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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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11■
얼룩
1
한 남자가 고층건물에서 떨어졌다.
살았다. 정말 고층이었을까.
그것두 아주 멀쩡하게. 고층은 몇 층부터일까.
그 남자는 죽기로 결심했고 뛰어내렸다. 폴짝.
낙하의 속도는 폴짝을 발음하는 시간과도 같아서, 순간이었다. 포올짝.
그 무서운 속도에 생각 역시 가속도로 내달리어 스물세 가지 생각이 스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죽음에서 걷어 올린 건 그 스물세 가지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생각이었다. 그의 발 아래로 걸어가는 그 여자. 도대체 어디서 본 여자인데 누구일까. 얼굴을 본다면 좀 더 가까이서 얼굴을 본다면 정말 누군지 알 텐데, 생각날 텐데.
그의 궁금증은 죽음에의 의지를 구기고 일어섰다. 오직 그 여자 얼굴을 가까이서 봐야겠다는 생각하나로 그는 그 여자 앞에 섰다. 우산도 쥐지 않은 그의 몸은 마치 메리 포핀스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사뿐. 가볍게. 그것 역시 순간이어서 그 여자 역시 그 남자가 언제 뒤따라오고 있던 것일까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도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던 남자에게 정작 그 여자는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때문에도 인터뷰는 연신 고층에서 떨어져 살아남은, 두 다리로 이여차, 착지를 한 그에게만 맞춰졌다. 인간의 생각이, 의지가 어떻게 행동을 지배하는가. 추락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지 않다. 멀쩡히 살아남은 억세게 운 좋은 이 사나이는 앞으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다시는 그 남자는 죽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결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덤과 같은 인생을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벙긋벙긋 웃어대었을 뿐이다. 생명의 은인인 그 여자와의 포즈는 그의 의지인지, 브이자를 만든 그의 손가락은 그 여자의 어깨에 잘 안착되어 있었다. 무엇이 좋은지 그 여자 역시도 어색한 미소가 아니라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한 사람을 살린 웃음치고는 적잖이 심드렁한 웃음이었다.
이미 살고 있는 그에게, 죽으려고 했던 그 아픔과 상처의 이유 따윈 없었다. 높은 곳까지 오르게 만들었던 그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살았다는 것이 완벽한 치유가 되었다. 살아있는 그에게 힘들었던 과거는 내세울 게 없었고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혹여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녀와의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무의식에는 그녀와의 일들이 잠재되어 있을지 모른다며 어떻게든 과거를 되살려 그 여자와의 연결고리를 알아내보마 달려들던 최면술사만이 그의 과거에 집착했으나, 그것은 가뿐히 무시되었다.
나는 그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그때의 그 아픔을 고스란히 잊어먹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눈 속에 언뜻 쓸쓸함을 박고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다. 다시 추락하고픈 마음이 그의 브이자 손가락에 잡히어 새근새근 안달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살아가는 동안 정말로 다 잊혀지는지를 묻고 싶었다.
눈을 뜨면 늘, 그 남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