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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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운명에게 “진짜 Yes”를
외치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늘 ‘껍데기는 가라’를 떠올린다. 근데 막상 껍데기를 모조리 벗어제껴 보면 그 안에 알맹이가 없다. 나의
알맹이는 껍데기의 결마다 숨어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작가를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오래오래 다른 사람이 ‘글을
쓰겠다’는 나의 의지를 방해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글을 못쓰게 하려는 외세와 글을 쓰고 싶은 나 사이에는 ‘경제적
자립’이라는 화두가 늘 자리잡고 있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면서 야간 대학원을 다니고, 책을 내셨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도 크면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작가의 직무 범위는 책을 쓰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라는 직업이 다 담지 못하는 아빠의 활동
범위가 담겨 있는 의미에서의 작가다. 이를 테면, 강연가라든지, 변화경영연구소장 등이 포함되어 있는 작가다.
나는 간섭 받는 게 싫었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의 교육방침 때문이라기보다, 내가 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가장 나중에 하고, 누가 챙길 것
같은 일들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 은연중에 습관처럼 배어있었다. 내 안에는 여러 겹의 껍데기가 생겼다. 만화를 그리는 대신 공부를 했고, 일어를 배우는 대신 영어를 해야
했다. 기타 대신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마했다.
간섭의 여지를 잘라버리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그렇게 다른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들을 먼저 집다 보니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잊어버렸다. 때를 놓치면 해보고 싶다는 불길 같은
열망은 잦아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는 삶은 야채처럼
흐물거렸다. 결국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장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에 나는 ‘아, 저는 그냥 지나가던
구경꾼이예요.’라는 말로 빼기 일쑤였고, 그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다. 선택과 집중보다 구색 갖추기에 몰두하는 삶. 나는
꿈에 관해서는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아빠와 나 사이에는 암묵적인 동의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이 많았다. 우리는
많이 닮아 있다. 아빠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먼저 털어놓지는 않으셨다. 종종 시간을 내어 집에서 맥주를 한 병 같이 마실 때마다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아빠는 단지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은근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하셨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하고 계시는 일을 나와
같이 해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원하는 걸까? 이 질문에도 나는 쉽사리 ‘맞아요! 그렇게 하겠어요’라고
답하기 어려웠다. 어줍잖게 시작했다가 조금 해보고 못하겠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중해야 한다.
나의 머뭇거림은 아빠의 임종 자리에서도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마디를 할 시간만이 허락되었는데도, 나는 아빠에게 마음 속에 있는 다짐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훌륭한 작가가 될게요.’ 그 문장은 머릿속에 선명한 글씨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져 있었는데,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잠깐, 내가 진짜 작가가 되고 싶은 게 맞는건가? 아빠처럼 할 수 있을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 게 맞는 건가? 그 동안 아빠가 겪었던 불면증과 입병 같은 것을 달고 사는 것이 난
좋아 보이던가? 매번 책을 내고 시장 반응에 예민하게 곤두서야 하는,
오로지 책으로 평가 받게 될 그 직업이 나는 좋은가?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이 정말
좋은 것이던가? 가장 최초의 관문이 연구원이 될텐데, 나는
그걸 해낼 준비가 되어있나? 이렇게 고민하던 도중, 나는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빠는 돌아가셨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만약 ‘암이
있었고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지만, 무사히 수술을 끝냈고 이제는 많이 회복하셨습니다’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나는 아빠와 같이 연구소를 운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쉽다. 후회한다.
그 때 말씀 드려서 마음만은 편하게 보내드릴걸.
오디세우스는 10년동안 방랑했다고 전해지며 칼립소와는 7년을 있었다. 그렇다면 10년의 70%를 칼립소의 섬에서 지낸 셈이다. 7년이라니, 미련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7년 동안 오기기아의 절벽에 서서 고향 땅이
있을 곳을 향해 그리운 눈길을 던졌을 것이다. 물론 매순간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격정적인 즐거움이 폭풍처럼 그를 지배하다가 물러갔을 때, 그는 분명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문득문득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들은 얼마나 컸을까. 이제 스무 살의 건장한 청년이겠구나. 페넬로페는 신혼 때와 많이 달라졌을까.
그렇다. 오디세우스가 다시 떠나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노력이 덜했다기 보다는 신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의 귀로는 이미 예정되어 있고, 다만 적당한 때가 운명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영원한 생명, 재물, 권력 앞에서 의연해질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디세우스도
처음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계속 싸웠을 것이다. 그러다 그리움이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하고
폭발했던 게 아닐까. 그게 7년 뒤 어느 날이었지 않았을까.
아빠가 살아계실 때 우리는 좋은 부모자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스승으로서의 아빠를 만나고 있다. 마치 고고학자처럼 서재에 묻혀있는 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발굴해나가는
중이다. 이렇게 배수의 진을 치고 책을 읽고 칼럼을 끄적이노라면, 죽음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런 가정을 해본다는 것이 덧없는 것이지만, 예전과 다름없는 나날이었다면, 나는 아직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을 것일테니.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의 열매는 예상외로 아주 달콤하다.
그러니 시계를 돌려 작년 4월로 되돌아간들,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의 나와 똑같이 사랑하며, 한숨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똑같이 아쉬워하며 머릿속의 한 문장을 털어놓지 못한 채 그 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다만 때가 일렀을 뿐이다. 필요에 의한 껍데기였던 것이다. 탓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에게는 나에게 맞는 그 날이 찾아올 것이다. 이번에는 나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쿵쾅쿵쾅 뛰다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으로 운명의 부름을 받아들여 말할 것이다.
네(Yes).
벌써 2년이 지났네...
37기 꿈벗 여행 때 당신을 많이 닮았다는 작은 딸이야기를 하시며
언젠가 당신의 딸이 당신의 일을 이어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살짝 내비치셨었어.
그래서 당시 난 어니언의 존재를 모르면서도 무척 궁금했지.
사부님을 많이 닮았다는 그래서 그 분께서 자신이 애정을 갖고 키어오신 일들도 함께 하길 바라는
그런 자랑스러운 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부님께서 갑작스레 떠나신 후 어린 나이임에도 아버님의 장례를 의연하게 치뤄내는 모습을 보여
어쩌면 그 분의 딸은 나중에 그 분 못지 않은 큰 그릇으로 성장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
며칠전 승완선배의 아침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
"매일 계속해서 소설을 쓰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때때로 자신의 뼈를 깎고 근육을 씹어 먹는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그렇지만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다.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글은 써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그 세계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집중력, 그리고 그 집중력을 가능한 한 길게 지속시키는 힘이다. 그렇게 하면 어느 시점에서 그 고통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것, 나는 이것을 완성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니언의 반짝이는 미래를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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