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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년 째 머리 속으로만 쓰고 있는 제 국수책 - '가칭: 어이없게도 국수' 의 에필로그로 생각해둔 초안을 꺼내 다듬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초안이네요. 남은 20여개의 꼭지글을 다 쓰고나면, 또 바뀌겠지만, 결의의 다짐을 위해 올려봅니다.
에필로그
왜 하필 국수냐면.
나는 답하지 못했다, 왜 국수지? 왜 국수가 날 위로할까. 왜. 하필. 국수였을까.
국수는 만만한 녀석이다. 밥은 필연적으로 여자들에게 노동을 상징한다. 밥, 나만을 위한 밥, 혹은 누군가가 해주는 밥이라는 것은, 대부분 여자들에게 밥을 책임질 더 나이든 여자가 존재하는 어릴 적을 제외하곤 경험하기 힘든 사치다. 고생스러운 한끼의 노동, 먹기 위해, 먹이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수고의 무게가 밥에는 담겨 있다. 쌀을 불리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반찬 그릇과 밥 그릇과 국 사발을 준비하고 상을 놓아 차려내고 다시 온 식구가 밥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치지 않는 일련의 노동들을 생각해본다면. 그러니까 국수는 밥 보다 여러모로 만만한 존재다.
명절의 거나한 차례상이 끝나고, 이런 저런 기름진 음식에 지친, 무엇보다 노동에 지친 여자들이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여전히 배고픈 식구들을 위해 부르르 끓여내는 야식 메뉴가 국수다. 아이와 남편을 학교에 보내고 한 숨 돌린 주부들이 간단한 한끼의 수다를 위해 쉽게 찾는 곳이 국수집이다. 생각컨데 내가 하든, 남이 하든, 가장 수고를 더는 간단한 한 끼, 고래로 널리 알려진 패스트푸드이면서 함께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는 한끼, 그런 음식의 형태를 가진 것이 국수였을 것이다. 온 식구를 걷어 먹이기 위한 고단한 수고가 뒤따르는 그런 희생과 노동의 한 끼가 아니라, 그냥 피곤하고 배고픈 나를 위한 온전한 한끼가 국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할머니의 간장국수를 떠올리다 문득 들었다.
아, 할머니. 그 밍밍하고 심심한 국수타래를 대접에 한줌 올려, 오이 조각 한 쪽, 계란 고명 한 가락 없는, 심지어 국물 한 방울 없이 맨 얼굴로 민망한 그 삶은 국수 타래에 할머니는 간장 한 숟가락을 척 얹어냈다. 상 위에 얹어낼 것도 없이 대접 채 들고 쇠젓가락을 푹 찔러 넣어 슥슥 비벼낸 간장국수. 나에게 줄 국수였다면, 손녀에게 줄 음식이었다면 그렇게 아무 것도 얹지 않은 맨 국수를 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그 맛없어 보이던 간장국수의 의미를 찾으려고 이 모든 국수의 추억을 되짚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어릴 적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냥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인 것만은 분명한 간장국수 한 그릇의 의미를 나는 40여 년이 지나서 배우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을 넘어 내가 그 맛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까? 가장 좋은 것, 맛있는 것, 내 시간의 대부분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어주고, 간장 한 술을 얹은 국수 한 그릇으로 나를 대접하는 삶. 그러고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그녀의 속내를 듣고 싶다. 내가 아니라 온통 남을 향해 기능하는 24시간을 살았던 할머니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내가 아는 가장 부처에 가까운 인간이었던 그녀의 삶을 나는 요만큼이라도 만져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전능한 국수의 도움으로도 그 길은 머나멀다.
여하튼 나는, 국수로 추억하고, 국수로 힐링하고, 국수로 명상하는 여인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다 국수로 점도 치는 지경에 이를 지 모르겠다. 뭐든 자신을 생각의 길로 이르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게 종교나 음악이나 영화 같은 멋진 주제들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국수’였기에 나는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이끌어 알 수 없는 길로 향하게 할 거라고, 이제는 내 마음 안에 사시는 고마운 분이 말씀하셨다. 내가 국수를 쓴 것이 아니라, 국수가 나를 이끌어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찾게 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했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 상실과 회복의 여정에서 늘 나를 격려하고 에너지를 충전시켜준 수많은 국수들의 따끈한 헌신에 감사한다.
절대지존 평양냉면, 새침매콤 회국수, 신속조리 점심단골 신라면, 궁극의 소면 구포국수, 얼큰푸짐넉넉한 짬뽕, 어디에도 없는 엄마표 김치말이 국수, 너희들의 활약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러나 멸치육수 넉넉히 부은 잔치국수 너, 그리고 쫄깃부들한 면발로 나를 격려한 칼국수의 공헌도는 누구와도 비할 수 없구나.
성년의 사춘기, 마흔의 반전으로 휘청였던 지난 2년. 나는 국수를 먹으며 껍데기만 남은 듯 허하던 마음을 추스렸고, 극강의 비대칭이였던 상박하후의 체형을 상후하후로 균형있게 살찌웠으며, 사랑해마지 않던 수많은 국수의 사연을 엮어 심지어 책을 쓸 지경에 이르렀다. 이 글은 내 삶에 늘 함께 해준 고마운 존재, 국수에게 바치는 오마쥬다. 나와 따뜻한 한 끼를 함께 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애정 고백이다. 어이없게도, 내 일생의 사랑이 된.
우리, 언제 국수나 한 그릇?
어이없게도 국수
너는 늘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 나를 살찌우는구나
이유도 모를 고단한 허기에
부어도 부어도 목마른 갈증에
빼빼 말라 쪼그라든 나를
너는 늘 따뜻하게 채워주었구나
힘 빠져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아주고
얼빠져 풀린 눈동자에 힘을 실어주는 너
면발의 부드러운 위로
국물의 따끈한 진심
수줍고 미안한 삼천원의 미덕
그게 바로 너지
어이없게 고마운 너, 국수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읽지 못했지만 "더블린 사람들"은 읽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에러비'(Araby) 편을 좋아합니다. 에러비라는 바자(bazaar)에 저녁 늦게 가서 문을 닫은 어두운 골목에서 느끼는 분노와 좌절감이 주는 아련한 느낌이 어린시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웬지 이런 설정은 조이스 본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독특한 느낌이 듭니다.
어렸을 때 시장을 혼자 돌아다니다 어둑어둑해졌을 때 느꼈던 이상한 느낌.... 사람들은 돌아가고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고 나는 혼자 서있고....묘하게 서글픈 느낌. 사르트르가 구토를 느꼈던 그런 감정보다는 '에러비' 적인 감정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종종의 국수에 대한 첫기억인 간장국수에서도 묘한 서글픔을 느낍니다. 그저 탄수화물을 섭취한다는 느낌인 물과 국수와 간장 뿐인 국수에서 큰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개인의 경험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어린시절 비슷한 경험에서 느꼈던 아스라한 감정을 되살리게 만드는 오브제역할을 합니다. 서로다른 개개인의 경험과 사고체계속에서 이런 동질성을 발견하는 것은 인생자체의 초라하고 덧없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초라하고 덧없음을 채워주는 것.........국수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인가 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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