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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09시 41분 등록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돌베게, 2004.


1. 저자에 대하여


■ Shin, Young-Bok, 申榮福 ■

출생/사

1941. 경남 밀양

•활동 분야

작가, 교수, 진보학자

 

• 발 자 취 •  

• 저 서 •

• 역 서•

1963.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5.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

196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 선고

1968~1988. 대전・전주교도소 복역(20년 20일)

1988.8.15 특별가석방 출소

1989~2006.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2007~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198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3. 엽서

1996. 나무야 나무야

1998. 더불어 숲

2004.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7. 처음처럼: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8. 청구회 추억:Memories of Chung-Gu Hoe

2008. For the First Time:처음처럼(영문판)

2010. 신영복(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2. 변방을 찾아서

1966. 외국무역과 국민경제

1991. 사람아 아!사람아

1992. 루쉰전(공역)

1994. 중국역대시가선집(공역)

 

 

 

 

 

 

신1.jpg

…… 

숲은 나무 한 그루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들이 존재해야 한다. 서로 나무가 되자.

……


■ 처음처럼을 들이키며!

신2.jpg 

20-20-20


 내가 그를 만났다!

 언제였던가. 스무살. 그때였다.

 이십대에 감옥으로 끌려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생활한 그의 강연을 듣는 날. 스무살은 어찌 해도 방방뛰는 나이였으니 앉아서 그의 강연을 들을 때만 해도 ‘지루해’라는 느낌이 들려고 했다. 강연은 좀더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그의 조용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의 말들이 흘러가는 것이 내 뛰는 심장의 속도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강연이 끝나고...되돌아가는 길,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부터 내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귓전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 그의 숨소리, 그의 몸짓, 그의 글들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그의 음성은 차분히 나를 뒤따라와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버지로부터

 또한 그 시절의 많은 청춘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신영복 또한 시골 출신의 가난한 농군의 아들인 줄 알았다. 흔히들 하는 말로 소팔고 논팔아 서울로 공부하러 보낸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그리하여 그들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걱정하게 되는 그런.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부모는 아들의 수감에 잘 견디어냈을 듯했다. 아마도 신영복의 가치와 신념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테니 말이다. 신영복의 아버지 역시 지식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신학상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교사로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천생 학자로 늘 책상에 앉아 무언가 집필하고 있었고 여든둘에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 여든다섯에 <김종직의 도학사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의 아버지는 1995년 여든여덟 나이로 타계하셨으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책을 쓰셨던 것이다.

 신영복의 고향은 경남 밀양으로 밀양과 의령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한 경남 의령의 간이학교 사택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에서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졸업했다. 그러니까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밀양교육감을 역임했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말이다.


청춘의 시절에

가세 때문인지 그는 부산상고에 진학하고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대에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당시국어 선생님의 권유였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1, 2학년 때는 가정교사 일로 바빴고 공부따라 가기 바빴다. 그러다 4.19와 5.16을 겪으며 그가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3학년, 1961년이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서울 상대에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경우회, CCC 산하 경제복지회, 동학연구회, 고대연대 학생 동아리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마오쩌둥,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 고리키들의 책을 읽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무렵에는 숙명여대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쳤다. 강사로 있으면서 <청맥>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를 따라갔다가 선배인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맥> 은 통일혁명당의 핵심인물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종종 반미적인 논설이 실렸다. 어느날 김질락과 이진영 등이 신영복에게 혁명을 지지하느냐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따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라 한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은 사형되었고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이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데 신영복은,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핵심 간부들이라 불리는 이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김종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다. 그리고 김질락과 이진영이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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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숲(신영복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그렇게 신영복은 통일혁명단 사건의 주동자로 엮이게 된다.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가 활동했던 모든 행적들이 조직적인 관곌 규정되어 수사 기록으로 남겨졌다. 고문을 받으면서 그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논리, 무엇이든 갖다붙여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

 ‘통일혁명단(통혁당사건)’은 1968년 일어난 대규모 간첩사건이다. 거물간첩 김종태가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북한노동당의 재남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전(前)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고 하다가 일망타진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으로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 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그는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활동하던 중이었기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심에서는 사형, 대법원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최종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안양과 대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성폭력, 살인 등으로 감옥에 가는 이들의 형량이 10년을 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허접한 수사와 당연한 귀결로 결론맺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도 개탄받을 일이긴 하지만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청춘의 그가 중년이 되어 세상을 밟았다. 당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걱정이 없을 리 없다. 다행히 그는 한한기 후에 성공회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휴지와 봉함엽서 속의 살아있는 글


 그는 오래도록 살았다. 감옥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감 생활. 무기징역이라는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젊은 청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가 수많은 젊은 청춘을 감옥에 몰아넣었다. 그 시대의 특정한 이들이 많은 이들의 영혼을 억압하고 신체를 억류할 권리를 부여받은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다시, 그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는 감옥에서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그러나 읽을 수 있는 책 수는 제한적이었고 글을 쓸 종이도 없었고 검열도 당했다. 20년하고도 20일의 시간 동안 그는 부모님, 형수, 제수에게 편지를 썼고 그렇게 그가 옥중에서 쓴 편지들이 책으로 엮이게 되었다. 그는 휴지와 봉함엽서 속에 가족에게 보낼 글들을 띄웠던 것이다. 그렇게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그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써내려간 글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어떻게 그러한 힘든 일을 겪고도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고 예쁠 수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그는 사형선고를 선고 받고 곧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책이 바로 <청구회 추억>이다. 1966년 봄 서오릉으로 가는 소풍길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우정을 나눈 여섯 어린이들과의 추억을 담은 글이다. 이 글 역시 교도소 두루마리 휴지에 볼펜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의 글들은 이렇게 흐물흐물 사라질지도 모르는 아주 얇은 휴지 속에 위태롭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더욱 애잔하다.

 교도소의 생활들을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랴. 다만 그의 책의 제목처럼 그에겐 그 긴 시간이 ‘사색’의 장소가 되었다. 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장소에서도 역시 ‘사색’하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책들을 만났다. 대전교도소 복역 시절에는 남파공작원 출신 한학자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과 4년간 한 방을 쓰면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이구영 선생과의 만남은 그를 동양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동양고전을 접하면서 ‘관계의 철학’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감옥생활을 하면서 자살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라고 한다. 햇빛과 그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 친구들이다. 그가 있었던 방은 북서향으로 2시간쯤 햇빛이 들어오는데 가장 햇빛이 클 때가 신문지 펼쳤을 때 정도였다 한다. 그 햇빛을 무릎에 올려 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죽었다고, 그는 그렇게 말한다.


처음처럼을 마신다!


신4.jpg 경남에 소재를 둔 무학소주는 처음처럼이라는 도수 낮은 소주를 내놓았다. 이름은 처음처럼. 이 처음처럼이란 글자, 어딘가 낯설지 않다. 세상에, 신영복 글씨란다. 세상에, 신영복 선생님이 소주회사에 글씨를 넘겼단 말이야? 놀라고. 놀라고.

 성공회대학교 퇴임 무렵 두산에서 브랜드명과 상표 글씨체로 시 <처음처럼>의 제목과 글씨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는 수락하고 1억 원을 받는데,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했다 한다.

 그의 그림과 글씨체는 이미 유명하다. 그는 감옥에 서예반이 생기면서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에게 지도를 받았다 한다. 그는 자신만의 서체를 구사하고 많은 글씨와 그림들을 창작한다. 그리고 그의 붓글씨는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협동체, '연대체'로 불리며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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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한겨레21[2006.05.16 제609호]

•한길사 '사회와 사상 제 15호':대담/인터뷰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월간 '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 통권 제15호

•다음 백과사전, 신영복(브리태니커)

•네이버 지식백과, 통혁당사건(두산백과)

•더불어 숲(신영복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p6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 과거, 현재, 미래. 이 셋의 구분은 누가 지었는지.


1. 서론


p16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 우리나라 감옥이라는 곳이 사상범은 독방에 두고 흉악범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사상범에 대한 격리는, 그들이 다른 이들을 그들의 사상으로 교화(?)할까봐...라는 것. 박정희....


p17 내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분단과 군사 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거지요.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은 동시에 우리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 사회적 환경이 동양고전으로 이끌었다...귀감이 될.


p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 어떤 글을 보든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고 바라보는가가 읽었으나  읽지 않은 듯한 상태를 넘어서게 한다.


p28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p22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 고전에 대한 열풍이 이러하기 때문일까. 한동안 장자 열풍이 휩쓸었는데.


p22~23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 그리고 최대한의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재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늘 과거의 무언가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p23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p24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 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는 스웨덴의 여성학자의 책.


p27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얼굴을 쳐다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더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부러워할 때도 있지. 세상엔 좋은 문장들이 넘쳐난다.

 

p28~29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 대등한 비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 비교는 늘 치우치기 마련이긴 하지만. 공존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렇게 와 닿는 오늘.

 

p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 막스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가 현실주의라고 결론내리는데 그의 동양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 합리화의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고. 동양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라고 말한다.


p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면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會意)문자(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 걸어가거나 걸어갖 않거나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p37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道在邇(도재이)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p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p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근대 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 인간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이들의 사고체계는 어쩌나.


p42 ‘화해(和諧)’ 화(和)는 쌀(米)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p42~43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 동양사상이 비종교적이란 의미가 저런 뜻.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시경』『서경』『초사』


p52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p53 원래 <시경>에 실려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시+노래+춤이었다고 전합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이 되고 언이 부족하여 가가 되고 가가 부족하여 무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 춤이라. 그리스인 조르바가 자꾸 춤추는 게 그래서인가.


p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 동감!


p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p61~62 문학이란,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64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


p68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한 공간에서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p70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p72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 무일을 꿈꾸는 자는 막상 무일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무일이란 개념 변화가 필요하다. 무일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개념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 자급자족, 먹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내가 노동을 해서 ‘자본’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돈을 얻는 일.


p75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현실에서 재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반복되기를 바라는 이들 때문에 아무런 소득이 없다. 역사에서 그 어떤 의미를 가져올 수가 없다.


p76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p77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 변화의 시발점은 내부. 끊임없는 내 안의 그 무엇 찾기.

 

p81-82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 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의진’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 우경적이라..이들이 참 현실적이긴 하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조화시키는 것. 나에게도 화두.


p83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목할 수 있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 낭만주의에 대한 오해. 낭만주의가 세상에 드날릴 때는 그것이 가진 장점이 있었다.


3. 『주역』의 관계론 『주역』


p87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p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 인간에 대한 경외감. 필요하다.


p89 우리가 생각하는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 명, 점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가기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점집을 찾을 때는 어땠지? 늘 미래가 궁금해서였던가. 결정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던가.


p92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p102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와 실위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의 존재론입니다.


p103 나는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 상위가 아니라면 중간만 하면 된다는 우리나라의 교육방식이 있긴 하다. 도대체 진정성있는 것 같진 않지만.


p105 위보다 웅이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웅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p107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 사상이며 사계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p107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p110 경복궁의 교태전은 <주역>의 지천태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처지교태(天地交態)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 교태전. 나 역시도 이 말뜻 오해하고 있었네. 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건지 이상타하고 있더랬다.


p110~111 혁명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태화의 근본임에 틀림없습니다.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여러분은 지천태라는 뒤집힌 형국, 즉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태화의 근본일 수 있을까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지요. 지천태괘를 이러한 혁명의 관점으로 읽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 혁명이 필요하다! 혁명이 필요하다!


p113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 주역 제3효. 하괘의 상효.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119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와 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p123~124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약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하나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 그러나 필요한 일.


p124~125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27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마침이란 없는 것이라 미완성의 괘가 있다면...삶도 모든 것도 미완성이라면 완성을 향해 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좀..


p128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행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 미완성은 결국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

 

p129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 노동의 소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영원한 일.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일. 변화를 위한 어떤 방법이 있을까. 혁명.


p130 易(역) 窮卽變(궁즉변) 變卽通(변즉통) 通卽久(통즉구) .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p131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잇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관계망. 특히 한국은 3명만 거르면 서로가 아는 사이라던가. 한국적 관계망.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논어』


p140 사회경제적 배경은 사상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141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에 대한 담론이든 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현재에 필요한 담론! 담론은 넘쳐나고 있으나 아무것도 변화됨이 없는 세상. 이럴 것을 볼 때마다 비폭력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p144 ‘습(習)’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부리가 하얀 새, 갈매기 조나단의 날개짓이 생각난다.


p144~145 어쨌든 ‘학이시습지’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p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p147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의 주인공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 과거가 늘 옆에서 따라오는 것도 힘든 일이긴 하지.

 

p150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p151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p153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따라서 법에서 적극적 가치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총체적 난국에서는 단호한 법가적 강제력이 사회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치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는 난세의 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55 시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료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해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p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熟知)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상품미학. 잘 팔리는 것.


p161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다.

⇒ 언어, 그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 모든 것은 언어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발화되고 나면 파급력을 더할 수 없이 세다.


p168 마음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듯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착하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이미 좋은 이미지가 되지 않았다. 착한 것을 지향하는 이들도 사라져가는 듯이 보이고. 착함이 ‘약은’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내가 이상하게 보는 건가.


p169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로 삼았던 금언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 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 필유린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 열사가 되지 마라는 것도 죽지 말라는 말. 죽음으로 아니라 살아서. 죽지 않고 살아 있기를 바랬던 많은 사람들....수많은 죽음들이 그대로 소멸되는 슬픈 현실들. 죽음은 더 이상 무기가 될 수 없고 죽음은 그저...누구에겐가 사건의 시작이지만 사건의 종결일 뿐.

 

p172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p175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知(지)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무엇을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관건.


p181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 현장 활동가들이 가진 놀라운 저 관념적일 정도의 고집에 놀란다. 때론, 답답하기도 하고 때론 어이없기도 하고. 순수하거나 열정적인 느낌을 넘어선 아집. 물론 지식층도 그렇지만.

 

p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86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란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 나는 무지를 늘 깨닫는 데도 불구하고, 왜 늘 제자리인지.


p188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 욕심이 없기를 바라는 욕심을 가지고 있어서....


p189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래서 뭐? 아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 없는 현실 속에 살다 보면 사람이 삐딱해진다.

 

p191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중립, 웃기지마라!

 

p200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p201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가 서 있거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는 한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 감고 있을 듯합니다.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산을 좋아하나, 물을 좋아하나. 지긋이 앉아 눈감고 있는 걸 봐선 산을 좋아해야 하는데.

 

p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맹자의 의義 『맹자』


p211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춘추시대의 군주는 지배 영역도 협소하고 전통의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군주 권력이 귀족 세력들의 제어를 받는 제한 군주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의 군주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군주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p212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이 표명되어 있는 장은 여민락장與民樂章이다.


p228 사실 나는 사회 원리로서는 측은지심보다는 수오지심이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측은지심은 인간 이해와 관련된 정서라 할 수 있고 수오지심은 즉 부끄러움은 인간관계 즉 사회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229 사람의 소위, 즉 하는 일에 따라서 그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입장에 따라 그 생각과 정서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인간 본성의 사회적 존재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선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본성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공자의 ‘성상근 습상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본성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 인간 본성이 사회적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지극히 공감.


p230 공자의 ‘이인위미里仁爲美 ’를 인용하여 어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진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인이란 인에 거하는 것이라고 직역했습니다만 인을 삶 속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성을 어떤 순수한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p232~233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 외부와 내부에서 함께 찾고 있다. 그것 모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p236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 만남이 없는 사회이지만, 만나려고 한다. 익명성으로. 인터넷 채팅의 시대.

 

p240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p242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토록 황폐화된 인간관계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간관계가 상품화로 전락하고 만 것은 결국 사회 때문아닌가.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가기도 하지만 사회가 인간을 만들기도 하지. 너무나 오랫동안 노출된 인간가치의 상실. 그것은 무엇, 누구 때문?

 

p245 일월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학과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 늘 모자라는 것을 채우려고 하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구덩이에 밀려 나아가지 못하는 삶. 늘 구덩이가 곳곳에 있다.


p249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仁을 짓밟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짓밟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개 사내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 맹자의 사회주의와 민본주의. 급진적.


6.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


p253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이 노장老莊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 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p253~254 유가 사상은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p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25장)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p257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 결국 모든 이론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


p259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대체로 기원전 350~기원전 200년 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명을 붙여서 읽거나 무명을 이름 붙이기 전으로 해석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 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지요.


p269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 예전 윤리 시간에 배웠던 그냥 인위를 물러난 노자 사상에 대한 느낌들. 그런데 뭔가 다르게 다가온다.

 

p269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 이름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어...한계..

 

p269~270 도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1장에서 노자는 개념적 사유, 즉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무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이며 통일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270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로 표현한다면 ‘도비도 비상도 명비명 비상명’이 되는 것이지요.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늘 개념적 정의부터 하려고 하는데. 그래야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본질 규명이라고 생각했는데.

 

p272-273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p273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악, 명분, 문물,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 아, 갑자기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자연.

 

p277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협소한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 자유와 자연을 주장하지만, 그것에 대한 명쾌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p280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임은 물론입니다.


p280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p282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무위를 잡으려고 합니다. 안 잡혀 지네요. 무리하게 하려고 해서일까요.


p284 노자철학은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무유수道無有水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상선약수’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p285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 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 물의 파괴성. 폭풍. 태풍. 역류. 이안류. 뒤덮어 버리잖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p287~288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지배자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불이 나면 재라도 남지만 물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가 버린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p288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다수는 힘이며 정의. 민주주의의 원리.


p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p289~290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연대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p293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p294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用(용)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나는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 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 숨겨진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 숨겨진 억압 구조. 지금 이 사회에서는 숨겨져 있지도 않은데. 뻔히 드러나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보려 하지 않는 걸까. 하긴, 나 역시도 보기만 하고 있으니.

 

p303 천하의 올바름이란 바로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이란 작위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7. 장자의 소요 『장자』


p309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 장자 외편, <추수>-

⇒ 그래도 모르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수 있지 않나. 꿈꿀 수 있게. 자신만의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지 않나. 그렇게 늘 그 틀 속에 갇혀 있지 않도록. 왜, 할 수 없다라고만 하는가.


p310 장자가 추구하는 문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였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p311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들의 경물, 즉 개인주의적인 생명 존중론이 양주학파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라고 합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이 하릴없는 소요인가 아닌가.


p314 <노자>의 서술 방식은 사설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p316 장자 사상이 권력에 봉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원용되었을 뿐이며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가 장자에 대한 일반적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묵의 천명 사상이나 천지론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장자 사상은 반체제적인 부정 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 부정의 해방론이라는 평가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p317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p319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p331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장자의 논거는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뜨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 장자 시대에 기계로 인한 노동의 종속성을 이야기하다니. 인간의 노동소외.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바라는 바대로 되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이제는 감정을 느끼는 로봇도 나온다던데.


p335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을 강요하는 제국과 패권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p340 장자 사상은 사실 재, 부재의 차원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재는 무엇인가의 쓸모입니다. 그리고 쓸모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하위개념입니다. 다른 것을 만드는 데 유용한가 유용하지 않은가 하는 수준의 것이지요.

     …장자의 논리에 따르면 도는 재와 부재를 조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의 도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주류 담론이던 부국강병 논리를 반성하고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343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 이런 말들을 하면서도, 어렵다. 늘.

 

p356~357 나는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어득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드라망...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


p363 사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의 장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상을 사회 역사 속에 해소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그 자각적 체계 때문입니다. 자각적 체계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독자성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독자성은 역시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는 태도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독자성에 앞서 시대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 지금 시대는 사상이 넘쳐난다. 행동이 필요할 때.


p364 묵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의 묵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하는 묵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검은색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은색은 노역과 노동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허식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 강의를 읽다 보니, 묵가사상에 끌린다.


p365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366 우임금의 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가 모델로 삼고 있는 주나라의 계급 사회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p367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 어느 시대에나 묵가와 같은 사상을 지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p370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실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 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 연대, 하층연대. 늘 기층민들이 주장하는 논리. 신영복 선생님도 연대를 주장하지. 그의 글씨체 역시도 연대체라 불리기도 하고.


p370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실천 방법이 개인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언제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규율로써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가는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불 속에도 뛰어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 언행일치. 사상과 행동이 일치된 학자. 바람직한 모습 아닌가. 게다가 조직적이기까지. 오늘날의 노동당의 움직임같은 느낌이..


p373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 요즘엔 사회의 혼란의 원인을 알듯 모를 듯. 원흉을 알겠는데 제거가 안되어서 더욱 혼란스러운.

 

p374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 그런가? 혼란의 원인은 결코 사랑할 수 없는데....


p392 우리의 사유는 사실판단의 기초 위에서 가치판단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실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각과 경험이 없으면 그 주장이 망상에 빠지게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가치판단이 없는 지각과 경험만으로는 사실을 일컬을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즉 지와 의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항상 판단의 표준을 세우지 않으면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며 삼표가 판단의 세 가지 삼표입니다.

묵자의 삼표는 역사적 경험, 현실성이며, 민주성.


p399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


p405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을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순자의 주장이 패자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p405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배척이란 단어가 갑자기 눈에 띈다. 지식층 학자층 사이의 저러한 배척, 배격들이 세상의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 아닌가.


p408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천론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 천문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개인의 사상이란 크게 보아 사회적 성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거지요.


p412 순자가 천론에 이어서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수순입니다. 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교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성악설의 위치가 바로 이곳입니다. 천명을 전제하고 성선을 전제하는 맹자의 체계에서는 그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고, 그 선한 가능성을 확충함으로써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성과 선단을 하늘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순자로서는 당연히 능참이라는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며, 교육이라는 외적 기능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 속에 순자의 소위 성악설이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 무슨 일인가 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천지와 음양의 변화이며 드물게 나타나는 사물의 변화일 뿐이다. 괴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두려울 것은 없다.’


p412 성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 제도론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제거를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가 그의 주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천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선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훨씬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여겨진다. 성선설에 관해 너무나 인간중심적으로 사고했기에 그리고 당연히 ‘착하다’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어렸을 적 혹했을 뿐.


p413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 선의 인위성에 대해 공감한다.

 

p423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


p427 무릇 음악은 사람의 감정에 파고듦이 깊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므로 선왕이 형식을 신중히 하신 것이다. 음악이 조화롭고 평온하면 백성이 화락하되 질탕한 데로 흐르지 아니하고, 음악이 엄숙하고 장중하면 백성이 정직하여 어지럽지 아니하다. 음악이란 사람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음악이란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정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이 음악을 만든 것이다.

악론.


10. 법가와 천하 통일 『한비자』


p433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신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


p452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러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라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 나도 아마, 틀 탁을 가지러 가는 사람일지 모른다.


p465~466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잣거리에서 시서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봉건제를 복구하려는 구사회의 저항이 완고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렇지. 규모가 아니라 이유다. 이유다. 이유다. 사건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것.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논리가 자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유라고 외쳐대고 있으나 외면되고 있다.


11. 강의를 마치며 불교 신유학 『대학』『중용』양명학


p472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입니다.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사상입니다.

⇒ 광대무변함. <화엄경>에 표현된 화엄의 사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대로가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고 하는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과 성기설(性起說)에 기초하고 있다. 법계연기설은 현상 세계의 개개의 사물들이 겉으로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다 같이 서로 원인이 되는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화엄사상은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엄 [華嚴] (두산백과)


p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p475 불교에서는 깨닫는 것, 즉 각이란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p475~476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p477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의 그물랑에 있는 구술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척의 궁전에 결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인드라망. 제석천에 있다는 인드라망. 제석(帝釋)은 천제석, 또는 석가데바인드라(Sakra devanam Indrah)라고도 하는데 벼락을 신격화한 것으로 고대 인도의 베다(Veda)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벼락, 쇠갈고리, 인드라망의 무기를 든 제석은 일체의 악마를 물리치는 신으로서, 우파니샤드시대에는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모든 신을 주재하는 등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제석은 불교가 성립되면서 불교 속으로 흡수되었다. 즉, 도리천(忉利天, 육욕천(六慾天)의 둘째 하늘)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면서 여러 천중 및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천신으로서 신중의 으뜸이 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제석천도(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회화, 2005.1.10, 솔출판사)

  신6.jpg   인드라망은 제석천이 사는 도리천 세계의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지칭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천둥을 ‘인드라’라는 신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리그 베다』에서 인드라는 공중에 살고 있는 신으로 그려졌지만 불교에 수용되면서부터 도리천(忉利天)에 사는 신으로 표현되었다. 도리천은 불교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다고 한다. 또 도리천 사방에 8개씩의 천이 있어서 도리천과 함께 33천을 이룬다. 사실 도리천이란 말 속에는 33이란 수가 들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도리는 3을 뒤덮는 그물을 지칭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천둥을 ‘인드라’라는 신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리그 베다』에서 인드라는 공중에 살고 있는 신으로 그려졌지만 불교에 수용되면서부터 도리천(忉利天)에 사는 신으로 표현되었다. 도리천은 불교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다고 한다. 또 도리천 사방에 8개씩의 천이 있어서 도리천과 함께 33천을 이룬다. 


p477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를 보는 것이 바로 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p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이며 나무는 원인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이 불이무이라 합니다.

⇒ 그러니, 인연이라는 것이 아픔이오.


p497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이 理입니다. 성즉리입니다. 이는 법칙성입니다. 이 이가 성이며 성이 천명입니다. 이 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임은 물론입니다. 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즉 솔해야 하는 것이며, 솔은 노라 하였습니다. 이 도를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교입니다. 성과 도는 비록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기품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고 모자라는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기준으로 삼아 품절하여 천하의 질서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교라 하는 것이지요.

⇒ 중용이 그저 가운데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쪽 저쪽 정확히 가운데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


p505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과거란 지나가지 않는다. 늘 따라다닌다.

 

p509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 사상은 실천되어야 자기의 것. 이 말대로라면 나는 사상가일 수도 없다.


p510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적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어느 사회에서나 실천의 중요성. 이론가이기는 쉽다. 예전엔 이론가가 더 어렵다고 생각했고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실천의 부족함으로 이론으로 선회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태생이 그러한가?

 

p515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들은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種樹郭橐駝傳(종수곽탁타전)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길.




3. ‘내가 저자라면’


■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1. 서론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3. 주역의 관계론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5. 맹자의 의義

6. 노자의 도와 자연

7. 장자의 소요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10. 법가와 천하 통일

11. 강의를 마치며

 

 

이 책의 제목이 ‘강의’인 이유가, 이 책이 실제 강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성공회대학교 교양과목인 ‘고전 강독’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다. 고전에 대한 저자 나름의 읽기 방법으로 고전을 재해석하고 있다.

 <강의>에서 다루는 고전은 춘추전국시대 대표적인 사상가인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의 핵심 사상이다. 즉 이들 사상가들이 서술한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에 담긴 사상과 철학이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때의 사상을 현재와 미래에서 '관계론'에 초점을 두어 이들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이와 같이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이들 사상을 풀어가는 것은 작가가 보기에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가 관계론이기 때문이다.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바로 인성, 인간관계라고 보는 까닭이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고전은 늘 읽어본 듯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다. 오래도록 접했지만 직접적으로 접한 것은 없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고전의 맛보기라도 새로움을 준다. 그래서 장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학자의 사상에 매료되어 사상가의 책들을 읽어야지가 지속되었다. 그렇게 공자 다음엔 맹자, 맹자 다음엔 노자, 노자 다음엔 장자...이런 식으로 학자들의 사상이나 그에 대한 해석이 좋게 여겨지는 것은 작가의 의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글의 순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의 흐름에 따른 것일 뿐인데도 점점 더 좋아지는 글의 내용으로 인해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차례야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작가는 ‘관계론’에 집중하여 이 책들을 살펴보고 있었기에 전반적으로 일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양한 ‘관계론’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 보완점이라기보다는..


고전을 읽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고전은 꼭 읽어야 하는지 세상은 ‘고전읽기’를 강조하고 강요하고 있다. 지금도 넘쳐나는 수많은 책들이 많건만, 화려하고 깔끔하게 포장된 책들로 줄줄이 나와 주고 있건만 아주 오래전의 사상들을, 책들을 끊임없이 읽으라고 재촉한다. 도대체 왜!

 책읽기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고 자기만의 질서와 체계가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책읽기라는 것은 교과서조차도 읽을 시간없이 문제집 풀이에 혈안이 된 현실이다(이런 교육현실을 겪은 나를 기꺼이 불쌍히 여겨주며). 또한 너무나 획일적인 풀이로 일관되었는데 그러한 관점의 전환을 해볼 수 있어 좋았다. 다만, 어쩌면 너무나 맛뵈기 식의 고전 소개가 사람에게 애간장을 끓게 하는 면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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