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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1일 11시 0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현대문학을 말할 때 한 유파, 한 문학 운동, 한 시대의 대표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 한 사람. 제임스 조이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예술, 무용, 문학 같은 어딘지 친근한 단어들이 그 앞에 현대를 붙이는 순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는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히는 것 같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뭔가 해석하고 싶지만 조각난 말들이 입안에서 깔깔하게 맴돈다. 그것은 말로 나오지 못한다. 그저 추측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평가는 극과극이다. 그는 마치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 같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5개 만점에 주저 없이 5개의 별을 받는 영화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2개 반에서 3개 정도의 별점을 받는 영화들. 공부 많이 한 평론가들의 안목은 그들의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이스에 대한 문단의 평가를 조금 빌려와 보자.

 

세계문학사를 한 몸에 수렴하고, 파괴와 반역과 고전주의와 정숙이 공존하며, 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그 문학적 방법이 더욱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언어와 문체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며, 정취가 악취미를 통해 세련미를 더하고, 악취미가 정취를 통해 증폭되며, 국제적 또는 무국적적인 허무와 불안의 묘미가 있고, 더욱이 그러면서도 문학적 세계 전체가 종교성의 한 음화를 이루는 구조를 볼 때, 그가 바로 모더니즘자체인 것이다. /김성숙, 율리시스, 1202

 

평론가들이란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러나 어렵긴 해도 꾹 참고 그에 대한 학계의 반응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려 한다. 세간에는 율리시스를 읽은 사람보다 이 책으로 논문을 쓴 사람이 더 많을 거란 농담이 돌기도 한다. 학자란 평생을 가지고 한 분야만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니, 그렇게 알면 알수록 까면 깔수록 매력적이라는 그의 평가가 유혹적으로 들린다.

 

조이스의 삶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 6 6일에 태어났다. 머릿 글자를 따면 J.J인데 한남동 하얏트 호텔 1층에 있는 클럽이 생각난다. 그 이름이 조이스에게서 나온 것인지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외설적인 그의 소설과 분위기는 잘 맞는 편이다.

 

 그는 지금은 기네스 산지로 더 유명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존 조이스와 메리 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글롱고우드 칼리지 초등학교 과정을 거쳤으며, 더빌린의 벨베디어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받고, 로열 유니버시티를 졸업했다. 그가 나온 학교들은 모두 가톨릭 예수회 계열이었다. 학교측은 조이스가 졸업후 학교에 남아주길 바랐다. 이는 대학교수가 되는 동시에 가톨릭에 평생을 바침을 의미했다. 어머니들이 늘 그렇듯이 조이스의 어머니도 이 제안을 허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조이스는 열여섯 살 이후 그런 삶에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 끝무렵의 자유사상이었다. 입센에 심취하여 노르웨이어를 공부했을 정도였다. 해방 사상을 품은 극작가에게 조이스가 감동한 이유는 영국, 프랑스에게 뒤진 낡은 전통에 묶여 고민하는 아일랜드 청년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톨릭, 민족해방운동보다도 자아의 해방을 바랐다.

 

1902년 그가 스무 살에 조이스는 파리로 갔다. 그 뒤 아일랜드에 잠시 머물렀을 뿐 계속 외국에서만 살았다. 2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만 그는 잠깐 더블린에 머물렀다. 그 동안에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여러 단편을 지역 신문과 잡지에 투고했다. 노라 바너클과 결혼하여 대룩으로 돌아간 것도 이때이다. 이 무렵 생활이 궁핍하여 오스트리아령에서 상업학교 영어교사로서 살림을 꾸려갔다.

 

이십 대의 그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스물 일곱에는 더블린에서 최초의 영화관 볼터를 경영했으나 실패했고, 신문 발간도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예전에 써둔 더블린 사람들이 오랫동안 출간 이야기가 오갔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책 속의 상점이나 인물이 더불린에 실제로 있어서 여러 가지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영국 왕실에 대해 너무나 무례하게 썼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이스는 이것을 절대로 고치지 않았다. 이 책은 10년만인 1914에 런던에서 발간되었다.

 책이 출간될 무렵 그가 더블린 사람들에 이어서 10년에 걸쳐 집필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영국 잡지 에고이스트에 연재되었다. 그리고 1916년 뉴욕의 휴 부시 서점에서 출판되었다.

 

1914년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 때문에 트리에스테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자 조이스는 스위스 취리히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영국인들과 연극활동을 하며 희곡을 쓰며 율리시스 집필을 시작했다. 율리시스는 21년까지 7년동안 쓴 작품이었다. 1922년 드디어 율리시스가 출판되었다. 초판 1000부 가운데 미국으로 보낸 것은 대부분 불태워지고 영국에 보낸 것은 세관에 몰수되었다. 1923년 조이스는 야심작 진행중인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로부터 16년 뒤 단행복 피네건의 밤생으로 출판될때까지 여러 잡지에 부분적으로 실렸는데, 무의식을 끌어들인 방식 때문에 극단적인 호평과 악평 사이에 놓였다.

 

미국에서는 율리시스가 오랫동안 관세법에 따라 외설문서로서 수입 금지도서였다. 그러나 1933년 울지 판사가, 이 책은 새로운 문학분야에서 이루어진 진지한 실험이라는 판정을 내려 금지가 해제되고 그해에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조이스는 제1차 세계대전 뒤 파리에서 머물렀는데 율리시스를 쓰는 동안 홍채염에 걸려 점차 집필이 힘들게 되었다. 조이스의 사진들을 찾아보면 왼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사진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아마도 이때 사진으로 추정된다. 안질이 더욱 더 악화되어 홍채염, 결막염, 녹내장 등의 합병증을 보였던 것이다. 1930년까지 그는 9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의 불행 중 또 하나는 그의 딸 루시아(Lucia)가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인 일이다. 7개국의 방랑, 경제적인 곤궁, 상이한 언어, 글을 쓰는 일에만 몰두하고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육체적 긴장을 술과 유흥으로 해소하는 아버지, 이 모든 것이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C. G. 융이 내린 진단 내용은 다음 과같다.

"당신들 두 사람은 강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따님은 빠져 죽고 있는 중이지만 선생은 다이빙을 하고 계시네요."

이 모든 어려움들과 질병들 속에서 조이스는 별로 격려도 받지 못한 채, 끈질긴 집념을 버리지 않고 <피네간의 경야>를 완성시키기 위해 싸웠다. <피네간의 경야> 1939 2 2일 그의 57번째 생일에 인쇄본을 받게 되었고, 그 해 5 4일 런던의 페이버 앤드 페이버사와 뉴옥의 바이킹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조이스 가족은 다시 피난처인 취리히로 이주한다. 1941 1 11일 조이스는  십이지장궤양으로 취리히의 적십자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으나 1 13일 사망하게 된다. 이틀 후 <더블린 사람들> <사자들>의 마지막 장면과 같이 음산하고 눈이 오는 날에 그는 취리히의 플룬테른 공동묘지에 뭍혔다. 1951년 노라도 그와 함께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가 59세일 때의 일이다.

 

율리시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구성과 주요인물을 빌려, 현대인과 고전 속 인물을 대응시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작품이다. 조셉 캠벨이 신화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지도와도 같다고 말한 것에 비추어보았을 때, 조이스는 이를 문학적으로 실현해본 최초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그린 일리아드의 후일담이다. 그리스 연합국은 10년 동안의 전쟁 끝에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헬레네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미녀였다. 훗날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으로 고대 그리스를 찾아갔던 파우스트 박사마저도 그 미모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의 왕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오디세우스만 그리스 남단 더 아래로 표류하여 1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괴물과 마녀가 사는 아프리카 연안과 지중해 여러 섬을 돌면서, 배와 부하를 잃고 10년동안 헤맨 표류와 귀국까지의 이야기가 오디세이아이다.

 

조이스는 오디세이아의 애독자였다. 1차 세계대전 무렵 율리시스를 집필하던 중 친구에게, 오디세우스의 다면적인 성격이 고전의 재미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괴테도 셰익스피어도 단테도 발자크도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같은 인간을 그린 적이 없네. 오디세우스는 신혼이며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전쟁에 나가는게 싫어 미친 척했지. 그는 평화주의자였어. 그러나 거짓말이 들통 나 전쟁에 참가하자 철저한 항전주의자가 되었네. 커다란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숨어서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네. 또한 그는 키르케의 애인이었고, 칼립소의 연인이었으므로 곧 연애의 순례자이지. 그동안에도 줄곧 아네와 아들을 만나길 바랐으므로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했고. 이런 다면적인 인간을 그린 사람이 호메로스 이후에 또 누가 있는가.

 

이렇게 인간의 모든 성격을 갖춘 오디세우스를 현대인으로 재창조하는 데 조이스는 블룸이라는 인물을 설정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자전적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은 스티븐 디덜러스다. 한글로 쓰면 디덜러스는 낯설지만 영어로 쓰게 되면 그것은 다이달로스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토마토, 토메이토와 비슷한 개념이다. 조이스는 청년시절 다이달로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냈던 것 같다. 소년시절부터 집과 학교에서 익힌 가톨릭 계울을 대학 졸업 직전에 버리고 근대의 자유인으로서 자기를 해방시켰을 때 그는 자신을 예술의 방법자로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톨릭교를 포기했으므로, 자신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해 달라는 임종 전 어머니의 부탁도 뿌리쳤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그렇게 거절한 일이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그를 괴롭힌다. 그것이 율리시스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조이스는 20세기 초까지의 자유와 자연을 소박한 뜻으로 중요시한 작가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방법자와 기술자로서 철저를 기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보전하려 한 20세기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는 기술자 다이달로스, 곧 디댈로스로서 자기를 그린 것이다.

 

조이스의 문체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사 인용이다. 조이스는 한때 파리에서 성악가로 자립할 생각도 했었다. 성량 풍부한 테너 목소리를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아 그는 더블린에서도 테너로 경연에 나간 경험이 있었다. 가수가 될지 작가가 될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늙어서도 술을 마시면 반드시 노래를 불렀다는 조이스의 취미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율리시스에는 해변의 처녀들이나 장난스러운 예수의 발라드 등 아주 다양한 노래 가사가 인용되었다. 지금은 이 노래들이 유행가가 아니라 별표가 붙은 주석을 통해서만 인용되었음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노래를 알고 있다면 그 노래들의 가락이 저절로 연상되고 울려 퍼지며 소설의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 말하자면 조이스는 음악이 들어 있는 소설이라는 참신한 놀이를 발명한 셈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은 음악 상태를 동경한다는 페이터의 예언을 실현했다. 언어에 사로잡힌 작가가 노래를 좋아하는 까닭은, 언어의 힘이 가장 잘 발휘되는 분야가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어휘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했다.

 

또한 그는 현대의 평범한 인물들을 고대 서사시에 나오는 반인반신의 영웅과 미녀들에 빗대어 이중적으로 묘사를 해낸다. 각 챕터별 소제목으로 달아둔 신화 속 인물들과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확실히 그 겹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부정한 아내인 소프라노 가수에게는, 그의 귀향을 기다리는 정숙한 아내의 모습이 겹친다. 엘리엇은 이 신화적인 방법을 현대사라는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전망을 지배하고, 질서를 주고 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소개했다. 현대소설의 폐단인 작중인물의 왜소함을 보충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조이스는 묘한 길에 접어든 근대소설을 인류 문학사의 정통으로 도로 데려오기 위해서 참으로 구체적인 선후책을 고안해 냈다.

 

율리시스는 혼란스럽다. 특히 선정적인 일에 대한 언급이 참 당치도 않게 맹렬하다.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우아하고 단정하다. 서머싯 몸이나 존 업다이크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시대상 조이스가 앞서기는 하다.._)외설한 욕을 태연히 남용하는 것도, 지저분한 분뇨담도 모두가 미풍양속에 대한 야유라기보단 문학적 습관에 대한 반역이자 폐단에 젖어있기만 한 문학자들에 대한 경멸의 상징이다. 반 장난이면서 소설의 전통을 되살려서 문학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욕의 발로였다. 실명거론이나 모델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악명 높은 선정주의 따 따위 그에게는 신선한 문학적 기법이었으며, 정통적인 시인의 자기주장으로의 복귀였다.

 

마지막 페넬로페 편을 읽고 나면 혼란이 가중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론은 뭔가. 블룸과 몰리의 관계는 이렇게 뜻뜨미지근하게 해결되는 것 없이 그대로이며, 그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뭐 이런가?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하고, 읽고나니 기분이 별로가 되어버리잖아. 나의 노력과 시간을 해피엔딩으로 보상해줘. 젊은 예술가의 초상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나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갯벌 장면 같은 것을 나는 필요로 한단 말이야. 그것은 호우드 곶에서의 결혼 승낙 같은 것은 아니란 말이야 라고 투덜대자 조이스가 조용히 웃으며 그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인생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긍정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블룸과 몰리는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영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 동안의 여행에서 블룸의 몽상은 몰리에 대한 것으로 고정되어 있고, 결말 부분에서 몰리 역시 생각 속에서나마 남편에게 충실하게 대한다. 이들에게는 기계적인 정액의 사출을 넘어선 진정한 감정의 공유와 영적 교감, 그리고 화해가 존재한다.

 

2. 가슴을 무찔러 들어오는 구절


 칼립소


100. 신화 소개> 칼립소는 그리스어로 감추는 여자란 뜻이다. 강풍을 만나 표류하던 오디세우스가 홀로 이 섬에 도착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여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를 7년 동안이나 놓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제시한 것은 영원한 삶과 재물, 권력이었으나 결국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아내와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7년동안 비척비척 말라가던 오디세우스는 결국 제우스의 판결로 칼립소를 떠나 이타카로의 여행길에 다시 나선다.


>>율리시스의 칼립소는 다소 난감하다. 페넬로페가 되어야 할 마리온이 칼립소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다. 페넬로페와 칼립소가 사실은 한 명이다? 오디세이아만 읽어보면 둘은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또한 둘을 같은 사람으로 둔다면 오디세우스가 칼립소로 변신한 자신의 아내 페넬로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또한 마리온과 페넬로페는 놀랄만큼 닮은 점이 없다. 남편 이외의 남자를 애인으로 둔 그녀. 남편인 블룸 또한 이를 알고 있다.


102. 미스터 레오폴드 블룸은 짐승이나 새의 내장을 즐겨 먹는다. 들큰한 거위 내장 수프, 호두맛이 나는 모래주머니, 속을 채워서 구운 심장, 빵가루를 입혀 튀긴 엷게 썬 간, 대구 알 소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양 콩팥 석쇠구이로, 엷은 오줌 냄새가 그의 미각을 미묘하게 자극해 준다.


>> 소주도 없는 아일랜드에 호두맛이 나는 모래집과 튀겨 얇게 썬 간, 내장 수프라니, 블룸의 입맛이 약간 괴랄하게 느껴진다. 그의 취향 또한 블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가는 와중에도 옆집 하녀의 엉덩이를 한 번 꽉 잡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내장은 솔직하고 육체적인 기관이다. 본능적 욕망들의 집약체다. 식욕과 성욕 같은 것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오디세우스에게 칼립소가 제안한 것들을 상기해보자. 영원한 삶과 재물, 권력, 밤마다 침대로 기어들어오는 매혹적인 여인이런 것들은 욕망의 사냥감들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무언가 바라며 살고 있다.


119. 어렸을 때부터 뼈를 빼서 그들은 윤회한다. 우리가 죽은 뒤를 산다. 우리의 영혼. 죽은 뒤 인간의 영혼. 디그넘의 영혼


>> 디그넘의 장례식은 칼립소 파트에서 그다지 핵심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블룸도 장례식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전개방식상 블룸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준비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은 디그넘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으며, 잔잔한 파도처럼 서서히 죽음이라는 사건이 블룸을 덮친다.

 


나우시카

 

572. 줄거리) 스티븐과 멀리건이 사는 마텔로 탑 근처의 샌디마운트 해변에 세 소녀, 거티 맥도월, 시시캐프리, 에디 보드먼이 저녁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 해변에는 바다의 별이라는 교회가 있고, 마침 거기에서 금주를 위한 기도가 진행된다. 흘러나오는 기도소리를 들으며 거티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일로 슬퍼하고, 또 준수한 젊은이 레기 와일리와의 밋밋한 사랑을 떠올린다. 이곳에는 마침 산책하러 온 블룸이 있다. 블룸은 이 소녀를 모른다.


거티의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에 블룸은 매혹되고, 결혼상대로는 중년 남자가 좋지 않을까 몽상하던 참인 거티도 블룸에게 마음이 끌린다. 홍혼이 짙어지고 마이러스의 바자 불꽃이 올라간다. 거티는 바위에 앉은채, 불꽃을 본다는 핑계로 몸을 점점 더 뒤로 젖힌다. 무릎을 든 자세가 된 거티의 속옷이 블룸에게 보이고, 블룸은 자극을 받아 자위행위를 한다.


>> 소설 마지막에 보면, 블룸은 거티가 절름발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거티는 블룸이 아내를 빼앗긴 남편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그렇게 둘은 별 일 없었다는 듯이 헤어지고 만다. 칼립소, 나우시카 파트를 읽고 난 지금, 블룸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 사람이 상당히 외설적이고 저속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578. 그래, 내 명예를 걸고 얘기 안 할게. 하지만 명예는 그럴 가치가 있는 경우에만 명예인 법. 거티에게는 타고난 우아함과 대범한 여왕의 기품이 있었으니 그녀의 섬세한 손과, 둥글고 높은 발등이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였다.


579. 그녀는 마침 초승달이 뜨는 날이므로 오늘 아침 그것을 막 자른 차이다.(초승달이 떴을 때 머리를 잘라야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는 미신에서) 그녀의 사랑스러운 머리 위로 풍성한 머리다발이 눈부시게 늘어뜨려져 있다. 또 그녀는 손톱 손질도 했다. 목요일에 하면 복이 있다고 하니까. 그리고 방금 에디의 말을 듣고는 뺨에 섬세하고 옅은 장밋빛 홍조를 띠우며 수줍어하는 그녀의 표정은 신이 빚으신 아름다운 나라 아일랜드 내에서도 견줄 여성이 없을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579. 그녀는 슬픈 듯 눈을 내리깔고서 잠시 말이 없었다. 에디에게 무어라 대꾸하려 했지만 내면의 어떤 것이 그녀의 말을 막고 있었다. 마음은 말하라고 유혹했지만 자존심은 침묵하라 명령했다.


>> 비슷한 경험이 생각났다. 내가 이 것을 말하면 내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뒷일 생각 안하고 질러버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다. 우아하게 화내고 싶다. 양이 깨물 듯 상대를 깨우쳐주면 좋겠다. 언제쯤에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582. 그녀는 행운의 바탕이 된다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색이었고, 또 신부가 옷 어딘가에 푸른색을 조금 지니면 행복해진다고들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좋은 운명이 오기를 기도했다. 왜냐하면 지난주 어느 날, 그녀가 녹색 옷을 입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중간 시험의 장학금을 위해 공부하라며 그를 밖으로 못 나가게 한 슬픈 일이 있었으므로.


>> 미신. 미신. 행운을 불러오는 미신은 많이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침식사로 카레를 만들면 그날은 좋은 하루가 될 거라는 식으로 작은 사건들을 행운과 연결시키는 것은 건강한 방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 너무 집착하면 안된다.


582. 또 그녀는 이날 아침, 낡은 속옷을 뒤집어서 입을까 고심했는데, 이는 속옷을 뒤지버 입으면, 그날이 금요일만 아니라면, 행운이 찾아오고 연인의 만남이 이뤄진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신들, 그러나 일상의 상상. 거티는 몽상가다. 많은 여인들이 공상을 필요로 할 것이다. 거기다 남성 중심적 사회 속에 여성 판타지를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는 늘 2%씩 부족하다.


583. 그녀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랑은 그녀의 발아래 진기하고 불가사의한 애정을 바치는 왕자의 매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강하고, 과묵한 얼굴의, 이제까지 이상적인 여성을 만난 일이 없는, 아마도 머리에는 약간 백발이 섞인 남자다운 남자다. 여자를 이해하고, 그 튼튼한 팔로 힘껏 그녀를 품어 안고서, 길고 긴 입맞춤으로 위로해주는 그런 남자. 틀림없이 천국과 같은 기분이리라. 그런 남자를, 그녀는 이 향기로운 여름의 석양빛 아래 앉아서 동경하고 있다. 마음의 모든 것을 바치고, 오직 그만의 유일한 한 사람이 되어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언제나 함께하는 앞으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그의 약속된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


>> 마지막은 결혼 서약문을 인용한 것인가 보다. 지금의 결혼식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저 문장들을 통해 조이스 문체의 맛을 잘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약간 공감 같은 것도 갔다. 한동안 나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을 선호했었던 적이 있었다. 어쩐지 내 또래 사람들보다 어른스러울 것이라 여겼고, 경제적,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착각이었다. 나이가 몇이든 인간은 여전히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기수양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자 거티의 이 환상 같은 상상이 조금 철없어 보이게 되었다.


584. 어쨌든, 그녀와 남편은 또한 그림과 조각 작품, 사람을 너무 닮아 금방이라도 말을 할 것 같은, 길트랩 할아버지의 애견 개리 오웬의 사진, 친츠천으로 덮인 의자, 부잣집에서 쓰는 백화점 여름 세일에 나왔던 저 은제 토스트랙 같은 것들로 꾸민 아름다운 응접실을 갖게 될 것이다. 남편은 훤칠한 키에 어깨가 떡 벌어져 있을 것이며 (그녀는 항상 남편으로 키가 큰 남자를 원했다.), 꼼꼼히 손질한 콧수염 아래 하얗고 갖런한 치아가 빛나는 그런 남자일 것이다. 그와 그녀는 대륙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될 곳이고 (꿈 같은 3주간!), 그리고 그 다음엔 작고 아늑한 집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날마다 소박하면서도 빈틈없이 갖춰진 아침식사를 함께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하러 집을 나서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진심어린 포옹을 하고는, 잠깐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것이다.


>> 여성과 남성의 차이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간과하고 지나가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해는 하지만, 섭섭한 것을 감출 길이 없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코칭을 하고 잔소리를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 은근히 알려주기도 힘들다. 그렇기 위해서는 소위 Delicate moment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묘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습관과 훈육에 달린 것이라 사랑의 상대가 가르쳐줄 성격의 것은 아닌 것 같다. 말하는 순간 깨져버리는 것이랄까.


잠깐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는 것이 좋은 예라고 보여 냉큼 집어왔다. 조이스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이런 소녀적 공상의 결과물들을 잘 꿰뚫고 있는 것일까. 남자면서. 그의 관찰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592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의 목소리이며, 우리는 모두 자연 법칙에 따른 뿐이니.

 


페넬로페


.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 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 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산데. 아침 드라마의 찰진 대사마냥 귓구멍에 팍 꽂히는 표현이라 일단 저장하기로 마음 먹었다.


1197. 그렇지 내가 저 안달루시아 소녀들이 항상 그러하듯 머리에다 장미를 꽂았을 때 그렇잖으면 난 붉은 걸로 달까봐 그렇지 그리고 그이는 나에게 저 무어의 성벽 바깥에서 어떻게 키스했던가 그리고 나는 그이를 글쎄 다른 사람만큼은 훌륭하다고 생각했지 그런 다음 나는 그이에게 눈으로 졸라댔지요 다시한번 내게 요구하도록 말이야 그래요 그러자 그이는 내게 물었지요 내가 그러세요라고 말하겠는가고 그래요 나의 야산의 꽃이여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나의 팔로 그이의 몸으로 감았지 그렇지 그리고 그이를 나에게 끌어당겼어요 그이가 온갖 향내를 풍기는 나의 젖가슴을 감촉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요 그러자 그이의 심장이 미칠 듯이 팔딱거렸어요 그리하여 그렇지 나는 그러세요 하고 말했어요 그렇게 하겠어요 (Yes)


>> 블룸과 마리안의 결말은 다소 밋밋하다. 둘은 서로 등을 맞대고 한 침대에 돌아눕는다. 현실의 관계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그러나 마리안의 독백, 꿈을 통해 독자는 두 사람이 처음 프로포즈를 한 날의 기억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른채 그녀는 네라고 대답한다. 그게 마지막이다. 이 긴긴 소설의 마지막이다. 결국 모든 핵심이 이 한 마디를 위함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Yes를 위해 조이스는 페넬로페 챕터에 마침표 하나 찍지 않았구나. 엄격한 언어의 편집증 환자가 생각해낸 거대한 마침표로구나. 점 하나로구나. 그래, 인생이란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이구나. 그저 지금의 나로서, 이 작은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뿐이로구나.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다. 겁도 많다. 용기를 가지자.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조차 용기 있는 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및 뼈대

1

에피소드 1 텔레마코스

에피소드 2 네스토르

에피소드 3 프로테우스

 

2

에피소드 4 칼립소

에피소드 5 로터스 이터즈

에피소드 6 하데스

에피소드 7 아이올로스

에피소드 8 라이스트리곤들

에피소드 9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에피소드 10 방황하는 바위들

에피소드 11 세이렌

에피소드 12 키클롭스

에피소드 13 나우시카

에피소드 14 태양신의 황소들

2(이어서)

에피소드 15 키르케

 

3

에피소드 16 에우마이오스

에피소드 17 이타카

에피소드 18 페넬로페

 

제임스 조이스 생애와 문학

제임스 조이스 생애와 문학

굉장한 말에 대한 조그만 치료앙드레 지드

단테 브루노 비코 조이스사뮈엘 베케트

열린 시학(詩學)―움베르토 에코

제임스 조이스 연보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소제목으로 잡고 현대의 일상으로 그들을 끌어들인다. 겹쳐보기를 사용한 장점이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의 순서에 따라 그들은 등장한다. 숨기는 여인 칼립소, 어린 공주 나우시카,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 이 세 여인을 통해 블룸은 모험을 떠났다가 다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다. 별 것 없는, 남들 다 하는, 평범한 자리일지라도 그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자리로. 그가 아니면 안될 그 자리로.


신화와의 겹치기는 좋은 전략이었다. 거티도 마리온도 블룸도 나는 모르는 타인이었으나, 그들의 소제목을 통해,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해줌으로써 그들은 나우시카 공주와 님프 칼립소를 묘사한 것이 된다. 신화적 인물은 원형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뼈대가 되고, 거기에 현대의 살과 옷을 덧입힌다. 장밋빛 뺨이 되살아 나는 것이다.


조이스의 또 하나의 전략은 실제 인물을 관찰하여 작중 인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실명 거론 때문에 그의 책이 출판될 때가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보면, 그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골칫덩이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책은 앞으로도 수세기 동안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것으로 보이니 조이스는 스스로의 기행에 아주 훌륭한 이유를 가진 셈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먼저 읽었던 터라 스티븐 디덜러스가 주인공 중 하나로 나오는 것이 반가웠다. 같은 작가의 똑같이 혼란스러운 문체로 읽으니 거기의 디덜러스가 커서 여기에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조이스의 생애를 조사해보니 놀랄만큼 디덜러스의 삶과 일치한다. 어디서 많이 듣고 알고 있는, 익숙한 삶이다. 이 사람은 자기의 인생도 소설에 거의 여과 없이 반영시켰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2) 보완점

현대인과 일상은 너무 소소하다. 그것 자체로는 마음을 끌지 않는다. 중첩을 통해 신화적인 깊숙함은 회복했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해결은 없다. 블룸이라는 인간의 생의 대세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신화와 현실은 다시 대비를 이루고, 현실은 원래의 회색조로 되돌아간다. 독자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사구조는 양날의 칼과 같다.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독자의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칠만큼 파괴적인 반향을 갖지만, 소설 속 주인공과의 공통점을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율리시스 자체가 외면당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이 소설의 어디에 줄을 쳐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스토리 진행상의 클라이맥스에 줄을 쳐야할까, 아니면 깨알 같은 회상과 사건에 줄을 쳐야 할까. 나의 펜 끝은 갈 곳을 잃고 블룸을 따라 여기저기를 헤맸다. 무의식을 활용한 글쓰기라니 터무니 없다. 그런 이유에서 독자보다는 학자를 위한 현대문학이라는 평가에 힘이 실린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짜 위대한 점은, 소설을 모두 읽고 난 독자 개인의 삶에서 발휘된다. 그저 꾸역꾸역 밀려드는 시간에 따라 순간순간을 해치워버리던 현대인의 무의식이 갑자기 수다스러워지는 것이다. 조이스의 문체가 혼잣말 하듯 무의식을 하도 찔러대는 통에 한쪽 눈을 뜨고 말을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는 감정과 감각과 무의식을 통해 순간을 특별한 것으로 잡아내게 만든다. 독자는 율리시스에 들어가 앉게 된다. 블룸 대신 자기를 오디세우스의 위치에 세워 신화를 떠난다.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엄마도, 아침에 출근해 인사를 건네던 옆자리 동료도 다들 각자의 자리가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순식간에 어제와 다른 오늘이 펼쳐진다.


그렇다. 조이스가 말하려 했던 것은, 현실과 신화의 두터운 경계를 허무는 일일 것이다. 신화 속의 인물들을 현대로 불러오는 주술이 그가 실험하고자 했던 바이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인간으로서 사는 것.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 여기서 칼 융이 그에게 내린 진단이 다시 떠오른다. 선생은 다이빙을 하고 있군요. 그랬으리라. 뛰어들지 않고서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3) 마음을 무찔러 들어오는 장절


1197. 나는 처음으로 나의 팔로 그이의 몸으로 감았지 그렇지 그리고 그이를 나에게 끌어당겼어요 그이가 온갖 향내를 풍기는 나의 젖가슴을 감촉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요 그러자 그이의 심장이 미칠 듯이 팔딱거렸어요 그리하여 그렇지 나는 그러세요 하고 말했어요 그렇게 하겠어요 네(Yes)


역시 가장 마지막 장면이 인상에 남는다. 통째로 삼켜야만 하는 율리시스의 모든 혼돈이 이 한 장면, 이 한 마디를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조금 있지만 온전히 사랑하는 남자를 받아들이는 이 장면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리온의 네(Yes)에 나의 마음까지도 일렁일렁 변한다. 전형적인 장면이지만 사랑스럽다. 그렇게 하겠어요, . 그의 세계와 마주본다.

다만 현실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 같다. 외도하고 있는 아내와의 관계가 예전, 열렬히 사랑해 프로포즈를 하던 순간을 떠올린다고 개선되는 것은 아니니까. 소설을 읽으며 해결책을 생각하다니, 나도 많이 세속적으로 변한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긴 하다. 이 부부의 현재에 비추어보면, 역시 반려자로는 나를 믿어주고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람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4) 키워드

삶에 대한 긍정, 욕망, 오디세우스, 낙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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