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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06시 49분 등록

국수와 나의 소소한 추억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달콤하고 잔인한 4, 세상에서 제일 바쁜 서울 토박이 워킹맘이 생면부지 낯선 부산에서 오도카니 전업 주부가 되었다. 미쳤냐며 나를 말리던 친구의 말에 따르면 앞만 보고 내달리던 경주마가 트랙에서 갑자기 끌어올려져 발굽이 푹푹 빠지는 해변에 내던져진 꼴이었다. 여하간 중요한 건 스피드, 그리고 ROI(투자 대비 성과)!’를 외치며 살아왔던 15년 차 직장인의 일상에서, 이력서에는 기술할 수 없는 오만 가지 허드렛일로 이뤄진 주부의 일상으로의 전환은보잉 747기의 불시착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처음 한 달은 패닉 속에서 집안일에 매달렸다. 어찌나 서툴고 어찌나 바쁘던지. 청소와 밥, 빨래로 하루 열두 시간의 노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다음 6개월은 나는 자연인, 아니, 자유인이다를 외치며 꽃꽂이에, 요가에, 주말마다 아이들과 바닷가로 놀러 다니며 15년 만에 맞은 휴가를 만끽하며 보냈다. 그러다 동면의 계절이 왔다.

1, 얼음 송곳 같은 겨울 바람과 함께 반성의 시간이 닥쳐온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불과 반년 만에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를 끝없이 되묻는, 그토록 도망치려 했던 질풍노도의 시기, 마흔의 사춘기를 맞고 말았다.

경력과 인생의 전환점, 마흔의 초입에서 많은 사람들은 마비된 듯 일상을 이어나가거나, 용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도 하고, 나처럼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게 닥쳐온 변화 앞에서 허둥대며 혼란에 빠져들기도 한다. 마흔 뿐이랴. 소처럼 일하는 서른이든, 방황하는 스물이든, 겨울 나무처럼 외로운 쉰이든 삶의 무게는 버겁고, 나의 존재 의미는 오리무중인 것을. 겨우내 나는 조바심에 못 견디는 나를 애써 방치해두었다. 도망치고 싶고 쉬고 싶은 욕구를 인정하며 기다렸다. 

그러자 보도자료와 CEO 연설문, 사보 원고 같은 직업인으로서의 기계적 작문에 지쳐 멀리했던 글쓰기의 욕구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들여다 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했다. 조금씩 하고 싶다’, ‘알고 싶다라는 속삭임이 제발 날 내버려 둬라는 마음의 장벽을 넘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들에 밀려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적어 보기로 했다. 영화, 공부, , , 아이들, 많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 내 40년 인생을 정리하고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꾸준히 내 옆에 있었던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빈곤한 사람이었나허탈했다. 그런데 하나, 딱 하나가 내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건 어이없게도, 국수였다. 적어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까지 돌아가도 분명 내 인생에 있었던 존재. 무언가 추억할 이야기, 함께한 사람이 떠오르는 존재가 나의 일도, 책도, 음악도, 미안하지만 가족도 아닌 국수, 너였다니.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수 매니아, 그리고 국물의 여왕이다. 어딜 가든 국수를 먹는다. 귀찮아하는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도 반드시 국물과 사리를 추가한다. 딴 음식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간 먹는 걸 좋아하는 데, 특히 국수를 좋아할 뿐이다. 임신을 했던 시절에는 하루 한끼는 반드시 국수를 먹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아 동료들이나 부하직원들에게는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혼자 만삭의 몸을 끌고 가파른 언덕길을 넘어 기어이 국수를 먹으러 갔다. 그런 녀석, 늘 내 곁에 있어 주었던 존재, 국수를 생각하니 이야기꺼리가 넘쳐났다.

국수와 나 사이에는 정말추억이 많았다. 불평, 자기비하, 변명에 압도되지 않는 흐뭇하고 애틋하고 기쁘고 소중한 기억, 소중한 사람들의 추억이 국수와 함께 차곡 차곡 쌓여있음을 발견하고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잔치국수를 생각하면 상고머리를 한 어린 나와 고모와의 즐거운 외박이 생각났고, 오장동 냉면을 생각하면 한 걸음에 달려갔던 그 새벽, 애틋했던 연애의 시작이 떠올랐고, 인삼주 반주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던 닭한마리 칼국수를 생각하면 새벽마감을 함께 하던 선배 생각이 났고, 평양냉면의 시원하고 그윽한 국물을 맛볼 때면 할머니 생각에 목이 메었고, 명동 칼국수의 매운 김치 맛을 생각하면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정리하고 축하하기 위해 오래된 필름을 복구해 영사기에 걸고 나만의 극장에서 상영하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이제 반절쯤 살아낸 내 인생, 힘든 때도 있었지만 멋진 삶이었구나. 잘 살았고, 이 사람들을 만나서 참 좋았고, 앞으로는 이들과 더 행복한 삶을 꾸려갈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다. 뭘 할까? 어떻게 더 즐겁게 기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준비할까. 이 질문에 다시 몸을 던지기 위해 나는 나의 오랜 벗, 국수의 힘을 빌기로 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 나의 일부로 소화하고 흡수한다는 것, 그것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음식은 나와 그와 그녀의, 우리들의 오룻한 추억으로 남으며, 함께 한 그 순간을 잊지 못할 오감으로 기록한다. 먹는다는 것은 결국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쓰는 것을 모두 합해도 넘어설 수 없는, 몸과 정신을 총동원하는 경험이다. 그렇게 밥상을 함께 한 사람들과의 기억이, 국수가락에 딸려 올라오는 흥건한 국물의 훈기처럼 훈훈하고 애틋한 나의 일부가 되었고 역사가 되었음을 이 글을 시작하며 깨닫게 되었다. 개인의 역사란, 결국 나를 포함한 누군가와의 소중한 순간들이 이어져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겨우내 대체 몇 그릇의 국수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하루 한끼는 국수였다. 살면서 먹은 국수는 대체 몇 그릇이나 될까? 야근을 하다 갑작스레 깨달은 허기를 달랬던 그 저녁, 사는 게 고행이구나눈물을 그렁대며 억지로 삼켰던 혼자만의 점심, 입덧에 지친 쓰린 속을 달래려 찾던 언덕 위의 그 집, 4대에 걸친 친정식구들이 다 함께 나선 외식 때도 나는, 우리는 국수를 먹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 먹고 싶어한다는 것은 삶의 의지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다져온 세계를 뒤로 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또는 다시 일어날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한 동면기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국수 한 그릇 하실례예?’ 라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다. 지금 울고 싶은 당신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중에서, 이상국)

IP *.53.209.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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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08:32:29 *.104.9.216
국수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 웬지...ㅎㅎ

국수 한그릇 말아놓고 읽어야지...책 나오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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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11:18:17 *.196.54.42

 국수 한 그릇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참, 어이없게도 국수! 네요 ㅎㅎ

에필~프롤로그 썼으니 책 다 썼네요^^ 어때요 요즘 글발은?

국숫발 뽑듯이 쭉쭉 뽑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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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12:59:45 *.94.41.89

다른 국수 이야기들도 너무너무 기대됩니다. 사랑이 가득한 국수 한 그릇 원츄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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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13:57:40 *.85.20.115

국수 이야기가 맛집찾아다니는 얘기는 아닐거라 생각했어요.

후루룩 빨아올리는 면발처럼

쭈욱 끌어댕기는 국수이야기 열나게 응원하고 있습니다.

..국수 말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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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16:31:29 *.50.21.20

아 매주 월요일! 

12시 이후!

마감 저녁은 늘 국수를 먹고 있습니다. 

종종님 글 읽고 나면 안 먹을 수가 없어여.....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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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19:39:50 *.113.77.122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우리 같이 국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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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19:54:33 *.213.28.79

종종의 국수는 이거였구나!

왜 국수일까? 했는데....

삶과 같이 어울어지는 국수이야기 기대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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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23:36:16 *.222.10.126

국수는 면발이 길다. 칼국수는 굵고 두꺼우니 쇠젓가락으로 집어 먹기가 좋다. 반면 소면은 얇고 보드랍다 그래서 잘 엉긴다. 그래서 한 움큼 집어 먹을 수 있다. 어릴 적 찬장에는 국수가 늘 몇 뭉퉁이 있었다. 그리고 밀가루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나의 집에도 밀가루가 있다 하지만 국수는 없다. 음식은 누군가 늘 먹지 않으면 준비되지 않는다. 누군가 늘 먹었던 그 국수는 배고픔을 한가닥 한가닥 채워주는 명줄이었고 자식들 배부름에 웃는 그녀의 기쁨이었다. 나의 집에는 국수가 없다. 마트에 가서도 국수를 집어 장바구니에 넣지 않는다. 더이상 집에 국수는 없다. 그리고 그녀도 나의 집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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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20:50:14 *.160.136.90

오랜만에 찾아가는 부산. 그리고 후르륵 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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