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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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 7월 수업 참관록 빙자 오지랖 궁시렁쇼
화요일 마감 30분 전. 이제야 소파에서 튕겨 일어나 이번 주 칼럼을 타이핑하기 시작한다. 우쒸, 이번 주도 망했다. 망했어. 지금 시작하면 언제 끝이 나려나? 불쏘시개로 꽁지와 발등을 불을 댕겨 살 타는 냄새는 아까부터 났다. 취한 듯 나른한 오늘은 일어나기 싫다. 이번 주는 10기 수업 참관록을 써야겠지. 징징거리기 또는 생색내기로 시작한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남의 인생에 대해 들으면, 그 사연의 밝음, 어두움과는 아무 상관없이 속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자체로 그(녀)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나와 관련이 있어진다는 그 느낌은 버겁고 즐겁다. 나는 원심력과 구심력을 동시에 느끼며 외면 자세를 취한다. 그 쪽을 향한 눈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 자리에서 순발력 있게 상대의 비밀과 깊이나 무게가 비스무리할 듯한 나의 비밀로 물물교환을 하면 좀 낫다. 근데 뒷북, 각주구검이 특기인 나는 늘 한 박자 늦다. 내 입장은 이렇다. 저 물 속에 뛰어들라거나 건지라는 건 환영이다. 내가 할 일은 장의 가운데로 던진 누군가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덥석 집어오지 않는 거다. 나의 짐이 아니라 그들의 짐을 거기 둔 채 그냥, 지그시 바라만 보는 거다. 지나가는 전철을 전철역에 앉아서 보듯,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듯. 그(녀)가 자신의 짐을 지고 가는 걸 존중과 존경의 마음으로 지켜 보는 거다. 오프수업은 내가 1년차 였을 때나 지금이나 에너지가 많이 요구되는 공부시간이다. 게다가 요 며칠 내적인 출렁거림의 파고가 높았다. 짝수 날에는 머리를 감는다며 6월 1일자로 입법예고한 새로운 규칙을 뭉갠다. 떡진 머리로 스마트폰 티비를 종일 본다. 쌍둥이 육아나 출산 주제다. 뒷풀이 4차를 뛰고 온 남편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건성으로 맞아들인다. 이런 날 남편은 잠자면서 안방 회전이 심하다.
수업에서 돌아온 지 이틀 동안은 써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만 잔상이 남았다. 희동이, 피울, 종종, 어니언, 구달씨다. 데카상스 10명 중 남자는 달랑 3명인데 그들은 모두 써포트라이트 안에 있다. 그들은 거기가 편안한 듯 하다. 또 그건 내 시야의 습관일거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사연과 아픔에 감정이입하면서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딸의 역사에서 기인된 시신경 사용 경로. 많은 고모와 언니와 누이들이 가진 습관. 어니언이 써포트라이트 안에 든 건 그녀가 원한 건 아니었을테다. 나는 서포트라이트 안에서 그녀를 안 본 척 한다. 이건 나의 사회성 부족에서 유래한다.
사흘 뒤부터는 밝은 그늘에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치, 찰라, 앨리스, 녕이, 에움길씨다. 이 중에서 참치씨는 거의 써포트라이트에 포함된다. 앨리스씨는 밝은 그늘에 있다기 보담은 서포트라이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듯 하다. 녕이씨와 에움길씨는 어두운 곳에 있다. 에움길씨는 일부러 거기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이번에 검은 옷을 입고 상경했다. 녕이씨는 원한다면 좀 더 오래 그 구석에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연구원 과정 졸업을 위한 첫 책 첫번째 마감(2014년 4월 30일)을 놓쳤다. 두번째 마감(2015년 4월 30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9월 북페어를 안한다는데 어쩌지? 나는 여전히 내 책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을 쓰고 싶은데 수태가 아직 안되어서 그 안에 책 출간 계약을 하거나 완료될 것 같지 않다. 여성과 신화를 키워드로 하는 것은 그닥그닥이다. 주제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여성영웅신화였다가 신화는 어려우니 다른 책으로 일단 졸업은 하자 했다가 오락가락이다. 그 와중에 휴직을 통한 재충전을 즐긴다. 아이가 오지 않더라도 나는 ‘난임을 사유로 한 질병휴직’을 근거로 안식년을 가질 수 있는 걸 대단한 행운이라 여기며 감사하고 있다. ‘누려’가 나의 모토다. 10기 수업에 4번 참여했다. 입학식, 5,6,7월 수업. 페이스 메이커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혼자서는 졸렬해지고 흔적없어지는 사람이라서 살아남기 위해 팀을 꾸려야 했다. 메타세콰이어나 은행나무 가로수길의 나무 한 그루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뚫는게 그토록 자신이 없나? 그렇다. 한 번만 제대로 뚫어내면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쉬울 것 같다. 나는 끝장을 못 본다. 힘을 분산시키며 찔끔거리고 있나?
수업을 듣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어쿠스틱 라이프, 야매요리 만화를 핸펀으로 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주제의 오프수업은 내 때도 지금도 힘들다. 내 때는 술을 퍼마시며 수업을 했었는데 지금은 주인공이 아니니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헉헉거리며 후기 비스무리한 걸 썼다. 쓰다 보니 어려웠다. 오지랖과 추측을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 수업에서 말로 하고 말았어야 할 것들을 글로 쓰는 것에 대한 자기검열이 되풀이되었다. 그래도 계속 모닝페이지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쓸 때까진 몇날며칠 계속 할 것 같았다. 항복하고 쓰기로 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어 특수교사를 휴직하고 있는데 멀쩡한 성인을 향한 이런 오지랖질이라니. 난감천만. 나의 강점은 최상주의자, 개인화, 연결성, 신념, 학습자 또는 책임인데 이 중에서 뭐가 이런 거에 관련되어 있는 걸까? 그 직업을 통해 길러졌거나 잘 표현, 소모되던 기질이 이거였던가? 만약 그렇다면 우연의 장난으로 진입했다고 생각했던 그 직업은 나에게 천직이 아니겠나?
후기를 쓰면서 누구에 가장 공감했던가? 참치씨와 녕이씨, 그리고 찰라씨를 쓰면서 그랬다. 다 내 이야기이지 않나? 자신의 생명, 야생의 영역을 지키고, 그들의 운명에 절한 후 등 돌려 내 삶을 향해 가는 것. 희동이씨와 종종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일찍 헤어진 내 아버지의 등을 보았던 경험에서 헤아려졌다. 그들이 아닌 척 해도 그들의 속에서 나오고 그이들을 사랑하는 자식들은 아빠나 엄마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하는 걸 알고 있다. 앨리스씨와 에움길씨는 아직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은 나와 좀 다르다. 장애라는 키워드로 얽으려 들지만 여의치 않다. 구달씨는 잡히지 않는다. 구달씨처럼 밝은 남자어른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듯 하다. 피울씨의 요청은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이해=복권에 대한 과제가 있는 남편을 지켜보는 중이므로 나와 영 무관하지 않다. 아직은 애가 없지만 만약 아이가 온다면 그건 내 새끼에 대한 것이다. 나는 그 과제와 자유롭지 않다. 게다가 분노는 내 문제다. 나는 사자가 있다고 내 분노에 대해 알고 있다. 내 안의 아레스를 학대자 폭군이 아닌 수호자 마르스로 발현시킬 과제는 나의 것이다. 분노를 창조적으로 채널링해서 ‘질투는 나의 힘’처럼 강력한 표어인 ‘분노는 나의 힘’으로 상장시키는 과제가 내게도 있다. 늘 두려워했다. 내 속의 분노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해꿎이할까봐. 그리고 먹이감이 없을 때 자신을 질겅질겅 씹게 만드는 육식본능의 발톱이 나를 자해할까봐. 그래서 ‘피울의 아레스를 위하여’를 써보기로 했다.
끙끙 싸매다가 이걸 벗어놓기 위해 올려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내린다.
뒤늦게 답장을 씁니다.
콩두언니, 간혹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는 것이 본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요.
저는 자주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하고는 속상해하곤 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남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백스테이지를 비교하는 것이더라구요.
오늘 아침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읽는데, 거기서도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이다라는 말이 나와서 얼른 밑줄을 쳤어요.
그걸 요즘 깨달아서 참 즐겁고 홀가분합니다.
저번 과제는 처음으로 그것이 바탕이 된 글이었어요.
제법 가짓수가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있어서 반갑네요.
다음 오프 때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 다음달은 연수네요. 다다음달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