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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7일 17시 39분 등록

강의

신영복, 돌베개


2014. 7. 27


1. 저자에 대하여


나는 이분의 책을 두 권 읽었다. 하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리고 이번에 읽은 <강의> 가 그것이다. 나는 이분을 좋아한다. 아직 이분을 모를 때였을 것이다. 라디오 인터뷰였던 것 같은데 리포트가 서예에 대해서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그 질문에 공부하는 사람에게 서예를 마치 예술이나 되는 것 처럼 떼어서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던 것 같다. 공부하는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러다가 좀 잘 쓰게 된 것 뿐이라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는데 서예가로 불리는 것이 불편하다고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인터뷰를 들으면서 내가 평소 ‘작가’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검색창에 선생의 이름을 넣었다. 그 때의 아우라가 허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연이란 항상 이렇다. 때가 있는 것이다. 선생은 이렇게 내게 오셨다. 


1941년 생이시니 선생의 나이 올해 일흔 넷이 되셨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신다.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이렇게 활동 하실 수 있길...그리고 그 기간 동안 몇 권의 책을 더 남겨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선생이 귀한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그가 우리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선생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경을 바친다. 그 분은 아마 모를 것이다. 모르는 것이 좋다. 구본형 선생과도 그랬었다. 훗날 아쉬워 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

선생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선생께서 정년퇴직을 할 무렵 한겨레에 선생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그 전문을 옮겨 둔다. 내 목소리로 다시 써 볼까 생각도 했지만 배껴 쓰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임에 그만두었다. 


한겨레 신문, 2006년05월11일 제609호,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놓은 것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올해 정년을 맞는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조그만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의 삶을 정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뵙는 사이에 정색하고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부분도 캐물어야 하는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살아내신 한국 현대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 한명숙 총리의 지명을 계기로 그의 부군인 박성준 교수의 전력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서 박성준 교수의 ‘상부선’이기도 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버렸다.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로,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한겨레 신문, 2006년06월22일 제615호,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사형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죽여버리겠다는 법적 결정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연해질 수 있을까? 뒤에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울상대생이던 김병곤이 사형을 선고받고 “영광입니다”라고 되받아 전설을 남겼지만, 그 받아침은 진짜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도 선고의 순간에 최대한 의연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입으로 가더란다.


무기징역이라 하려면 입이 삐죽 앞으로 나오고, 사형이라 말하려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에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되더라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잊혀지지 않는 명대사 “나 떨고 있니?”처럼, 아무리 사상범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떨리기 마련이 아닐까?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국민학생 친구들을 위해 글을 쓰다

처음에는 사형이 근거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 이 정권은 충분히 사형을 집행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심각하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그가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1년 반 동안 일상을 같이 보내던 여섯 명이 차례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의 죄목은 대개 상관 살인인데, 신영복은 1960년대의 억압적인 병영문화가 낳은 가슴 시린 비극을 연속적으로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사형이 확정되는 순간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너무 짧은 삶으로 끝나고 만다는 애석함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당시의 젊은 언어로는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에 논리적으로 사형이 삶의 단절로 귀결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당시 혁명적 의식에 투철했던 청년들의 낭만적인 정서는 척박한 식민지 땅에 태어나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식민지 청년들 앞에 놓인 삶의 당연한 한 형태라고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접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노부모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영복은 자신의 죽음이 자신에게야 삶의 완성일 수 있지만, 부모님께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죽음이란 것도 결코 한 개인의 죽음일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까? 신영복은 지금 생각하면 의외지만, 혹시 돈 빌리고 안 갚은 것은 없는지,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아직 사형수였던 시절에 쓴 글에 ‘청구회 추억’이란 것이 있다. 감옥에서 휴지에 적어서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헌병의 도움으로 집으로 전해진 이 글은, 신영복이 우연한 기회에 사귀어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당시 국민학생이던 꼬마 친구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장충체육관 앞에서 2년 넘게 만나던 꼬마 친구들은 왜 신영복이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모를 것이 아닌가?

신영복은 사건 당시 현역 육군 중위였기 때문에 그의 사형집행 형식은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었다.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란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거리였다. 프랑스혁명의 선봉에 섰다가 옥사한 대수학자 콩도르세는 ‘찬란한 햇빛 아래 죽는 것’을 그렇게 바랐다지 않는가. 모든 사형수가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와닿는 신영복의 사색은 총살형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처연한 낭만과 갈라진 현대사의 처절한 아픔이 안겨준 젊은 날의 임사체험(臨死體驗)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법원에서 상고 포기로 형이 확정된 뒤 신영복은 1970년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신영복은 당시에는 전향 문제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육군교도소에서는 전향 문제에 대한 권유도 없었고, 그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당시 안양에는 사상범이라고는 신영복 한 사람뿐이었다. 전향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선배도 없었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란을 메우는 것으로 전향서를 작성했다.


<엽서>에는 왜 고친 자국이 없는가

신영복이 전향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게 되고, 특히 박정희 정권의 강제전향 공작이 본격화될 무렵이었다. 그는 한 사람이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면서, 반성도 하고, 고민도 하고, 자기 합리화도 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쉽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은 결국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조직성원이었다면 좀더 심각하게 고민했을지 모르나, 그는 조선노동당원도 아니고, 통혁당원도 아니었다. 빈농 출신으로 정치 일꾼이 되어 온몸으로 사회주의 세상의 짜릿함을 맛본 적이 있는 남파 공작원들, 게다가 그들은 북에 가족을 두고 있었다.

신영복이 20년 감옥 생활에서 꼬박 15년을 보낸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것은 1971년 2월이었다. 안양과는 달리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그는 이미 전향서를 쓴 상태에서 대전으로 이감왔기 때문에 특별사동에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도소 당국은 전향했지만 통혁당 사건 무기수인 신영복을 바로 공장에 출역시키지 않았다. 한 1년 정도 독방과 혼거를 거듭하면서 관찰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은 출역을 허락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쇄본으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영인한 <엽서>를 보다 보면 고친 자국이 거의 없다는 점에 문뜩 깜짝 놀라게 된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도 다 사연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지식청년 신영복은 감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두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 이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분단된 조국의 감옥에서 그런 생각을 담아둘 수 있게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였다. 밖으로 보낸 엽서가 모여 있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어보리라 하는 생각에서 감옥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엽서 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미리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다 봐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 형태로 갖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고 한다.

면벽 명상이나 독서를 하기에는 독방이 좋을 것 같지만, 20년 감옥 생활 중 5년여를 독방에서 보낸 신영복에 따르면 독방의 징역살이가 더 힘들고 때로 정신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으면 언어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방을 왔다갔다 하며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면 교도관은 통방하는 줄 알고 앉으라고 야단을 친다. 혼자서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이상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서 후딱 그쳤다가, 다시 혼자서 말을 하기를 반복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란 역시 같이 대화하고 부대끼며 사는 존재였던 것이다.


장기수들의 역사와 만나다

신영복이 파기환송 후 다시 재심을 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친구나 후배들 중에 이미 대전에 와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징역살이가 인생에 있어서 조금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공장에 출역하는 것보다는 오로지 독서에 열중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교도소 재소자란 물론 우리 사회의 하층민이긴 하지만, 룸펜적 성격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과 접촉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영복이 보기에도 재소자의 대부분이 룸펜적 성격이 강해서 사회 변혁 의지라든가, 노동계급으로서의 건강한 자부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도 역시 민중이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그들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과 맨살을 맞대는 접촉을 하면서 지식청년이었던 자신이 가졌던 관념성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하게 된다.

교도소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낸다는 것은 바깥의 도시에서 잠깐 악수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온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징역 생활에서 도덕적 가식을 부리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감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정직한 알몸 그대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방에서 대개 몇 년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삶과 살아온 내력을 공유하면서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또 다른 사회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하, 목수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책이나 교실에서 인식했던 것과는 다른 펄펄 뛰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쭉 자라고, 책을 통해 정서를 키워온 사람으로서, 그런 자신의 인식의 틀이 깨어지는 것은 감옥 초년에 그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영복이 육군교도소 시절이나 독방에서만 있은 안양 시절에는 잘 몰랐다가 대전에 와서 새삼 발견한 사실은 교도소에 노인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공장에서건 사방에서건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신영복은 개인의 성격과 범죄를 연결시켜왔던 그때까지의 단순한 논리를 반성했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관해서 이야기 듣노라면 그 혹독한 상황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범죄가 개인의 성향보다는 사회나 시대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영복은 밑바닥 인생들과 맨몸으로 부대낀 오랜 감옥 생활을 통해 지식청년으로서의 관념성을 깨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감옥은 청년 신영복에게 여기에 더해 어떤 새로운 역사의식을 일깨워주었다. 1970년대 초반은 아직 해방으로부터 채 3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조국이 찢어진 상황에서 전쟁의 격동에 몸을 내던졌던 사람들, 또는 그 격랑에 휘말린 사람들 중에 아직 감옥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물론 50대 60대를 넘긴 노년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빨치산 출신도 있었다. 빨치산에도 한국전쟁 중에 입산한 ‘신빨치’만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에 입산했던 ‘구빨치’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또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 안내원들도 있었다. 신영복은 해방 전후의 분단 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들과 일상을 같이했다. 막연하게 책에서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사람들을 만나 이들에게서 생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로서는 20대의 명석한 신영복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신영복은 마치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생환된 역사’였다.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한 그 느낌!


서구 근대를 뛰어넘는 관계론 구상

신영복은 그 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박치음이 <소쩍새>란 노래를 헌정한 노촌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명문 연안 이씨 집안의 종손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전쟁을 겪으며 월북해, 사회주의 사회를 몸소 겪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파되고, 일제 때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체포돼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8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선생이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쉽지만 노촌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셨고, 또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셨다.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노촌선생을 만나기 이전부터였다. 60년대 대학 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뒤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 문화, 서구적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몰두했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 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제의식 말고도 옥중의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징역 초년의 왕성한 지식욕에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나이였으니 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이 딱이었다. <노자 도덕경> 같은 책은 5200자에 불과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통해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서구 사회는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사회인 반면, 동양이나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한 <강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건물,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기념물뿐이랴. 최근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전 어느 서예학회에서 ‘서예의 실용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신영복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된 것은 아마 ‘동상예방 주의사항’이나 ‘재소자 준수사항’ 같은 소내 게시물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晩堂 成柱杓),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특히 풍양 조씨 노론 대가집 후예인 정향 선생은 추사의 서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선생이나 한말의 서화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에게 배운 분이었다. 교도소장이 글씨 한 점 얻을 욕심에 서도반이 생긴 뒤 한 번 모신 것인데,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오시어 글씨를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민체, 우리 서예의 중요한 경지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궁체는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한문 서도에서 익힌 필법을 도입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해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역사의식을 길렀으며,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 여러 가지 기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년 8월14일 잡혀간 지 꼭 20년 20일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음력으로 꼭 20년 만이다. 생일날 잡혀가서 생일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출옥했다.

그는 20년의 징역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위를 넘어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가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기 개조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야,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며 칭찬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세상과 다시 만났다. 하나의 나무가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뤄가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던 그가 지난 6월8일 아쉬운 정년 고별 강연을 했다. 20여 년의 청년기, 꼭 20년의 귀양 생활, 그리고 귀양이 풀린 뒤의 해배(解配) 기간이 20년가량이었다. 해배 2기라고 할 수 있는 앞으로의 20년, 더불어 숲의 중심에서 신영복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년 1월)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년 7월)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년 8월)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0년 12월)

변방을 찾아서 (2012년 5월)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16p. 그러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 선생의 이십여년의 옥중 생활을 대학에 비유하셨다. 성찰과 배움의 기회였다고 술회하는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는데 그는 나의 또 다른 스승이시다.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 근대화와 서구 문화였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습니다.

-> 선생이 대학 다닐 무렵.


17p.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 선생은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나는 나를 성찰하고 나를 일깨워 알아차리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깊은 뜻을 새기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동양고전의 책거풀 정도는 읽었다. 언제나 누군가가 해석해 놓은 것을 읽을 수 밖에 없었지만 ... 그래서 늘 원문으로 읽고 싶은 욕구가 일었으나 한자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아 일찌감치 포기하곤 했다. 뜻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며 나는 그들이 해석해 놓은 글 만으로도 내용을 충분히 삮여낼 수 있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무지로 함정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내 주특기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자위하지 않으면 내가 초라해져서 견디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늘 이런식으로 나를 속여왔다. 가면뒤에 숨어서...그러고 보면 그동안 독파한 고전들도 공부라기 보다는 고전 쇼핑에 그친 것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 선생의 동양고전과의 인연은 감옥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3권만 소지 가능) 때문이기도...


요즘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근본적 담론 자체가 실종된 환경이라고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아직도 그러한 반성적 정서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보다는 오히려 덜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18p. 노촌 이구영 선생(한학의 대가)과의 인연

-> 감옥에서 같은 방에서 4년 동안 동거,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

-> 시대의 역설과 모순 : 노촌 선생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시대 때 노촌 선생을 검거했던 그 형사.


21p.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 과거에서 배울 수 없는 역사는 무의미하다. 역사는 오늘의 기록이다. 이렇게 기록된 역사는 바로 오늘 재 해석 된다. 


22p.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 선생은 춘추전국시대와 오늘의 상황이 닮아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부국강병, 무한경쟁시대

->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건축 의지가 바야흐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상황입니다. 설계 도면을 파괴하는 것이지요.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미래는 오래된 과거.


천지현황과  I am a dog.


28p. 그뿐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무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지금 여러분 가운데 두 사람을 일어서게 하고 두 사람의 차이에 주목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본질적인 것이 드러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어떤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 고전 강독의 화두



30p. 서양문명은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

->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는 선을 추구

-> 과학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발전의 동력,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

->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

-> 과학의 압도적인 발전으로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

->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은 인간적 가치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자본축적의 전략적 수단

-> 과학은 희망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

->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은 없었을지도

->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음.

->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


33p.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와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공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34p.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고가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36p.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8p.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테면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場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우주라는 개념도 宇宙의 복합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는 물론 공간 개념입니다. 상하사방이 있는 유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는 고금왕래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生氣의 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41p. 인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43p.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 되는 것.

-> 모든 사상은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수용하여 동양사상에서는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중용이 바로 그것이다. 즉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것을 인정하고 조화와 균형을 매우 중요시 한다. 따라서 모순과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 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이른바 감천역물 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45p. 동양 사상은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새로운 미래담론의 화두_同(지배와 억압의 논리)의 논리를 和(공존과 평화의 논리) 논리로 바꾸는 것.


우원하다.(현실과 거리가 멀다. 길이 돌아서 멀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다.


[2. 오래된 시와 언]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52p.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성과 전정성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소위 상품미학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 광고 카피는 허구입니다.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이버 세계 역시 허상입니다. 가상공간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 진짜가 귀한 세상에 살고 있다.


55p. 정의가 언이 되고 언이 부족하여 가가 되고 가가 부족하여 무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56p.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58p.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사무사, 즉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고 하였다.


鄭風, 건상(褰裳)-치마를 걷고

子惠思我(자혜사아) :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褰裳涉溱(건상섭진) : 치마 걷고 진수라도 건너가리라.
子不我思(자불아사) :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豈無他人(기무타인) : 세상에 남자가 그대뿐이랴.
狂童之狂也且(광동지광야차) :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子惠思我(자혜사아) :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褰裳涉洧(건상섭유) : 치마 걷고 유수라도 건너가리라.

子不我思(자불아사) :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豈無他士(기무타사) : 어찌 사내가 그대뿐이랴.
狂童之狂也且(광동지광야차) :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61p.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만리장성 맹강녀의 전설. 이산의 아픔을 지금까지도 보편적인 정서인 듯 하다.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지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좀 더 잘 살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62p. 초상지풍 초필언 草尙之風 草必偃 :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수지풍중 초부립 誰知風中 草復立 ;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64p.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 즉물적 세상,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 되어 있는 상태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70p.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_ 서경의 <무일>편.

->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오늘날 세대들에게 필요한 말.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혀지길

-> 늙은이가 빨리 은퇴하는 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로화 되는 것이다.


77p.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81p.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 현실과 이상의 갈등,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격언과도 같은 말.


[3. 주역의 관계론]


87p.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


92p.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101p.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안분지족, 능력이 100인 사람은 70 정도의 자리에...나머지 30은 창조적 공간으로, 능력이 70인 사람이 100의 자리에 앉았을 경우 모자라는 만큼 위선과 거짓이 차지하거나 불량으로 채우게 된다.


103p.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28p. 주역의 마지막 괘가 미완성의 괘_화수미제괘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며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라 합니다.

-> 목적과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30p. 易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 통이란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 통이란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


-> 주역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변화’ 와 절제의 사상


131p. 우리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런 점에서 주역의 범주는 그것이 판단 형식이든 아니면 객관적 존재에 대한 진술 형식이든 그것이 망라하는 세계는 결과적으로 왜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그래서 사람은 절제하고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삼가하고 겸손하고 밝거라’ 는 내가 늘 학생들에게 주는 말이다. 주역의 해를 보고 있자니 이런 나의 말들이 더욱 간절해 진다. 


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팔십년후아거시 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_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에 쓴 시.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 춘추전국시대 : 사회에 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개진된 시기.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 되는 시기,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회질서가 재편되는 시기, 제자백가의 백화제방의 시기.


-> 고전을 읽는 독법 : 시제時制를 잃지 말 것.


142p.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 학습은 신분상승의 도구,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

-> 공자는 식읍을 봉토로 받는 대부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피고용인인 士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 역시 당대에는 등용되지 못한 것이다.

-> 習은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 새겨야 한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

증자왈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 불충호 여붕우교이 불신호 전불습호

-> 증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날마다 세가지 면에서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한 일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벗을 사귐에 믿음직하지 못한 건 아닌가? 배운 바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145p.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146p.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흔히 시간이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요컨데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150p. 군자불기君子不器

->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 년 전의 노예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


153p.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 형과 예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 지배계층은 예로 피지배 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사법원칙이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생긴 것일테지만

-> 부끄러움에 관한 것.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 집단적 타락 증후군 :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걸리는 놈이 재수 없는 놈이란 인식, 고위층의 부정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타락에 대하여 연민하는 것이 아니라 고소해 하는 것, 타인의 부정이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 시키는 것으로 활용.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論語八佾第三-8


子夏問曰: " '巧笑천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왈   기여자상야  시하여언시위의


-> 신영복의 변역 : 

자하가 물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素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素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은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商가 나를 깨우치는 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 김형찬 옮김(논어, 홍익출판사)_여러편을 비교해 보건데 일반적 해석으로 보임.

자하가 여쭈었다. “고운 웃음에 보조개가 아름답고,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또렷하니, 희 바탕에 무늬를 더하였네” 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희 바탕이 있은 다음이라는 것이다.”

자하가 말하였다. “예는 나중 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일으켜 주는 자는 상이로구나! 비로소 자네와 함께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159p.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160p.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일반적인 해석 :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내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 선생의 해석 :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 공존과 평화의 원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


166p. 德不孤, 必有隣 덕불교, 필유린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 마음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

-> 心好不如德好 를 추가하고 싶다.

->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171p. 信 = 人 + 言

-> 언은 원래 신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이란 곧 신에 대한 맹세.

172p.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번지가 인에 관하여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이다. 이어서 지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이다.

-> 공자의 인에 대한 각자 다른 대답, 안연에게는 인이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 중궁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사마우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 이라고 했다.

-> 仁 과 知, 愛人 과 知人 ...논어의 근본 담론.

-> 애인이란 남을 생각하는 것, 지인이란 인간을 아는 것.

->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179p.  子曰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학하되 사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

->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쉬움. 사회적 관점을 가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적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사와 학의 적절한 배합이 필요하다.


187p.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188p.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명석하다. 공과를 불문하고 교묘하게 그것을 숨기거나 치장하려고 해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


194p. 子曰 質勝文則野 자왈 질승문즉야 文勝質則史 문승질즉사 文質彬彬然後 君子문질빈빈연후 군자

바탕이 문채보다 승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


[5. 맹자의 의]


不忍人之心

맹자는 공자의 인을 의로 계승, 의는 인의 사회화.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한권의 고전을 택해야 한다면 맹자를 읽어라.


219p.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다.

-> 오늘날 행복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무심,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다른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


222p.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도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 하는 것과 같다.


230p. 인에 거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스로 택해서 인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237p. 만난다는 것은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뜻입니다. ...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

->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

-> 수오지심의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

-> 도시의 익명성, 무관심, 냉혹함 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것. 모두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불인인지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


250p.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면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6. 노자의 도와 자연]


->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사상이 두 개의 축

-> 유가사상은 나아감(進)의 사상.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

-> 노장사상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의 사상. 근본 즉 자연으로 돌아가야 함.

-> 다른 학파의 주장과는 달리 일체의 인위적인 규제를 반대하는 사상.

->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

->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


269p.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바다가 아니다.

-> 도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세계

->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상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

상대주의 ->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


277p.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

-> ‘개입하지 말고’가 어떻게 해석되면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는데 자연적인 것에 대한 개입을 말하는 것이지 인위적인 것, 작위적인 것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278p.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59장). 자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貨). 오늘날 농산품보다 공산품이 비쌈.


280p.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 지금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 이러한 자본주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


284p. 노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

-> 도무유수,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인지라 물로 도를 설명한다.


292p. 빔이 쓰임이 됩니다.

-> 비어 있음으로 쓰임이 생긴다. 그릇이나 방이나.

->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히길 희망.


297p. 노자의 자연은 ‘nature’가 아님. 서구적 개념의 자연은 문명 이전의 야만 상태를 의미하는 것.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 so’ 정도. 자연은 그 자체로 완성된 상태, 외부를 가지지 않는 존재


299p.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動보다는 靜을, 滿보다는 虛를, 巧보다는 拙을, 雄보다는 雌를, 進보다는 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본다.


[7. 장자의 소요]


-> 자유와 해방, 자유주의 철학

-> 장자 사상. 소요유逍遙遊...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 이것은 궁극적인 자유, 자유의 절대적 경지. 소요유란 빈배로 흘러간다는 것.

->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겠다.


321p.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상대적 관점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만 본다. ...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325p.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術에 관한 것이 아니라 道에 관한 것.

-> 논어의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와 통하는 경지.


329p.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까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 1810년대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 기계로 말미암아 일터를 잃은 노동자

-> 노동은 삶 그 자체이며,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함.


336p.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 입니다.

-> 책과 글로 그 사람의 진의를 모두 알 수 없다. 글이 가진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실질을 모두 글로 표현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을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 가 없다. 


352p.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지요.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지요.


[8. 묵자의 겸애와 번전 평화]

-> 하층민이나 노동계급의 대변, 형벌을 받은자들의 집단, 반체제적 성격의 기층민들을 대상으로 번성.

-> 근검 절용, 실천 궁행,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

-> 묵자는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

-> 공자와 묵자의 시대인식 : 무도하고 불인하고 불의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

-> 겸애, 교리, 연대


374p.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 겸애의 사상에 이르러서는 성경의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386p.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

-> 예방의 공이 인정받는 것을 본 예가 없다. 문제는 일어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상수다. 그러나 이것은 어렵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밝혀진 바와 같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 유가의 이단아.


406p.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 무슨 일인가 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천지와 음양의 변화이며 드물게 나타나는 사물의 변화일 뿐이다. 괴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두려울 것은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요순 같은 성군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걸주와 같은 폭군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르게 응하면 이롭고 어지럽게 응하면 흉할 뿐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비축하고 때 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도를 닦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 순자의 천론은 다른 유학자들과 차별 되는 것.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님.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


418p. 예란 기르는 것이다.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422p.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428p.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 미래사관, 변화사관

->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 군주의 절대권력을 옹호하고 은밀한 술수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

-> 한비자는 그가 펼친 이론과는 달리 우직한 졸성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동문(이사)의 꾐에 빠져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던 불운의 남자.


433p.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 오늘 날에 비춰 보면 맞는 말이 아니다. 재물이 적은 것이 아니라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재물이 일부에게 편중되기 때문에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었다.


442p. 주 이래로 구제 방식에는 예와 형, 귀족은 예로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 일반적

-> 법가는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르리는 것.

-> 유가는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


두 자루의 칼 = 상 + 벌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 가지 징표...오늘의 반추 449~450p.


454p.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가지 부류, 첫째 학자, 둘째 언담자로서 세객, 셋째는 대검자로서 협객, 네번째는 근어자로서 임금의측근, 다섯번째는 상공지민...사치품을 만들어 농부의 이익을 앗아간다.


457p.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 악양과 진서파의 고사로 대비되는 인간적 면모에 대한 고찰.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


458p.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법가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


[11. 강의를 마치며]


대방광불화엄경 :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

-> 화엄: 꽃이 엄숙하다.

->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

->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아 하는 것.

-> 관계론의 상징적 이미지 인드라망.

->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 연기는 결과 나무는 원인


대학: 

-> 3강령 : 명덕을 밝히는 것, 백성을 친애하는 것,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

-> 8조목 :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506p.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 人은 仁으로 나아가고 仁은 德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로 나아간다.


509p. 가슴에 두 손

->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 되어야

->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



3. 내가 저자라면


선생의 이 책을 교재 삼아 나도 강의를 해 보고 싶다.

그래서 연륜이 쌓이고 관점이 돈독해 지면 선생의 책의 거울 삼아 ‘피울 강의’를 펴 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나즉하면서도 절제되고 정제되어 있다. 넘치지 않으면서 부족하지도 않다. 곁에서 속삭이듯 하면서도 날카롭고 강하다. 울림이 길다. 그러면서도 공손함을 잃지 않는다.


선생의 강의는 ‘관계론’으로 수렴 된다. 그는 동양 고전을 통해 얻는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바를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나간다. “징역살이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내가 괴롭고, 외롭고, 힘든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작 진짜 고통은 나로 인해 고통받은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의 고통이 다시 내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관계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의 인터뷰를 요약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의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존재론’의 대척점에서 우리 사는 세상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 즉 ‘더불어 숲’속에 사는 세상을 염원하는 선생은 그 해법을 ‘관계론’에서 찾고자 한다. 이 책의 주된 관점은 바로 이 ‘관계론’에서 동양 고전을 읽고 느끼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에 있다.


[책의 구성]


이 책은 선생께서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 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해왔던 강의를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교양과목으로 고전 강의라기 보다는 오늘날의 여러 가지 당면 과제를 고전을 통하여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로 개설한 강의였다고 선생은 밝히고 있다. 하여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란 부제를 달았다고 한다. 선생은 이 책이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선생의 바람처럼 선생은 책에서 담담하고 나즈막하지만 깊은 통찰과 울림으로 오늘의 현실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선생의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힘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28p. 그뿐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무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41p. 인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159p.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보완점 그 외]


이런 책 한번 내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선생께서 이 책을 낼 무렵의 나이가 되면 내게도 이 만큼의 공력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2004년 초판 발행 이후 2014년 현재 37쇄가 될 동안 개정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본문 가운데 선생께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하셨던 부분들을 긴 세월 동안 보완하여 고쳐 출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면 그리 했을 듯 하다. 중용, 대학, 불교 이야기에 대한 내용들을 추가로 보완 할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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