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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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전 독법
2014. 7. 27
근래 몇 개월 동안 동서양을 넘나들며 고전의 넓고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고전을 읽으면서 나는 항상 역자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찌 플라톤을 만나고 향연의 말석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공자 선생님을 만나 그에게 사사 받고, 다산 할아버지를 만나 자식에게 베푸 실 돈독한 가르침을 당신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영롱하게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분들과 만나게 해 준 역자 선생님들이 사무치게 고맙다. 그러니까 이분들 덕분에 내가 선생님들을 만나고 그분들께 사사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때로 아득한 저 너머로 직접 건너가 보고 싶은 유혹과 충동에 시달린다. 내게 저 너머의 세상은 암연暗然의 바다에 다름 아닐테지만 분수를 모르는 욕심은 잔잔한 심장에다 왕소금 한 바가지를 쏟아붓는다. 한 동안 심장이 파닥파닥 뛰지만 까만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일 것인데 너른 강 이쪽에서 결국 발 한번 담궈 볼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만다. 그저 망망대해 앞에 나무젓가락 하나로 맞서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내고는 풀이 다 죽어 돌아서고 말 뿐이다. 대략 삽십년쯤 전에 알파벳을 알았지만 열살박이 작은 아이와도 말하지 못하고 등본을 보지 않으면 아이들 이름조차도 더듬거리는 주제에 언감생심이지 않은가. 이쯤 되면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게도 한번쯤은 와줄만도 한데...그러면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와 거래를 하고 말 것이다.
내가 오래된 책 그러니까 고전들을 만나는 것은 ‘성찰’과 ‘알아차림’에 있다. 그렇게 나를 바로 알아 정신차려 깨닫고 그렇게 나를 반성하여 돌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모름다움’에서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일 것인데 고전은 이 길을 낱낱이 알려주는 자상한 안내자다. 그 동안 나는 제법 고전을 읽었다. 동양고전이 주가 되겠지만 회자되는 고전들의 책거풀 정도는 섭렵했을 것이다. 언제나 누군가가 해석해 놓은 것을 읽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것으로 본의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문으로 읽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것은 내가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한정 지어 놓았다. 뜻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며 나는 충분이 그들의 해석 범주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는 먹이를 먹어야 하는 나는 주는 것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늘 이런식의 자위로 무마시켜왔다. 늘 이런 식 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동안 독파한 고전들도 공부라기 보다는 쇼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다. 수년 전 색연필로 도배하면서 읽었지만 다시 보니 처음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동안의 책읽기가 이리 허술했던 것이다. 다시 선생을 만나 조곤 조곤 선생의 목소리로 그의 강의를 들었다. 선생은 고전을 통해 ‘오래된 미래’를 만나고자 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만나는 지점에 동양고전의 자리가 있음을 설파하면서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전이하여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임을 간곡히 말하고 있다. 선생의 목소리를 따라 가면서 오랜만에 깊은 시간을 보냈다. 더불어 또 한번 원전을 원전으로 읽었으면 하는 어림없는 펌프질로 심장이 팔딱거렸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선생은 논어 팔일편의 한 대목을 열어 놓고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라는 작은 표제어를 내어 놓았다.
원문은 이렇다.
子夏問曰: " '巧笑천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_ 論語八佾第三-8
자왈 기여자상야 시하여언시위의
여기에 선생은 이렇게 번역문을 달아 놓았다.
자하가 물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素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素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은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商가 나를 깨우치는 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다른 번역문을 함께 보자. 여러편을 비교해 보건데 아래 해석은 일반적 해석으로 보인다.
자하가 여쭈었다. “고운 웃음에 보조개가 아름답고,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또렷하니, 흰 바탕에 무늬를 더하였네” 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이라는 것이다.”
자하가 말하였다. “예는 나중 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일으켜 주는 자는 상이로구나! 비로소 자네와 함께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_김형찬 옮김(논어, 홍익출판사)
두 해석을 비교해 볼 때 두루뭉수리하게는 뜻이 통한다 할 수 있겠으나 나처럼 좁고 우비한 사람은 어설프고 헷갈린다. 고전이란 것이 어차피 한 뜻으로 읽혀야 할 이유도 그래서도 안될 것이지만 돌을 씹은 듯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선생은 소素를 ‘인간적 품성’을 뜻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아래 해석의 주를 보면 소素를 ‘희다’ ‘소박하다’의 의미로 전하고 있다. 또한 예후호禮後乎에 대해서도 선생은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로 전하는 반면 아래에서는 “예는 나중 일이라는 말씀이십니까?”로 전하고 있다. 이것은 앞뒤가 바뀐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해석을 참조해 보았으나 결국 나는 해석자들의 해석을 다시 더듬거리고 있다는 것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말았다. 이 따위 해석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랴. 다시 자위로 도망 길을 열었다. 나는 선생의 해석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쉽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논어 옹야편에 다시 영혼을 울리는 구절이 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자왈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연후 군자
‘바탕이 문채보다 승하면(튀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튀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나는 내용을 채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탕이고 바탕은 곧 아름다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