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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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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7일 10시 31분 등록

10살 때 말로만 듣던 서울로 상경을 했다. 안채와 사랑채, 앞마당과 뒷마당을 오가며 생활하던 나에게 방1, 부엌1,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과 콘크리트마당이 서울 생활의 주거공간이 되었다. 턱없이 좁아진 집에 대한 불만이 있을 법도 했지만, 나는 적응을 곧잘 했다. 서울에 와서 접하는 여러 가지들이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시절이다. 그 중에 하나는 양변기였다. 처음 화장실에 들어 갔을 때, 떡 하니 앉아있는 흰 색의 그 놈이 무슨 용도인지 도무지 몰라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엄마한테 물어본 기억이 난다. 매일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거름으로 쓰기 위해 모아야 했던 인분을 보지 않고도, 볼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놀라웠고, 그렇게 깨끗한 곳에 앉아 볼일을 봐도 돼나? 싶을 정도로 왠지 미안하고 아까웠다. 집은 좁았지만 화장실에 대한 신비함이 그런대로 만족감을 주었다.

서울 학교는 어떨까? 시골에 있을 때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던 대상이다. 내가 다니던 시골 학교는 대운동장, 소운동장, 조그마한 동산과 연못까지 있었기에 서울에서 다니게 될 학교에 대한 기대감은 자못 클 수 밖에 없었다. 처음 가방을 매고 엄마 손을 잡고 전학을 가던 날, 너무도 좁은 운동장에 멋없는 콘크리트 건물 몇 개가 내 상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기대 이하여서 그랬는지, 처음 올라와 하게 된 학교 생활에 기가 죽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겁은 그때부터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 생활은 예상외로 술술 잘 풀렸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내 사투리가 웃겼는지,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아이들이 주위로 몰렸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쓰고 있는 말이 사투리임을. 그 뒤 말투를 바꾸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도, 내가 말만하면 아이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학 오기 바로 전에 읽은 구전전래동화의 몫이 컸다. 서울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다 읽었을 거라 생각하며 뒤에 앉은 아이한테 시범적으로 이야기를 해줬더니, 재미있게 듣는 것이 아닌가. 그 덕에 나는 이야기를 잘 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 아이들이 따분해 하는 시간이면 교탁 앞 의자가 내 자리가 되었다.

좀 더 치밀하게 읽어 놓을걸….이라는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나지 않는 부분은 즉석 에드리브하는 여유까지 보였으나, 이를 눈치채지 못한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기만 했다. 그 뒤로 이야기 거리가 떨어질 때까지 공부하기 싫어하는 시간이 오면 으레히 나는 교탁 앞 의자 위에 올라가 이야기를 해주곤 했으니, 나의 서울 상경 적응기는 이만하면 성공한 셈이 아닌가?

하지만 나에게도 극복되지 않는 벽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였다. 처음 보다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말투가 서울말도 아닌 것이 시골말도 아닌 것이 정체 모를 언어를 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딜 가던 세력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과연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입담 덕분인지 갑자기 나에게 접근하던 몇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사실 친구로 사귀고 싶은 아이들은 아니었다. 10살의 내 눈에도 가벼워 보였고 자기 잇속에 따라 언제든지 친한 친구가 바뀔 수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단 그렇게라도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아이들이 진짜로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하굣길에 그 아이들이 나에게 따라붙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붕어빵을 사주겠다고 이야기하며 앞장을 섰다. 아니나다를까 붕어빵이라는 말에 더 친한 척 달려드는 아이가 있었다. 못마땅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동행했다. 외로워서였을까? 나의 지지세력에 대한 기반을 붕어빵을 통해 더 단단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계산이 들었다. ‘이번에는 사투리를 쓰지 않고 멋들어지게 붕어빵을 사주리라속으로 생각하며 가는 길에 마음속으로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세련된 서울 말씨로 당당하게 돈을 내미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저씨 붕어빵 다섯 개만 주세요.’  

드디어 파라솔을 지붕 삼아 붕어빵을 파는 아저씨에게 도착했을 때, 연습한 대로 아저씨, 붕어빵 다섯 개만 주세요.” 스타카토를 달아가며 최대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이만하면 잘했겠지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아이들이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도 나를 보며 빙그레 웃으셨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물었다.

도대체 왜 웃는거야?”

니가 좀 전에 사투리 썼거든.”

뭐라고? 나 안 썼는데.”

, 붕어빵 다섯 개만 주세유~~~~ 했어.”

아저씨도 아직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랬다. 나의 사투리는 내 몸에 난 솜털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멋들어지게 서울말을 써 보겠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아이들은 예상했던 대로 붕어빵만 얻어 먹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한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서울아이들에 대한 기억이다. 어느 정도 예상된 행동이기에 상처는 받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의 웃기는 장면으로 기억되는 추억이다. 지금도 붕어빵을 볼때마다 그 영상이 플레이 된다.

그 때,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면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그곳에 우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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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4:49:41 *.196.54.42

붕어빵 하니 얼굴찐빵이 생각나내유~~

내 얼굴보다 크다던 그걸 혼자 다 먹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음 미련둥이!

 

참치님 글이 또박또박 고수가 바둑 돌 놓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랄 때의 기억이 어쩜 그렇게 명료해요? 나는 어렸을 때 기억을 되살려 칼럼을 쓰는데 기억이 흐릿하여 창작한 부분도 생기는데...

기억도 기억이지만 오래 다듬은 흔적이 좋은 칼럼을 만들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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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5:29:40 *.219.223.18

구달님땜에 살아요. ㅋㅋ

요즘 <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들 뒤적거리게 되네요.

글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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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8:04:25 *.223.11.212
a컷을 숨기고 b컷을 내어 놓은 느낌이 드는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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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9:06:40 *.219.223.18

이게 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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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23:28:07 *.202.136.114

ㅋㅋㅋㅋㅋ 붕어빵 속에 우정은 없다??

전 스무살 때 처음 혼자 서울 와서 코 베갈까봐 코를 붙잡고 다녔었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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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22:05:17 *.124.78.132

붕어빵 먹튀를 하다니!! ㅎㅎㅎㅎㅎ

대학교 신입생 때 너 어디 살아? 강남 살아? 라고 묻던 몇몇 서울 아이들 때문에 기죽었던 일과,

백원단위까지 철저하게 더치페이하던 그 아이들을 보며 깜짝 놀랐던 일들이 갑자기 리플레이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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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9 21:48:46 *.113.77.122

우리아이들은 전학와서 힘들어했는데 역시나 참치는 어릴때부터 이야기 꾼이었네 ^^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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