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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6일 09시 12분 등록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개똥아, 산아 안녕

 

날이 엄청 찐다. 더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시작되었어. 태풍 너구리는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네. 일본 오키나와 쪽은 사람들을 잘 대피시킨 듯 하다. 우리나라처럼 그 자리에 그냥 있으라고 재난대피 훈련을 하지는 않아 다행이다. 우린 너무 더워서 창문을 다 열어놓고 지낸다. 작년 여름은 침실로 쓰는 방의 이중창을 아예 떼어서 내려놓았지. 나는 더위에 강한 편인데 너의 아빠는 아주 못견뎌하신다. 찬밥을 먹는데도 땀을 사우나처럼 흘린다. 바람길인 거실이나 건너방에서 잘얄까? 거긴 암막이 없으니 안되겠지. 야근근무를 하고 낮에 자는 이들은 암막커튼을 치거든. 성수기라 설치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벽걸이 에어컨을 한 대 사면 어떨까 한다. 당신한테 시집오게 되면 내가 에어컨은 꼭 혼수로 갖고 오겠다고 했었는데 막상 내가 더위를 안 타니 잊어 먹고 있었어.

 

어제 엔틱액자를 여러 개 주문해서 우리 결혼사진을 중심으로 양가 가족사진을 넣어 늘어놓았어. 양가 부모님 사진을 따로 뽑고, 형제들과 찍은 사진을 세웠어. 나는 우리 결혼식 때 사진을 넣았어. 거기에는 조카들도 모두 나오거든. 그는 어릴 적에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을 골랐어. 마음이 뿌듯하다. 이번에 액자에 넣을 사진을 구하느라 아빠는 친가의 앨범을 뒤져서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많이 가지고 오셨어. 아빠의 어릴 적 사진을 처음 보았단다. 쬐그만 애기가 아주 귀엽더라. 어쩌면 너희 중 하나는 아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닮을 수도 있겠지.

 

오늘은 개똥이와 산이의 친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줄 참이야. 사진이 온 김에너희 뿌리에 대해 미리미리 적어두면 좋을 것 같아. 나는 이걸 <박정희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책에서 보았단다. 박정희할머니는 5남매를 기르면서 그 아이들이 한글을 읽고 써서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을 때까지를 기록해서 한 권씩 선물로 주시더라. 다섯 아이에게 모두 엄마가 손으로 쓰고, 그림을 그린 육아일기를 주셨어. 거기에는 조부모, 외조부모, 엄마, 아빠, 엄마아빠의 만남과 결혼, 뱃속에서 놀던 모양, 태어나 잘 먹던 음식과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물론 6,25 즈음 주변 상황들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단다.

 

나는 오늘은 친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써두려 한다. 이 글들을 쓰고서 멀지 않은 미래에 그 분들이 사시던 곳을 아빠랑 같이 가 보면 좋겠구나. 이게 우리 가족의 성지순례겠지.

 

너희 할아버지는 한영숙 씨다. 폐암으로 여러 해 투병을 하시다 돌아가신 지 6년째다. 납골당은 파주의 청아공원이다. 제사날은 음력 1 18일이다. 고향은 전라남도 완도군 마진도다. 마진도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다. 우리 결혼식 때 마진도에서 작은 아버님과 작은 어머님이 오셨어. 할아버지의 사촌 동생이셔. 섬에서 목포로 배를 타고 나와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오셨대. 내려가 뵙겠다고 약속만 드리고 아직 뵙지를 못했다. 아빠도 섬에는 단 한 번 가보셨대.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폐암이 재발하셨을 때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그 때 처음으로 4가족이 방문하셨다는구나. 그 후에 섬에서 양파가 올라왔는데 아빠는 양파를 볼 때마다 그 때의 섬 양파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이야기하신다.고향을 떠난 뒤 딱 1번 방문할 수 있었다니 사는게 쉽지 않아서겠지? 막 투병을 하실 때가 할머니의 환갑이셨대. 고생 많이 한 막내여동생이 집에 우환이 있어서 환갑까지 그냥 지나가는 걸 아쉬워하며 충청도에 계시는 외삼촌이(너에겐 이 어른의 호칭이 뭐지?) 음식을 싹 장만해서 실어오셨단다

 

할아버지는 위로 누님이 두 분 계시다. 큰 누님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셨고, 66살이던 때 돌아가셨다. 작은 누님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고 76세로 생존해 계시다. 우리 상견례를 할 때 나오신 어른이다. 막내 아들 백일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남묘호렌게교 기도를 1시간 하는 걸 퇴진해 본적 없다 하시는 분이다. 나를 조카며느리로 마음에 들어 하셨지. 할어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너한테 증조할아버지는 한일남씨고, 할머니는 김일엽씨다. 증조할아버지는 배를 타셨다. 보름이나, 한 달 만에 집에 오기도 하셨어. 그런데 부모님을 직접 모시지 못하고 동생네 집에 계시게 한 것에 마음이 많이 아프셨나 보더라. 배에서 고생해서 벌은 돈을 부모님네 드리고 집에 빈 손으로 오시는 날이 많으셨댄다. 섬에서 해초 따고 갯펄에서 일하면서 두 딸, 아들을 데리고 혼자 애를 쓰던 할머니는 그걸 타박하기도 하셨나보더라. 우린 이번에 증조할아버지의 사진도 한 장 걸었다. 뒤에는 초가집의 문이 보인다. 수염난 모양이 아빠나 할아버지와 같더라.  

 

너의 증조할머니에 대해서는 따로 써야 할까? 왜냐하면 아빠는 증조할아버지는 본 적 없지만 일하는 부모님을 두고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거든. 그 분은 동네에서 키큰 할머니라 불렸단다. 여자가 호탕하고 대범했댄다할아버지 이름이 명 짧은 이름이라고 해서 개명한 것도 증조할머니다. 너희 아빠와 삼촌을 업어주고 부채질 해서 기르셨지. 나한테도 스탠레스 다라이를 하나 남기셨어. 돌아가시기 전에 스댕 다라이 2개를 사오셔서 이담에 며느리 들어오면 하나씩 주라고 하셨대. 지금 우리 집에 있단다. 증조할머니는 하루에 소주 1, 담배 1갑을 꼭 자셨댄다. 너희 할아버지는 없는 살림에서도 그걸 절대로 빠뜨리지 않았고. 한 손으로 담배를 물고, 기저귀를 설렁설렁 흔들어빨고 있으면 할머니가 '얼른 어머니가 마실을 가셔야 저걸 새로 빨지' 하셨대동네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우셨대. 어느날은 폐병이 걸려 누워있는 사람집에 애기(너희 아빠다)를 안고 가서 애기는 옆에 앉혀두고 누운 사람 밥을 떠먹이고 있더란다. 할머니로서는 기겁할 일이었지어머니, 어쩌자고 애기를 데리고 그러시냐고 하면 그런 소리 마라, 다 쟤가 복받을 거다 하셨대. 화장해 달라고 하면서 '불에 확 꼬실려서 강에 홱 뿌려버려라' 하셨대. 마지막에 중풍에 걸려서 몇 년 누워계셨는데 그 때 집없는 설움이 너무 컸댄다. 누워계신 노모를 업고 추운 겨울에 이사를 해야했던 걸 할머니는 두고두고 눈물 섞어 이야기를 하신다. 아빠가 할머니 방에 자면서 할머니 병수발을 들어주어서, 일을 나가면서도 고마왔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할머니와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아니라 딸과 엄마처럼 지냈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주변 사람들이 인제 편해지겠다고 하는 말이 서운하게 들리시더란다. 소중한 보물 잃은 것 같은 마음인데 저러나 싶어서.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는 섬에서 중학교는 목포에서 다니셨다. 목포에 있는 친정에 아들을 맡겨놓고 해산물들을 머리에 이고 목포로 나르던 이야기를 나는 전해 들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외손자를 매우 이뻐하셨단다. 식구 많은 집이라 어른 밥만 쌀을 넣어서 밥을 했는데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열어보면 그 밥이 손자의 도시락에 들어있곤 했단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8살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와 야학선생을 한동안 했단다. 그 즈음 증조할머니의 친정에서 장정들 여럿을 한날한시에 배에서 잃은 사건이 있었다. 증조할머니는 남동생과 조카 둘을 잃고서 아들을 섬에서 그냥 살게 하면 배를 타게 되고, 그럼 저렇게 잃을까 걱정이 되셨댄다. 때마침 봉당을 깨부수며 난리 치는 이도 있어 서울로 오게 되었단다. 신당동의 달동네였어.

 

그 때는 고모님 두 분이 모두 상경해 있었다. 작은 고모님이 부산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와 있었고 큰 고모님은 미아리 쪽에서 이미 결혼을 해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고 하셨어. 할아버지는 군대를 갔어. 수도방위사령부로 배속받았단다. 군대에 가고 보니 중학교 때 선생님이 장교가 되어 와 계셨고 그이가 좋은데다 보낸다고 거기로 보냈단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은 유일해서 의도하지 않은 고생을 많이 했단다. 제대 하기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소기침이 아주 심했다고 하시더라. 섬에서 올라온 후 5년도 안되어 돌아가셨나보더라. 화장을 해서 한강에 뿌렸다는데 거기가 어디쯤인지 모른다.

 

달동네에다가 집을 한 채 지었다. 무허가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작은 고모부가 미끄러져 머리를 다치셨다. 병원생활을 오랫동안 했고, 그 뒤를 대느라 그 집은 없어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매형의 병구완을 하고 돌아와 할머니를 잡고 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마음이 착하고 보드라운 남자였나 보다. 

 

할아버지는 타일 붙이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나중에는 사람들을 실어오는 일을 했다. 일이 없을 때는 지방까지 가서 일을 해야할 때도 있었어.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좋아해서 15분 나와서 전화를 하는데도 지방에서 일을 할 때면 꼭꼭 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너희 할머니는 이종희씨다. 고향은 동두천이다. 생신은 음력 1 25일이다. 이덕기씨와 정락순씨의 아들, , , , 아들 중셋째딸이다. 거기서 혼인을 해서 동두천에 있는 친척에게 양자를 가면서 동두천에서 살았다. 그 집은 지금은 동두천의 미군부대터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6.25 4살이었다. 위의 두 아이만 데리고 할아버지가 충북 음성의 친가로 피난을 가고 외할머니는 뱃 속에 만삭이 다 된 아이가 있어서, 4살인 네 할머니와 8살인 딸을 데리고 동두천 집에 남기로 했단다. 그렇지만 집이 폭격을 맞고 나자 할머니는 4살 딸, 8살 딸을 데리고 부른 배를 해서 음성을 걸어서 갔단다. 할머니는 이것을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으셨어. 폭격을 맞던 날 치솟던 불기둥을 기억하고 있었어. 그리고 시린 발을 남의 집 아궁이에 넣어 녹이던 것도 기억을 하고. 몇 달을 걸어서 거지꼴로 고향에 찾아갔단다. 그래서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지만 그 고생을 한 새댁은 병들고 말았다.  6.25가 나고 4년 후에 그러니까 네 할머니가 8살이 되었을 때 그 분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할머니보다 조금 일찍 그 때 뱃속에 있었던 아기도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그때 38살이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주변에서 재혼을 권해서 곧 재혼하셨다. 아마도 마흔 초반이었을 테니 주변 어른들은 그리 권하셨을 거다. 할머니는 9살에 외가 둘째 외삼촌집, 그러니까 할머니의 외할머니가 사시는 집으로 보내졌다. 여자아이를 남자가 혼자 기르기가 어렵겠다고 어른들이 판단하신걸까? 거기서 5년을 살다가 14살 때 서울로 오셨다. 일도 하고 공부도 시킨다고 했는데 남의 집 살이를 하신 거였다. 그 댁에서도 우리 결혼할 때 오셨다. 할머니는 14살부터 68세인 지금까지 일평생 일을 하셨다. 미용실에서 수건 빨아주는 일을 했고, 공장의 기숙사에서 밥을 해주는 일을 하셨다. 그 뒤로는 청소일을 하신다. 14살부터 68세인 지금까지 일을 쉬어본 적이 없으시니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다. 할머니는 일을 그만 두게 되면 공부를 하고 싶어하신다. 70부터는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시더라. 할아버지가 늘 공부시켜주시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미안해 하셨댄다. 초등학교 과정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하신다. 소녀였을 때는 무척 개구졌나보다. 뱀을 잡아서 소나무에 걸어놓기도 하고, 할머니의 외할머니가 외출할 때는 안 가는 척 미리 동구밖에 나가있다가 따라 가곤 했단다. 

 

할아버지 30, 할머니 25살에 결혼을 하셨다. 소개를 한 분은 사촌언니다. 이 사촌언니는 가까이에 살고 있었고 할머니는 많이 의지를 하셨다. 집이 어려울 때는 그 집에 가서 빚을 내서 썼고, 신용을 잘 지켰다. 두 분이 결혼하신 건 70년이다. 70 6월에 약혼을 해서 7월에 결혼을 하셨다. 결혼식날 친구들과 택시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고,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 바퀴 돈 것이 두 분의 신혼여행이었다. 두 분은 평생 의좋게 사셨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일이 있다 없다가 했다. 할머니가 경제권을 남편에게 맡기고 평생 일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가계부를 아주 꼼꼼히 쓰셨다. 할아버지가 폐암 재발 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이 그런 것들을 정리하신 거란다. 할머니 혼자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다.

 

할머니는 한 번도 버스카드를 직접 충전해 본 적이 없으셨대. 할아버지가 미리 해 놓으셨거든. 저녁 무렵이면 아내가 퇴근해 오기 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을 치워놓곤 했다. 섬사람이라 해물을 즐겼다. 할머니는 너무 피곤하니까 차만 타면 잠을 잤고,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집을 치워주면 돈을 몇 만원 더 주니까 그걸 일을 해놓고 오느라 몇 시간씩 늦곤 했다. 그럴 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오실 때까지 버스 정류장에 앉아 기다리곤 했다. 핸펀이 없던 시절이니 애를 태우며 기다리셨나봐. 할아버지가 좀 더 다정하고 눈물이 많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들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잠을 자지 못하고 전화를 하고, 할머니는 태평히 주무시곤 했단다. 할머니는 내가 저 사람에게 일을 열심히 해서 힘이 되어 주겠다고 마음 먹으셨댄다할아버지는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돌아본 듯 하다. 할머니의 언니가 암에 걸려서 46살에 돌아가실 때, 가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달동네 단칸방에 병자를 모셔서 약을 써서 달포 간호를 하고, 집에 내려가신 후에는 부부가 버스를 타고 일요일에 내려가서 들여다 보았나봐. 그 때 할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할머니는 공장 기숙사에서 밥을 해주느라 토요일까지 근무를 해야 했었대. 하루 쉬는 일요일날 병구완을 하러 가셨나봐. 지금 남겨진 사진들은 없는 살림이라도 입학식날이면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고, 졸업을 했다고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먹는 할아버지의 낭만 덕분이었던 듯 싶다.  

 

처음 살던 곳은 신당동이었고, 처음 집을 사서 간 곳은 우이동이었다. 우이동에서 새로 분양받은 빌라를 특히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대. 할머니는 일에서 은퇴하면 우이동 빌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어. 할머니는 거기서 할아버지 암 재발하기전 1년간이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하신다지금 사시는 곳은 신당동이다. 평생 거기서 일을 하셨는데 출퇴근하신 거지. 새벽 첫 차를 타야했지.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우이동 집을 세 주고 일터에 걸어갈 수 있도록 거기로 이사를 다시 왔어. 할머니는 삼촌과 같이 사시지. 삼촌도 마흔이 넘어서 얼른 결혼해야 한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결코 아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신다. 그저 당신이 곤죽같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사실 뿐이다. 몸무게가 41킬로이고 키는 150도 되지 않는다. 요즘은 날이 더워서 5 30분에 집에서 나가신다는구나.

 

개똥아, 산아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는 선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다. 참 존경스럽다. 너희가 할아버지를 닮는다면 정깊을 것 같고, 할머니를 닮는다면 야무질 것 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살아계시든 하늘에 계시든 너희를 기다리고 사랑하실 거다. 그저께가 초복이어서 넷이서 금호동의 해물찜집에 갔어. 할머니, 삼촌, 아빠는 닭을 싫어하셔.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삼계탕은 복날 음식이 될 수가 없어. 스키다시가 잘 나오는 집에서 소주랑 사이다 시켜서 해물찜을 맛있게 먹었지. 8월의 냉동수정란 이식 일정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아 내가 미리 수다를 떨었어. 빨리 손주 안겨드려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나를 도리어 위로하신다. 고마웠어. 난 요즘 좀 몸도 마음도 쳐진다. 영양제 챙겨먹는 것도 시들하고 어디 나서는 것도 시큰둥이다. 다시 힘내야겠어. 너희에게 편지를 쓰고 나면 나는 힘이 나곤 한단다. 내일은 아빠와 북한산에 갈거야. 어제는 같이 우비를 입고 남산에서 비를 맞았어. 바람이 많이 불어 좋았단다. 아가, 사랑한다. 엄마가.

 

 

 

Ps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오늘 시댁 부모님의 일을 간단히 적었어요. 그의 눈을 통해 나에게 그의 가족의 사진과 사연이 전송되고, 나의 눈을 통해 그에게로 우리 가족의 역사가 전송되겠지요. 그리고 두 가족은 아이들을 매개로 피를 섞게 됩니다. 그의 가족을 살피고, 우리 가족을 살폈을 때 열심히 착하게 살고 가족을 사랑했던 분들임을 알겠어요정말 열심히 살고 계세요.

 

그런데 만약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제가 저 사람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면 나는 계속 그의 옆에 있어도 될까요? 어떨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문득문득 그런 불안이 있어요. 그리고 요즘은 장마철이고 좀 위축되어서인지 그런 생각을 해 보곤 해요. 그래도 이 작업은 헛되지 않겠지요. 이건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의 뿌리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은 변해가는 것이니까 분명 결혼 안에서도 변해가겠지만요. 그의 부모님에 대해 살펴본 첫번째 유익은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더 늘어난 것입니다. 그 섬과 그 동네에 같이 가보고 싶습니다. 어머님이 학생들 모두 돌아가고 난 뒤에 아픈 시어머니의 빨래를 들고 가서 빨았다는 그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요, 그가 탔을 그네에 한 번 앉아 보고 싶습니다. 여덟집이서 살았고, 수도 1개와 공동화장실이 있었다는 그 집에도 가보고 싶습니다. 착하게 열심히 살아온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합니다. 또 이 사람하고 결혼해도 되겠구나 생각했던 것도 할머니와 아버지를 간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어요. 염치없지만 내가 아프더라도 이 사람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생각했어요. 또 하나 생각되는 건요 이 집 남자들이 보드랍고 순하다는 겁니다. 소중히 잘 간직해야겠어요.    

 

오늘 저희 부부가 같이 가족세우기에 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오는 길을 닦고, 걸림돌을 치우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과 인연이 있어 친숙하지만 그에게는 낯설텐데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동행하는 그에게 많이 고맙습니다. 저희 가족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제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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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6 22:26:05 *.101.168.170

참 구구절절이 살아있는 시가의 역사를 쓰셨네요, 어찌 이리 소상히 알고계신지요?

장차 올  아이들에 대한 소망이 이토록 절절하시니 부처님이 꼭 그 소망을 들어주시겠죠^^

착한 부군도 함 뵙고 싶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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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12:12:16 *.175.14.49

구달님^^ 읽어주셔서,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명절 때나 집안 행사때마다 주워들은 이야기를 썼어요.

남편하고 어머님께 적어둔다고 허락을 받고 적어준 이야기들이예요.

네^^ 다음 번에 남편하고 같이 만나게 될 기회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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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09:13:33 *.104.9.216
이게 역사다 싶은데 ... 그래서 저도 따라 해 보고 싶은데 언감생심이네요.

"와" 감탄사를 며칠째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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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12:13:12 *.175.14.49

피울님, 이런 게 역사군요^^

무얼 감탄하시는 지 저는 참 모르겠습니다. 하하

매번 읽어주셔서 정성어린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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