-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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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 가운데에는 저마다 질이 다른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경작된 밭이라도 곡식 사이에 바랭이라든가 가시라든가 그밖에 가시 있는 잡초가 섞이지 않은 법이 없습니다. _ 조반니 보카치오
`2014. 07. 06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나서지 못하지만 나는 이 놈이 반갑지 않았다. 가끔씩 띨빵한 짓을 하는 탓도 있지만 대책없이 녀석에게 끌려다니는 듯 해서 난 이놈이 싫었다.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그다지 반갑지도 않은 이 녀석! 계륵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따위 것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내가 어느 순간 하찮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서로 잘 하는 것을 하자 싶어 녀석과 타협을 하곤 한다. 어쩌다가 내 직관과 녀석이 가고자 하는 길이 충돌을 일으킬 때는 정말이지 나는 꽤나 심각한 혼란에 빠지곤 한다. 내 의지는 녀석을 무시하라고 하는데 녀석은 여지 없이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를 연발하면서 경고음을 요란하게 울린다. 녀석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단 한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정해진 길로 가자고 요구한다. 이럴 때 마다 녀석이 이긴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지독한 사유의 빈곤 상태와 직면하고 있다. 때문에 칼럼 쓰는 시간이 상당한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런 저런 어떤 것들이 내 안에서 무너지거나 다시 섞여서 혼란스럽다. 연구원 지원 할 때부터 셈을 해보니 어느 듯 반년이 지나고 있다. 삶토록 지난 반년의 시간만큼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 본적이 없지만 아직까지는 점점 더 헝클어지고 있다. 나름 견고하던 것들 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 같은데 그것들의 실체란 것도 또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도 선명하지 않다. 근래 몇 주간 더 헝클어져서 그 동안 만들어 놓은 얼개와 직관이 가려고 하는 경로가 어떤 것과 충돌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럴 때는 잠시 생각을 멈추라고 내 안의 현자가 속삭인다.
‘꼭 필요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이성은 필요를 말하지만 본능은 불편하고 버겁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이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너무 옳은 말씀이신데 우리 형편에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내가 자주 듣는 말이다. 총론엔 찬성하지만 각론은 찬성할 수 없다는 말이다. ‘형편’이란 만능 방패는 언제나 든든한 수비수이며 숨을 곳이다. 나는 이 방패를 뚫어 본 적이 없다. 지난 주 <상처 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불편하고 버겁고 무거웠다. 동의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의 할 수 없었다. 대문 앞에 선 걸인을 빈손으로 내친 기분과도 흡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한줄의 질문이 남았다.
지난 월요일, 주간 과제 납품을 완수하고도 개운하지 않았다. 지난 12주간 월요일 만큼은 다소 홀가분하고 개운한 맛이 있었으나 이 날 기분은 장마가 시작되는 날씨와 닮아 있었다. 느닷없이 배낭을 꾸렸다. 4홉들이 소주 한병과 라면 두개, 햄 한 쪼가리와 막영도구만 간단히 챙겼다. 산으로 피접을 떠나 온 것이다. 밤새 천둥 번개와 소나기가 쏟아졌다 말았다 했다. 천 쪼가리 하나로 바깥과 경계를 만들었지만 이 얇은 경계만으로 나는 나만의 세계에 있었고 무도하고 포악한 밤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인간은 참 하찮은 것으로부터 용기와 안정을 얻는다는 것이 매번 신기하다. 그리도 또 가련하다. 소주 한병을 김치 안주로 비웠다. 햄 쪼가리나 라면 따위를 속에 넣고 싶지 않았다. 뒷 목에 넣어 놓은 뻣뻣한 각목은 소주 한병으로 녹아 날 것이 아닌 모양이다. 술이 떨어지고 또 이런 저런 망상이 덮치려고 할 때 잽싸게 <데카메론>을 열었다. 그러나 두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나는 다시 지난 주로 가 있었다.
‘울 엄마’란 제목으로 며칠을 끙끙 앓다가 말았다. 내게 편지를 쓰려고도 해 봤으나 또 몇 자 끄적이다 덮었다. 나를 정의 하라는 주제를 던져 놓고도 도무지 두껑이 열리지 않는다. 요 며칠간은 ‘사랑’이란 키워드를 던져두고 몇 페이지를 끄적거리다 또 덮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아직은 익지 않았다. 나는 아직 사랑을 말할 수 없다.
몇 주전 순천으로 특강을 가면서 네비게이션 덕분에 30분 정도 늦은 적이 있었다. 녀석을 따라가면서 “이상하다. 이 길이 아닐 텐데...’ 싶었지만 늘 그렇듯이 녀석이 시키는 데로 했다. 때 마침 녀석에게 귀신이 씌인 날이었던 모양이다. 한 번 꼬이기 시작하니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린다. 낯선 고속도로에서 녀석은 멋대로 지껄였다. 한참 만에 정신이 돌아왔으나 그 동안 나는 정신없는 녀석 말만 믿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처음엔 황당하더니 조금 지나서는 분노가 치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 없이는 당장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녀석보다 내가 더 등신이라고 생각했다.
특강을 마치고 며칠 남도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전히 네비게이션을 켜고 다녔지만 녀석이 가리키는 길로 다니지 않았다. 녀석은 항상 지 놈이 최적이라고 믿는 길로만 안내한다. 나는 돌아가더라도 남도의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고 싶었다. 녀석은 몇 번의 경고가 무시 당하자 순순히 내가 원하는 길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물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서만 말이다.
당분간 사유의 네비게이션도 좀 꺼두어야 할 것 같다.
눈을 감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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