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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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그녀들
10기 김정은
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 책이 있었어? 너 스타일 아니잖아?
내 책장에 꽂힌 제임스 조이스 책을 보고 남편이 물었다. 제임스 조이스? 아, 기억났다! 내 책장에 떡 하니 꽂혀 있는 제임스 조이스! 결혼 직전 난 그 책을 선물 받았었다. 그러고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은 난해하다는 소문에 지레 겁먹고 단 한번도 펼쳐 본적이 없었다. 그 책을 내게 선물한 사람은 바로 외간남자, 직장 입사 동기였다. 결혼을 준비하는 동료에게 왠 제임스 조이스?! 그 책을 선물한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 유학파는 그와 나, 단 두 명 있었다. 그는 영국의 아일랜드 출신이었고, 나는 미국의 네바다 출신이었다. 그는 제임스 조이스 마니아답게 유학 생활도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으로 상당히 풍부하게 보냈던 것 같다. 반대로 나는 학교와 알바, 성당만을 오가며,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 자유롭게 유학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하루라도 빨리 결혼함으로써 내 욕구를 비교적 안전하게 배출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그 동기는, 귀국해서 입사하자마자, 그것도 이십 대에 결혼을 준비하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선물은 내 결혼식을 애도하는 차원의 선물이었을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으면서 나는 세 명의 여인을 떠올렸다. 바로 가부장제에 귀속되길 바랬으나, 끝내 귀속되지 못했던 그녀들이다.
미국에서 알바로 일했던 옷 가게의 사장은 중년 여성으로 70년대에 미국행을 선택한 이민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전쟁 세대로서 결혼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다른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단다. 그녀의 어머니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녀는 장녀로서 아버지가 다른 네 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하지 못해 성인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뜬 것이었다. 그녀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녀는 여러 개의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어, 그녀의 아버지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어머니를 초청하여 부양하는 장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모토는 바로 ‘자나깨나 남자 조심!’이었다.
또 한 명 여성은 미국 유학 길에 올랐으나, 힘든 공부는 포기하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한번 잘 살아 보려고 했던 아는 언니이다.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동안을 한 이 언니는 그 지역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녀도 공부보다는 연애가 적성에 잘 맞았는지 공부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연애에 몰두했다. 한국인 유학생 남자 친구들을 사귀다가 돌연, “한국인 유학생들과는 더 이상 사귀지 않겠어!”라 선언한 후, 미국인 남자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자신은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갖길 원한다고 했다. 그렇게 결혼을 전제로 시작한 연애로 그녀는 일 년 동안 세 명의 미국인 남자들과 동거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결혼 전에 동거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다 동거 중 맞지 않으면 헤어지는 커플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국에서도 결혼을 빙자하여 언젠가는 돌아갈 여자 유학생들만을 노리는 남성들이 많다고 했다. 여러 번의 시도에도 자신이 바랬던 결혼에 실패한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선 보고 결혼하겠다며 한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은 근래에 알게 된 여성의 이야기다. 경기도 일대에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이며,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에서 결혼을 통해 여성들이 이주해 오고 있다. 거의 오십 대에 육박한 노총각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아들이 더 늙기 전에 손자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 어머니는 이십 대 초반의 베트남 여성을 천만 원을 들여 사왔다. 베트남 여성에게서 한 해가 지나도 아이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노심초사하기 시작했고 아들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 장가를 보내야겠다고 판단하여, 그 베트남 여성을 오백 만원에 내놓았다. 그 돈을 챙겨 다시 다른 여성을 사 올 목적이란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손자가 안 생길 것을 대비해서 혼인신고조차 허락하지 않은 상태였다.
여성에 대한 가장 큰 탄압이 가부장제라고 누가 말했던가? 가부장제에 귀속되지 않았다 해도, 전쟁의 피해자로서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도, 이주자로서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도 전부 여성들에게 있다. 결혼이라는 가부장제에 귀속되지 않은 채, 한 인간으로서 여성이 성적인 욕구를 외부에 표출할 경우, 보수적인 한국 사회나 개방적인 미국 사회나 남성들은 이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속 페넬로페 즉, 몰리는 남성중심의 사고에서 여성의 성은 없거나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대의 암묵적 억압에 대해 반대한다. 종교와 정치, 문화와 같은 상징계 안에서 여성은 텅 빈 존재로 가정되는데, 몰리는 일반적인 사회 통념이자 윤리라 불리는 이 경계를 넘나들며 그 근거를 무너뜨린다. 몰리는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벗어 던진, 다양한 인간 군상을 집약해 놓은 한 명의 인간이다. 즉, 그녀는 성녀이자, 유혹녀이고, 어머니, 아내이자 또한 정부이기도 하다. 몰리는 체계가 규정하는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로서 <율리시스> 열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서 방점 없는 대항 담론을 쏟아내듯 내뿜고 있다.
결혼이라는 가부장제에 귀속되어 안전함을 느끼는 나는, 처음엔 몰리의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들이 이해도 안될뿐더러, 일관성도 없고, 권위도 없음은 물론, 유혹녀로서 아우성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경계에 선 세 명의 여성들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추상적 가치와 단일한 정신적 원리보다는 현실세계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인생을 구성하는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에 기인한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세계는, 오히려 경계에 선 그녀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인정하는 듯하다. 이제, 몰리의 외침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결혼 직전, 제임스 조이스를 선물한 그 입사 동기는 가부장제 귀속선언을 한 나에게, 그래도 여성으로서의 삶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난 남편에게 대답했다.
제임스 조이스? 완전 내 스타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