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정수일
  • 조회 수 235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7월 21일 00시 02분 등록

율리시스

제임즈 조이스 씀, 김성숙 옮김, 동서문화사

`2014. 7. 20


저자에 대하여


나는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리뷰를 하고 있는가?

전혀 아니올시다. 심연이 얕은 것인지 사유의 빈곤 때문인지 재미도 느낌도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그 큰 명성만큼이나 언어의 조탁이 훌륭하며 장대하고 치밀한 묘사가 탄복스러울 따름이다. 저자의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켐벨에게서였을 것이다. 50주의 과제를 받아들고 미리 책을 구해 두었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스쳐 지났을 때 ‘몇 주 후면 읽어 볼 수 있겠구나’ 했던 기억이 있다. <율리시스> 전체를 독파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저자에 대한 깊은 탐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문학에 대한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닌 터에 의견을 가진다는 것은 애시당초 닿을 수 있는 욕심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에 임한 바에야 뭐라도 하나 건져야 할 것이기에 그 만큼은 절박함이 있다. 


고백하건데 나는 이런 책을 만나면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거품을 물면서 세기를 대표하는 문학적 작품이라고 칭찬하는데 나는 왜 이 책이 훌륭한 것인지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재미 포인트는 어디인지 아득하기만하다. 도대체 이 책이 얼마나 깊고 훌륭한 것이었으면 역자 김성숙은 이 책의 번역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인가! 율리시스 학회까지 창학하고 장장 55년의 열정 끝에 이 책의 한국어판을 간행하기에 이른 것인가 말이다. 이 책을 번역(제대로)하는데 걸린 시간이 55년이란 말인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것이다. 10여년쯤 전이지 싶다. 서울 출장길에 브레송(프랑스 사진가) 전시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다. 기다리던 전시회였고 오리지널 프린트가 걸린다는 소문이 있어 애써 관람을 하였었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심각한 고민 가운데 있었고 이런 고민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 후 나는 이 전시회를 두 번 더 보았다. 세계적인 사진가, 독보적인 사진가의 사진들이 너른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나는 감동할 수 없었다. 이런 사진을 두고 사람들이 열광하고 수 많은 사진가들이 그의 아류를 자처 하는지 이해하고 싶었으나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내린 처방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 나는 꽤 사진을 하는 축에 끼는 편이라고 생각했으나 혼자 까불고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깨달았다. ‘브레송의 사진에서 감동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했다. 또 다시 십년이 흐른 지금 겨우 사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선험적으로 볼 때 근래 읽었던 무거운 몇 가지 책들에서 느낀 우울함은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다른 까닭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이 책들이 읽힐 때 까지 공부할 수 있느냐. 공부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으나...


이 책의 뒷 표지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마 출판사에서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정리해 놓았을 것이다.


<율리시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더블린 사람들>과 조이스의 더블린 3부작을 구성한다. 현대도시 더블린의 일상이 신화적 알레고리 및 상징과 자연스럽게 결합된 이 작품은 진지한 신학과 놀이가 공존하는 이중구조를 띤다. 예술론과 광고문구가. 현란한 언어유희와 시적 추상이, 유머와 절망이, 축제와 장례식이 하나로 어우러져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룬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색체의 조합은 조이스의 문학적 개성인 동시에, 아일랜드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아일랜드의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또한 <율리시스>는 탁월한 언어적 감수성이 빛나는 언어유희의 전당이라 할 수 있다. 다층적 상징, 조어와 합성어가 절묘하게 구사되며, 온갖 문체실험이 이루어진다. 현학적 요설과 시적 순간이 탁월한 미학적 균형 감각을 통해 결합된다. 변화무쌍하면서도 통일성을 잃지 않는 견고한 문체미학은 창조적 요소와 파괴적 요소가 공존하는 혼돈과 소용돌이로써의 세계를 그려내는 조이스 문학의 본질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온갖 모험을 되풀이하면서도 언제나 문학적 전통으로 돌아간 작가 조이스. 전위롸 고전주의가 일체를 이룬 작가 조이스. 그는 아일랜드의 신화적, 문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극단의 언어미학을 추구함으로써 놀라운 만큼 생생하고 진실한 20세기의 풍경을 그려낸 탁월한 모더니스트요. 현대소설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창조자였다. 


대단하다는 말 같기는 한데 찬미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과 교양이 부족한 탓일게다. 설명이 사실 더 어렵다.


[저자의 연보를 통해서 살펴 본 생애]_본서 참조

먼저 저자의 연보를 통해서 저자의 생을 개관해 보자.


1882년 그의 아버지 존 스태니슬롯 조이스는 의학을 공부하고 더블린으로 와서 세무 공무원이 되었다. 1880년 어머니 메리 머리와 결혼하였으며, 10형제(4남 6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년 후 둘째 존 스태니스로스가 태어났으며, 둘은 평생 쌍둥이를 떠올리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888년(6세) 예수회 부설 기숙학교 클론고우스 우드 칼리지 입학. 최연소 학생으로 재학시절 운동을 좋아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음. 이 때 교장은 콘미 신부였는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1891년(9세) 견진 성사를 받고 알로이시오라는 이름을 선택함. 6월 아버지의 실직으로 자퇴. 파넬이 죽자, 글르 배반한 힐리를 탄핵하는 풍자시 <힐리, 너마저!>를 씀. 열렬한 파넬 신봉자인 아버지는 이것을 인쇄해 친구에게 보내는데, 현재 남아 있지 않음.


1893년(11세) 콘미 신부의 도움으로 더블린 예수회 벨베디어 칼리지에 3학년으로 입학.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배움.


1894년(12세) 이해부터 필수 교재가 된 찰스 램의 <율리시스의 모험>을 애독하고, 내가 좋아하는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율리시스에 관한 글을 지음. 또한 1922년 큰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리시스 최고의 입문서로서 이 책을 추천함.

-> 큰어머니에게 책을 추천할 만큼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다. 율리시스가 수천년 동안이나 각광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896년(14세) 처음으로 사창가를 감. 신앙의 동요와 함께 예술에 대한 마음이 깊어짐. 이 무렵 예이츠의 영향이 짙은 정조란 시를 쓰지만 현재 남아있지 않다.

-> 조숙하다.


1898년(16세) 9월 유니버시티 칼리지 입학. 존 프랜시스 반(젊은 예술가의 초상_크랜리)과 가장 친해짐. 입센에 심취.


1899년(17세) 예이츠의 <캐슬린 백작부인>을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하는 학생들의 서명운동에 조이스는 분명하게 반대함.


1900년(18세) 학교 내 문학 역사협회에서 ‘연극과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우리들 죽은 자가 눈을 뜰 때>에 대해 논한 에세이가 매체에 시리고 영국 연극비평가 윌리엄 아처를 알게 되고, 학교 친구들의 경탄과 선망의 대상이 됨. 


1901년(19세) 아이랜드 문예극장의 지방성을 바난하는 <소요의 날>을 쓰고, <두 개의 에세이>라는 제목을 붙인 85부를 인쇄,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배포.


1902년(20세) 문학 역사협회에서 아일랜드 시인 제임스 클래런스 맹건에 대해 강연. 여름, 조지 러셀의 소개로 예이츠와 그레고리 여사를 만남. 문단의 중심인물들은 조이스의 루시퍼 같은 거만함에 당황하면서도 그 문학적 재능에 감탄. 1년 동안 더블린 신간 <데일리익스프레스>에 서평 23편을 씀.

-> 부러질 지언정 굽히기 싫어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벌써 여러곳에서 천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1903년(21세) 파리에서 가난으로 고생. 어머니 사망. 술에 빠져 삼.


1904년(22세) 친구 존 이글린턴의 간행 기획을 듣고 약 2천 단어의 자전적 에세이 <예술가의 초상>을 하루에 다 쓰는데, 편집자들의 거부에 부딪침. 이 작품은 1907년 개정을 거쳐 1916년 <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출판됨. 나소 거리를 산책하다가 노라 바너클을 만남. 고가티와 사무엘 트렌치와 동거하나 곧 고가티에게 깊은 원망을 품고 아버지의 집으로 감. 


1905년(23세) 풍자시 <종교 재판소>를 100부 인쇄하여 더블린의 친구나 지인에게 보냄. 이것은 예이츠에서 고가티에 이르기까지 더블린 문인 전부를 단죄한 결별장 또는 복수선언이다. 장남 조지오 탄생


1906년(24세) <더블린 사람들>출판 계약_이후 수정 요구를 둘러 싸고 오고 간 격한 편지 끝에 계약 파기, 로마 은행 문서과 채용, 율리시스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스태니슬로스에게 편지로 말함, 이후 이 생각이 확대되어 <율리시스>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계기.


1907년(25세) 창작에 대한 극도의 슬럼프로 은행을 그만두고 직업도 없이 트리에스테로 되돌아 감. 류마티스로 입원, 장녀 루치아 탄생, 지속되는 가난으로 살림이 나아지지 않음.


1908년(26세) 심한 홍채염


1909년(27세) <더블린 사람들> 출판 계약, 이 때 더블린 체류는 이 후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줌.


1910년(28세) 홍채염 재발로 요양, 출판 예정이었던 <더블린 사람들>은 에드워드 7세 언급 부분을 수정하라는 출판사 요청이 세 번 있었으나 계속 조이스가 거부하는 바람에 미루어짐.

->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는 집요하리만치 분명하다. 출판이 중요했으나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건한 사람이다.


1911년(29세) 에드워드 7세에 관한 내용을 모두 삭제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받고 마침내 이 문제에 대한 왕실의 견해를 묻고자 조지 5세 앞으로 편지를 보냄.


1912년(30세) <더블린 사람들> 출판 계약 또 결렬. 출판 계약자 로버츠에 대한 분노를 담은 풍자시를 써서 동생을 통해 더블린 지인들에게 나눠주게 하고 그 뒤 다시는 아일랜드 땅을 밟지 않음.

-> 책 속의 상점이나 인물이 더블린에 실제로 있어서 여러 가지 반발에 부딫쳤고, 영국 왕실에 대해 너무나 무례하게 썼다는 이유로 여러번 출판이 좌절 되었으나 그는 끝내 그의 고집을 꺽지 않았다.


1914년(32세) <더블린 사람들> 출간, 동생 스태니슬로스가 과격 이탈리아 민족통일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 관헌에게 체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금.


1915년(33세) 런던과 미국 출판업자들이 조이스에게 강한 관심을 보임. 개인교사 일을 계속 함. 영국왕실문학기금으로부터 보조금 75파운드 받음.


1916년(34세) <더블린 사람들> 미국판 간행, <젊은 예술가의 초상> 출판


1917년(35세)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영국판 간행, 녹내장 수술, <율리시스> 저술 계속.


1918년(36세) <율리시스> 미국 잡지 리틀 리뷰에 연재, 근처에 사는 말테 플리아시만과 교재하나 이들의 관계는 곧 그녀의 보호자를 알게 되면서 끝나게 되고 이 이야기는 <율리시스> 거티와 마사의 소재가 됨.


1919년(37세) 1917년 이후 익명으로 후원한 사람이 해리엇 위버였음이 밝혀짐. 이후 그녀의 경제적 원조는 조이스 사후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계속 됨. 


1921년(39세) <율리시스> 출판 계약, 외설 시비로 리틀 리뷰지 연재 중단, 1000부 예약 모집에 예이츠, 파운드, 지드, 헤밍웨이 등이 신청함. <율리시스> 완성.

-> 예약 모집에 참여한 이들이 이름이 빛난다. 이로서 조이스와 <율리시스>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1922년(40세) <율리시스> 첫 한 권을 건네받음, 구상한 지 16년 집필한 지 7년만의 일임. 찬사와 악평이 난무하며 문단에 반향을 일으킴.


1924년(42세) 더블린의 정다운 정보원이었던 이모의 죽음으로 조이스는 깊은 슬픔에 빠짐. 왼쪽 눈을 6번째로 수술 받음.


1925년(43세) 오른쪽 눈 통증으로 발광 직전. 왼쪽 눈 세 차례 더 수술.


1926년(44세) 왼쪽 눈 10번째 수술


1927년(45세) 율리시스 표절에 대한 항의문을 만들어 여러 나라 작가들의 서명을 요청. 서명자는 크로체, 뒤아멜, 아이슈타인, 에리엇, 지드, 헤밍웨이, 로렌스, 울프, 예이츠 등 167명. 뉴욕 재판소의 표절 금지령은 이듬해 12월에 떨어짐.


1930년(48세) 왼쪽 눈 11번째 수술. 융에게 율리시스 독일어판을 위해 머리글을 의뢰하였으나 그의 머리글 원고를 읽고 조이스는 ‘이 남자는 한 번도 미소 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듯’이라고 함.


1931년(49세) 노라와 정식으로 결혼. 아버지 사망. 


1932년(50세) 딸의 정신분열증. 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쏟음. 예이츠로부터 아일랜드 문학 아카데미 창립 회원이 되라는 연락이 오나 거절함.


1933년(51세) 불면, 복통, 루치아의 정신분열증 악화 등으로 몸과 마음이 지침. 뉴욕에서 율리시스가 외설 문서가 아니라고 판결. 랜덤 하우스는 다시 활자 조판.


1934년(52세) 루치아가 조이스의 생일 잔치에서 어머니를 때리고 요양소에 수용. 융에게 루치아를 진찰하게 함.


1935년(53세) 환상과 악마에게 시달림.


1936년(54세) 인세를 루치아에게 다 씀. “돈을 다 쓰면 다시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말함.


1938년(56세) 친구 폴 레옹에게 “지칠 대로 지치고, 혈액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머리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나는 긴 시간 동안 벤치에 앉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 극심한 복통에 대해서 말했다. <피네건의 밤샘> 완성.


1939년(57세) 2차 대전 발발. 고먼이 쓴 자신의 전기를 교정함. 


1940년(58세) <제임스 조이스> 출간_하버드 고먼


1941년(59세) 1월 13일 사망. 할리 레빈은 조이스의 모든 작품을 다른 첫 연구서 <제임스 조이스>를 저술해 유럽 문학사에 조이스의 위치를 다짐.


1947년 뉴욕에서 ‘제임스 조이스’협회 결성.


1966년, 1969년 더블린에서 ‘조이스 심포지엄’ 개최.


연보를 통해 저자의 삶을 개관해 보니 길지 않은 그의 삶 또한 처절하다. 탁월한 한 사람의 작가를 연구하고자 협회가 결성되고 심포지엄이 개최되는 인정받고 존경받는 작가. 그러나 그는 평생토록 가난과 병마와 불행(딸의 정신분열증 등) 가운데 살았다. 더불어 생활과 타협하지 않은 그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더블린 사람들>의 출간에 즈음하여 번번히 내용의 수정 요청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롯한 대쪽을 읽었다. 



[저자의 기질적 특징과 문학]


: 언어 감각이 뛰어난 작가, 세계문학의 판도를 바꿔 놓은 작가.

1201p. 제임스 조이스 그가 위대한 작가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존경과 친밀감에서든, 경멸과 적대감에스든 이른바 ‘현대문학’을 말할 때 한 유파, 한 문학운동, 한 시대의 대표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가는 역시 조이뿐이며, 이 점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문학사를 한 몸에 수렴하고, 파괴와 반역과 고전주의와 정숙이 공존하며, 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그 문학적 방법이 더욱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언어와 문체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며, 정취가 악취미를 통해 세련미를 더하고, 악취미가 정취를 통해 증폭되며, 국제적 또는 무국적적인 허무와 불안의 묘미가 있고, 더욱이 그러면서도 문학적 세계 전체가 종교성의 한 음화를 이루는 구조를 볼 때, 그가 바로 ‘모더니즘’ 그 자체인 것이다. 조이스보다 더 위대한 작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세기 머리에 시작된 문학적 혁명의 여러 특징을 그보다 더 잘 갖춘 거장은 없다. 제임스 조이스는 열광적인 찬사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계속 묵살되어 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묵살하는 시늉을 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 나는 그가 위대한 작가임을 몰랐다. 그러나 지금부터 알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찬양하는 글에 무거운 의미가 묻어있다. 20세기 특징을 가장 잘 갖춘 거장이라고 표현에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다.

-> 그의 작품 <율리시스>와 <피네건의 밤샘> 같은 작품은 20세기 전반의 가장 큰 문학적 실험.

-> 율리시스가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유럽 문학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임.

-> 20세기 소설 작법은 이 작품이 나온 뒤부터 변해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임.



- 어린 조이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 끝 무렵 유럽 문학에 나타난 자유사상.

영국이나 프랑스에 뒤진 낡은 전통에 묶여 고민하는 아일랜드 청년.

가톨릭도 민족해방운동도 따르지 않았던 것은 자아해방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

발음이나 목소리에 이상하리 만치 예민한 반응.
-> 이러한 그의 성정이 그의 문장을 화려한 언어적 유희의 장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단념이나 타협할 줄 모르는 기질의 소유자.
-> 와라, 아 인생이여! 나는 백만 번이나 현실과 싸우고, 내 영혼의 철침으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단련하리라...고애 아버지여, 예술가의 선조여, 지금보다 영원히 나에게 힘을 빌려 주오. 이상의 독백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 끝 부분에 있는 말이다.

고집불통
-> 당시 유행하는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에도 따르지 않았다. 보다 더 자유롭고 국제적인 시각에서 글을 쓰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주류나 대세는 그에게 유혹이 되지 못했다. 그에게 유혹은 그 자신밖에 없었던 듯.

왼쪽으로 가려고 오른쪽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 그의 방식

성악적 재능의 소유자
-> 다양한 예술가적 기질과 재능을 타고난 천재.

1904년 무렵에 쓴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의 출간 이야기로 본 그의 성격은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에는 타협이 없다는 것. 더불어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율리시스>에도 그대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성정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작가적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듣고 보고 경험한 내용을 모티프로 하여 저술하는 치밀함의 소유자.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은 호평과 악평의 극단 사이에 놓여 있었다.

평생토록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 홍채염으로 열번 이상의 수술을 한 만큼 고통을 겪었으며, 의사로부터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집필에 몰두하는 집중을 보여 줌. 


[율리시스, 그 이름은?]


율리시스는 호메로스가 썼다고 전해지는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영어식 표현이다. 라틴판으로는 울리세스, 프랑스판으로는 율리스로 읽히며, 그리스판으로 오디세우스이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구성과 주요 인물을 빌려, 현대인과 고전 속 인물을 대응시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작품.
-> 이라고 <율리시스>를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몇 장만 읽은 바로는 와 닿지 않는다. 아울러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다고는 하나 본질의 어떤 측면을 관통하고 있는지는 좀 더 파헤쳐 보아야 할 것 같다. 두루뭉수리하게 ‘본질’이라고만 하면 명확하지 못하다.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욕망과 욕정에서 한발짝도 떨어질 수 없는 가여운 존재가 인간이란 말인가! 그것을 탐구하고자 또는 파악해서 말하려고 한 것인가! 


[조이스의 오디세우스, 즉 율리시스]


조이스는 오디세이아의 열혈매니아였던 모양이다. 그랬으니 현대판 오디세우스를 썼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에게는 오디세우스가 어떻게 보였을까?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괴테도 세익스피어도 단테도 발자크도 호메로스이 오디세우스 같은 다면적 인격의 인간을 그린 적이 없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전쟁에 나가는 게 싫어 미친 척했지. 그는 평화주의자였어. 그러나 거짓말이 들통 나 전쟁에 참가하자 철저한 항전주의자가 되었네. 그는 전황이 불리할 때도 전군을 고취 시켜 승리의 희망을 불어 넣었으며, 커다란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숨어서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네. 그는 술이나 씨름, 경주 따위의 무예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연합군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인정받았지. 목마라는 새로운 병기를 만든 점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탱크와 같은 것을 이미 고대에 만든 무기제작자이기도 하네. 또한 그는 키르케의 애인이었고, 그 다음에는 칼립소의 연인이었으므로 곧 연애의 순례자였지. 그동안에도 줄곧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나길 바랐으므로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했고, 아울러 그는 문학에 그려진 최초의 신사이기도 했어. 스케리아 섬에 표착했을 대는 알몸이었으나 왕녀 나우시카에게 가까이 갈 때는 나뭇가지로라도 몸의 일부를 가리지 않았는가. 이런 다면적인 인간을 그린 사람이 호메로스 이후에 또 누가 있는가.”

이런 다면적 성격의 소유자 오디세우스를 현대인으로 재창조하는 데 조이스는 ‘블룸’이라는 인물을 설정하였다. 블룸은 서른여섯 살로 헝가리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이다. 고등학교를 나왔고, 아내 마리온과의 사이에 밀리라는 딸이 있다. 프리먼지의 광고부원으로 자기절제력이 강하고 점잖은 듯하면서도 여성 편력을 일삼고 자신의 잡학다식을 자랑하는 등 여러 성격을 지닌 복합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아내 마리온은 유명한 가수로 그동안 많은 남성과 관계해 왔으며 현재는 그녀의 음학회를 주관하는 보일런과 연애하고 있다. 블룸은 그것을 눈치채고 있으나 아내를 사랑하므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소심함도 갖추었다.

이전 작품들(실내악, 망명자들,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의 주인공은 ‘스티븐 디댈러스’ 였는데 이 사람은 ‘다이달로스’의 화신이다.
: 조이스는 방법자와 기술자로서 철저를 기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보전하려 한 20세기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는 기술자 다이달로스로 자신을 그린 것.

디댈러스는 <율리시스>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는 율리시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에 해당한다.


[화려한 문장]


<율리시스>의 독특한 문체는 처음부터 화재.

조이스는 말장난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기호가 결국 <율리시스>에 이르게 된 것.

이 책은 언어유희의 극치
첫째, 재치있는 농담을 끊임없이 사용.
둘째, 합성어 및 조어를 만듬.
셋째, 패러디와 모방으로 놀이.
넷째, 농담
다섯째, 외설
여섯째, 가사인용 등의 형태로 언어적 유희가 펼쳐짐.
일곱째, 언어의 다양성.
여덟째, 나열과 목록
아홉째, 수수께끼.

그의 언어에 대한 집착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며 철저함.
: 전문어, 학술어, 속된 말, 상말, 천한 말, 유아어, 욕, 의성어까지 다양하게 사용.

율리시스에 중요한 또 한가지는 ‘주술성’
: 유희와 주술은 어느 정도에 이르면 그 둘을 나누기가 불가능. -> 공양과 진혼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의식의 흐름’
-> 한 인물의 행동이나 대화 바로 뒤에 독백이 이어짐
-> 디댈러스의 경우에는 상당히 정신적, 그러나 블룸의 경우 육감적이고 세속적.
-> 외형 묘사가 아니라 내면 묘사를 과감하게 많이 한 점이 이 책의 특색.
-> 덕분에 소설을 읽기 힘들고 복잡하게 만듬 :
나만 어려운게 아니었던 모양.

[율리시스 독법]


보통 소설에서는 이야기 줄거리로 작품에 움직임과 골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줄거리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 그저 고전의 형식을 뼈대로 삼고 그에 맞추어 구성을 되도록 변형시킴으로써 각 장마다 독립된 맛과 재미를 만들어 낼 뿐이다. 곧 이 작품은 교향곡이나 건축물처럼 방법적인 구조의 재미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독자는 단순히 화제를 좇아 읽어서는 안된다. 구조의 재미와 각 세부를 살린 데에 이 작품의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_1238p.


[조이스의 영향]


세계문학에서 조이스의 이름을 빼고 현대소설을 논할 수 잇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모든 작가가 율리시스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듯하며, 설령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조이스를 스승으로 모시게 될 성싶다. 이는 상당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본디 그는 비평적인 작가이며 세계문학의 정통에 속해 잇고, 전통을 배우려 하는 사람이라면 저도 모르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에 파괴적 요소와 창조적 요소를 둘 다 내포하고 있는 문학자를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함부로 그를 부정해 버린다면 결국 순순히 그를 받아들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조이스는 갖가지 모험을 되풀이하여 언제나 문학의 정통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이야말로 전위와 고전주의가 안팎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조이스 특유의 위험한 창조였다. ... 생각건데 인류의 소설사 전체를 커다란 모래시계에 비유한다면 조이스의 작품은 그 잘록한 허리에 해당된다. 언어라는 알갱이가 시간과 함께 잠시 멈추어서 모든 것을 함축하는 그곳, 문학과 삶이 하나로 응결되는 그곳이 조이스 문학 세계이다. _ 1240~1241p.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에피소드 4 칼립소


: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바다의 요정.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데 10년이 걸렸는데 이 가운데 7년이란 시간을 칼립소와 보낸다.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만났을 때 오디세우스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트로이를 떠나 수년 동안 갖은 고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부하들을 모두 잃고 오기기아섬에 홀로 떠밀려 온 오디세우스를 본 칼립소는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불노불사로 유혹하고 밤에는 여인으로 유혹하며 오디세우스에 극진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향수를 달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지극한 관심과 보살핌에도 오디세우스의 향수병은 더해 갔고 이럴 지켜보는 칼립소의 마음도 찢어진다. 오디세우스를 가엽게 여긴 여신 아테네의 개입으로 이들의 갈등은 비로소 해소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아테네의 부탁으로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칼립소에게 보내 오디세우스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라 명한다. 칼립소는 이 명령에 부응하여 땟목을 만들 목재와 연장을 주었으며, 떠날 때는 식량을 담뿍 챙겨서 순풍과 함께 보내 주었다.


줄거리.


1904년 6월 18일 오전 8시, 블룸은 부엌에서 자기와 아내 마리온을 위해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다. 11시에는 친구 디그넘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 그는 새나 짐승의 내장을 좋아하므로 콩팥을 사러 나간다. 그리고 신문 기사로 동양에 대해서 몽상하기도 하고 이웃집 하녀의 엉덩이를 보고 색욕적인 자극을 받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아직 자고 있는 아내에게 가벼운 식사를 나른다. 그때 와 있는 편지 두 통과 엽서 한 통을 본다. 아내에게 온 편지는 발신인이 그녀의 연인인 블레이제스 보일런인 듯 하다.한 통은 딸 밀리가 생일 선물 고맙다며 보낸 것이다. 또 마리온에게 옆서 한 통이 더 와 있다. 마리온은 오늘 오후 보일런이 찾아온다고 지나가는 말로 말한다. 블룸은 자기에게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예술가 아내에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새로운 연애소설을 찾아 주겠다고 아내와 약속한다. 그 뒤로 오후에 보일런이 집으로 와서 아내와 밀회 한다는 상상으로 그는 온종일 어디에 가든 고민에 싸인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지난 잡지를 읽으며 현상소설을 써볼까 하고 쓸데없는 공상을 하기도 한다.


-> 이 편을 읽고 이 이야기가 오디세우스의 5편 칼립소편에 해당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오딧세이아(천병희 옮김)를 펼쳐 놓고 대비해 가면서 다시 읽었다. 그래도 모르겠다. 저자는 여기서 마리온이 페넬로페가 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칼립소로 대별된다고 했다. 오디세우스를 섬에 머물게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블룸은 마리온에게 머무는 것으로 섬에 머무는 것에 대별되는 것인가? 보일런의 존재는 그러면 무엇인가? 거 참!

다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103p. 고양이는 머리가 나쁘다고 모두들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고양이를 이해하는 것 보다도 고양이가 우리 말을 더 잘 이해하는 법이다. 이 녀석은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모두 이해한다. 게다가 집념이 강하다. 나는 이 녀석에게 어떻게 보일까?


106p. 동방 어딘가의 나라에서 아침 일찍, 날이 새자마자 출발해서 태양보다 앞서 여행하면 하루의 진행을 단축시킨다. 영원히 그것을 계속하면 이론적으로는 나이를 조금도 먹지 않는다.


125p. 무엇인가 새롭고 부담이 가지 않는 것.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다.


에피소드 13. 나우시카


: 스케리아섬의 왕 알키노스의 딸. 난파한 오디세우스를 구해준다.

칼립소의 섬에서 떠나 고향으로 향하던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 때문에 다시 난파한다. 스케리아섬에 표류하게 된 오디세우스. 이 섬의 왕녀 나우시카는 시녀들을 데리고 빨래를 하러 나왔다가 오디세우스를 만나게 되고 왕궁으로 안내한다. 부왕 알키노스는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가 맺어지길 원하지만 오디세수스는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고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이들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나우시카와 오디세우스가 서로 사랑을 느끼면서도 맺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상통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줄거리


오후 8시에 가까운 무렵, 위도가 높은 더불린에서는 이즈음 해가 진다. 스티븐과 멀리건이 사는 마텔로 탑 근처의 샌디마운트 해변에 세 소녀가 저녁 바람을 쐬러 나왔다. 심술궂은 에디와 말괄량이 시시는 데려온 아이들을 상대로 놀고 있지만 아름다운 소녀 거티만은 이에 아랑곳없이 혼자 떨어져 앉아 있다. 거티는 흘러나오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일로 슬퍼하고, 또 준수한 젊은이 레기 와이리와의 밋밋한 사랑을 떠올린다. 이곳에는 마침 산책하러 온 블룸이 있다. 쌍둥이가 가지고 졸던 공이 블룸에게로 날아오자, 그는 그것을 다시 던져준다. 그것이 거티 옆에 떨어져 그녀와 블룸은 서로 시선을 나눈다. 거티의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에 블룸은 매혹되고, 결혼상대로는 중년 남자가 좋지 않을까 몽상하던 참인 거티도 블룸에게 마음이 끌린다. 불꽃놀이를 보려고 시시와 에디는 아이들을 데리고 뛰어간다. 그러나 거티는 바위에 앉은 채, 불꽃을 본다는 핑계로 몸을 점점 더 뒤로 젖힌다. 무릎을 든 자세가 된 거티의 속옷이 블룸에게 보이고, 블룸은 자극을 받아 자위행위를 한다. 의식적으로 노출한 거티도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까이 다가서거나 하지 않는다. 이윽고 어둑해져,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거티는 떠난다. 그리고 그때 블룸은, 그 아름다운 소녀가 여느 이들과는 좀 다름을 알게 된다. 그 뒤 그는 해변에 남아 여러 가지 몽상을 한다. 밀회를 즐기고 있을 아내와 보일런 때문에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혼의 산부인과 병원에 입원한 퓨어포이 부인에게 문병 갈까 생각한다. 마지막에 그는 바위에 앉은 채 살짝 존다.


575p. 이 교회로부터 가끔 정적 속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폭풍에 시달린 사람의 마음을 인도하는 영원한 등불,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에게 올리는 기도의 목소리들이었다.

-> 소설 전반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거나 장소를 묘사하는데 매우 정밀하다.


579p. 마음은 말하라고 유혹했지만 자존심은 침묵하라 명령했다. 그녀는 그 귀여운 입술을 잠시 달싹이는가 싶더니 흘깃 위쪽을 바라보고는 5월의 아침처럼 신선한, 짧고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601p. 그리고 그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빛이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얼굴에는 달아오른 정열이 있었다.


603p. 그것은 이별인 셈이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가야만 하나 두 사람은 또 여기에서 만날 것이다. 


604p. 구두가 너무 죄는가? 아니. 그녀는 절름발이다! 오!

-> 저자가 그녀를 절름발이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에피소트 18. 페넬로페


: 정절을 지킨 오디세우스의 아내.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트로이 전쟁으로 떠난다. 언제 돌아올지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판국에 페넬로페는 수 많은 구혼자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구혼자 선택을 미루는 빌미로 시아버지의 수의 짜기를 시작하고는 그 수의 마련이 끝나면 구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고르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짠 베를 풀었다. 더 이상 구혼자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오디세우스는 돌아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난다. 아들과 만나 저간의 상황을 파악한 오디세우스는 거지 차림으로 집에 돌아와 작당을 실행한다. 수십명의 경쟁자들을 처단하고 페넬로페에게로 갔다. 이로써 페넬로페는 지고지순한 아내의 표본이 되었다. 



줄거리


마리온은 자면서도 남편이며 하녀며 보일런이며 지브롤터에서의 생활이며 소녀 때 사건이며 첫사랑에 대한 일이며 따위를 뒤죽박죽 몽상한다. 또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교수이자 시인이 된 스티븐과 연애하는 것도 공상한다. 그녀의 생각 속에서, 남성을 가리키는 그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뒤섞여 있다. 본디 정숙한 부인의 표본인 페넬로페와는 달리, 마리온은 자기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성에게 개방적인,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여성이다. 따라서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녀는 블룸 안에 자신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심 그를 존경한다. 마리온은 학식도 윤리관도 모자라나 대지 그 자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다. 마치 만물의 생명의 근원인 듯 선택할 여지없는 오염 속에서 불명의 생명을 간직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에피소드는 구두점이 없다.


1135p. ....세상에서 뭐라 하든 중요한 것은 처음뿐이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런 일은 생각지도 않아 결혼하고서가 아니면 왜 남자에게 키스할 수 없을까 가끔 온몸으로 아주 좋은 기분을 느낄 때에는 마음이 미칠 것 같아 사랑하고 싶어지는거야


1137p. 마치 종마처럼 그것을 우리 속으로 쑤셔 넣는 단지 그것만이 그들이 여자에게 구하는 것이지.

-> 이 에피소드에선 ‘그’ 와 ‘그이’가 난무한다. 그가 누구인지 그이가 누구인지 난잡하다. 


1139p. 여자란 남자가 능청맞게 눈을 깜박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고 있어도 다 알아 난 그이의 모습을 보고 무엇이 그이를 못쓰게 만들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어......

 -> 본문은 그다지 옮길 것이 없다. 누군가가 그랬다더군. 결혼이란 ‘상대방 성의 배타적 사용권’이라고 말이야. 어리숙한 남자들은 이 말을 믿고 싶은 것인지 정말로 믿는 것인지 모르겠네. 마리온은 결국 여성성의 상징인 모양이군. 그래서 칼립소도 되고 페넬로페도 되는 모양이야. 애시당초 정절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지. 사내놈들은 전쟁터로 나가면서 남은 여자들에게 자물쇠를 채우고 지놈들은 전쟁터에서 남의 여자를 뺏어 놀았고, 여자들은 그 자물쇠를 차고 사내들이 올 동안 넋 놓고 기다렸을리도 없지 않겠어. 그러니 왜 결혼이란 걸 만들어 가지고선 서로 피곤하게 만들었냐 말이다. 그냥 원숭이 때 처럼 애비가 누군지 모르게 했으면 좋찮아. 어차피 어떤 통계를 보니 10%(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정도의 아이가 친 아버지에게서 자라지 않고 있으며 그 사실을 남자는 모르고 있다고 하더군.

-> 마침표 하나 없는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이 여자 참 멋있네. 나라도 반하겠어’ 싶다가도 세상의 여자들이 이렇구나 싶다가도 그러니 사내들은 또 어떻고 싶다가도 이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 되돌이표를 만나고 막 그러네.

-> 제임스 조이스의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이고...마리온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이것은 저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내가 저자라면


나는 또 우리는 책을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책 읽기는 사뭇 달라야 한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즐기고 느끼고 그리고 또 땡기면 리뷰 한자락 읊으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며 훌륭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한가지를 더 해야 한다. 내가 쓸 글, 내가 쓸 책에 소용 될 무엇인가를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배껴 쓸 것이어도 좋고 덮어 쓸 것이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건 낚아 올려야 할 책무가 부여된 것이다. 이 책무는 본문의 내용을 씹어 삼키는 것에 우선한다. 책을 이해 했건 말았건 부과된 책무란 말이다. 빈곤한 사유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감당해 내고야 말아야 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읽고 좋아하던 <오디세이아>에서 골격을 가져와 현대의 옷을 입히고 여기에 <율리시스>란 제목을 붙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율리시스의 은유이며 비유이다. 오히려 오리지널보다 깊고 오묘하다. 빌려왔으나 아류가 아니다. 하여 이 책은 현대소설의 모태가 될 수 있었다. 가져오되 베끼지 않은 것이다. 가져오되 재 창조 되었다. 가져오되 더 깊어졌다. 가져오되 그래서 새로울 수 있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였다. 

조이스는 그의 글에서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데려와 글로 엮었다. 작가적 상상의 탁월함이 없지 않았으나 자신의 이야기, 즉 자전적 포맷을 놓지 않았다. 주변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며 여기에 살을 붙이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 하다. 새로운 것, 뾰족한 것, 똑소리 나는 것, 쌈박한 것을 찾느라 오만 곳을 헤매고 다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비로소 탁월할 수 있는 필살기다.

저자는 쓰기 위해 먹었다. 살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간절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병마도 불운도 불행도 막을 수 없다. 그와 같은 천재성이 없음이 한탄스러우나 어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바에야 도리없다. 매일 읽고 매일 쓰고 그리고 계속 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즐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는 아직 즐길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 책에서 외설이 없었다면 날개 없는 새와 같았을 것이다. 숭고하고 신선한 것은 외설 뒤에 숨긴다고 해서 그것이 폄회되지 않는다. 그리고 외설이 꼭 더럽고 추악하고 나쁜 것이라는 믿음 또한 동의할 수 없다. 내가 하면 로멘스!


IP *.201.146.14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