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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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감옥
2014.07.27
10기 찰나 연구원
‘앗’ 하는 순간에 어느 덧 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오른발은 앞으로 쫙 미끄러지고 왼발은 접질려서 접혀졌다. 몸에서 근육이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소는 욕실.
간신히 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욕실을 나와 그냥 방에 누웠다. 통증 때문에 더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있다가 어느 정도 통증이 완화된 후에 병원을 갔다.
다행히 뼈에는 문제가 없는데 인대가 많이 늘어났으니 앞으로 2~3주는 깁스를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처방. MRI를 찍어봐야 할 정도로 심한데 상태를 좀 보자고 하셨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왼발에는 전체 깁스를 하고, 오른손에는 목발이 쥐어졌다. 패잔병이 되어 나는 병원을 나서서 천천히 걸어갔다. 하늘에는 비마저 내리고 있었다.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 주말부터 가족끼리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아주버님과 얘기해서 휴가 준비를 해왔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앞으로 2-3주면 스페인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거지? 찹찹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왼발이다. 2001년 왼발에 인대가 삐끗한 이후로, 2010년에 다치고, 2012년, 그리고 올해로 네 번째다. 그동안은 발목만 삐끗해서 짧게 깁스를 했는데 이번에는 왼발 무릎이다. 발을 다치면서 자세가 삐뚤어지기 시작하면서 허리가 아프고 발에도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서 걷는 것이 힘들어졌었는데 이번에 휴직기간동안 쉬면서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그런데 무릎이어서 발전체 깁스를 하니 발목 다쳤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릎을 굽힐 수도 없고, 누웠다 일어나는 것도 한 참 걸려서 가능했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하던 역할이나 일들을 시아버지, 남편, 아들에게로 다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밥을 차려주던 입장에서 밥을 얻어먹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나에게 부여되었던 엄마, 며느리, 기타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에서 나는 다 벗어나고 약속 있던 것도 다 취소하고 나는 고스란히 집에만 있게 되었다. 이번 주 나에게 유일한 외출은 병원에 진료를 받기 위한 것이고 면회는 가족만이 가능했다. 마치 감옥 속에 있는 죄수가 되어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았다.
문득 신영복 선생님이 20년 20일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 속에서 깊은 사색을 통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이 나오고, 그때 접했던 동양고전이 인연이 되어서 『강의』라는 책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과연 내가 그 속에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창가에 비친 햇살과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감옥에서 10년째 되던 해에는 사람의 걸음걸이만으로도 그 사람의 직업을 알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른다고 했는데 감옥에서의 일상은 쉽지 않은 일들이다.
감옥에서 한 번에 허락된 책은 3권. 책을 마음대로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지만 동양고전은 얇아서 여러 권을 묶어서 하나를 제본해서 오랫동안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 『강의』책은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다.
몸의 구속은 한 면으로는 정신의 자유를 낳는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구속이 오히려 자유를 낳게 된다. 부산했던 많은 일상들, 여러 가지로 뻗쳐 있던 생각의 문들이 하나둘씩 닫히면서 오히려 더 깊게 사색해볼 수 있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닌 20년의 깊은 시간의 사색을 통해서 이루어진 『강의』는 마치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얼마나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있었던가!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 부딪치고, 사람들의 관계에 실망하고 기뻐하고 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사상의 변화를 통해서 이룬 오천년의 역사 속에 비쳐보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짧은 순간들이었다. 또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상품미학, 인간의 소외, 인간관계의 황폐화에 대한 문제점들을 나의 우물 밖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선택한 많은 것들이 자본주의 속에서 배운 것들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에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을 향해 나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그것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감옥에서 나가려면 2-3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감옥에서 나와도 적응을 하기 위해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감옥에서 나오면 두부를 먹으면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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