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14년 7월 7일 08시 50분 등록

바보 영길이_구달칼럼#13 (2014.07.07)

 

그 집은 아주 낡고 엉성했다. 나무판자로 대충 얽어 만든 조잡한 집으로 우리 집 뒤에 있었다. 울도 담도 없었고 지대가 조금 높아 우리 집 너머로 그 집 마루가 바로 보였다 자주 보는 풍경이지만 그 마루에는 영길이가 아무렇게는 늘어져 코를 골고 있었다.

 

영길이는 나보다 10살쯤 나이가 훌쩍 많아 아저씨 뻘 청년이었지만 좀 모자라서 항상 헤벌죽 웃고 다니는 우리의 만만한 친구였다. 우리 또래의 누구도 그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아니, 존대는커녕 그는 항상 우리의 놀림감이었다. 아이들이 그를 대하듯이 그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집이나 마치 제 집처럼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사람들도 밥을 먹다가도 그가 오면 마치 가족이나 친구처럼 한자리 끼워서 밥을 먹였다. 물론 사람들은 허드레 일이나 성가신 일을 그에게 시키기도 했는데, 그는 마다하는 일 없이 충실한 머슴처럼 그 일을 하곤 했다. 그는 어린 여동생과 지게꾼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늘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에게 지게 작대기로 얻어맞곤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매질이 심할 때는 동네사람들이 그를 피신 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얻어 맞고 살았지만 다음날 보면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렇듯 그늘이 없는 그를 사람들은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고 바보라고 불렀다.

 

경사진 우리 집 뒤 산 쪽으로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에는 그 집의 막내이며 나의 단짝인 자야라 불리는 계집아이가 살았다. 그녀는 말이 계집아이지 선머슴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비록 사춘기도 못된 어린 나이의 나였지만 그녀가 이성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우린 몇몇 아이들과 더불어 자치기, 다망구(술래잡기), 말타기, 총싸움 등의 놀이를 하며 날마다 축제일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초가집 뒤 산기슭의 커다란 대밭에 숨어 들어가 종일 총싸움 놀이를 하다가 지치면 우리의 아지트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대밭 가운데 자그마한 빈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 댓잎과 마른풀을 깔고 덩쿨로 대나무를 얽어 그럴싸한 우리 만의 쉼터를 만들어두었다. 사고를 치거나 무슨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가 매를 들면 난 무조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간혹 비슷한 이유로 피신한 자야를 만나기도 했다. 거기서 놀다가 늘어지게 한숨 자고 해가 기웃할 무렵이면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때쯤 집에 들어가면 "문디 손, 어서 씻고 밥 먹어라"는 한마디로 용서를 받곤 했다.

 

하루는 몇몇 친구들과 다망구(술래잡기)를 하던 중 자야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우리가 달려가 목격한 장면은 참으로 참담했다. 자야가 호박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당시 호박 구덩이에는 똥오줌을 거름으로 퍼 넣어 호박을 키웠는데 자야가 그 지뢰를 밟은 것이다. 망연자실, 우리 모두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리의 호프, 영길이가 나타났다. 그는 호박잎과 마른풀로 자야의 다리를 대충 닦아 내고는 자기 옷에 똥이 묻는 것도 마다 않고 울며 몸부림치는 자야를 들쳐 업고 가서 우리 집 마당 수돗가에서 깨끗이 씻어 주었다.

 

이러한 우리의 은인 영길이에게 짓궂은 우리들은 그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오후 서너시쯤이면 영길이는 버릇처럼 자기집 마루에서 입을 벌린 채 코를 골고 낮잠을 자곤 했다. 자야와 나는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영길이에게 접근하여 그를 살며시 꼬집어 보기도 하고 건드려 보았으나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옳다 되었다. 기회는 지금이다" 우리는 쾌재를 부르며 즉시 작전 개시에 들어갔다. 알맹이를 다 까먹은 강냉이를 영길이의 벌린 입에다 물리고 손등과 발등에 불침을 놓고는 우릴 쫓아오지 못하도록 새끼로 발을 묶어 두었다. 치밀하게 사전 공작을 마침 후, 우리는 저만치 숨어서 결과를 지켜보았다. 숯 검댕이 심지를 타고 든 불똥이 영길이의 살갗에 닿자 그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뒤이어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입에 물린 강냉이 때문에 분명치 않은 짐승 소리를 내었다. 강냉이를 입에 문 채로 왕방울 눈알을 떼룩떼룩 굴리던 영길이의 모습에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다가 다리야 날 살려라 하며 줄행랑을 쳤다. 악동 같은 우리의 이런 장난질에도 그는 늘 헤벌죽 웃으면  "야 너들 그러지마, 마이 아퍼" 한마디로 너그러이 우릴 용서해 주었다.

 

이렇게 사람 좋은 영길이는 필자를 무척 좋아했다. 필자는 자야의 언니로 자야 보다 예닐곱은 더 먹은 우리동네의 미인 축에 끼는 아가씨였다. 필자가 눈에 띄면 영길이는 부리나케 달려가 무언가 자기에게 귀한 것을 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는 처절한 짝 사랑에 머물기 일수였다. 영길이의 이런 행동에 필자는 진저리를 쳤다. 바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무척 상한 필자는 영길이의 선물을 획 던져버리고는 꼴 보기 싫으니 꺼지라고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이런 필자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영길이는 그냥 한결같이 그녀를 좋아했다. 갖은 타박과 멸시에도 특유의 헤벌쭉 웃음으로 응수했다. 누군가를 향한 좋은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참기 힘든 고통이 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데카메론의 이야기들 가운데 벙어리 흉내를 내고 수녀원의 머슴으로 들어간 마제토 이야기를 읽다가 갑자기 영길이가 생각났다. 벙어리 마제토가 수녀들의 거리낌 없는 성적 욕망의 배출구였다면, 바보 영길이는 순수한 인간의 전형으로 인간 본래의 순수를 그리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요 위안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바보 영길이, 그가 그립다. 그는 우리들에게 쉼터요 피난처인 대숲 속 아지트와 같은 존재였다.

IP *.196.54.42

프로필 이미지
2014.07.07 13:44:46 *.219.223.18

영길이...정다운 이름이네요. 시골의 삶은 정말 큰 선물입니다.

저는 아직도 꿈 속에서 고향이 배경이 될 때가 많이 있답니다.

여전히 아름답더라구요.

프로필 이미지
2014.07.07 14:10:15 *.196.54.42

이 이야기의 배경은 부산 문현동인데 그 시절 지게골이라 하여 시골이나 진배없었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보배라는 걸 날이갈수록 새록새록 알게 되네요.

 

참치님도 그런 면에서는 축복받은 사람^^

프로필 이미지
2014.07.07 18:07:03 *.223.11.212
이야기 좋네요.
자야와 썸타신 이야기를 빼셔서 아쉽긴 하지만 ...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4.07.08 21:35:33 *.124.78.132

앗! 그 이야기도 담번에 듣고싶네요 :) ㅎㅎㅎ

근데 자야 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인가봐요~ 저희 어머니 친구분도 이름이 자야고, 아버지 친구분도 자야가 있고~ 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4.07.09 08:47:57 *.196.54.42

뭐, 자야와 별 썸씽은 없고.... 있다면 광안리 해수욕장인가 가서 해수욕을 하며 장난치다가 그를 업었는데 등이 뭉클한게 기분이 야릇하고 묘했을 뿐....^^

프로필 이미지
2014.07.07 18:11:48 *.252.144.139

필자가 여자가 아니라 이 글을 쓰고 있는 구달님으로 오해했다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는 것 같아 토속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구달님의 향기가 담뿍 담긴 글인것 같다는!

프로필 이미지
2014.07.09 08:58:49 *.196.54.42

세련된 도시적 재키님도 토속적인 것 좋아하나 보죠^^

사춘기 적에는 소설 '소나기'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그 때는 상대가 너무 성숙해서리....

프로필 이미지
2014.07.08 21:25:30 *.175.14.49

장애를 가진 이웃을 동화로 쓴 오카 슈조의 책을 읽는 듯 하네요.

혼날 때는 도망가서 숨는 아지트가 있었다니 소년 구달님은 엄청 귀여우십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4.07.09 09:01:57 *.196.54.42

지금은 혼나도 도망가 숨을 곳이 없어서 무지 슬퍼요 ㅋㅋ

콩두님의 아지트는 어떤 곳일까요?

프로필 이미지
2014.07.08 21:39:43 *.124.78.132

그는 늘 헤벌죽 웃으면  "야 너들 그러지마, 마이 아퍼" 한마디로 너그러이 우릴 용서해 주었다...

이렇게 마음이 넓어지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 뭔가 저도 영길님(?)께 치유받은 느낌이예요 ^^*



프로필 이미지
2014.07.09 09:14:49 *.196.54.42

사람이 독기가 빠지면 바보스러워 지나 봐요. 그런 면에서 나도 좀 바보스러워 졌으면...해요.

녕이~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우니, 존재 자체가 우리에겐 치유네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