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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11시 50분 등록

1.제목: 강의 (부제: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jpg



- 출판사:돌베개

 

2.저자 : 신영복(1941~)

 

신영복(申榮福, 경남 밀양 출생, 1941~ )은 대한민국의 작가, 대학교수이며 진보적 학자이다. 호는 쇠귀이다.

신영복.gif  독서는 삼독.jpg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1]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 20년간 감옥생활

 

육군 교관으로 장교였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충격을 받고 ',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한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없게 한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 그에게 감옥 생활 20년은 ?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역사의식을 길렀으며,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 여러 가지 기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814일 잡혀간 지 꼭 2020일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음력으로 꼭 20년 만이다. 생일날 잡혀가서 생일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출옥했다.

 

그는 20년의 징역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위를 넘어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가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기 개조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며 칭찬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세상과 다시 만났다.

 

-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신영복은 그 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박치음이 <소쩍새>란 노래를 헌정한 노촌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명문 연안 이씨 집안의 종손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전쟁을 겪으며 월북해, 사회주의 사회를 몸소 겪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파되고, 일제 때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체포돼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8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선생이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쉽지만 노촌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셨고, 또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셨다.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노촌선생을 만나기 이전부터였다. 60년대 대학 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뒤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 문화, 서구적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몰두했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 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제의식 말고도 옥중의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징역 초년의 왕성한 지식욕에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나이였으니 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이 딱이었다. <노자 도덕경> 같은 책은 5200자에 불과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통해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서구 사회는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사회인 반면, 동양이나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한 <강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 <엽서>에는 왜 고친 자국이 없는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쇄본으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영인한 <엽서>를 보다 보면 고친 자국이 거의 없다는 점에 문뜩 깜짝 놀라게 된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도 다 사연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지식청년 신영복은 감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두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 이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분단된 조국의 감옥에서 그런 생각을 담아둘 수 있게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였다. 밖으로 보낸 엽서가 모여 있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어보리라 하는 생각에서 감옥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엽서 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미리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다 봐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 형태로 갖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고 한다.

 

 

- 민체, 한글 서예체를 만들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건물,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기념물뿐이랴. 최근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전 어느 서예학회에서 서예의 실용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신영복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된 것은 아마 동상예방 주의사항이나 재소자 준수사항같은 소내 게시물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晩堂 成柱杓),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특히 풍양 조씨 노론 대가집 후예인 정향 선생은 추사의 서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선생이나 한말의 서화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에게 배운 분이었다. 교도소장이 글씨 한 점 얻을 욕심에 서도반이 생긴 뒤 한 번 모신 것인데,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하시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오시어 글씨를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궁체는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한문 서도에서 익힌 필법을 도입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해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8) /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더불어 숲, (2003)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 / 처음처럼(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청구회 추억(돌베개, 2008) / 느티아래강의실(한울, 2009) /신영복-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참조

1)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C%98%81%EB%B3%B5

2) 한겨레 21 칼럼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6/05/021075000200605110609056.html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6/06/021075000200606220615026.html

 

1)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그러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만 그러한 독법의 필요를 이야기한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이 책이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p) "

 

단순히 고전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를 통한 현실에 대한 이해를 원했고, 개인의 실존적인 존재론보다는 관계론에 입각해서 고전을 풀어나가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서양의 자본주의에 만연된 사고에서 벗어나 동양과 서양이라는 균형 잡힌 시각과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책을 쓰게 되었다

 

2)저자에 대한 나의 생각

어느 수행자도보다 삶에 대한 경건함이 우러나오게 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접했을 때, 글 하나 하나에서 우러나오는 성찰의 힘을 느꼈었는데, 강의는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성을 몸으로 직접 깨닫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을 신영복 선생님은 해내신 것이다.

요즘 다리를 다치면서 드는 생각이 머릿속으로는 다 이해하고 깨닫는다고 했었는데 실제 그것이 내 몸과 일체화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본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그냥 일반 교수와는 다르지 않은 교수가 되었을 텐데, 그의 삶과 글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6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그러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만 그러한 독법의 필요를 이야기 한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이 책이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서론]=======================================================

 

<<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

 

-17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은 동시에 우리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 화두와 오래된 미래’ >>

 

 

-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역사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과거의 재조명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동안은 너무 개념없이 접근을 해왔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더 의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리라.

 

-23 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관계론에 대해서는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entered One,경주 문화엑스포 국제학술회위 논문집 )라는 글에서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해두기로 했습니다만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관계론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인데, 사람이라는 것이 관계를 빼면 사실 존재로서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동양사상에서 이렇게 중요한 부분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24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4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 낯설지만 좋다. 우리는 과연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것일까? 많은 과학의 진보속에서 인간의 삶은 정말 나아지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로 하다.

 

 

 

<< 천지현황과 I am a dog >>

 

 

-25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

 

-26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왕 내친김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과거의 어학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그뜻을 재조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

 

 

-28 그뿐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이런 큰 차이가 숨겨져 있는지 생각지 못했다. 그저 주어진 사고의 틀 속에서 생각하고 고민했지 그것을 넘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늘 그 자리만 맴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핵심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

 

-28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 일 수 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차이에 대한 인정, 그것을 통한 통합과 공존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너무 지엽적이거나 주변적인것에 매달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29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우리가 고전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동양 문화와 서양문화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유의해주기 바랍니다.

 

차이보다 관계에 주목하라. 그것에 기반한 관계망. 관계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봐야겠다.

 

 

<< 고전 독법의 참여점 (Entry Point) >>

 

 

-32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강독에서 확인해야할 부분입니다.

 

-33 서구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식이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이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entry point)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한 고전 독법이 이루어져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제약이라는 것이 관계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의미있게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고 의미가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소용이 없어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들은 많이 있을 수 있기에.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을 구체화하는 노력들은 필요하다.

 

-36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하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래도 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동양의 도는 길위에 있기에, 윤리적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더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것 같다.

 

 

 

<<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

 

-40 동양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학에서는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것중의 최고, 최량의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만큼 완벽한 과학과 흐름이 있을까. 사시사철 때가 되면 변화하는 그들의 변화와 움직임이 볼수록 신기하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몇 억년을 거쳐서 다져진 시스템이 아닌가.

 

 

<<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41 인성이란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자체를 인간 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관계가 이렇게 중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성이 개인이 가지는 면만을 강조한다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인 면과 관계가 플러스 되어야 할 것이다.

 

-41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동양적 인간주의는 이처럼 철저하게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동양적 인간주의가 이처럼 철저한 관계론적 개념인데, 그동안 얼마나 관계에 대해서 무심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하나의 개체로서만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이래서 인성을 고양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리라. 자기 자신을 키우기도 어려운데,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고 나서야 자기를 키우게 되니... 한면으로는 반대로 생각해봐도 될 것 같다. 결국 내가 크고, 남을 키우고, 다시 상호작용에 의해서 서로 같이 크게 되는것이리라.

 

 

 

<<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

 

 

-45 미래 담론은 대부분이 20세기의 지배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한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가치를 천명하고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담론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2.오래된 시와 언 - 시경, 서경,초사]===============================

 

 

<<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

 

 

-52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

 

 

-62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의 조각들의 모임. 시간이 갈수록 진실의 힘이 더 크게 와 닿는다.

 

 

<< 풀은 바람속에서도 일어섭니다 >>

 

 

-62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64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 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 마디로 허위허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위허식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시적관점의 중요성.

 

-65 안도현의 시는 이런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나는 과연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을까? 삶을 다시 돌이켜봐야 할 것 같다.

 

-65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기록은 무서운 규제장치입니다 >>

 

 

-68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23왕의 주고받은 어록인 <<서경>>이 탄생되는 까닭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

 

 

-70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無逸하라는 것이지요.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무일하는 자세는 살아가면서 중요한 자세라고 본다. 스스로를 계속 돌아보고 살펴봐야 하리라.

 

-72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필요하다. 그것이 한면으로는 삶의 동력으로서 역할들을 해주기 때문이다.

 

 

 

<<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

 

 

-75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버리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중요한 기준이라고 보인다

 

-75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75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잊고 있었다. 생산하는 자의 고마움을. 소비하는 자를 한때 부러워했던 내 삶에 대해서 다시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는 것을 순간 더 깨닫게 되었다. 막연한 미래만 꿈꾸며 살았는데, 이제는 현재속에 깨어 있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그 말의 의미. 이제는 알게 된다.

 

 

<< 현실과 이성의 영원한 갈등 >>

 

 

-81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르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어느 면에서는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막상 그 상황에 접하게 되면 다른 선택이 쉽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필요하다.

 

-82 이론은 좌경적으로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3.주역의 관계론 -주역]========================================

 

 

<< 바닷물을 뜨는 그릇 >>

 

-87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경과 전 >>

 

-92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 위와 응 >>

 

 

-102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와 실위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보다 자기의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한면으로는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어서 좋다.

 

 

<< 지천태 >>

 

 

-113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남의 것은 늘 평탄하기만 하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것은 꼭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누구에게나 삶의 굴곡은 다 있는 것이라.

 

 

<< 천지비 >>

 

 

-119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와 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인 까닭, 그것이 비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관계에 대해서 아주 쉽게 정의를 해두었다. 열려있고 소통하는 상태다.

 

 

<< 산지박 >>

 

 

-123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름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낯선 자신과 직면하는 것이 사실 제일 힘든일이리라. 하지만 평소에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조차도 솔직하게 그리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같다. 일단은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야 하리라.

 

-124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 ,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상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 화수미제 >>

 

-127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늘 무엇인가 완성해야 하고,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의미없는 것조차 그 에 매달려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미완성조차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

 

-128 최후의 패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궁즉변躬則變 변증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kategorie)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4괘를 칸트의 판단 형식과 같은 철학적 범주라고 했습니다.

 

궁극에 도달해야 변화는 이루어진다. 대부분은 궁극에 도달하기전에 포기하게 되는데, 이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야 겠다.

 

-131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제와 변화의 연계성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주역의 변화를 대하는 자세는 좋다. 절제와 겸손이라.

 

-131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2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절제와 겸손이라는 부분이 관계론의 높은 차원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실천이 안되는데, 더욱 더 신경 써서 해나가야 겠다.

 

 

-133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에 쓴 시입니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4.논어인간 관계론의 보고 -논어]==================================

 

 

<< 배움과 벗 >>

 

 

-143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을 복습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을 이론적으로만 가볍게 접근했는데 배움에 대해서 실천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145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관계에 관하여 깊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회의 본질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만은 여러분과 합의해두고 싶은 것이지요.

 

-145 사회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사람은 책을 통해서도 변화하지만 사람의 만남을 통한 인간관계의 변화를 통해서 더 큰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 같다.

-146 이러한 이론은 물론 변혁 이론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지만 생산자에 대한 지배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해지든, 사회주의 당 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제도의 핵심 개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지요.

 

제도를 만들 때 인간자체에 대해서 고려를 했지만 인간관계까지 고려하지 못했는데 향후에는 인간관계까지도 더 고려해 보아야겠다.

 

 

<< 옛것과 새로운 것 >>

 

 

-147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가 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추억의 시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다음 글은 진보평론에 기고한 강물과 시간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흔히 시간이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

새천년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미래 담론의 기본 구도는 두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 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 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다.

나 또한 시간에 대해서 유수와 같은 개념을 가졌었는데, 이제는 과거에 대해서, 현재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재해석이 필요하다. 과거를 통해서 결국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149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50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이래서 스승을 찾기도 어렵고, 되기도 어려운 것 같다.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기에 바쁜데, 비판적 창조자가 되어야 하리라.

 

 

<< 그릇이 되지 말아야 >>

 

-150 君子不器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특정한 기능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리라.

 

-152 우리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년 전의 노예 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전문성을 위해서 지금껏 노력했는데 그것이 노예계급의 회귀라니.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인지에 대해서 인식을 못했는데 이번 책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

 

 

-158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존재론과 관계론은 참으로 다른 접근이다. 하지만 존재를 통한 관계맺기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159 특히 심각한 것은,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는 글자 그래도 양자와 대자의 회의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언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듯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닏.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다. 숙지성의 의미가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깊은 멋을 우러 내는것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유혹하는 상품미학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고려가 필요하다. 내가 사고 있는 상품. 왜 그것을 선택하게 되는지. 선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의문을 던져봐야겠다.

 

 

<< 공존과 평화 >>

 

 

-161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 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맺기와 차이 짓기, 즉 데피랑스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정체성이라는 것이 타자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일까? 오히려 차이보다는 나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차이가 그것을 더 부각시키기는 할 것이다.

 

-162 논어의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거슬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면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화와 동이 이렇게 큰 차이를 이루는 것일 줄이야. 그래서 를 지향해서 공존과 평화를 향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163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5 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165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의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존중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화의 원리로 우리의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노력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할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통일을 염두해두었을 때 우리가 자주적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에 대해서 깊은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리라. 그리고 스스로도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해 가야 하리라.

 

 

 

<<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

 

 

-166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167 루쉰의 경우는 심의 의미를 각성과 의식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심호心好를 각성이나 의식의 의미로 읽지 않고 마음씨또는 인간성의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미모의 기준을 외적인 형식미에 둘 경우 사흘이 안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에서 형식미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백범을 넘어서 그리고 루쉰을 넘어서 이 마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대한 고려가 결국에 무의식속에 녹아들어 있는 수준까지 되어야 진적으로 마음이 좋다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168 나는 이 신호불여심호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심호불여덕호가 그것입니다. “마음 좋은 것이 덕 좋은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덕의 의미는 논어의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그래로입니다. ‘이웃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의 의미라면 덕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좋으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넓어지겠지요. 그리고 심호는 착하다는 뜻이고 착하다는 것은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르 소중히 하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심과 덕을 일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덕은 당연히 인간관계에 무게를 두는 사회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심과 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그동안 잘 하지 못했는데 다시한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

 

 

-170 이 구절은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구절입니다.

과연 요즘 정치인이 얼마나 백성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반면에 나또한 그들을 욕할 수 있을까? 각박해진 세상만을 탓했지 나 조차부터 시작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나부터 시작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리라.

 

 

- 170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를 얻으면 백성들은 얼마든지 유입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백성이 곧 식이고 병이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경제도 나오고 백성으로부터 병력도 나오는 법이지요.

이처럼 백성들의 신뢰는 부국강병의 결정적 요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어의 이 대화의 핵심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71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의 회의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은 원래 에게 고하는 자기맹세이므로 이란 곧 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신이 이렇게 엄격한 말인지는 몰랐다. 신에 대한 맹세였다니. 그래서 많은 말을 하는것보다는 말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172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논의해두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은 정이며 정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정치에 대한 심오한 해석이다.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니.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 이러한 것이 구현되면 그 사회가 살아 숨쉰다고 느낄 것 같다.

 

 

 

<< 참된 지는 사람을 아는 것 >>

 

 

 

-174 란 사람을 알아보는 것, 즉 인재를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란 지인이다라는 단호한 선언이 실용적 의미로 왜소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어전체의 구상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 愛人知人 논어의 근본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래서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17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다시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하물며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는 함께 이야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가치와 자본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저 지식을 위한 지식에 대한 공부만을 중요시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지식을 많이 알고서도 오히려 사람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진정한 지식을 쌓고, 지혜의 단계로 확대해나가야 하리라.

 

 

<< 이론과 실천의 통일 >>

 

 

-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죠.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통한 공부를 했는가? 존재론적인 공부만을 해왔던것이고, 그래서 남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것에서 벗어나 나와 남, 그리고 그 관계를 함께 보는 진정한 공부를 해야 하리라.

 

 

 

<<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

 

 

-186 우리는 지와 우에 대하여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했습니다만,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것이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나의 진정한 무지의 수준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것에 대한 성찰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깨진독에 물붓기와 마찬가지이리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임도 구별하여 나를 정확하게 알고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

 

 

-188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 어쨌든 자기의 공을 숨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함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욕無慾과 무사無私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욕과 무사에서 우리의 논의를 끝낸다면 그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윤리학에 갇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무욕과 무사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접근을 이제는 그만했으면 한다.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국민을 우롱하는 나라의 처세에 정말 참을 수가 없다. 무엇이 국민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그들은 제대로 알아야 하리라.

 

 

-189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

 

 

-193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이건 예건 인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94 어쨌든 우리는 논어가 인간관계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론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 질서를 뛰어 넘는 관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대한 접근 경로로 그런쪽으로 한정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관계로 규정했는데, 그것의 중요성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하리라.

 

 

 

<< 광고 카피의 약속 >>

 

 

-198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로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짦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현실의 인간관계의 단순함을 아주 잘 표현한 일이다.

 

 

 

<<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

 

-199 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것으로 삼아서 생활화 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 ,낙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면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서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대부분 단계에서 멈추었다. 거기서 진도를 더 나아가서 단계에 까지 이르렀으나 의 단계까지 간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터득도 존재하지 않았던 같다. 그래서 이제는 의 단계까지 한번 해보는 것이다.

 

 

 

<<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

 

 

-202 인자는 오히려 노장적이기까지 합니다. 개별적 관계나 수많은 그물코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세계를 망라하는 그물, 즉 천망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엔 자신의 업보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돌아오게 되는 것 같다.

 


[ 5.맹자의 의-맹자]==========================================

 

 

 

<<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

 

 

 

-232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안에서 찾는것도 중요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죄책감에 많이 무칠 수 있기에 균형잡힌 시선도 필요하다.

 

 

-233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부에서 찾아보게 됨으로써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게 되는것이리라. 그렇게 하면 남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236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의미합니다.

 

만남, 즉 서로 안다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차례 더 고민했으면 양마저 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만남과 관계가 이루어져야 했으리라.

 

-242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바다를 본 사람을 물을 이야기 하기 어려워한다 >>

 

 

-243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웅덩이가 다 채우기 전에 다른 웅덩이를 채우기에 바빴는데 이제는 웅덩이를 채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245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명심해야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학과라고 할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우직하게 정도를 걸어갈 수 있는 우직함과 여유가 이제는 필요하리라

 

 

 

<<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

 

 

-249 맹자<이루상>의 일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장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신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서 자초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고 잘 얘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 6.노자의 도와 자연 - 노자] ======================================

 

 

 

<<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

 

 

-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뜨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25)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노자 사상은 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과학적 체계를 접하는 것 같은 인식이었다. 인간조차도 거대한 자연속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해준다.

 

-255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257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조작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엄청난 건축을 완성해두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268 굳이 현이라고 쓰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의 본체를 무라고 한다면 무의 의미를 유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도의 본체는 유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무가 아니라 절대적인 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270 노자의 제 1장은 무와 유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 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는 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는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도가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변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유입니다. 형이상학적 체는 무이지만 형이하학적 용은 유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인 도체가 유형인 도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상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노자의 법칙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대립적이고 이분적인 사고를 하면서 살아왔는지 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양분적인 사고 외에 그 중간적인 사고도 필요하리라.



 

 

<< 인위人爲는 거짓()입니다 >>

 

 

-273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와 선이란 사실은 인위적인것이라는 인식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미와 오를 반대개념으로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의 반대개념도 악이 아니라 不善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은 가까이하고 싶은 가치로 규정하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꺼리는 것, 혐오스러운 것으로 규정합니다. 대단히 합리적인 생각이지요. 선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도 미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시대에 갇혀있고 사회적으로 갇혀있지요.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미와 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 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2장의 핵심 개념은 인식과 실천의 반성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위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미와 오가 반대개념이고, 선과 불선이 반대개념이라니……. 인식의 상투성과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하리라.

 

-275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본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6 정치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노자는 유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진짜 도의 경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뽐내고 공로를 차지하려고 하는지? 그것에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했었는데... 그 단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하는것이리라.

설령 다 가져가도 내가 잃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76 결론적으로 노자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속에 살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천박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서 천박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새로운 인식이다.

 

-277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협소한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한 걸음걸이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 뼈를 튼튼히 해야 >>

 

 

-278 노자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참으로 노자답다고 하겠습니다. 현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이거나 그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언어와 논리들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유장한 걸음걸이가 필요하리라.

 

-280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속성에 나는 그냥 그대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물들은 지도 모른채. 소비앞에 길들여서 소비자를 위대하게 생각했고, 생산자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다.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 ”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 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283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노자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

 

무위와 무행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착각하지 말자

 

 

 

<<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

 

 

-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287 노자가 군주학이 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패권 경쟁의 무도한 작위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 그것이 민초들의 정치학인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반전 중명 사상을 설파하고 약한자가 이긴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노자의 비판 담론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민초들의 삶과 투쟁에 뛰어난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이며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8 78장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유유약이 사직의 주인이 되고 천하의 왕이 되는 까닭,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이유를 읽어내야 합니다. 왜 그러한 힘이 약한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오는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 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 빔이 쓰임이 됩니다 >>

 

 

-292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이 되기 때문이다.

 

무의 쓰임이 유의 쓰임이상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것을 잊고 지냈는데 다시 한번 비어있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292 그 자명한 사실의 배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의 배후로서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93 자본주의적 가치란 소유와 소비라는 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실천적 관점이 바로 노자의 현대적 독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없음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비움, 에 대해서 더 고민해봐야 하리라

 

-294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

 

 

-296 간섭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성취되는 것이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구절인 백성개위 아자연입니다.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믿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지요. 무언과 불간섭은 노자 철학의 전제입니다.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입니다. 공을 세우고 일을 성취했더라도 그 공로를 치하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그 공로를 이야기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백성개위아자여’,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우선 신뢰의 문제입니다.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스스로 신뢰감을 갖게 하는 것은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 성취를 해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고, 정치가들은 자신이 백성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있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297 분명히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가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집단적으로 터득해 갑니다.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의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라지요. 여러분이 걸어가는 여러 골목 중의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는 작은 계기로서 추체험 되기 바라는 것이지요.

 

내가 살아가는 현실속에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하고 깨달아야 하리라.

 

-298 치산치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삶은 한강이나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월을 겪어온 것입니다. 장구한 역사를 겪어온 가장 자연스러운 가치와 질서가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노자의 도이고 노자의 자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구한 역사의 가치.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것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봐야 하리라. 그래서 나의 삶속에서, 나의 현실속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

 

 

 

<<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

 

 

-299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는 줄 알았다. 늘 조급했다. 그리고 그 조급함에 대응하지 못하면 아웃이었다. 조급함이 합당한지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맑고 고요함의 의미를 알겠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했을 때 내가 입을 피해?도 알겠다. 이제는 의미있는 선택들을 했으면 한다.

 

-300 의 기준, 즉 최고의 기준은 자연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원초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자입니다.

 

-300 왕필은 사물에 맞춰서 채우되 아끼거나 자랑하지 않으므로 비어 있는 듯하다고 주를 달아놓았습니다. 장자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부어도 차지 않고 떠내어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획일적 형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형식이 없는 경우에는 닳거나 다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대직약굴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을 대절 즉 비타협적인 절개와 지조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역시 고수들의 단계다.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하려는 것이다.

 

-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 그러나 기본적으로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도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언어가 전부인줄 착각하고, 언어로서 얘기하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양측간의 합의 도출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더 중요한 시간임을 알겠다.

 

-302 마지막으로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긴다는 것, 그리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올바름이라는 것은 역시 노자 사상의 당연한 진술입니다. --- 천하의 올바름이란 바로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이란 작위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

 

 

-304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 (Progress Is Simplification)

 

-304 노장 사상을 몇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보다는 정을 만滿보다는 허, 보다는 졸을 웅보다는 자, 그리고 진보다는 귀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 열자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노자는 마치 자연법칙처럼, 그리고 수학에서 ‘0의 발견처럼 정말 큰 사상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다시 한번 음미를 해봐야 겠다.

 

-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7.장자의 소요 - 장자>=========================================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높이 나는 새가 먼곳을 바라롭니다/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 한다/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 쓸모없는 나무아 울지 못하는 거위 / 빈 배 / 나비꿈/ 혼돈과 일곱 구멍/ 참다운 지식/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 8.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 묵자>> ==============================

 

 

 

<<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363 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2천 년 만에 복권된묵자>>

 

 

-370 겸애와 반전 평화를 묵자 사상의 핵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 >>

 

 

-373 묵자는 혼란의 궁극적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

 

 

-382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을 봄으로써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 같다.

 

-382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것입니다.

 

 

 

<<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

 

 

-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돌아보면 웃을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수위조절을 통한 예방이 중요한 것 같다.

 

 

 

<<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

 

 

-388 바로 이 구절이 묵비사염의 원전입니다. 바로 묵자의 소염론입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물드는지도 모른채 물들면서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한 다른 관찰이 필요하리라.

 

-389 절용은 물건을 아껴 쓰는 검소함입니다. 절용은 밖에서 땅을 빼앗아 나라의 부를 늘리는 대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사과론입니다. 과소비를 없애는 것이지요.

 

-390 묵자의 절용이 과연 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문화 그 자체가 과연 인간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용없는 물건의 생산에 대해서도 무척 관대합니다. 그런 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는냐 하는 일견 인간적인 논리로 합리화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구조를 어떻게 짜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 규모와 소비 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진보는 단순화라는 간디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묵자의 <절용>편은 소염론, 사과론과 함께 과잉생산과 대량소비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 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낭비 주고와 함께 거대한 소염 구조도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 9.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 ===============================

 

 

<< 인간의 능동적 참여 >>

 

-408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409 인간의 적극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

 

 

-414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늘 어느 하나에 속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417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와 법도를 알수 있는 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단善端을 갖추고 있다는 맹자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성악설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어서 왠지 미안한 감이 든다. 이제서라도 제대로된 이해를 해서 다행이다.

 

 

<<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

 

 

-422 (순자)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을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게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423 유명한 청출어람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424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 예와 악이 함께하는 까닭 >>

 

 

-427 무릇 음악은 사람의 감정에 파고듦이 깊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므로 선왕이 형식을 신중히 하신 것이다. 음악이 조화롭고 평온하면 백성이 희락하되 질탕한 데로 흐르지 아니하고, 음악이 엄숙하고 장중하면 백성이 정직하여 어지럽지 아니하다.

 

음악이란 사람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음악이란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정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이 음악을 만든 것이다.

 

 

<< 10. 법가와 천하 통일 -한비자>> ================================

 

 

<<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

 

-432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433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

 

<< 강한 나라 약한 나라 >>

 

 

-441 그러나 법가의 법치 원칙은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 법제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 비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 계층이 법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입법과 사법을 동시에 장악하고, 금과 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저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탁과 발, 책과 현실 >>

 

 

-452 이 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나로서는 나 자신을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람이 못되는 것이지요.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현실을 책으로만 접근했는데 매일 부딪치는 일상이 현실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가지 부류>>

 

 

-457 교사가 졸성보다 못하다는 이 말의 뜻을 나는 세상 사람들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죠.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만으로도 한비자는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동문수학한 이사의 속임수에 빠져서 죽임을 당한 것만 보아도 그가 펼친 이론과는 반대로 한비자는 오히려 우직한 졸성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57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법가를 위한 변명 >>

 

 

- 462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내가 저자라면

 

고전을 관계론의 일관된 맥락으로 재해석하여 미래를 창신할 수 있도록 우물안의 개구리에서 나와서 더 넒은 바다의 세계를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성찰의 책이다.

미래는 우리의 현실이고, 현실은 과거에서 찾는것이고, 미래는 과거를 통해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는 고전의 오천년 역사를 거슬러 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법가에 이르러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에 이르는 거대의 고전의 바다속에서 우리를 한껏 빠뜨렸다.

그동안의 고전읽기가 단순히 낱글자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그쳤다면, 그는 이런 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그것을 현대 시점에서 어떻게 해석해서 결국엔 실천적 삶을 통한 창신을 어떻게 해나갈것인지에 대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우리가 서양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우물속에 있는지 조차도 모른채 우리는 우물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우리의 몸속에는 있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양의 세계와 가치관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주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이 논어와 노자, 장자에 대한 해석이었다.

 

- 논어의 인간 관계론을 성찰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올린 저자의 남다른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논어를 몇 번 읽어보긴 했지만 군자의 에 대한 것, 배움에 대하는 자세 등 윤리 교과서 수준에서 읽었다면, 이번에는 和同論’, ‘’, ‘아름다움’,‘知人, 知愛공부 등 근원적으로 다시 볼 것을 강조했다.

 

-노자사상이 이렇게 깊은 것인 줄 처음 알았다. 마치 자연 법칙과 같은 것이었다. 자연의 일부분로서의 인간의 모습이어야 이러한 사상 체계속에 흡수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체제하에서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위적이나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노자의 철학을 귀본歸本의 철학이고 본은 이며 자연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자연과 떨어진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장자의 정수인 소요유,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제물론편의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나비꿈’, 양생주의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변무의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천지의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 천도의 책은 옛사람의 찌꺼끼입니다. 산목의 쓸오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빈배’ , 혼돈과 일곱구멍, 참다운 지식,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의 대표적인 이야기 하나하나가 기존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것들에 대해서 다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물안 개구리인 나는 과연 어떤 우물안에 있는것이고, 우물을 떠난 개구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그리고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 정신은 처음 알게 되어서 인상적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고 가진 자의 역사인데, 하층민과 민중까지 고려한 그의 사상이 놀라웠다.

 

신영복 선생님의 깊은 사색에서 나온 고전에 대한 해석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작은 것에 분개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장구한 역사속의 한점을 살아오면서 부딪치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화를 내곤했는데, 아무일도 아니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절제된 단어 선택이 의미 전달을 더욱 깔끔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책에서도 얘기했듯이 우리가 자본주의를 통해서 물질의 낭비, 인간의 소외, 인간관계의 황폐화에 대해서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한 면으로는 불교의 연기론과 맞물리는 것이기에, ‘관계론의 입장에서 이 책을 더욱 더 재미있게 보았다.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서론에서 동양고전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과 관계론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 후, 오천년 역사에서 중요한 고전과 그것의 중요 사상, 사상의 변화를 순차적으로 소개하였다.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을 다루었으며, 주요 내용 위주로 재해석을 하였다.

 

-목차

 

1.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 국어사전 290/ 화두와 오래된 미래’ / 천지현황과 I am a dog /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 ‘인간은 인간 관계입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2.오래된 시와 언 - 시경, 서경,초사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 풀은 바람속에서도 일어섭니다 / 기록은 무서운 규제장치입니다/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초사의 낭만과 자유 / 현실과 이성의 영원한 갈등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3.주역의 관계론 -주역

바닷물을 뜨는 그릇/경과 전 / 효와 괘/주역읽기의 기초 개념 / 위와 응/죽간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 지천태 / 천지비/ 산지박/화수미제 /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4.논어인간 관계론의 보고 -논어

춘추전국시대/배움과 벗/ 옛것과 새로운 것 / 그릇이 되지 말아야 /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 공존과 평화 /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 참된 지는 사람을 아는 것 /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이론과 실천의 통일/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광고 카피의 약속/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 공자의 모습

 

5.맹자의 의-맹자

어찌 이를 말씀하십니까?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 한다/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6.노자의 도와 자연 - 노자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인위人爲는 거짓()입니다 / 뼈를 튼튼히 해야/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빔이 쓰임이 됩니다 /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진보란 단순화입니다

 

 

7.장자의 소요 - 장자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높이 나는 새가 먼곳을 바라롭니다/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 한다/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 쓸모없는 나무아 울지 못하는 거위 / 빈 배 / 나비꿈/ 혼돈과 일곱 구멍/ 참다운 지식/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8.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 묵자

여러 사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묵자의 검은 얼굴 /2천 년 만에 복권된묵자/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9.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

하늘은 하늘일 뿐/인간의 능동적 참여/성악설의 이해와 오해/예란 기르는 것이다/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예와 악이 함께하는 까닭

 

10. 법가와 천하 통일 -한비자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강한 나라 약한 나라/임금의 두 자루칼/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가지 징표/탁과 발, 책과 현실/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가지 부류/교사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한 법/ 법가를 위한 변명/ 천하통일과 이사

 

11. 강의를 마치며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도전과 응전/ 대학독법 /이학理學에 대한 심학心學의 비판/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가슴에 두 손

 

 

 


3) 보완점

책의 중용 내용에 대해서 본문 원전을 설명하다가 내용관계상 생략했는데, 부록으로 그 부분까지 실어주고 한자 독음에 대해서도 병기해주면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 이 책의 키워드는?

관계론, 사실성, 진정성, 겸손과 절제, 변화, 시적 관점, 온고창신, 격물치지, 천성,

 

IP *.113.7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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