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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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
2014. 7. 20
그렁그렁 한 것이 벌써 눈시울이 촉촉하다. 녀석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했을 것이다.
- 아빠! 학교에 같이 가 주시면 안되요?
- 아빠가 데려다 주까?
- 네
- 그래~~
제일 먼저 일어나는 녀석이 어쩐일인지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지 못한다. 어디 아픈가 했는데 다행히 아픈 것 같지는 않다.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침대에서 몸을 빼더니 책가방부터 챙긴다. 엄마는 아이가 나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 큰 아이는 미리 가 버렸고 오랜만에 둘 만 남았다.
작은 아이에게 엄마가 있을 때 아빠는 식은 밥이거나 먹다버린 껌이다. 웬만큼 구애를 해도 꿈쩍도 않는다. 나는 녀석에게 늘 삐진다. 열 한살 먹은 아이에게 맘 상해 하는 것이 더 맘 상하지만 맘 상하는 건 상하는 거다. 아이스크림, 떡볶이이로 꼬셔도 딱 그만큼이다. 녀석의 거래는 얄짤없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오늘 처럼 엄마가 없는 날, 녀석은 입안의 혀처럼 감미롭다. 찰싹 달라붙어 살살 녹인다. 아미노산 듬뿍 들어간 햇차처럼 보들보들하게 착착 감기는 맛이 딸 키우는 낙이라 애비는 바보가 되고 말 밖에.
학교까지는 걸어서 3분이면 닿는다. 키 만한 가방을 메고 신 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고는 운동화를 다시 신주머니에 넣는다. 물통 주머니와 핸드폰이 담긴 잡다구리 핸드백까지 챙기고선 현관을 나선다.
- 신 주머니 줘. 아빠가 들어 주께.
- 아냐! 됐어.
가만히 손을 잡았다. 평소 같으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 잡은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 잡고 다닐 때가 엇 그제 같은데 벌써 같이 손을 잡을 만큼 자란 것이냐.
대문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것이 장마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겠다. 편의점 사거리에서 50미터쯤 더 가면 학교다. 8시 30분까지는 개방해 놓은 쪽문으로 쏙 들어가면 학교 담벼락을 지나 정문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될테지만 오늘처럼 늦은 날은 할 수 없이 정문까지 가야한다.
- 윤아. 오늘 덥겠다.
- 어. 근데 괜찮아.
- 올 때 또 힘들거든 전화 해!
- 응
- 여긴 누가 이렇게 쓰레기를 버려놨을까?
- 여기 빌라촌에서 버렸을 껄.
- 나쁘다 그자?
- 냄새도 나고, 여기 피해서 다녀.
학교 담장 밑으로 아이들이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늘 다니던 길이건만 이렇게도 무심했었다. 널부러진 쓰레기들이며 아무렇게나 무성한 풀떼기들이 제법 을씨년스럽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지킴이 할아버지가 인사를 한다.
- 학교에 늦은 갑지요?
- 네~~애기가 좀 아파서요. 현관까지만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부녀는 아직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제법 높이 흔들면서 박자까지 맞추며 걸었다. 저나 나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손으로 전해준 말들이 녀석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 아빠.
- 응
- 내가 애기야? 4학년인데.
- 응
- 왜?
- 넌 항상 애기야?
- 왜?
- 아빠한테는 항상 애기지. 니가 할머니만큼 나이가 먹어도 육십살이 되어도 애기야. 아빠한테는.
- 근데 아빠는 내가 육십 살 될 때까지 살아있을까?
- 살아 있으까 마까?
- ...(나이를 계산해 보는 듯)
- 살아 있으면 좋겠나?
- 응. 당연하지.
현관 계단 앞에서 손을 놓았다.
-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
- 응
서너 계단 올라가더니 돌아 보고선 손을 흔든다. 마주 흔들어 주었다. 뭉클하다. 아이는 현관을 넘어갈 때 까지 두번 더 돌아 보았고 그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면서 쓰레기 문제랑 학교 담벼락 밑을 정리해 주기로 맘 먹었다. 아이들이 적어도 하루에 두번 씩은 어김없이 다니는 길이란 것을 지금에야 알아차렸다.
무심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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