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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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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1일 11시 32분 등록

벨소리와 함께 낯선 번호가 떴다. 귀찮은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다 최대한 퉁명스럽게 받았다.

여보세요.”

누나? 목소리 들으니 잘 살고 있는 거 같네?”

머리를 굴린다. 누구일까? 나를 다짜고짜 누나라고 부르며 거리낌 없이 구는 이놈의 정체는 누구일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질 않는다.

, 근데 너 누구니?”

나야 누나 XX.”

? XX.....? 그래, 오래간만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10년 만에 걸려온 전화가 너무도 뜻밖이어서 잠시 멍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안부를 묻는다. 잘 살고 있는지, 어떻게 전화를 하게 되었는지 등. 나와 한때 친하게 지내던 언니와 공부를 같이 하고 있는 사이라고 말했다. 보험리뷰를 하던 중에 전에 다니던 회사 이름이 나왔고, 아는 사람 이름을 얘기하다 내 이름이 나온 모양이다. 그렇게 서로 공통의 화제거리가 되었고, 내 연락처를 넘겨 받은 후배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는 내가 졸업작품을 할 때, 우리팀의 서포터즈였다. 졸업 작품에 별 관심 없이 음식을 해대던 나의 즐거움에 항상 맛있다는 말로 용기를 북돋워주던 놈이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남자 셋이 사느라 식사가 아니라 때우는 음식을 먹던 후배였기에, 내가 끓이던 맛없는 순두부찌게, 김치찌개, 계란말이, 호박전 등을 먹으며 집에서 보다 더 잘 먹는다고 좋아했던 후배였다. 고로 나의 음식에 대한 취미를 갖게 해준 인물이다. 내 음식에 대한 고마움으로 데카메론에서나 나올법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답례로 해주었고, 우리는 후배의 입담을 주워듣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후배는 거칠게 자랐기에 생활력 하나는 끝내주게 강하다는 것이 학교 다닐 때도 드러났다. 눈치 빠르고, 센스 있고, 판단력 좋고, 싹싹하고, 의리 있고, 행동도 빠르니 어딜 가도 제 몫 이상을 해냈기에 아는 사람도 많았고, 부르는 곳 역시 많았다. 우리는 그 후배를 보며 사막 한가운데서도 선인장보다 더 강하게 살아남을 놈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많은 경험 덕에 나보다 3살이 아래였지만, 항상 나의 좋은 대화상대였다. 내가 속상할 때나 힘들 때, 나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던 후배였다. 그런데 10년 전 내가 가장 힘든 선택을 했을 때, 연락이 끊겼다. 누구보다도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해주고 위로해 줄거라 생각했는데, 몇 번의 콜에 바쁜 목소리와 부재중 전화에 회신 없는 횟수가 누적되면서 나의 서운함도 쌓여갔고, 그러다가 연락이 끊겼다.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다. 나는 서운한 감정을 풀지 못한 채 사는데 열중했고, 그러다가도 문득 연락이 끊긴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서운한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오곤 했다. ‘나의 선택이 실망스러웠을까?’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난무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연락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어디서 나온 자존심인지, 마지막 전화를 내가 부재중으로 남겼으면, 후배가 당연히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순서를 정해놓고 있었다. 아마 그때 최고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지나가는 바람에도 서운함을 실려 보냈던 것 같다.

통화를 하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시절 경기가 좋지 않아 건축시공에서 인테리어로 업종을 바꿨고, 아이가 갓 태어난 시점이라 자리잡기 위해서 동분서주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을. 하루하루 전쟁터 같은 일상에서 총알과 지뢰를 피하며 목적지까지 가야 했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생활력 강한 놈이 아기아빠까지 되었으니, 그 책임감은 오죽했으랴 싶은 생각에 그 동안 케케묵은 서운함은 한바탕 소나기에 시원하게 씻겼다.

후배는 내가 지금 너무 잘 사는 것 같아 좋고 반갑다고 했다. 아이들을 부를 테니 한번 모이자고 한다. 나 역시 그리웠던 후배들 이었기에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단숨에 오케이 했다. ! 그런데 난 연구원이지. 안 그래도 요즘 제대로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과 늘지 않는 글솜씨 탓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이 놈들을 만나면 가볍게 밥만 먹고 헤어지지는 못할 것이기에 최대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주를 선택해야 했다. 10년을 다 풀어내기 위해서는 눈물, 콧물, 웃음, 감동이라는 안주가 필수일 테니까.

후배와 나는 1시간 20분을 통화했다. 10년 동안의 시간을 말로 풀려니 간단하지가 않았다. 예전처럼 서로의 수다에 휠이 꽂혀 묻고 답하기를 지속하기에는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후배 덕분에 한동안 뒤 돌아보지 않던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정말 오래간만에 덮어 두었던 묵은 쌀로 밥을 지은 기분이다. 그 밥은 탱글탱글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김이 무럭무럭 난다. 급한 마음에 크게 한 술 떴다. 목이 매인다. 얼른 찬물을 한 모금 마셔 꿀렁 삼켰지만, 그 묵직함이 식도를 압박하며 천천히 내려간다. 또 한입 먹는다. 이번에는 입안에 오래 두고 씹으며 음미했다. 시간이 지나니 달착지근한 단맛이 우러나온다. 봄의 따사로움을, 한 여름의 작렬하는 태양과 거센 폭풍우를 제대로 견디고 수확을 하였기에 묵었어도 밥맛이 좋다.

그렇게 추억으로 밥을 지을 동안 아들이 배가 고프단다. 새 쌀을 씻어 얼른 앉혔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밥이 좋다는 아들의 노인네 같은 발언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아들에게는 새 쌀로 지은 뜨끈뜨끈한 밥을 한 상 차려주어야지. 하지만 난 오늘은 묵은 쌀밥을 먹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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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2:03:37 *.104.9.216
인연이란 것도 유통기한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어제 인연이 오늘 같지는 않아서...

그 시인의 고백처럼 세번째는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쌀밥은 금방한게 맛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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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11:20:19 *.94.164.18

ㅋㅋ 역시 마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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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6:11:21 *.196.54.42

음~ 걔가 애였군! ㅎㅎ 난 그때 걔가 왜 여자로 생각했을까?

심중에 품은 이야기를 가마솥 밥을 하듯 오래 뜸을 들여 지어낸 그대의 밥맛이 제법 구수하군요^^

 

"후배와 나는 1시간 20분을 통화했다" 10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어찌 이리 오래 통화할 수 있는지 입이 쩍 벌어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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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11:21:26 *.94.164.18

맞아요. 걔가 얘였어요. ㅋㅋㅋ

한때는 저를 추종하는 누나부대들이 있었죠.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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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17:06:58 *.36.147.213
오래된 좋은 친구가 있다는게 이렇게좋다는걸 새삼 알게됩니당 아 기분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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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11:22:20 *.94.164.18

맞아맞아. 기분 좋은 전화였어. 만날 날이 설레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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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03:58:29 *.222.10.126

요즘 연락오면 겁나요! 그리고 미안해요.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니 말이에요.

그래도 이해해주는 친구가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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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11:23:26 *.94.164.18

그래도 잊지않고 먼저 연락해주는 분들이 있 다는 것에 감사하더라구요.

만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해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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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19:59:33 *.113.77.122

역시 10년전에도 참치의 넉넉함이 그냥 느껴지네.

이제는 지난번 라면에 이어서 밥도 같이 먹어야 할것 같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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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20:11:21 *.94.164.18

언제든지요. 그리고 언능 다리 쾌차하시고 go 스페인 같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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