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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1일 08시 50분 등록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김종건 역, 생각의 나무, 2007.


1. 저자에 대하여


■ James Aloysius Joyce ■

출생/사

1882.2.2 아일랜드 더블린 / 1941. 1.13 취리히.

•활동 분야

작가

 

•발 자 취  

•저 서

1888(6세). 예수회 기숙사제 학교인 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 초등학교 입학

1891(9세). 경제적 어려움으로 퇴교. 10월 6일 당시 애국자 파넬의 죽음에 충격으로 파넬의     ‘배신자’를 규탄하는 <힐리여, 너마저>란 시를 씀. 아버지가 만족하여 인쇄했으나 남은 것은      없음. 이후 2년간 휴학하고 아버지의 고향 코크를 여행하며 그의 모교를 구경

1893(11세). 예수회 학교 벨비디어 칼리지 중학교 입학. 장학생으로 수업료 면제, 작문 경시     대회 최우수상

1898(16세). 성직자의 길 대신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수회 학교 더블린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입학했으나 학우 관계보다는 학교 근처의 국민 도서관에 다님. 대학 재학 중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를 완전 마스터함. 아일랜드 문예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으나 조이스는 비판적    이었고, 기독교 및 편협한 애국심에 대한 반항심을 가짐. 당시 조이스는 대륙의 문학 및 고전    에 흥미, 입센에 심취.

1899(17세). 예이츠 <캐스린 백작부인>을 공격하는 동료 학생들의 항의문에 서명 거부

1901(19세). 아일랜드 극장의 지방성 공격하는 수필「소요의 날」발표. 대학 잡지에 게재하    려 했으나 예수회 지도교수에 의해 거절됨

1902(20세). 10월 학위를 받고 파리에서 의학 공부하기로 결심하나 경제적 이유로 중퇴. 늦    가을 더블린을 떠나 런던의 W.B 예이츠 방문하고, 그의 작품 판로의 가능성 살피기 위해 얼    마간 그곳에 머뭄

1903(21세). 파리에서 의학에 대한 흥미를 잃고 더블린 일간지에 서평 쓰기 시작함. 4.10.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부친의 전보를 받고 더블린으로 되돌아옴. 암으로 임종을 앞둔 모친은 신앙    생활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조이스는 거부하고 모친은 8.13일 사망

1904(22세). 어머니 사망 후 조이스 가의 처지는 악화되며 가족과 점차 멀어짐. 3월 달키    의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 6.10일 노라 바너클을 만나 사랑하게 됨. 둘이 처음 데이트를 한 6    월 16일은 불룸스데이라 불리며, 율리시스의 시간적 배경이 됨. 결혼을 관습으로 반대함으로써    더블린에서 노라와 살 수 없게 되자 함께 유럽으로 떠나기로 작정함. 10월 8일 런던과 취    리히를 거쳐 폴라((유고슬라비아령)에 도착한 뒤 그곳 베를리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침

1905(23세). 오스트리아 트리에스트로 이주. 7.27. 아들 조지오 탄생. 3개월 뒤 동생 합류.    「더블린사람들」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양도하나 10여년의 다툼 끝에 1914년에야 출판.

1906(24세). 로마 이주. 이듬해 3월까지 은행에서 일함. 그 후 트리에스트로 돌아와 영어     가르침

1907(25세). 딸 루치아 안나 탄생. 홍채염에 걸린 이후 안질로 계속 고생

1909(27세). 방문 차 아일랜드로 가 다음날 트리에스트로 되돌아왔다가 경제적 지원을 얻어     더블린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한 극장을 개관

1910(28세). 트리에스트로 되돌아옴. 극장 사업의 모험 무너짐. 더블린을 처음 방문했을 때 뒤     에 그의 희곡 「망명자들」의 소재로 삼은 감정적 위기를 경험함

1912(30세). 「더블린 사람들」에 대한 시비가 조이스에게 강박관념이 됨. 마지막으로 더     블린을 방문했으나 출판을 주선할 수 없었음. 조이스는 심한 비통 속에 더블린을 떠났으며 트리     에스트로 돌아오는 길에 「분화구로부터의 가스」란 격문을 씀

1913(31세). 에즈라 파운드와 교신하기 시작. 그의 행운이 움트기 시작함

1915(33세). 1차 대전, 친구들의 진력으로 스위스 입국

1917(35세). 미국 부호의 딸 메코믹 부인으로부터 2년간 매달 경제적 원조를 받게 됨. <에고    이스트> 소유자 해리엇 위버 여사에게서도 경제적 원조를 받아 생계 걱정없이 창작에만     진력할 수 있었음. 최초로 눈 수술. 이 해 말까지 「율리시스」의 처음 에피소드 초고를 끝     마침

1919(37세). 트리에스테로 귀환. 영어를 가르치며 「율리시스」 쓰기 시작. 문단 주목받음

1920(38세). 에즈라 파운드의 주장으로 파리 이주. 엘리엇을 비롯한 많은 문인을 만남. ‘죄악      금지회’의 「율리시스」에 대한 외설 고소로 <리틀 리뷰>지에 「율리시스」연재 중단

1921(39세). 「율리시스」재판에서 유죄 판결로 미국 출판을 단념하나 미국 부호 미망인 실     비어 비치의 후원으로 파리에서 출판할 수 있게 되어 마지막 에피소드 완성하고 작품 교정     에 몰두

1922(40세). 왼쪽 눈 녹내장으로 실명 직전에 이름. 8년간 10회의 수술로 실명은 면함. 여름    영국 서섹스 휴양차 여행하여 「피네간의 경야」구상함

1931(49세). 아내와 함께 런던 여행. 결혼식 올림. 12.29일 부친 사망. 악화된 눈병으로     여러 번 수술하나 거의 보이지 않게 됨

1932(50세). 손자 스티븐 조이스 탄생. 3월 딸 루치아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음. 이후 회복되    지 못한 채 조이스의 여생을 암담하게 만듬

1933(51세). 연말 미국 뉴욕 법원이 「율리시스」가 외설물이 아님을 판결. 이로써 최초의    미국판 출판이 가능해짐(최초 영국판은 1936년 출판)

1934(52세).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냄. 취리히 근처 요양원에 수용된 루치아 곁에 있음. 취    리히 의사와 눈병에 대해 상담

1935(53세). 수년 동안 집필하던 「피네간의 경야」완성 위해 노력

1938(56세). 프랑스, 스위스, 덴마크로의 작은 여행으로 파리에 거주할 수 없게 됨

1940(58세). 프랑스 함락된 뒤 조이스 일가 취리히 거주

1941(59세). 장 궤양으로 복부 수술 후 취리히에서 사망. 취리히 프렁텀 공동묘지에 안치됨

1896(14세). 모범생으로 인정받아 성직에 입문하    기를 권유받음 호라티우스의 글을 영역함

1900(18세). <문학 및 역사학 학회>에서 <연극과      인생>에 관한 논문 발표. 논문「입센의 신극」     이 <포트나이틀리 리뷰>지에 게재됨

1901(19세). 아일랜드 극장의 지방성 공격하는 수필    「소요의 날」발표

1902(20세). 아일랜드 시인 제임스 클라런스 맹    건에 관한 논문 발표. 맹건이 민족주의의 제물이었    음을 주장.

1904(22세). 자서전적 소설「예술가의 초상」단    편 집필. 「영웅 스티븐」, 「젊은 예술가의 초    상」으로 개작됨

1907(25세). 런던의 한 출판업자가 시집 <실내    악>을 출판

1908(26세). 「영웅 스티븐」개작하여 이듬해까    지 지속. 3장을 마친 뒤 잠시 작업 중단

1914(32세). 조이스의 ‘기적의 해’로 「젊은 예술    가 의 초상」이 <에고이스트>지에 연재되기 시작.   「더블린 사람들」출판. 「율리시스」를 5월에 기    초하나 「망명자들」을 위해 잠시 중단

1915(33세).「망명자들」완성

1916(34세). 「젊은 예술가의 초상」출판

1918(36세). <리틀 리뷰>지(뉴욕)에 「율리시스」    연재. 5월 「망명자들」출판

1922(40세). 40번째 생일에 「율리시스」출판

1923(41세). 「피네간의 경야」첫 부분 씀       (1939년 출판될 때까지 ‘진행중’인 작품으로 알    려짐). 수년 동안 새로운 작품에 대하여 활발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 「율리시스」3,500부 출판    했으나 499부를 영국 세관에 몰수당함

1924(42세). 「피네간의 경야」의 단편 몇 개    출판. 이후 15년 동안 「피네간의 경야」대부분을    예비 판으로 출판할 계획이었음

1927(45세). 4월과 1929년 사이에 「피네간의    경야」제1부와 제3부 초본을 실험 잡지 <트랑지숑>    게재

1928(46세). <아나 리비아 플루라벨> 출판. 이후     10년 동안 진행중인 작품의 여러 단편 출판

1932(50세). 손자 스티븐 조이스 탄생에 감동 <보    라, 저 아이를>이라는 시를 씀

1939(57세). 「피네간의 경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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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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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단상


아, 눈!


 작가라고 하면 말이야.

 타인의 책도 많이 읽어야 되겠지. 자신의 글도 많이 읽어야 할 테고 말이야. 그런데 그 글을 읽을 수 없다면 말이야, 그럼 어떡하지? 그래 좋아. 타인의 글은 읽지 않는다치고 상상력을 동원해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글을 쓰지. 제대로 글을 쓰고 있을까를 어떻게 알지?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요, 조차를 구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컴퓨터라는 게 있으니까. 그런데 컴퓨터가 없던 시대에 작가가 되려는데 앞이 안 보인단 말이야. 그럼 어떤 심정이 될까.

 조이스는 말이야. 25세 젊은 나이에 홍채염에 걸려서 이후부터 고생을 했다고 하거든. 하긴 25세면 뭐, 나보다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네. 홍채염의 원인이 다양하긴 하지만, 어쩌다가 그 질환을 앓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낫지 않은 채로 10년이 지나서야 첫 수술을 했다고 하는데 수술할 수 있었던 건 그때쯤 어느 여인네들의 경제적 원조로 경제적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일까. 수술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첫 수술 후 5년 뒤에 녹내장이었다고 한 걸 보면,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던 모양이야. 녹내장은 시야가 바깥에서부터 중심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되는 병이지. 그러니까 완전히 실명하기까지 서서히 진행되는 병이지. 어디서는 실명을 했다고 하고 어디서는 실명까지는 아니라고 하는데, 아무튼 녹내장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겠지. 다행히 왼쪽만 그렇다고 하는 걸 보면 후천적인 어떤 원인에서였던 것 같긴 해. 홍채염에서 발발했을 수도 있지. 그나마 한쪽만이라는 것이 다행이긴 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힘든 것이 절반이 된다는 건 아니긴 하지. 수술을 위한 경제적인 면도 신경써야 할 거고, 불안감과 공포도 존재할 것이고 말이야. 나쁜 눈으로 계속 글을 쓰고 교정을 보고 해야 했으니 눈이란 게 쉴 틈이 없었겠지. 눈이란 건 말이야, 작가가 아니더라도 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체의 부분 중의 하나이긴 하지. 계속 그의 마음 속에 ‘눈’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긴 한가봐. 스위스 취리히에서도 눈에 대해 상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들 중에 실명한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더라구. 보르헤스도 그렇고....직업병인가? 그냥 심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상황에서 신체적인 문제로까지 고생했을 조이스가 안쓰럽게 느껴지네. 눈이 자주 아팠으니 자주 눈을 감고 있었을까? 그래서 눈을 감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머리로 보다 많은 생각들이 흘러가게 두었을까? 그러고 있다보면 그것이 아주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결혼은 관습이다?! 그래서 거부한다?! 그래도 여자랑은 산다?!

  

 난 열한시 삼십분에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줄곧 바보처럼 안락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바보입니다.

 

 나는 오늘 두 사람에게나 말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굴어서 그들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닌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노라 바너클에게, 1904년. 제임스 조이스


 1904년 22세의 청년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 그래서 저렇게 열렬한 연애시를 쓰기도 하지. 그녀는 노라 바너클, 집에서 도망나와 더블린의 한 호텔에서 하녀로 일하던 스무살 여성이었어. 이후 그들은 평생을 함께 하는데 그들이 만난 그해-6월 10일 만났다고 해-당장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으로 가게 되지. 그리고 1년 뒤 1905년 7월에 아들 조지오가 태어나고 1907년 딸 루시아가 태어나.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꾸리며 함께 살아가지. 그들은 만났을 때부터 격정적인 사랑을 했던듯해. 하긴 청춘이란 게 그럴 만도 하지만. 그런데 우습지 않아? 사랑은 하되, 같이 살되, 결혼은 하지 않는다라는 게. 글쎄, 여러 모로 반항끼가 다분해 보이긴 했지만 결혼이란 관습이란 이유로 조이스는 결혼을 거부한다네. 참, 그러니까 결혼식과 결혼 증명같은 거겠지. 그러니까 나름 형식적인 것을 거부했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도 하지. 그런데, 그게 뭐야? 결국 그렇게 살아가잖아. 결혼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꾸리는 생활들을 누리며 살아가잖아. 그럼에도 거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것이 ‘관습’이기 때문이고 그 ‘관습’에 따를 수 없었다는 그 온전한 반항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좋아, 좋다구. 결혼이란 형식같은 거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거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존중이란 느낌도 있는 거잖아. 노라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랑때문이었단 건가. 최근에 로뎅이 사랑한다는 여자와 결혼을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좀더 발끈하게 되는지도 모르지. 로뎅은 그렇게 단지, 결혼이란 것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한 여자를 제 옆에 묶어 두고 평생을 피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다른 여자와 수없이 염문을 뿌리고 다녔더군. 그러니까, 그것은 한 여자에게 온전히 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던 거지. 그런데 조이스에게도 다른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더라구. 우선은 오로지 그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한다는 여러 부인네들이 있어. 한 명이 아니라는 얘기지. 뭐, 이들은 경제적 원조를 해줬던 사람이라고 하고. 다른 얘기들은 발견하지 못했으니 넘어 가고.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마르타 플라이수만이란 스위스 여성이란 연애를 했대. 뭐, 은근한 연애에다 슬프게 끝났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간 적이 있단 이야기잖아? 더구나 그 여자가 율리시스에서 마사 클리퍼드의 모델이라네. 잊지 못하고 책 속에서도 살려 놓은 거지. 아무튼, 웃긴 건 이때가 경제적으로 좀 안정된 시기라고 하는데, 그러고싶었냐고 묻고 싶네, 정말.

 그리고 1931년에 결혼을 했어. 만나서 같이 산지 27년 후지. 여러 번의 수술로도 눈이 보이지 않을 시기였던 때이기도 하고. 왜? 왜 이때는 결혼을 한 거지? 이때는 결혼이 관습이라는 생각이 바뀌었나? 관습이라도 상관이 없었나?


정신질환


 정신질환이란 단어를 들으면 기분이 좀 묘해. 슬프고 아리기도 하면서도 그 어떤 호기심이 새록새록 솟아나지. 무엇이 그런 병을 발병하게 했는지를 알고 싶어서 말이야. 사실, 병이란 것이 들어찰려고 한다면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하지만, 또 정신질환에 관해서는 꼭 삶의 어떤 이유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게 있나봐.

 그의 딸 루치아가 정신분열증을 앓았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결국 스위스에 있는 요양원에 수용되었다고 하지. 조이스가 스위스에서 지내면서 루치아를 자주 보러 다녔다고 하나봐. 어쨌든 눈도 좋지 않은 이 작가는 딸의 정신분열증으로 상심이 컸다고 해. 루치아는 어쩌다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게 되었을까. 한때 루치아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를 연모했다고도 해. 사진을 보니 이쁘게 보이던데. 무용수들과 찍은 사진이 있던데 그녀도 무용수였을까. 그녀도 예술적인 기질이 특출한 사람이었을까.

 아무튼, 딸의 정신분열증으로 마음고생하며 곁에 있던 조이스는 딸에 대한 애정이 컸나봐.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보면서 이 사람을 정신질환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스치기도 했어.


경제적 시련과 재능


 제임스 어거스틴 조이스, 그는 더블린의 작은 마을 라스가에서 태어났지. 10남매 중 장남이라고 하는데 그의 형제는 모두 어릴 때 죽었다는군. 나중에 트리스트에에 같이 사는 동생 존은 빼고 말이야. 그의 아버지는 매력적이고 똑똑했지만 씀씀이가 헤펐대. 그래서 조이스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지. 오죽하면 학교를 중퇴할 정도였겠어! 그래도 아버지란 사람이 아들이 재능이 있는 것을 알아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은 했나봐. 조이스가 일찍부터 재능이 없었다면, 공부에 탁월함을 보이지 않았다면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야. 사람이란 나이가 좀 들어서 재능을 발견하게도 되는데 말이야. 공부를 하다 보니 특별한 분야의 재능이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야. 어쨌든 어린 시절부터의 탁월함이 조이스에게는 있었어.

 세상에, 9살 소년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란 정치가의 죽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까지 썼다잖아. 파넬은 키티 오셰이란 여자와의 애정행각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하네. 키티 오셰이랑 남편의 이혼재판 때문에 민족당 당수직에서 파넬이 물러났다고 해. 그래서 조이스는 민족주의자 파넬이 추종자들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을 해서 파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배신자들을 비난하는 “힐리, 너마저도”라는 시를 지었다는 거야. 아홉 살 소년의 이런 시를 읽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네. 그런데 어떻게 소년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정치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배반자니 하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 것 말이야. 아마도 누군가가 조이스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 수도 있겠지. 아버지의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신념들이 조이스에게로 전달이 된 듯하다고 해. 얼마나 깊게 아버지의 사상들을 수용했으면 어린 소년의 감성에 저런 힘을 발휘할까. 아무튼 이후로도 조이스는 나름 자신의 사상이나 신념이 굳었던 듯해. 대학에서도 그는 입센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반대했고 근대 극작가들을 옹호하며 자신의 의견들을 글로 피력했지. 수많은 이들이 반대하고 비난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들을 주장하고 펼칠 수 있다는 건, 참 매력적이지. 아무튼 이러한 조이스의 행동들은 보수적인 더블린의 예수회 학교에서는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 논문이 거절당하기도 하고 말이야.

 한동안 문학을 떠나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당시 그는 아일랜드 문예극 운동에 대해 비난하고 아일랜드 문예극장 지도자들의 편협하게 보고 있었는데 그 영향이 컸던 걸까. 하지만 결국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지. 의학을 지속하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고 하고 말이야. 하긴, 의학 공부를 할 땐 술만 마셨다고도 해.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해 더블린으로 돌아와서 노라를 만나고는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으로 가게 되지.

 먹고 살기 위해서 그는 영어를 가르치려는데 여의치 않았지. 실제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고. 잠시나마 은행에서도 일을 했다고 하지.  잘은 모르지만, 은행에서 일할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럽 여러 곳을 떠돌며 어렵게 생활했는데 더블린 사람들의 끊임없는 출판 연기와 시비, 율리시스의 외설 시비로 인한 출판의 어려움 때문에도 많이 힘들었지. 작가로서 수입을 얻어야 하는데 출판이 안된다는 것은 얼마나 좌절되는 상황이겠어. 그의 경제적 안정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으며 안정이 좀 되었다고 해. 그래서 좀 여유롭게 창작에 몰두하고 눈 수술도 받을 수 있었던 듯해.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병까지 가지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은 출판이 계속 되지 않았으니 많이 힘들긴 했을 거야.

 아무튼, 문학에 대한 재능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기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재능이 그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도 한 거지.

  

에즈라 파운드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

 에즈라 파운드가 조이스에게 많은 도움을 줬지. 1913년 31세에 에즈라 파운드와 교신하던 그 시점에 조이스의 행운도 움트기 시작했지. 에즈라 파운드를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스위스로 입국할 수 있었고 경제적 원조도 받을 수 있었고. 에즈파 파운드의 권유로 파리로 이주를 하기까지도 했어. 그래서 엘리엇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말이야. 그런데 조이스가 피네간의 경야를 발표하고 많은 문학적 동지들과 사이가 멀어졌대. 에즈라 파운드하고도 말이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야단이었다네. 이해할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야단법석을 떨 것까진 뭐야. 아무튼, 따돌림까지 당했대. 참 나. 파운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해대다가 두 사람의 관계는 1920년부터 팽팽해졌다네. 동생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고. 조이스는 이 평가에 낙담을 했대. 초월이 안되었던 모양이야. 안쓰럽네. 버니지아 울프도 조이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고 해. 엘리엇에게 보내는 편지와 자신의 일기에 조이스의 글에 대해 비문학적이고 저속하다고 했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의 한편으로는 조이스의 문학적 성공에 대한 시기로 악의로 가득찼다고 하는데, 뭐 그 둘은 같은 해 태어나 같은 해 사망했대.

 사실, 에즈라 파운드는 자기 작품인들 사람들이 쉽게 이해를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모더니즘, 이미지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처음엔 좋지 않았을 텐데. 파운드는 무명이던 조이스를 여러 모로 이끌어 주었던 사람이지. 공동작업도 했고 말이야. 그리고 파운드 자신이 <에고이스트>지 비공식 편집자로서, 그리고 <리틀 리뷰> 편집자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 출판을 도왔거든. 엘리엇에게도 도움을 줬고 헤밍웨이도 도왔다고 하기도 하더라고. 그리고 이미 유명했던 시인 예이츠에게도 글에 대한 충고를 할 정도였으니 파운드 자신의 문학적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좀 있었던 모양이야.



아일랜드를 사랑합니까


 아일랜드인 제임스 조이스. 아일랜드는 내겐 참 이상한 나라다. 한여름 소나기 같은 느낌을 주지. 내가 무엇을 보았기에 동화같은 느낌을 받는 걸까. 담백하고 경쾌하면서 톡톡거리는 이미지들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더블린, 이곳을 늘 떠나면서도 조이스의 글들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사람들은 아일랜드 태생의 이 작가가 좋은가봐. 유명인에 대한 예우 차원인가. 블룸즈데이까지 있다니. 블룸즈데이는 <율리시스>의 배경인 1904년 6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는데 작품 속 세 명의 주인공들 스티븐 데덜라스, 레오폴드 블룸, 마리언 블룸의 주인공들을 기념하는 거지. 아니, 사실은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기념일로 다양한 행사를 가지는 날이라고 하지. 웃긴 건 1904년 6월 10일 조이스는 그의 아내를 만났는데 6월 16일은 아마도 그들이 보다 진한(?) 데이트를 한 날이라고 하던가. 조이스 개인으로서는 아주 특별한 날인데 이것이 영원한 기념일로 남았지. 그가 늘 떠나 있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제임스는 더블린에서 많은 상처를 입기도 했고, 그의 작품이 계속 출판 거절되기도 했고 사람들로부터 공격당하기도 했고, 극장 사업을 하다 실패도 맛본 곳이지. 정착하지 않고 늘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떠돌던 조이스는 작품에서는 늘 더블린을 떠나지 못해. 그의 마음 속에 이 땅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일까. 사실 미움도 애정의 한 표현이라고 하지. 완전한 무관심이야말로 애정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말이야.

 예수회 학교를 다녔지만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견해를 달리했던 조이스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어머니가 임종 직전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자 스스로를 어머니를 죽인 죄인이라고 끊임없이 자책하는 것이 나와. 돌아가실 때 진심이 아니더라도 그거 한번 못해주랴 싶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정말 욕먹을 아들이긴 하지.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사상이 더 깊숙하게 몸에 배었나봐. 아버지는 호인이고 사교적이고 정치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물론 이런 사람들 중에서 가정 살림은 잘 보살피지 않는 위인이 있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도 그러했어. 덕분에 빈궁한 생활을 한 조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가진 견해가 많이 수용된 듯해. 9세에 정치가와 관련된 일에 분개하며 시를 적은 것만 봐도 그렇고. 그런데 하나는 수용하고 하나는 수용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그의 어머니 역시도 온화하고 좋은 성품이었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 대한 ‘반항’끼가 있었던 걸까.


■ 율리시스, 1904년 6월 16일의 랩 혹은 일기


 어디에서 뽑은 최고의 작품이라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책을 순위화한 목록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본 목록들의 상위권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그러니까 오래도록 나는 타인이, 전문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목록을 살피면서도 이 율리시스를 잘 피해왔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율리시스, 오디세우스는 이미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고 이야기였다. 굳이 이 이야기를 제임스 조이스의 시각으로 다시 읽을 필요까지야라며 스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강제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책을 펼치고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들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까닭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등한시했던 시절이 안타까워지며 이 두꺼운 책을 얼른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짐과 동시에 읽는다는 기쁨이 솟구쳤다. 그토록 사람들이 율리시스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아마도 정복욕이지 않을까.

 율리시스를 읽다가, 특히 마지막 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것은 랩이야’란 생각이었다. 사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말들이 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생각의 흐름을 감히 말이 뒤따라 갈 수 없다. 오디세우스 10년의 이야기보다 율리시스 하루의 이야기가 이렇게 양적으로도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페넬로페 역시 남편을 기다리면서 무수한 내적 갈등을 했을 것이고 거듭 거듭 생각의 순환이 이어졌을 것이다. 몰리가 내뱉는 문장들을 보면서 마침표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블룸의 생각들을 다시 뒤적였다. 마침표가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라는 생각을 했다. 읽어 가면서의 호흡도 달라진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이겠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블룸의 간결하면서도 딱딱 끊어진 호흡과 달리 몰리의 호흡은 쉴새가 없다. 여성의 생각도 수다스러움이려니 하는 걸까. 아무튼 몰리의 생각들은 랩처럼 음악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했고 내용의 놀라움도 상쇄시켜주는 듯 고조시켜 주는 듯한 문장들을 읽으며 현대판 랩으로 읽어 내려갔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이 아니다


 율리시스 이야기를 생각했던 내게 당연 첫 장부터 ‘이게 뭐지’란 당황스러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담이다. 머릿속을 항해하는 이야기. 하루 동안에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가. 참 재밌네, 재밌어란 생각들을 하면서 어딘가를 떠도는 것만큼 의식의 흐름 역시도 재미있는 유랑이란 생각을 했다.

 거창하게 들리는 의식의 흐름이란 문학용어가 사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의 소설기법이 가미되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낯설다기보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음, 뭔가 익숙해, 익숙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쓰라고 재촉받으며 제출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일기가 아니라 뭔가 가정의 격랑을 겪을 때 혹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써내려간 일기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토록 기법적으로 쉬운 소설이 어디있을까.


율리시스는 외설인가 아닌가


 조이스의 연보에서 율리시스가 외설시비로 휘말렸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뭐?’. 그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마광수의 책. 마광수의 책을 본 적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저런 황당한 시비에 휘말리게 했을까란 궁금증이 인 것은 당연하다. 결론은, 글쎄 모르겠다. 어느 시대이건 꼬투리 잡는 인간과 집단은 있고 그것을 사명감으로 여기는 집단은 있으니.

 외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시의 재판 결과 최종적으로는 해금조치가 되었으니 이 책은 외설시비에서 최종 승자가 되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설’에 더 각인되어 있을 듯하다. 오늘날처럼 포르노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본다면 이런 시비가 있다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1920년대 유럽도 역시, 실제 외설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것과 그것을 표현해 낸 작품들을 보는 것은 인식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일단, 율리시스는

 

당대에 그토록 시달림을 안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이토록 격찬을 받으며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소개에, 작품 소개에 구구절절하게 나온 바에 의하면 <율리시스>가 가지는 가치는 혁신적인 소설기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나올 시점에 한창 주가를 홀리던 의식의 흐름 기법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언어미학이라고 한다. 언어미학의 관점에서는 번역을 보는 입장에서는 늘 아쉽다. 어떻게 언어유희가 활용되는지를 모국어를 느끼는 그 맛으로 알고 싶지만 늘 각주를 의지해야 하며 그마저도 쉽게 와 닿지를 않으니 안타깝다. 특히 언어유희를 즐기는 나로서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율리시스>를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위치지은 이유란다. 그 위치를 지은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 문학을 전공한다는 ‘전문가’에 의해서겠지. “나는 <율리시스>에 아주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고 조이스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말들도 있다 한다. <율리시스>로 문학박사를 받은 사람이 <율리시스>를 끝까지 읽은 사람보다 많다라는.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올려놓는 것이 그러니 의아스럽기도 할밖에. 그토록 공격받은 제임스 조이스의 이 소설은 공격으로 인해 더욱 회자되어서일까.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T. S.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자기들의 작품을 쓸 때 이 책의 영향을 받았나나 어쨌다나.

 왜 ‘다름’은 늘 공격받아야 하는 것인지. 나의 이해하지 못함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들은 참 안타깝다. 어쨌든, <율리시스>보다 더 욕먹었던 작품이 <피네간의 경야>인데, 이 책도 지난 번부터 계속 읽어야지 하고 있던 책이다. 욕을 많이 먹은 작품이라니 또 불끈 이 책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말년에 눈 때문에도 딸 때문에도 힘들었던 제임스 조이스, 지금 후대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만족스러운가요?




참고 자료


•제임스 조이스. 김병철 역, 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1999.

•제임스 조이스, 홍덕선 역, 젋은 예술가의 초상, 문학과 지성사, 1997.

사진 : 네이버캐스트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율리시스 제4장. 칼립소


・시간 ; 1904년 6월 16일, 목요일, 오전 8시

・장면 : 더블린 북서쪽에 있는 이클레스가 7번지, 리오폴드 볼룸의 집


p152 동방의 어느 곳 : 이른 아침 : 새벽에 출발한다. 해를 정면에 안고 여행을 하면. 하루 동안에 그 행진이 끝난다. 그것을 영원히 계속하면 이론적으로 하루 이상 걸리지 않는다. 해변을 따라 걸어간다. 미지의 나라, 어떤 도시 대문에 당도한다. 거기 보초가, 그도 역시 늙은 병사, 늙은 트위디의 커다란 콧수염을 하고, 길다란 종류의 창에 몸을 기대로 있다. 덧문 내린 거리를 배회한다. 지나가는 터번 두른 얼굴들. 검은 동굴 같은 카펫 상점들, 덩치 큰 사나이, 쾌걸 터코, 꼬부라진 파이프를 피우면서, 다리를 포개고 앉은 채. 거리의 장사꾼들의 외치는 소리, 회향 탄 물, 셔벳을 마신다. 종일 성화를 부린다. 한두 명의 강도를 만날 수도. 글쎄, 만나도 좋아. 일몰이 다가온다. 주랑 사이 회교 사원의 그림자들 : 둘둘 말은 족자를 든 승려들. 나무의 흔들림, 신호, 저녁 바람, 나는 계속 지나간다. 퇴색해 가는 금빛 하늘, 어떤 어머니가 문간에서 나를 살펴본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말로 그녀의 아이들을 집으로 부른다. 높은 담벼락 : 그 너머로 울리는 현악기. 밤하늘, 달, 보라색, 몰리의 새 양말 대님의 빛깔. 현악기. 자세히 들어 보라. 소위 달서머라는 저 악기를 하나 연주하고 있는 한 소녀. 나는 지나간다.

⇒ 이렇게 간단하고도 일상적인 것들, 생각나는 그대로, 소설이 된다. 누가 뭐라든 무슨 상관이랴. 좀더 당당해져라.


p164 윤회란, 그는 말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거요. 그들은, 예를 들어, 누구든 동물이나 나무로 바뀔 수 있다고 믿곤 했지. 그들이 님프라고 불렀던 것도, 예를 들면.

⇒ 나는 분명 동양인이다. 불교신자가 아님에도 ‘윤회’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울림 때문에 더 눈여겨 본다.


p167 고양이가, 털을 말끔히 핥은 다음, 고기 싼 더러운 신문 쪽지에로 되돌아 가, 코를 거기다 갖다 댄 뒤 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고양이는 울면서, 그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모양이군.

⇒ 율리시스!!! 너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오랜 세월 항해하다 되돌아오고 싶지!!


율리시스 제13장. 나우시카


・시간 : 저녁 8시

・장면 : 스티븐이 아침 산책을 하다가 잠시 머물렀던 샌디마운트 해변의 바위. 블룸은 샌디마운트에 사는 디그넘 미망인을 위문하고 곧 이 해변에서 휴식을 취함.

 

p627 여름의 해거름은 그 신비스런 포옹으로 세계를 감싸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서쪽으로 해가 지면서 어느덧 지나가는 하루의 마지막 석양이 바다와 개펄 위에, 만의 물결을 예나 다름없이 지켜보는 정다운 오랜 호우드 언덕의 뽐내는 곶 위에, 샌디마운트 해안을 따라 해초 자란 바위 위에, 그리고 마지막이기는 하나 결코 덜하지 않게, 폭풍으로 동요된 인간의 마음에 그의 순수한 광휘로 언제나 등대가 되고 있는 성모를 향한 기도의 목소리를 정적 위로 수시로 흘러내고 있는 고요한 성당, 바다의 별, 마리아 위에, 애정이 넘치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의 묘사.

 

p631 그는 아마도 그녀가 느꼈던 것, 때때로 그녀의 마음속, 골수에까지 사무치는, 저 무디게 쑤시는 공허함을 거의 개의치 않으리라.

⇒ 역시 공허함이란 단어에 꽂혀서.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였나를 보며.

 

p635 그녀는 왜 사람들은 바이올렛이나 장미와 같은 시적인 것은 먹을 수 없을까 하고 가끔 이상하게 생각했는지라 그리고 그들 부부는 그림과 판화 그리고 길트랩 할아버지의 애견인, 거의 말을 할 정도로 사람과 닮은 개리오엔의 사진이 걸려 있는, 그리고 의자들의 사라사천 덮개 그리고 부자 집에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클러리 하기 골동품 염가 대매출에서 산 저 은제 토스트 선반이 비치되고 아름답게 꾸며진, 응접실을 갖게 되리라. 그는 넓은 어깨를 가진 후리후리한 키에(그녀는 남편감으로 키 큰 남자를 언제나 갈망했거니와), 세심하게 다듬어진 간추린 코밑수염 밑으로 반짝이는 하얀 이빨을 갖고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밀월여행을 위해 대륙으로 떠나게 되리라(멋진 세 주일을!) 그러고의 둘 만을 위해, 소박하나 정성들여 차린 아침식사를 먹게 되릴. 그리고 그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사랑하는 자신의 예쁜 아내를 한껏 끌어안고 잠시동안 그녀의 눈 속을 깊이 내려다보리라.

⇒ 바이올렛이나 장미와 같은 시적인 것은 먹을 수 없을까 가끔 이상하게 생각했는지라,라는 글을 본 순간 내가 이것과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냥 뒷문장까지를 적었다.


p637 그녀는, 두 개의 불을 싫어했는지라 램프 없이 갈색 서재 안에 사그라져 가는 여진 곁에 혹은, 생각하면서, 창밖으로 녹슨 버킷 위에 떨어지는 비를 꿈에 어린 듯 이따금 유심히 시간제로 바라볼 때, 그것을 혼자 거듭 거듭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은 단란한 가정을 파멸로 이끈 저 사악한 음료가 그녀의 유년 시절 위로 그의 그림자를 던졌던 거다. 아니야, 그녀는 폭주에 의해 야기되는 난폭한 행위를 과거에 심지어 가정사회에서 목격했는지라, 만취의 독기의 재물인, 그녀 자신의 부친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각한 것을 보아 왔으니 왜냐하면 만일 거티가 알고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의 행위로서 이외에 여자에게 손을 드는 사내야말로 천인 중의 가장 천인으로 낙인 찍혀져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 유심히 시간제로 바라보다...음 이 표현에 눈길이 가서. 처음엔 사악한 음모로 읽었다가 다시 보니 사악한 음료다..


p640 그때까지 그녀와 신사는 가장 우연한 시선만을 단지 교환할 뿐이었으나 이제 그녀는 자신의 새 모자 테두리 밑으로 그를 대담하게 쳐다보았는바, 거기 황혼에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얼굴은, 창백하고 이상하게도 찡그린 채, 그녀가 여태 보아 온 가장 슬픈 얼굴처럼 보였다.

⇒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가장 슬픈 얼굴을 떠올리며.


p650 만일 그녀가 저이의 눈 속의 저 마력의 유혹을 본다면 그녀로서 조금도 머뭇거릴 필요가 없으리라. 사랑은 자물쇠 장수를 조롱하니까. 그녀는 아무리 큰 희생이라도 감수하리라. 그녀는 그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리라. 그녀는 그에게 전세계보다 더 값진 것이 될 것이오, 그의 나날을 행복으로 장식해 주리라.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의문이 있었나니. 그녀는 그가 기혼자인지 아니면 아내를 잃은 홀아비인지 혹은 저 노래의 나라 출신인 외국 이름을 가진 귀족처럼 어떤 비극이, 아내를 정신병원에 처넣게 하고, 잔인하게도 사랑하게 했는지, 죽도록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대단한 상관이랴?

⇒ 그래, 뭐라든 그게 무슨 대단한 상관이랴?


p655 전 오늘 이렇게 두통이 심해요. 내가 편지를 어디에 두었더라? 그래 됐어. 모든 종류의 미칠듯한 그리움들.

⇒ 그리움. 미칠듯한. 그 모든 종류의.


p660 여자들이 ‘갓 칠한 페인트’라 표지를 해놓은 의자에 앉는 일은 결코 볼 수 없지. 전신에 온통 눈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침대 밑을 들여다본단 말이야. 움찔 놀라는 시늉을 하고 싶은 거다. 여자들은 바늘처럼 예민해요. 언젠가 카프가 모퉁이에서 몰리에게 그녀가 좋아할 줄 알고, 그 남자 참 잘생겼군, 내가 말했을 때, 그 남자 의수예요 하고 순식간에 알아챘지. 역시 의수를 하고 있었어. 여자들은 그런 걸 어디서 감지하는 걸까?

⇒ 여자들은 바늘처럼 예민한가..그런가,,


p665 상상컨대 냄새는 수백만 개의 작은 알갱이가 불어오는 걸 거야. 맞아 그거야. 왜냐하면 저 향료의 섬들, 오늘 아침 실론 사람들 수리 떨어진 곳까지 냄새를 풍기지. 그의 정체를 그대에게 말한다. 냄새는 마치 곱고 고운 베일이나 거미줄 같아서 여자들의 피부를 덮고 있는 거다. 소위 말하는 비단 거무줄 같이 고운지라. 여자들은 언제나 그걸 몸에서 발산하고 있는 거다. 놀랍게도 고와서 무지개빛처럼 그걸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그녀가 벗어놓은 것에 붙어 있어요. 그녀의 스타킹의 기운 곳, 따뜻한 구두, 코르셋, 속바지: 바로 조금 차서, 그걸 벗어버리는 거다. 빠이빠이 또 만나. 고양이놈도 역시 침대 위에 벗어놓은 그녀의 슈미즈 냄새를 맡기 좋아하지. 절대적으로 그녀의 냄새를 알아내요. 목욕물도 마찬가지. 크림 곁들인 딸기를 내게 생각나게 하지. 정말 어디서 그런 냄새가 나는 걸까. 거긴가 혹은 겨드랑이 아니면 목 아랜가. 왜냐하면 냄새는 온갖 구멍과 구석지기에서 나오기 때문이지. 어테르 기름 또 그 밖의 무엇으로 만든 히아신스 향수. 사향 쥐. 그들의 꼬리 밑의 주머니. 한 개의 낟알이 몇 년 동안 냄새를 뿜어낸다. 개들이 서로서로 뒤따른다. 안녕하세요. 안녕. 냄새가 좋아요? 흠, 흠. 아주 근사해요, 고마워요 동물들은 그런 식으로 지내는 거다. 그래 자, 그런식으로 그걸 생각해 보란 말이야. 우리들 인간도 마찬가지. 예를 들면 어떤 여인들은 월경 때가 되면 사람들을 멀리하지. 가까이 가봐요. 그러면 코를 틀어막을 듯한 냄새가 나지. 뭐 같을까? 항아리 든 청어 섞는 냄새 아니면. 프흐! 제발 풀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이거지.


율리시스 제18장. 페넬로페


・시간 : 없음(몰리는 시계에 의하여 그녀의 의식을 수놓지 않기 때문이다)

・장면 : 침대(침대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재회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p1228 남자란 계집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짓은 무슨 일이라도 어디든지 쫓아가지 하지만 따지고 물어서는 절대로 안 돼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들이 어디에 가 있는지 어디에 가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하지 나는 그이가 내 뒤에서 살금살금 뒤쫓아 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 눈을 내 목에다 바싹 붙인 채 말이야 그이는 우리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 몹시 마음이 타는 듯 했어 그래서 나는 반쯤 몸을 돌이키며 발걸음을 멈추었지 그러자 나더러 그러세요 하고 말하도록 나를 못살게 굴었어 드디어 내가 그이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장갑을 벗었지 그이는 나의 널따란 소맷부리가 미오는 날에는 너무 춥겠다고 말했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손을 내 몸 가까이 가져오려는 구실로서 말이에요 그 동안 노상 속옷 속옷 타령이었지 마침내 나는 그이가 조끼 호주머니에다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내 인형에서 그걸 벗겨다 준다고 약속했지 오 성스러운 마리아여 그이는 몸집이 커다란 바보가 빗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그이의 멋진 치열을 보자 다시 보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 그리고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니 내가 입고 있던 행살 형의 주름잡힌 오렌지색 속치마를 걷어올리도록 애원했던 거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흙탕 속에 무릎을 꿇겠다고 했지 또 정말로 끈기가 대단했어요

⇒ 아 마침표가 하나도 없는 문장을 읽게 되면 생각하지 어디서 쉬어야 하나 어디까지가 이어니자 혹여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로 읽게 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재미있지 이런 단순한 거 하나로도 글을 보는 재미가 달라져 세상을 재밌게 표현하는 방법은 어려운게 아닐지도 몰라 그냥 그 순간순간 스치는 생각들을 글로 모으면 무수한 책들이 나오긴 할텐데 물론 주제를 정해서 가야지 이런 거 재밌는데 이미 조이스가 해버렸어 이런 참 이런 걸 생각하면 일찍 태어나야 한다니깐

 

p1247 난 정말 싫어 언제나 우는 소릴 하는 사람들 말이야 누구든지 근심은 있기 마련인데도

⇒ 미투!


p1250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 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 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p1254 그인 코 밑 수염을 갖지 않았지 그건 가디너였어 그래 그이의 깨끗하게 수염을 깎은 얼굴이 눈에 선하군 프르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프롱 다시 저놈의 기차가 우는 기적 소리 불러도 대답없는 정든 그 옛 시절 다시 한 번 나의 눈을 감고 숨을 쉰다 입술을 앞으로 내민다 키스한다 슬픈 표정 살짝 눈을 뜨고 피아노 이 세상에 안개가 펼쳐지기 전에 나는 안개가 펼쳐지기라는 대목이 싫어 들려오도다 사랑의 달콤한 노오오오오오오래 여기를 힘차게 부를 테야

⇒ 생각들을 할 때도 박자가 일정하지 않고 리이이이이이이듬을 타나

 

p1259 지금은 밀리도 없잖아 사진술을 배우게 하려고 계집애를 그런 곳으로 보내다니 그이의 생각은 정말 주부 때문이지 그 대신 스케리 학원에나 보내는 게 나아 그러면 거기서 그 애는 나와 달라서 학교에서 뭐든지 일등으로 배우게 될 텐데 단지 그이는 나와 보이런 때문에 그와 같은 짓을 안제나 했을 거야 바로 그 때문이야 확실히 그런 것이 그이가 만사를 음모하고 계획하는 식이라니까 요사이 그 애가 있었다면 나는 이것에서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었을 거야 우선 문에 빗장을 지르지 않는 한 나는 불안하게 했지 먼저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다니 내가 문에다 의자를 버텨 놓고 장갑을 끼고 거기를 씻고 있을 때 말이야 정말 신경질 나게 하거든 그렇잖으면 하루종일 로봇처럼 그 애를 유리 케이스 속에 넣어 언제나 둘이서 바라보고 있는 게 좋을 거야

⇒ 딸애가 생각날 때는 어떤 때다, 뭐 이런 것들을 알려주는 글귀다.


p1261 나중에 혼자 생각한 일이지만 남자가 여자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데도 그의 생(生)을 포기할 지경이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임에 틀림없어 그런 남자란 요즘엔 드물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은 좀처럼 믿기 어려워 만일 그것이 정령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닌 한

⇒ 그렇게 생각하지마 생을 포기한다고 다 진실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안돼 요즘 시대는 거짓이 얼마나 많은데 하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일 수도 요즘은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고 남의 생을 죽여버리지


p1277 나에겐 아들이 없어 그이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어 그건 내 잘못은 아니야 우리들은 서로 포옹했으니까 나는 텅 빈 길 한복판에서 수놈이 암놈의 엉덩이를 타고 있던 두 마리의 개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을 때 그게 전적으로 나의 기를 꺾게 했던 것 같아 상상컨대 내가 울면서 짠 그 조그마한 털 재킷으로 그 애를 장사지내지 말 걸 그랬어 그걸 어떤 가엾은 애에게 주는 것이 나았을 걸 하지만 나는 다시는 결코 아이를 갖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지 그것 도 우리 집안의 최초의 죽음이었어 그 이후로 우리들은 아주 변해 버렸어 오 나는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우울해지고 싶지는 않아

⇒ 가부장적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죄로 여기며 살아왔던가. 심지어 조선시대 씨받이 역시도 여인네들이 주도한 경우도 많았다하니 경을 칠 노릇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저 생각들.

 

p1283 그렇지 내가 저 안달루시아 소녀들이 항상 그러하듯 머리에다 장미를 꽂았을 때 혹은 난 붉은 걸로 달까봐 그렇지 그리고 그이는 내게 무어의 성벽 밑에서 어떻게 키스했던가 그리고 나는 그이를 당연 다른 사람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했지 그런 다음 나는 그이에게로 눈으로 요구했지 다시 한 번 내게 요구하도록 말이야 그래 그러자 그이는 내게 요구 했어 내가 그러세요 라고 말하겠는가고 그래요 나의 야산의 꽃이여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나의 팔로 그이의 몸을 감았지 그렇지 그리고 그이를 나에게 끌어당겼어 그이가 온갖 향내를 풍기는 나의 앞가슴을 감촉할 수 있도록 그래 그러자 그이의 심장이 미칠 듯이 팔딱거렸어 그리하여 그렇지 나는 그러세요 하고 말했어 그렇게 하겠어요 네(Yes).

⇒ 결국 오랜 방황 끝에 그녀는 집에 도달했다. 행복한가?



3. ‘내가 저자라면’


■ ‘율리시스’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율리시스 

 

제1부

에피소드 1 텔레마코스

에피소드 2 네스토르

에피소드 3 프로테우스

 

제2부

에피소드 4 칼립소

에피소드 5 로터스 이터즈

에피소드 6 하데스

에피소드 7 아이올로스

에피소드 8 라이스트리곤들

에피소드 9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에피소드 10 방황하는 바위들

에피소드 11 세이렌

에피소드 12 키클롭스

에피소드 13 나우시카

에피소드 14 태양신의 황소들

에피소드 15 키르케

 

제3부

에피소드 16 에우마이오스

에피소드 17 이타카

에피소드 18 페넬로페

 

 

 제임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구성과 등장인물을 자신의 <율리시스>를 써 나가는 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제목과 목차만 봤을 때만 해도 이것은 그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러다가 이것이 왜 율리시스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율리시스와의 연관성을 계속 곱씹는 맛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그 긴 세월을 바깥에서 떠돌아다닌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이야기다. 제임스 조이스가 태어난 곳,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율리시스 속에 담겨 있다.

 <율리시스> 전문가들의 작품 해설들을 끌어와 이 뼈대를 설명하자면, 율리시스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3부 구조와 같다. 텔레마키아, 율리시스의 방랑, 귀향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장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그것들을 차용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온전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그의 이전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는 작자 자신이기도 하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이다. 율리시스에서는 조이스의 작품들 속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단,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그런데 또 이들 모두는 상상의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거의가 실제 모델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글쎄. 감동이란 건 무얼까. 어떤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이야기의 내용이 탁월하다? 그냥 율리시스는 놀랍다. 가만 보면 별 일 아닌 것들을, 전혀 대단치 않은 작품이다. 왜냐고, 이것은 우리가 늘상 하고 있는 말과 이야기들 아닌가? 딱히 신비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익숙한. 이것을 소설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들 놀란 것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나도 소설을 쓰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늘, 첫 시도가 중요한 법이지.


■ 보완점이라기보다는..


 랩같은 문장. 마침표 없는 문장.

 내가 <율리시스>를 보완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므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몇 번을 더 읽고 나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주구장창 분석해 댈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경외감, 달리 생각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율리시스>를 읽었다.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이것이 하루의 기록이라는 것에 놀라고 이것이 율리시스의 뼈대를 가져왔다는 데 놀라고 조이스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의 돌려쓰기라는 데 놀라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델이라는데 놀라고 아무튼 놀라고 놀라고.

 이 작가, 교묘한 방법을 쓴다. 자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생각보다 글이 편하게 읽혀졌다. 어쩌면 다른 생각들을 하지 않고 별생각없이 읽으려 했기 때문일지도. 처음엔 무수하게 달려있는 각주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 많은 각주들을 다 이해해야 하니 첫 장이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 책을 북리뷰가 끝난 이후에도 완전히 다 읽기로 작정을 하고서야 각주를 잠시 잊고 그냥 문장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니 내 식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글이 넘어갔다. 아마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글들을 곱씹게 되겠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해석하려는 생각들이 이 글을 읽는 방해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의미찾기에 매달리지 않는 것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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