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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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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4일 22시 50분 등록

나는 거북이. 어수룩하고 느리지. 하지만 한걸음한걸음 걸어가는 보폭을 유지하고 시간이라는 것을 부여했을 때,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나는 서두르지 않아, 그냥 가면서 즐길 뿐이야. 내가 가는 길에 나 있는 풀들, 지저귀는 새소리, 흐르는 시냇물, 멀리 보이는 산들이 나의 즐거움을 더 해 주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도 괜찮아.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거든, 시야는 가려지지만 운치 있고, 길은 질척거리지만 더위를 식혀주기도 하지. 내가 조절하는 것은 지치지 않게 노력하는 것뿐이야. 빨리 가려고 채찍질을 가하지도 않고,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그냥 걸어갈 뿐이야. 한발한발 내디뎌질 때, 보여지고 느껴지는 세상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야. 이것이 늦게 출발하고 속도가 느린 내가 재밌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지.

나에게는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어. 느릿한 보폭과 항상 웃는 얼굴 때문에 전혀 보여지지 않는 것이 있지. 아주 오래된 그것은 나를 무겁게 만들어.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나에게 딱 달라붙어 있거든. 무겁기 때문에 잘 넘어져서 내 몸은 상처투성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무게 때문에 더디게 갈 수 밖에 없어. 마음의 발목을 잡기도 하거든.

난 이번 수업에 거북이 등껍질을 떼어 내고 싶었어. 등껍질 안쪽에 몸의 일부처럼 붙어 있는 그것을 나의 오랜 껍질과 함께 제거하고 싶었거든. 그럼 가벼워지고 홀가분해 질 것 같아서. 그런데 나는 연기를 잘하는 것일까? 숨기기 선수일까? 구달님이 보는 나의 시원한 웃음처럼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게 된 이유는 잘 모르는 듯 해. 그리고 나는 나의 대부분을 홀라당 벗어 재켰기에 사람들은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있었어. 아니 이제까지 말한 것 이외에 더 있다고? 글을 읽는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수치심중독이라는 병명인 동시에 죄명을 갖게 해준 사건이 있었지 아버지의 부재 말고도. 나의 오랜 병명이자 죄명을 알게 되었을 때, 난 탈출하고 싶었어 빠삐용처럼. 사실 내가 지은 죄는 아니야. 그렇게 느껴질 뿐이지. 내가 짓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동안 감옥을 만들어 놓고 살았거든. 감옥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벗어 던지고 싶었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시도하고 싶었지. 난 그것만 제거하면 융이 말하는 놀라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야. 항상 그것은 나를 주춤거리고 자신감 없게 만드는 주요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어.

그래서 내 등껍질과 석화된 조직을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지. 수업 과제를 올리라고 했는데, 나는 역시 나의 웃음과 알려진 히스토리 뒤로 떼어내고 싶은 조직을 잘 숨겼지.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보아주기를 바랬어. 그리고 한 마디 질문을 던지면, 나의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된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그것을 고해성사처럼 불어버리려고 했지. 그런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더군. 난 숨기는데 성공했지만, 벗는 데는 실패했어.

이차오프 스케줄이 있었지. ‘그럼 거기서 고해성사를’….하지만 술과 함께 어우러진 그 자리는 데카메론이 훨씬 잘 어울리더라고. 하지만 난 초조하지 않았어. 모든 것은 다 어울리는 때가 있는 법이거든. 그런데 우리는 우습게도 데카메론 이야기도 초보 티를 팍팍 냈어. 벗지도 입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였지. 스페인의 예행연습을 한 상태니 아마도 그곳엘 가면 나는 나신이 될 수 있을것 같아. 사랑은 화끈하게, 벗을 때는 홀딱!

다음 날 칼국수와 함께 해장술로 막걸리를 마셨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괜찮던데. 그 후 앨리스와 에움이 쇼핑하러 동대문을 간다기에 나와 교장선생님이 따라 붙었지. 교장선생님께서 나의 몸배 바지가 좋아 보이셨던 모양이야. 스페인 여행가서 단체로 입자는 제안을 하셨지. 구달님과 피울님은 난리가 났어. 그런걸 어떻게 입냐고. 그런데 나는 벌써부터 상상만 하면 미소가 돌아. 쇼핑하기 전에 우린 끝내주는 커피숍을 갔지. 교장선생님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처럼 그런 자리도 잘 알아보시더라구. 커다란 창가 앞에 자리잡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 조용하고 맛있는 커피와 음악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있는 풍경에서 도란도란 피어나는 이야기 꽃. 나는 그때 내 옆에 앉으신 교장선생님께 구선생님의 모습을 보았지.

원래의 목적이었던 쇼핑은 물 건너갔어. 5분 돌아보았나? 옷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재미없더라구. 그래서 얼른 접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을 했지. 이동 중에 점심메뉴는 개에서 와인으로 바뀌었어. 그런데 이 계획 수정은 아주 탁월했어. 나는 그런 와인바는 처음 가보았는데 우리가 간 곳은 고수들만 알아볼 수 있는 멋진 장소였어. 들어가는 입구부터 우와! 우리는 홀딱 반했어.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게 만드는 그 곳은 음악도 좋고 와인도 좋았지. 아무렇게나 방치한 것 같으면서도 주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정원은 옛날 시골집 마당과 닮아 있었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어. 수업이야기, 스페인에 대하여, 그리고 잠깐잠깐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데카메론. ‘이것이 욕망의 모습이구나싶더라구. 거기서 몇 시간을 보냈을까? 서두를 것도 없고 긴장할 것도 없이 말이 나오는 대로 풍경과 어우러지는 맛이 아주 일품이었어. 그러다가 난 내 껍질이 벗고 싶어졌지.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했어. 내 수치심중독의 가장 큰 원인. 나를 넘어지게 만들고 주춤거리게 만드는 그것.

나는 이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어. 언제쯤 그냥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거 같아. 사건이 있었고, 나의 느낌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지. 나는 알고 있어.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병에 걸린 것을.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나는 정말 크게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살면서 한번도 하지 못했지. 그렇게 했다면 조금 더 가벼워졌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지금은 그럴 일이 없어 참 다행이야. 내 이야기를 들은 멤버들은 아마 놀랐을 거야.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도 가장 큰 폭력을 행사했거든. 아주 잔인했지. 꼭 칼을 보고 피를 흘려야 섬뜩한 것은 아니야. 때론 그런 것들이 없이도 더 큰 폭력을 행사할 수가 있거든.

이렇게 쓰니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이 엄청 궁금하겠다. 하지만 프로는 아무 때나 벗지 않아. 다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거든. 에움이 많이 울어주었어. 내 이야기 때문인지, 자신의 무엇인가가 생각났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눈물이 고맙더라구. 나는 거북이 등껍질과 조직을 제거했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너무 홀가분해. 처음에는 가슴 한 가운데서 동심원을 그리는 아픔이 느껴지더라구.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해. 당연한 것 아니겠어. 35년을 간직한 것이니까. 난 그 자리의 풍경과 그 자리의 맴버들을 잊지 못할 것 같아. ‘부암동 동지들난 이렇게 부를래. 아마 피울님은 부암동 동지에 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몰라. 약 올려야지.

다 이야기하고 나니 기운이 좀 빠지기는 하네.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데 남편의 냉랭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어. 아차, 그제야 생각이 나지 뭐야. 사촌이 난 아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는데. 동대문 커피숍과 부암동에 흠뻑 취하는 바람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지 뭐야. 그런데 이렇게 날이 서 있을 때는 그냥 놔두는 것이 상책이야. 밥을 먹고 옆에 가서 미안하다고 했지. 진심으로. 그런데 한편 그 마음은 진심이 아니기도 했어. 아기는 다음주에 보러 가도 되지만, 부암동 풍경은 오늘 하루밖에 없었거든. 남편 기분이 좀 누그러지면 다시 잘 이야기로 풀지 뭐. 그러면서 한편 이런 생각이 드네. 남편한테 조금 더 잘해야겠다. ‘안보이던 이런 모습들을 보면 남편은 연구원을 불안해할지도 모르겠구나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난 그 사람을 불안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내 옆에 있을 때 최대한 숨쉬고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야.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정말 소중한 날이야. 시원하게 샤워하고 나니 기분이 좋네. 이렇게 개운한 샤워는 그 동안 해 본적이 없었어. 내 무거운 등껍질을 부암동에서 벗게 될지 몰랐지 뭐야. 참 곳곳에 마련된 인생의 선물이 아름답고 향기롭다.

다른 멤버들도 나와 같은 시원함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

PS: 혼자 중얼거리듯 읊조려 보았습니다. 저의 진짜 오프수업은 부암동에서 일어났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7월 오프수업 장소 제공해주신 정산선배님께 감사 드리고, 많은 코멘트와 애정을 보여주신 교육팀께도 감사 드리고, 점심과 케익과 타르트를 공수해준 찰나언니와 어니언한테도 감사를. 언제나 빠지지 않는 피울님의 보이차와 웨버, 녕이, 구달님이 준비해준 와인과 쿠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나의 상징물이 된 교장선생님의 시루떡 일품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먼 길 올라와 주신 미스터리님 얼른 건강 회복하시길. 그리고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콩두님도 참 감사합니다. 콩두님의 후기가 기다려지네요. 중간에 참가해주신 타오선배님도 감사합니다. 레지던스에서 새벽에 선배님의 활약이 빛났습니다. 데카상스의 점점 걸쭉해지는 오프수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아하! 레지던스에서 어니언과 달자님이 끓여주신 라면 맛도 잊을 수 없을 듯 합니다.그리고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했지만 문선배님의 방문 감사했고, 홍승완선배의 책선물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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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4 23:10:48 *.104.9.216

묻고 싶었으나 참았었지요. 궁금하지만 오히려 지금 몰라도 나쁘지 않을 듯도 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이런 칼럼 한번 써 보고 싶습니다.

글이 많이 좋습니다.

가슴이 열리니 글빨이 오르네요.

조탁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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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00:08:22 *.218.178.5

부암동 한 번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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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00:29:08 *.160.33.203

아 김밥 먹고 싶다. 매운 족발이랑 막국수랑 라면이랑 붕어싸만코랑 과자랑 타르트랑 케익이랑 

먹고 싶다. 

배달도 안되는 이 새벽에 어쩌지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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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00:36:59 *.218.178.5

스페인, 스페인....가서 수영복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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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00:41:28 *.160.33.203

입지... 수영복... 

아 파우스트고 헬레네고 일단 얼른 자야겠어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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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6 07:41:44 *.175.14.49

비키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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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17:43:10 *.196.54.42

음, 부암동이라.....?

그 담쟁이 동굴에서 등껍질을 확 벗었다고?  여튼 추카추카!!

허나 그대 신랑 잘 만난 것 같으이.

주부가 1박2일을 풀로 땡땡이 쳐도 품어줄 수 있는 너른 가슴의 사나이라면

그 가슴은 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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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20:41:52 *.218.178.5

참치를 품으려면 태평양은 되어야죠.

결혼 잘 한거 맞아요. 살수록 멋진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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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6 18:51:29 *.113.77.122

같이 있지 못해 아쉽지만 등껍질을 벗었다니 축하해. 

반면에 요즘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나도 이런데 남편들도 속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나도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참치의 더욱 더 멋진 모습이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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