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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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종결
10기 김정은
난 고전 <데카메론>이 영 불편하다. 이야기의 내용이 거의 여성의 또는 여성에 대한 욕망과 간교한 처세술, 쾌락의 추구이다. 뭐든지 대 놓고 밝히면 아름답지 않은 법, 난 데카메론식 직접적인 묘사가 재미가 없다. 이 책 고전 맞나?
수녀원에서 따분하게 지내던 어린 수녀는 남자와 놀기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얘길 듣고 정원사 아저씨와 즐긴다. 어라? 이 정원사 아저씨는 벙어리 행세를 하며 다른 수녀들과도 줄기는 사이이다. 수녀원장과도 그렇고 그런 사이네? 수녀 여럿을 상대하느라 힘에 부친 정원사는 벙어리 행세를 그만두지만 그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어린 수녀는 혼자 즐겼을 때보다 마음이 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4년 동안 아홉 명의 남편을 거쳤지만, 그 동안 수녀원에서 생활했다고 속이고, 숫처녀 행세를 하며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사는 여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9명의 남자와 1만 번은 행했을 터인데, 숫처녀라고 믿게 했다."며 그녀는 남편과 잘 지냈다고 한다. 이 여인은 남편을 속이고도 마음이 편했을까? 아니, 그녀 남편의 여성 편력도 그녀 못지 않았을까? 보카치오는 오히려 이 이야기 말미에, "그러므로 키스를 받은 입은 빛이 바래지기는커녕 달처럼 더욱 윤기가 난다"라는 속담을 소개한다. 그들을 더욱 부추기는 듯하다.
헉! 하고 놀라는 나는 10대 소녀도 아니고, 20대 처녀도 아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하지만 내 본능은, 내 욕망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내가 특별한 취향이 없듯, 음식 맛도 ‘맛있다’라는 표현 외에 다른 느낌을 떠올리기 어렵듯, 난 성적인 것에도 특별한 취향도 별다른 감흥도 없는 여자인가? 갑자기 슬퍼진다. 내가 야한 이야기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이유는 뭘까? 내 본능에 문제 있나?
관대한 주제나 영혼의 위대성을 좋아하는 것이 취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난 혹시 몸은 현대를 살고 있지만, 정신은 중세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내 영혼을 억압하는 존재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영혼의 중세를 벗어나기 위해 난 뭘 해야 하나? 머리가 아프다. 혼란스럽다.
종교적인 색체가 짙은 가정에서 나는 마더데레사같은 수녀가 되기를 꿈꾸었던 소녀였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더 컸다. 우리 동네엔 육체는 고등학생이나 정신은 여섯 살쯤 된 청년이 살았다. 소녀는 동네 사람들이 다 ‘바보’라고 부르는 이 청년에게 반감이 전혀 없었다. 육체와 정신이 따로 성장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 청년은 한창 남녀의 차이를 궁금해 한다는 유아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과 다를 여성의 몸이 상당히 궁금했던 것 같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에게 반감은커녕 호의를 보이는 소녀가 딴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 청년이 소녀의 치마를 들치고 속살을 만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아이스케키!
이후로 동네 남자아이들의 사소한 장난에도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그 불쾌감이 떠오른 것이다. 아예 치마를 입지 않았다. 짧은 머리에 우중충한 색깔의 바지가 좋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차려 입고 다녀야 마음이 편했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내 치마를 들치는 일은 없으리! 누구도 내 허락없이 내 속살에 손 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으리!
<데카메론> 속 여인네들이 예상치 않은 사건으로 겪게 되는 성교에 쾌락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 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거의 잊혀진 기억이다. <데카메론> 속 여인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성교에도 쾌락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남자의 시선이 과도하게 반영된 것인가?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과연 악마를 지옥에 보내며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구나"라면서 좋아했다는 순진한 알베리크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수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수녀가 되지 못했고, 이젠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작가라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야 한다. 하지만 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도 관대한 주제나 영혼의 위대성을 제외하고는 까막눈 수준이다. 취향도 없고, 욕망과 본능에 대한 이해도 없다. 중세를 살고 있는 내 영혼을 현재로 끌어와야겠다. <데카메론>을 읽고 어이없게도 나는 내 취향의 중세 종결을 선언한다.
르네상스 시절의 유명한 조각가 첼리니의 자서전을 보면 길거리에 나갔다가 적을 만나서 칼싸움을 하고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모두가 무장을 하고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인 셈이죠. 남자의 세계에서는 대낮에 길을 가다가 순식간에 줄리엣의 사촌 오빠처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시절이니 여자는 상시적인 전리품처럼 취급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성 풍속의 역사"를 보면 어떻게 보면 매우 문란해보이는 이런 시대상이 잘 나와 있습니다. 풍속이란 것이 욕망의 방향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며 도덕이라는 중력에 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 멀리 떨어져 온 현재의 입장에서 당시의 풍속을 재단하여 본다는 것은 그닥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all is for the best in the best of possible worlds" 란 말을 생각해보면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자신의 처지를 어루만지며 지내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100+1 nights)도 대부분의 이야기가 남녀간의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버튼 판 아라비안 나이트를 보면 어떤 사람이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돈을 들여 예쁜 여자 노예를 사서 여행 도중 매춘을 시켜서 그 돈으로 여행 경비를 대고 도착해서는 그 노예를 팔아버리는 얘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여자노예가 남자에게 사랑을 느껴서 곤경에 빠진 남자를 구하고 둘이 함께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무슨 스톡홀름 신드롬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녀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일이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도 밴드니 카톡이니 하면서 찰나의 욕망에 빠져 일탈하는 남녀가 많은 시대에, 데카메론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을 복카치오가 들으면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중세의 종결이란 제목을 보니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이란 책이 생각나는 군요. 물론 중세의 종결이란 의미가 완전 다른 것이지만... 중세적 사고와 행동이 서서히 가을을 맞이한 이후 근세로 넘어가게 되는 데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 자체는 그닥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에 대한 기사도적인 로망스(Romance)와 전리품으로서의 여성 사이에는 많은 간극이 있지만 아마도 여성의 위치는 본인의 신분과 운명에 따라 그 사이 어디에선가 왔다갔다하는 것 같습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조의 영국에서도 요즘 말로 야설인 포르노 소설이 한 때 유행했는 데 그 유행이 금방 사라진 이유가 책을 사는 것보다 여자를 사는게 더 가격이 저렴해서 였다는 걸 보면, 활자 인쇄가 없어 필사를 해야 했던 중세 시절 데카메론이란 책을 사서 본 사람들은 나름대로 식자 계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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