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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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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06시 50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라고 불리우는 신영복은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복역한 지 20 20일 만인 1988 8 15일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2006년 정년 퇴임 후 석좌 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고 현실참여적 성향을성공회학파 대표주자라고도 불리며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신영복의 엽서’ ‘처음처럼이 있으며, 역서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 ‘사람아 아! 사람아’, ‘노신전’, ’중국역대시가선집등이 있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또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해왔기에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이 본디부터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명의 소용돌이가 그를 군사재판까지 몰고 가게 되었고 ',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고뇌와 사색은 감옥에서 생활하게 되는20년내내 이어지게 되고, 그는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감옥에서 그는 밑바닥을 살아온 민중들과 맨살을 부대끼며 살면서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 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방에서 오래 살다 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만 배우지 않았다. 실제 경험하는 것이 중시하다고 생각하는 그는10여년간 교도소에서 실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 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들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체험을 하게 된다. 더불어 책에도 언급되어 있는 이구영 등으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 '나의 대학시절' 이었다고 고백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이도 감옥에서 여러 장기수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라 한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힘있으면서도 정감이 가는 그의 글씨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소주 광고, 선거 유세 등에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 서론

16.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17.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근본적 담론 자체가 실종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21.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3.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6.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과거의 어학 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27.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그 뜻을 재조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28-29.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 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초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39. 진흙이 그릇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40. 인간주의란 인성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41. 인성이란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덕불고 필유린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 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인은 기본적으로 인+인 즉 이인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 즉 인과 인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42.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는 쌀을 함께 먹는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하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7.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게 우원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잘못된 길을 조급하게 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경계해보아야 할 것이다.

 

2. 오래된 시

52.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53.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픔과 기쁨이 절절히 배어 있는 시경의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64.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65.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시를 많이 읽기 바랍니다.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7.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8.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소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70.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 요즘에도 볼 수 있는 모습인 듯 하다. 사실 나를 보면 왜 이렇게 자꾸 사서 고생을 하려는지 답답하다. 하지만 몸이 편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 이다.

 

72. 한마디로 무일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지치고 주저 앉고 싶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왜 이렇게 힘들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어차피 힘든 세상 어떻게 하면 더욱 재미나게 살아볼까 고민하는 것이 더욱 필요할 것만 같다.

 

74. 주공은 일반삼토, 일목삼착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75.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 효율성을 생각하며 잔머리를 굴리고, 몸과 마음이 편한 것만을 좇는 내가 반성된다. 또 무엇이든지 돈을 써서 해결 하려고 하고, 또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반성해 본다.

 

77.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 나의 미래는 내가 쌓아온 과거와 내가 살아가는 현재가 모여 만들어진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더욱 아름다운 미래 풍광을 꿈꾸어야겠다. 

 

82.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역의 관계론

88.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를 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어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 요즘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를 너무 작게 본다고 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인지하는, 적어도 겸손한 사람이라며 위안해본다.

 

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 , 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자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선택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우선은 모든 지혜와 도리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결정은 어렵다.

 

90.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100. 역지사지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 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1.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 빌딩은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땅에 건물을 너무 많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터와 집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 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 나의 자리는 알맞은 70%의 자리인지 고려해 볼 일이다.

 

102.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산전수전을 두루 겪으신 노인들은 대체로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지키기를 충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3.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07.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이라 하였습니다. 죽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110. 경복궁 교태전은 바로 주역의 지천태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지교태 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113-114. ‘천지제야라는 의미는 음양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천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법칙, 즉 천지의 운행 법칙이라는 의미로 풀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119. 나아가기 보다는 물러나 강호에 묻히는 것이 난세를 살아온 사람들의 처사였습니다. 이러한 처세를 비판하는 목소리고 없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직언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당했지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히는 것이지요. 인적 자원의 재생산 구조가 복원되기 위해서는 삼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제도권 전체가 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120.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결과가 좋아야, 그리고 끝이 좋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과정의 즐거움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훗날의 즐거움을 도모하기 위해 참고 견디고 희생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잇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통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변화입니다.

 

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2.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33.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서산대사)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35.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 궁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 대한 담론이든 민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42.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143. 중요한 것은 이을 복습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실천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 결국은 실천이 중요하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다.


149. '온고이지신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구절은 대체로 온고 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보다는 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를 딛고 신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의 의미를 온존의 뜻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이 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50. 옛것 속에서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환과 척결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이위사의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우나 과거지사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3.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으로 이끌고 예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154.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9. 미는 글자 그대로 양자와 대자의 회의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163.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7-168. 루쉰의 경우는 심의 의미를 각성과 의식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심호를 각성이나 의식의 의미로 읽지 않고 마음씨또는 인간성의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건강보다는 마음씨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미모의 기준을 외적인 형식미에 둘 경우 사흘이 안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에서 형식미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백범을 넘어서 그리고 루쉰을 넘어서서 이 '마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168. 나는 이 신호불여심호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심호불여덕호가 그것입니다. “마음 좋은 것이 덕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덕의 의미는 논어의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웃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의 의미라면 덕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말에 쉰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169. 위령공편에 군자도모불모식그리고 군자우도불우빈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군자는 도를 추구할 따름이며 결코 식이나 빈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청빈의 예찬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아가 '사람과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0.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171.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信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言은 원래 神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信이란 곧 신神에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174.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175. 지와 애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사실입니다.

 

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7.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야 나무야 中)

 

188.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無私)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을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189.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92.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슨'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감옥을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194. 바탕이 문채 보다하면(튄다라는 뜻)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옹야편 中)  

 

195. 승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승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9.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201.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합니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7.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5. 맹자의 의

212. 많은 연구자들이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9.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라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마치 잉걸불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주는 것이지요.

 

225.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 싸가지가 있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가 된 것은 아닐까?

 

227.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사회 원리인 예가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라는 것을 밝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인 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불인인지심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 불인인지심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1.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232.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33.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쓰다가 전화벨 소리 때문에 글씨를 틀려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마저도 돌이켜보면 원인은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237.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이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 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대량 사살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42.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245. 일원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학과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본과 원칙에 맞추어 정도를 걸어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그리고 정성을 다하자. 조급한 마음이 앞서, 귀찮은 마음이 앞서 꼼수를 부리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하자.

 

6. 노자의 도와 자연

253-254.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8. 노자는 81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때 관윤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 지어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263.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고 부리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노자 제 1장 中)

 

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270.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1.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273 노자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위()는 인위, 작위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274.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277.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 현대사회에서도 이렇게 말 없이 행하는 것이 통할 수는 있을까? 조금 의문이다. 자연스럽게, 나답게 행동하고 싶지만 살아 남기 위해서는 상황에 적응해야 하고 변화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노자의 사상을 현대에는 어떤 식으로 접목할 수 있을까?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285. 노자 마지막 장인 제 81장의 마지막 구가 천지도 이이불해 성인지도 위이부쟁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콘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85-286. 셋째는 (물이)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9.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298. 미생물의 세계뿐만이 아닙니다. 생태계의 질서가 엄청난 규모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 사회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거대한 간섭인 것이지요. 치산치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299.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45장 中)

 

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 철학입니다. 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7. 장자의 소요

309.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325-326.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짧은 것은 늘려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장자 변무 中)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의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무엇이며 인 무엇인가에 대하여 장자는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이다.

 

328.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333.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34.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335.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을 강요하는 제국의 패권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337.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

니다.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

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38. 세상에서 도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 뿐이다. (천도 13절 中)

 

339.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340.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에 노닐게 함으로써 만물을 부리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아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재,부재의 고민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342.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제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 ,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343.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中)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 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346-347. 꽃과 나비가 비록 제물()의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꽃은 꽃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은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한다면, 즉 천인소연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347.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의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54.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56. 득어망전(고기를 잡고나면 그 고기를 잡는 데 소용되었던 기구를 잊어버린다)이 아니라 망어득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은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66. 맹자에 따르면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가가 주공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했던 사람입니다.

 

370. 묵자는 겸애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373.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겸애 中)

 

374.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 (겸애 中)

 

376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하가 서로 겸애하면 평화롭고 서로 증오하면 혼란해진다. 묵자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까닭이 이와 같다. (겸애 中)

 

381.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 전쟁의 페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묵자의 비공의 논리입니다.

 

382.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옛말에 이르기를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88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은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묵자의 소염론)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마땅하게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자는 임금과 제후가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신하들로부터 올바르게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90.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 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활동의 일환인 것입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408. 하늘에는 사시의 운행이 있고, 땅에는 자원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다스림이 있다. 이 다스림을 능참이라고 한다. 사람이 (천지와 동등한 자격으로 나란히) 참여할 수 있는 소지를 버리고, 천지와 동등한 자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환상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17.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는 지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418.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예론 中)

 

422. 나는 말한다. 학문이라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캠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싶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423.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지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425. 순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도와 인심입니다. 천도와 천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도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432-433.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433.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

 

434.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 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수는 없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 따르고 그 의 칭송했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했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지 인의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해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법가 사상의 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법가의 논리에 의하면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과거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는 현실 정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445. 법가의 오늘의 법학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 지도자론, 조직론 등 오늘날 정치학 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였습니다. 천하 쟁패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의 낡은 방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광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52.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의 공리공담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이나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뜻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은 대단한 능변가로서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변론으로 직하의 변자들을 꺾었다. 그러나 그가 흰 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 말의 통행세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11. 강의를 마치며

474. ‘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가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76.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7.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이며 나무는 원인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이무이라 합니다

 

479. 거대 담론 체계에 있어서 금수초목은 물론 인생사 모두가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화엄의 찬란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덧없는 무상의 세계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직하고 우리의 시공에 참여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88. ‘치지재격물’, 하여 이른다는 뜻입니다. 인식이나 깨달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격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격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통하여 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계 독립적 대상을 의미합니다. 물질과 같은 의미입니다. 인식과 깨달음이 외계의 객관적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492. 세계 평화는 세계를 구성하는 각 국가의 평화이며, 국가의 평화는 국을 구성하는 각 가의 평화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의 평화를 위해서는 가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품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대학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입니다. 이러한 체계적 논리의 최상에 놓여 있는 것이 명덕입니다. ‘대학의 최고 강령은 명덕입니다.

 

498. 주자가 중용을 통하여 제기하려고 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는 바로 도의 큰 근원이란 하늘에서 명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인간적 도리의 구체적 덕목은 예악형정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지요.

 

503. 우리가 이 심론에서 긍정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주체적 실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이 실천의 결과물이라면, 그리고 그 실천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목적의식적 행위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신유학에 대한 심학의 문제 제기는 매우 정당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양명학의 심이 선종 불교의 심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506.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人은 仁으로 나아가고 인은 덕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하는 도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입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 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508.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여러분에게 남기는 시와 산문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강의 중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기억되지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509.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10.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1-512. '그림'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을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5.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퍼지기를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책의 제목처럼 인자한 노교수로부터 진짜 강의를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 특유의 편안한 문체 덕분인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안정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끔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어 여러 번 곱씹어야 하는 부분도 나타났지만, 그래도 윤리 시간 달달 외우던 제자백가들의 사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깊이 알 수 있어 뿌듯했고, 기회가 닿는다면 앞으로 각 사상들을 더욱 한 발짝 깊숙이 알아보고도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책이었다. 또한 현대의 상황과 연결시켜 해석해주고 있는 부분도 좋았다. 물론 덕분에 책장을 넘기다가 잠시 멈추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저자 특유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반영된 점은 감안하여야 하겠으나, 그래도 특히 젊은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이러한 해설서는 반갑기만 하다.

 

굳이 개선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좀 더 한문풀이를 강화했으면 하는 것이다. 쉬운 한자, 혹은 책에 풀이가 나와 있는 경우 대충 뜻을 알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일부 성어들은 한자로 명기되어 있으나 그 뜻을 바로 알기가 어려워 해석이 되어있었으면 하였다. 저자가 말하듯 우직하게 모로 가는 독법을 위해 일부러 찾아보도록 유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마지막 챕터인 강의를 마치며부분은 저자가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하기에 앞서 고전 강독에 빠졌으나 관련된 이론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전체적인 책의 진행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 황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오히려 기타 소개하고 싶은 고전으로 따로 챕터를 구성하여 불교, 신유학 등을 소개하고 이후 강의를 마치며를 고전 독법에 대한 저자의 요약과 당부사항 등으로 구성하고 마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조금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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