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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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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6일 00시 37분 등록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나는 한 번도 소년인 적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 나의 정체성은 소녀보다는 소년의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식민지 시절의 자아를 지배자의 국적과 동일시하는 모양새로 나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간 무리지만 멋져 보이는 꿈을 설정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도리였고 수순이었다.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한국 사회는 좌절이라는 성인식을 치르게 했다. 나는 그런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 성인이란 꿈을 이룬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현실적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매우 겸손하고 순수한 데가 있어서 나는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꽤나 아프게, 실연의 상처를 앓았던 것 같다.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팠다는 걸 알겠다. 나는 결코 불가능했을, 지독히도 낭만적인 진로를 선택한 아이들을 부러워했는데 그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들마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면서 과거를 후회하는 중이라면 나는 견딜 수 없으리라. 예술가가 예술을 저버리고 학자가 학문을 저버리는 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그럴거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돈을 벌어라. 노골적으로 정치를 하고. 내가 순수하게 현실적인 인간이 되기로 한 만큼, 예술가도 학자도 순수하게 정신을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이러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완전히 현실적인 사람이 되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그 점이 나를 살게 했던 것 같다. 생존은 결코 의미가 될 수 없다. 살기 위해 산다는 건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 몇 명과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지금이 좋다. 그래도 가끔은 20살의 순간을 떠올린다. 완전히 순수한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현실에 지쳐 있었을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나는 나다운 선택을 한 것이리라.

 

이제 나는 만 31세 3개월이 되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에 앉았다. 화장실문짝 아래 뜯어진 포장재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몇 주 동안 저 상태로 벗겨져 있는데 빨리 본드로 붙이지 않으면 마모되어 떨어져 나갈 것이다.변기에 앉아 말없이 내 나태의 결과물을 바라본다. 포장재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문은 사실은 원목이 아니야. 아니지. 아니고 말고. 원목이었다면 엄청나게 비쌌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이 집을 감당할 처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문은 가짜다.

 

최근에는 액자를 몇 개 샀다. 검은 테두리에 디자인이 멋진 액자 몇 개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성 물리학자와 좋아하는 문구를 넣을 액자를 사고 싶었다 그런데 불과 개당 사천원 밖에 되지 않았고 나는 내 벌이에 충분히 감당할만한 액자들을 기쁜 마음으로 사들고 왔다. 그 액자들의 유리는 직각으로 잘려있지 않았고 모서리는 맞지 않았으며 역시, 원목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핏 보면 확실히 비싸 보인다. 그 것으로 족한 것이겠지. 나는 나름 만족하려 했다. 만족하려 했는데 어쩐지 이 모든 것이 내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은 가짜일까

 

이 상황을 시장경제에서는 순기능이라고 평가한다. 시장은 경쟁을 통해 더 질 좋은 상품을 더 싼 가격에 팔려고 한다. 구매자는 가장 좋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 덕에 나는 원목 무늬의 문짝과 원목 스타일의 액자를 가지고 딸기맛 우유를 먹고 있다. 내가 일하는 의료계에서는 가짜의 돈을 받고 진짜를 해달라는 시장과 정부의 요구에 따라 가짜 대신 진짜를 팔긴 팔되 다른 끼워팔기를 개발하기 위해 골몰하는 중이다.

 

원래 이런 거라고 했다. 세상은. 공산주의는 더욱 가망이 없을뿐더러, 이 정도라도 - 진짜를 사칭해도 좋을 법한 가짜로 살 수 있는 게 어디냐고 했다. 이제는 원목 액자를 가진다는 것은 시장에 편승해서 돈을 많이 번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이다. 좀 더 노력하고더 벌고그런 후에는 진짜를 아무리 많이 요구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좀 더 열심히 가짜의 세계를 심화시키는 데 일조할 것. 그런데그냥 이런 삶만 살다가 끝나는 건 아닐까?

 

TED에서 제스처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자기 인식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 라는 강연을 보았다. 일단 허상을 구축하라. 그리고 그 허상을 채워나가면 된다. 허상을 만들지 않으면 그 비슷한 것도 될 수 없다. 소년은 야망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 허상을 채우기 전까지, 소년은 가짜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허상이 진짜가 되고 실상이 가짜가 되어 늘 결여되고 미진한 채로, [[[[진짜가 결여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은가?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세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간극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가짜와 진짜 사이를?

 

둘 사이의 긴장 관계 때문에 가끔 실존은 허공에 붕 떠버린다. 유체 이탈. 가끔은 우주로 가고 싶다. 투명 인간이 되어도 좋고,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서 안전한 방어막만 있다면 폭풍우가 쳐대는 태평양 한가운데를 걷고도 싶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검은 산처럼 덮치는 파도에 잠겨보기도 하고 바다로 내려치는 천둥번개도 보고 싶다. 오로라를 보고 싶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싶고 더 멀리,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우리 은하를 바라보고 싶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최근에, 어떤 느낌을 받았다. Break through 해야 한다는 강렬한 자기 개시 명령이었다. 많은 역장이 존재하는데 그 인력에 나는 힘없이 끌려 다니면서도 그 행위들을 꽤나 적극적인 자유의지라고 믿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스스로는 두 발로 서거나 걸으려 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역장이 나타나 나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 주길 바래왔다. 마치 수컷 나방을 수십 키로 거리에서 불러내는 암컷 나방처럼. 운명적 염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 같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다시 태어나 모든 매트릭스를 보게 되는 것처럼, 나는 역장을 보게 되었다. 아직 모든 역장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역장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일은 역장을 무시하고 직선을 긋는 행위였다. 이제 break through할 때가 된 것이다.

 

진짜의 탄생.

 

칸트는 자유로워지라고 했다.

 

진짜는 진짜일 뿐이다. 이 진짜라는 것은 가짜의 반댓말로서의 진짜가 아니다. 진짜가 되고자 하는 야망 같은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진짜는 알에서 깨어난다(데미안). 알은 세계다. 진짜는 진짜가 갈 길을 갈 뿐이다.

 

이 말 말고 어떤 말을 더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진짜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니 진짜로 사는 것이 훨씬 재밌다는 것이다.

 

p.s. 책을 읽을 때마다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사부님이다.

책에서 훌륭한 구절을 발견하여 전율할 때마다 사부님이 그립다.

 

나는 사부님이 돌아가신 날로부터 원죄를 부여 받았다. 동시에 나는 자유를 얻었는데, 그것이 사부님의 죽음으로 얻어진 명분이라는 것이 슬프다. 나는 자유의 황야로 내던져졌다. 자유란 가슴 한 켠이 시원하면서 시리도록 두려운 것이었다. 아직도 사부님의 마지막에 대해 글을 쓰지 못한다. 그 분이 권유했던 글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나태하다. 나태를 시인하여 징역을 산다 하더라도 책임을 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믿는 것은 느리더라도 해낼 것이라는 느낌. 그 것은 의무이면서 동시에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부님은 막 살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부님에 대한 부채를 갚기 전에 죽는다면 내 인생은 쓸모 없는 것이 되리라. 모든 인생이 값진 것은 아니다. 나는 남발된 가치의 카드 속에 내 인생을 슬쩍 끼워 넣고 싶지 않다. 그 인생은 쌓아서 이루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방향만 알 것 같다. 쓸모를 객관적 지표로 환산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내가 사부님의 덕을 갚게 된다면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p.s. 밤이라 글이 꽤나 감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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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6 07:28:01 *.175.14.49

레몬, 감상적인 글 좋네! 밤에 계속 써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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