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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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쯤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만나고 싶은 사람 여럿 살고 있으나 기별 없이 홀로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딱 세 곳만 둘러보는 것이 여정의 전부였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나를 마주하는 시간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가장 제주다운 곳’의 하나인 돌문화공원을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제주에 딱 두 곳 있는 ‘기적의 도서관’. 그리고 그곳, 그분 삶의 애틋한 기록이 담겨 있는 장소에서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그곳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빗속인데도 제법 많은 방문객이 그곳을 들고 났습니다. 나는 건물로 들어서지 않고 마당에 섰습니다. 담장과 정원의 나무 너머로 제주의 남쪽 바다와 작은 섬이 보였습니다. ‘아, 그분은 이곳에서 저 바다를 보았겠구나. 시린 날이 많았을까? 넘실대고 일렁이는 날이 많았을까?’ 마당 귀퉁이에 서 있는 돌 비석 하나가 눈길을 잡았습니다.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머리카락의 모양과 눈빛의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자유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느낌, 살아있는 삶을 살아낸 느낌…. 비석에는 그의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높고 뚜렷하고 /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 고옵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 글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를 기념하는 건물 ‘이중섭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나는 이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당을 서성이며 읽고 멈추어 읽고 몇 번을 낮게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전쟁 중에 일가를 이끌고 이곳 제주의 남쪽 바닷가까지 피란을 내려와 1년을 머문 그. 두 평이나 될까 싶은, 부엌도 없는 방 하나를 얻어 해초와 게로 삶을 연명해야 했던 그의 삶을 추스르기 위해 그 좁고 어둡고 눅진한 방 벽면에 써 붙였을 저 글을 마주하고 읽으며 나는 스르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의 고단했을 삶이 내 몸으로 스몄습니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이 대목을 몇 번이고 되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했습니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이 내리고 쌓이고 넘쳐달라고. 자신은 다만 삶을 향해 가슴을 환히 헤쳐 삶을 마주하겠노라고. 그리고 그는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지랄 맞은 것이 삶이라 해도 그리는 작업, 그려야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삶을 당당히 이어가겠노라고.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에 몇 번을 머물며 나는 가슴이 아려와 자꾸 눈물을 흘렸습니다. 화구가 없어 담뱃갑의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그리기를 향한 삶, 생계를 어쩌지 못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일본 땅으로 보내놓고 자신의 그림으로 세상에 꽃을 피워보려 고투했던, 삶의 절망을 넘어서보려 몸부림쳤던 그 처절한 삶, 그럼에도 끝내 정신병과 지병으로 청량리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가 마흔 한 살 무연고자의 죽음으로 삶을 마쳐야 했던 그 사람.
그를 기념하는 그 작은 미술관 건물을 아주 천천히 구석구석 머물러 살피고 돌아 나오는 길, 나는 홀로 속삭였습니다. 충분하다. 이번의 제주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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