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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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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0일 23시 58분 등록

등교

2014. 7. 20



그렁그렁 한 것이 벌써 눈시울이 촉촉하다. 녀석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했을 것이다.

- 아빠! 학교에 같이 가 주시면 안되요?

아빠가 데려다 주까?

그래~~


제일 먼저 일어나는 녀석이 어쩐일인지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지 못한다. 어디 아픈가 했는데 다행히 아픈 것 같지는 않다.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침대에서 몸을 빼더니 책가방부터 챙긴다. 엄마는 아이가 나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 큰 아이는 미리 가 버렸고 오랜만에 둘 만 남았다. 


작은 아이에게 엄마가 있을 때 아빠는 식은 밥이거나 먹다버린 껌이다. 웬만큼 구애를 해도 꿈쩍도 않는다. 나는 녀석에게 늘 삐진다. 열 한살 먹은 아이에게 맘 상해 하는 것이 더 맘 상하지만 맘 상하는 건 상하는 거다. 아이스크림, 떡볶이이로 꼬셔도 딱 그만큼이다. 녀석의 거래는 얄짤없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오늘 처럼 엄마가 없는 날, 녀석은 입안의 혀처럼 감미롭다. 찰싹 달라붙어 살살 녹인다. 아미노산 듬뿍 들어간 햇차처럼 보들보들하게 착착 감기는 맛이 딸 키우는 낙이라 애비는 바보가 되고 말 밖에.


학교까지는 걸어서 3분이면 닿는다. 키 만한 가방을 메고 신 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고는 운동화를 다시 신주머니에 넣는다. 물통 주머니와 핸드폰이 담긴 잡다구리 핸드백까지 챙기고선 현관을 나선다.

신 주머니 줘. 아빠가 들어 주께.

아냐! 됐어.


가만히 손을 잡았다. 평소 같으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 잡은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 잡고 다닐 때가 엇 그제 같은데 벌써 같이 손을 잡을 만큼 자란 것이냐. 

대문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것이 장마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겠다. 편의점 사거리에서 50미터쯤 더 가면 학교다. 8시 30분까지는 개방해 놓은 쪽문으로 쏙 들어가면 학교 담벼락을 지나 정문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될테지만 오늘처럼 늦은 날은 할 수 없이 정문까지 가야한다. 

윤아. 오늘 덥겠다.

어. 근데 괜찮아.

올 때 또 힘들거든 전화 해!

여긴 누가 이렇게 쓰레기를 버려놨을까?

여기 빌라촌에서 버렸을 껄.

나쁘다 그자?

냄새도 나고, 여기 피해서 다녀.


학교 담장 밑으로 아이들이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늘 다니던 길이건만 이렇게도 무심했었다. 널부러진 쓰레기들이며 아무렇게나 무성한 풀떼기들이 제법 을씨년스럽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지킴이 할아버지가 인사를 한다.

학교에 늦은 갑지요?

네~~애기가 좀 아파서요. 현관까지만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부녀는 아직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제법 높이 흔들면서 박자까지 맞추며 걸었다. 저나 나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손으로 전해준 말들이 녀석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아빠.

내가 애기야? 4학년인데.

왜?

넌 항상 애기야?

왜?

아빠한테는 항상 애기지. 니가 할머니만큼 나이가 먹어도 육십살이 되어도 애기야. 아빠한테는.

근데 아빠는 내가 육십 살 될 때까지 살아있을까?

살아 있으까 마까?

...(나이를 계산해 보는 듯)

살아 있으면 좋겠나?

응. 당연하지.


현관 계단 앞에서 손을 놓았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


서너 계단 올라가더니 돌아 보고선 손을 흔든다. 마주 흔들어 주었다. 뭉클하다. 아이는 현관을 넘어갈 때 까지 두번 더 돌아 보았고 그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면서 쓰레기 문제랑 학교 담벼락 밑을 정리해 주기로 맘 먹었다. 아이들이 적어도 하루에 두번 씩은 어김없이 다니는 길이란 것을 지금에야 알아차렸다.


무심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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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1:44:49 *.252.144.139

제 동기 경수가 아들 이야기로 포토에세이 쓰는거 아시죠?

피울님 글을 읽으며 경수의 글과 사진이 떠오랐어요.

고이고이 모셔둔 글과 사진들을 잘 정리해 보세요.

좋은 책이 나올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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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2:54:22 *.104.9.216
사진은 정리할 수 있을텐데 글은 없더군요. ㅠㅠ

일상가운데서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은 늘 화두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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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2:50:34 *.196.54.42

유심한 피울 선생인지고 ㅎㅎ

 

따님 11살? 이 땐, 아빠랑 친해지기 쉽지 않죠.

님의 감수성이 피부로 스밉니다.

좋은 아빠란 위하여 시간을 낼 줄 아는 아빠, 오늘의 피울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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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4:16:19 *.201.146.143

작은아이입니다. 
좋은 아빠 아니에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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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3:20:49 *.213.28.79

사진 속에서 본 웃을줄 아는 아이의 미소가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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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4:17:57 *.201.146.143

맑은 아이입니다.

감성적인 아이지요.


이 아이는 항상 목이 마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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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5:39:35 *.213.28.79

ㅋㅋ 아빠를 닮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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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03:35:04 *.222.10.126

시집을 어찌 보낼꼬 우리 피울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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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09:07:03 *.104.9.216
말로만 이렇지 웨버처럼 놀아주는 애비가 못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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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20:28:51 *.113.77.122

아빠의 따뜻한 마음이 그냥 전달 되네요. 아빠의 이 마음을 자식도 느꼈을 거라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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