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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일 15시 09분 등록

여행전야_스페인 연수에 즈음하여

2014. 7. 31


며칠전 입니다. 끝물 장마에 습기 잔뜩 머금은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화요일, 아이들과 시내 나들이를 갔습니다. 교보문고, 알라딘 중고서점, 교동시장 빈대떡, 악세사리 가게 몇 곳 눈 쇼핑, 들어오는 길에 서른 한가지 아이스 크림 가게에서 늘어지기 등 언제나 비슷하게 돌아 오게 되는 길입니다. 

아이들이 교보에서 악세사리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먼저 중고서점으로 왔습니다. 늘 처럼 검색창에 몇 분의 이름을 넣어 봅니다. 구본형, 김훈, 법정 ... 역시 행운은 없습니다. 동양고전 몇 개를 더 검색해 보지만 맘에 드는 책이 없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지난 주 주인공인 ‘신영복’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다행히 몇 권의 책이 검색되었습니다. <더불어 숲 1, 2> 오천원, <나무야 나무야> 이천사백원, <처음처럼> 사천구백원, 이렇게 해서 모두 네 권 입니다. 쓸어 담듯이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모두 다 해도 책 한권 값이니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의미 있게 현명한 소비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이들을 기다리느라 구입한 책을 잠시 읽을 시간이 생겼습니다. 손에 닿은 책은 <더불어 숲> 1편 이었습니다. 습관대로 호구 조사부터 시작합니다. 1998년에 출판된 책이로군요. 잠시 상념에 잠겼습니다. 이때 나는 참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이 무렵 이 책을 만났더라면 아마 찰라의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숨막히는 고통도 뼈를 깍는 아픔도 견디고 견뎌서 남보다 한발짝이라도 더 앞서가야 했으니까요. 머리속엔 온통 성공, 진학, 효율, 합리화, 구조조정 따위의 단어들이 IMF의 혼돈과 함께 꽉 들어차 있을 때 였던 것 같습니다. 


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책갈피처럼 엽서 한장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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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경아

23번째 생일 진심으로 축하한다. 만난지는 오래됐는데 생일은 한번밖에 챙겨주지 못한 것 같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우리는 마냥 어린애 같은데... 하지만 나이 값을 하기 위해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지? 뭔 말이여...여하튼 축하해.

98. 8. 21

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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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로 꼭꼭 눌러 쓴 엽서가 시간을 꾹꾹 눌러 놓은 것 처럼 선명합니다. 좋은 책을 골라 선물한 지혜롭고 착한 진선이와 좋은 친구를 둔 경아가 불혹의 문턱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 졌습니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엽서가 16년이 지난 어느 날 이렇게 문득 출토되어 다시 태어난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녀들은 아직도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을까요. 왠지 그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잘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들 덕분에 한 동안 촉촉하고 따뜻했습니다. 


그녀들의 엽서 덕분이긴 합니다만. 시간을 이길 수 있다는 평소의 생각에 상당한 정도로 설명이 가능한 좋은 사례를 하나 발굴한 것 같아 흡족했습니다. ‘이긴다’는 것은 대결구도의 투쟁에서 상대를 누르거나 멸하고 일어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견디다.’, ‘감내하다.’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 앞에 견디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오롯하게 살아있는 글을 대할때면 이런 주장은 빈약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읽었던 많은 고전들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생력이 더해져서 오히려 더 젊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읽고 있는 <맹자>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천오백년을 건너 왔지만 오늘 날 간절한 말들이 넘쳐 납니다. 물론 시간에 관한 나의 말들은 주장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개인이 가지는 단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이야기가 잠시 벗어 났습니다. 엽서를 곱게 갈무리하고 책을 펼쳤습니다. 신영복 선생이 해외여행 중에 각지에서 보낸 엽서를 엮은 것이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간 여행이었는지 여행 가운데 쓴 글인지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만 여전히 나직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여행지에서의 단상을 전해옵니다. 첫 대목이 스페인 우엘바 항구의 산타마리아호 앞에서 쓴 글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운명이 데려다 준 끌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몇 개월, 고전 삼매경에 빠져 있던 중에서도 다음 주 앞으로 다가온 스페인 연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행의 설레임 따위가 아니라 염려였다는 것이 가까울 것 같습니다. 생경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만 더 큰 문제는 여행의 개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삶 동안 단 한번도 스페인을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연수란 이름으로 가는 여행이니 만큼, 더구나 어려운 여건 가운데 가는 여행인데 먹고 마시고 떠들고 말기엔 안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개념조차 잡지 못하고 있으니 데카상스로 묶어 낼 여행기를 어떻게 전개할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몇 권의 책과 여행기들을 찾아 봐도 먹고 마신 이야기와 생경한 풍경들에 대한 찬사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과 가우디가 만든 집들은 내게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하면 통한다고 했지요. 옛 글은 어김이 없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짧은 글은 암연의 바다에 한점 빛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제게 암연의 바다였습니다. 


“내가 이 엽서를 적고 있는 이 항구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마을입니다. 그러나 이 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며 유럽과 아프리카가 가장 가까이 닿은 곳입니다. 두 대해와 두 대륙이 만나는 곳입니다. 내가 이 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이 곳이 바로 500년 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출항한 항구이기 때문입니다._더불어 숲1 16p.”


새로운 천년이 시작될 무렵 약탈과 살육의 잔인한 20세기를 열었던 그 출발지에서 선생은 다시 새로운 천년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와 아내는 여행 후 풀어야할 큰 숙제를 안고 이번 여행을 떠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떠나는 이번 여행이 그대들이나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 사뭇 궁금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 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많은 이야기를 안고 돌아올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2009년에 아내와 함께 중국 운남이라는 다소 오지스러운 곳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마흔이 되어서야 평생 처음으로 떠난 해외 여행이었고 처음 배낭 여행이었습니다. 이 여행의 흔적 가운데 서문을 꺼내 보았습니다. 여행은 추억이라고 하더니...나쁘지 않은 것 같아 옮겨 봅니다.


~~~~~

서방은 애지중지하던 카메라 팔아서 여비 마련하고 마누라란 인사는 직장 때려치우고 생활비 헐어서 다녀온 운남땅 기록들을 여기에 모았다. 


마흔에 배낭 하나 달랑 짊어지고 계획 한 자락 없이 떠난 여행!


떠나지면 떠나는 것이고 

떠나지지 않으면 그대로 족하였다.


생활비 한 푼이 빠듯한 형편에 여행보따리 꾸릴 궁리에 골똘하는 모습이 밉게 보였음직도 한데 여행을 목전에 두고 아내는 불쑥 따라나서겠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도 정리해야 하고 아이들도 어른께 맡겨야 했지만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고 빠른 선택과 집중의 힘을 보여주었다.


여행중에도 아내는 

나보다 더 즐겼고

나보다 더 느겼으며

나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팍팍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절박함이었지만 여행은 생각 만큼의 산소통은 아니었다. 벗어두고 가려 했던 현실들이 질기게 따라 붙어 있었다.


버티면 버텨지는 것이 아니라

버텨지면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버텨지건 말건 벼텨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이것이 나를 괴롭히던 숙주임을 알았을 때 한없이 슬펐다.

그에게 위로가 필요했다.

이번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그에게 주는 작은 위로 같은 것.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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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21:03:27 *.160.136.90

다녀오고 나면 어떤 현실이 우리 앞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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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22:18:16 *.101.168.170

문체가 바뀐 것 같네요, 조곤조곤 이야기체로..., 피울선생^^

여행전야부터 이미 여행은 시작되었군요, 책 속의 여행과 옛날 부부의 첫 해외나들이의 추억까지 모두가 스페인 장정의 이야기로 집결됨을 봅니다.

좋은 여행기 하나 탄생할 것 같은 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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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6:00:51 *.113.77.122

부부가 함께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그냥 떠나는 그 자체, 그리고 거기서 맘껏 느끼고 오시길 바랍니다.

버리고 새로운 출발이 될 여행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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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8:27:41 *.94.41.89

사진에서 본 그 엽서.

전 우연히 옛 날 시집을 책꽂이에서 발견했는데

그 속에 제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있더라구요.

그 시집은 아내의 시집이거든요.

아 오글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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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5 10:33:42 *.218.175.50

언제 어떻게 떠나든 여행에 대한 예의는

몸과 마음을 다 풀어놓고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랍니다.

그것이 함께 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는 길이고,

같이 간 사람들의 즐거움을 더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즐기고 충만해졌을 때,

그 느낌과 경험은 스스로 성장하여 꽃을 피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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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01:20:02 *.254.19.183


여행 전야에 신영복선생의 글귀를 발견하다니,  멋진 동시성입니다.

지금 여행의 한복판에 있겠네요.

원하는 만큼의 의미를 담뿍 안고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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