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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일 21시 28분 등록

<도덕경>

1 저자에 대하여-노자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은 이(), 이름은 이(),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생애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이 쓴 〈사기〉의 노자전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지금의 허난성 루이 현) 사람으로 주(BC 1111~255) 수장실의 사관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점성·성전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와 덕()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 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에 노래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이 진(BC 384~362)의 헌공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 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家系)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 뒤 종교계에서 성전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 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 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 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사상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에 있으며, 그것이 ''()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 (),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나를 담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도가 도라고 불리는 순간 도가 아니듯이, 나를 새롭게 담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동안 나를 지켜준 이름 말고, 이제는 나를 더 넓고 깊게 발전시키고 비울 수 있는 박학한 무지와 습명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엇인가에 도달했으면 좋겠다.

도덕경을 읽었다면 나의 삶에 노자의 모습이 그전보다 더 많이 드리워지길 바란다. 내 안에 노자를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노자에 대한 실존에 대하여 설이 분분하고 정확하지 않다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도덕경을 읽었고, 그의 말을 만났으면 그만이지, 실존인물이 누구인 것이 무슨 소용이랴? 이 글이 2,000년 이상이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삶의 모습이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놀랍고 아쉽다.

노자….멋진 그대를 <도덕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어 행복했으며 그대가 누구이던 간에 이 글만으로 충만함을 안겨주었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007 1940년대에 동양 사상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임어당은 동양 문헌 가운데에서 어느 책보다도 먼저 읽어야 할 책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007 진영첩은 “<도덕경>이 씌이지 않았다면 중국 문명이나 중국인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007~008 우리가 의식하든 그러지 못하든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이 우리의 의식 심저를 움직이고 있고 그것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종교 철학, 예술,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 공자의 윤리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상이 우리 생활에서 양적인 외면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면, 노자의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사상은 우리 생활에서 음적인 내면 세계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008 <도덕경>은 중국 고전 중에서 주석서가 많기로 유명한 책이다.

008 <도덕경>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책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도와 덕에 대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중략) ‘는 우주의 궁극실재혹은 근본 원리, ‘이란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 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을 보라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010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노자의 사상을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고 송두리째 떠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려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고 그와 함께 생각하며 내면적 대화를 가짐으로써 뭔가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1장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도의 본체론적 측면

019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지만 그 이름에 나를 다 닮을 수 없는 것처럼, 도라는 것 자체도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 한정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미 도에 갇히는 것이지 않을까? 내 이름….나를 지키는데 내 이름은 많은 힘을 주었다. 자존감, 자부심 이런 것들이 내 이름과 더불어 나를 지키게 했다. 지금은 좀 더 넓어지고 자유로워진 의미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이름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속성을 바꾼다면 바뀌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그전 내가 사용하던 의미의 이름이 답답하고 고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좀 더 자유로워진 나의 이름이 필요하다. 나에게서 참치와 바람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020 이렇게 감지할 수 있고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도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무엇이다. (중략) ‘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의 대상일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느낄 수 있으나 만져지지 않는 것, 알겠으나 잘 모르겠는 것. 이런 느낌이 맞나?

020~021 ‘라든가 뭐라고 이름이나 속성을 붙이면 그것인 이미 그 이름이나 속성의 제한을 받는 무엇으로 절대적인 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명 혹은 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는 이름도 붙일 수가 없는 것이구나! 그래서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가 아닌 것이구나!

021 우주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무엇,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도록 하는 기본 원리, 그것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우주의 기본 원칙 같은 것, 그런 의미로서 ‘The Way’, 그런 의미로서의 궁극 실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021 만일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깊은 형안을 갖게 되면 전자인 실상계의 신비를 직관하게 되지만, ‘욕심을 가지고사는 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만을 감지하고 살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쉬운 일인가? 욕심을 비우지만, 주변과 더불어 살면서 욕심이 생기고, 나만 비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욕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 상호관계성 확인

023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

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도대체가 뭔 말인지….(책을 다 읽은 지금은 알겠다. 이 의미를)

023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

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성인(자유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모든 일 생겨나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루나 가지려 하지 않고, 할 것 다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공을

 쌓으나 그 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024 우선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말하고 있다.

첫째, (중략) ‘길다’ ‘짧다하는 것은 독립적인 단독 개념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으로 의존하는 상대개념이다.

둘째, (중략) 한 가지 사물이 서로의 관계에서도 길기도 하고, 동시에 짧기도 하다는 뜻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비본질적 사고라 할 수 있다.

025 이른바 분별의 세계, 일상적 세계를 초탈하라는 것이다. ‘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

로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원론

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 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

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025 (성인) 어원적으로 귀가 밝은 사람,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

람이라는 뜻이다. (중략)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

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 가는 사람을 뜻한다.

025~026 이런 성인은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무위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그리고 <장자>에서 가장 중요시되

는 행동 원리다. (중략)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나는 무위를 실천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나도 안되면서 남이 안되는 것을 보고 비웃고 욕까지 했으니나의 실체를

 본 사람들은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3장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 안민의 길

027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귀중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마십시

.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탐날 만한 것 봉이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027 억지로 하는 힘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028 훌륭한 사람을 표창하여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도록 떠받들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힘

쓸 것이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정부가 기관에서는 이런 통념에 따라 표창장이니 훈장이니 하는 것을 적격

자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널리 공표한다. 노자는 이런 상식적 관례를 깨어 버리라고 한다.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029 노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만하다는 것이 진정으

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029 ‘무지’ (중략)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얻어진 일상적인 지식, 세상을 도의 입장에서 보지 못한 단견, 소위 분별지

로서의 지식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잘못된 배움을 없애 가는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이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 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

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학한 무지근래 들은 말 중에 참으로 멋진 말이다. 나도 박학한 무지를 갖고 싶다. 제한된 안목에서 벗어나 겸손해

지며 계속 버리고 받아들임으로써 도달 할 수 있는 경지 말이다.

030 도의 길은 이런 지식을 버리는 과정이다.

030 중요한 것은 이런 일상적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경지를 추구하기 위

해서는 일상적 지식을 넘어서는 참된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일상적 지식이 주는 편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깨닫는 것이다. 하상공의 말처럼 우민이 아니라 안민의 장이다.

>내가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 참 부끄럽네. 물론 그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라는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편견에서 해방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죽기 직전?

4장 도는 그릇처럼 비어 - 도의 쓰임새

033 도는 대립을 함께 포용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총체이기에, 이런 것을 둔화시키고 중화시켜서 둥글고 화통하고 부드

럽게 해준다. 말하자면 음적인 현상과 양적인 현상의 조화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자연적인 것 치고 직선

인 것, 직각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033 (중략) 너무 혼자 맑은 체 도도하게 굴거나 하지 말고 양쪽을 함께 포용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라는 것

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태 내가 해왔던 거잖아. 똑 같은 사람인데 말이야. 어차피 종이 한장 차이인 것을 뭐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살았는지 몰라.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원래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인데 말이야. 사실

은 물릴까봐 두렵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지. 진정으로 강자였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두려움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034 사실 세상의 세상됨이란 도가 세상과 하나됨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됨됨이가 도의 모습 그대로이다.

는 전적으로 초월적이기도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내재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겸하고 있는

 변증법적 실재라 할 수 있다.

034 도는 우주의 궁극 근거로서 무시적이고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이라는 뜻이다.

5장 짚으로 만든 개처럼 - 도의 무편 무당성

036 ()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의 상관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라는 것이다.

036~037 인이란 도가 제대로 받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강조되는 법이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인위적, 의식적으로 조

화스럽게 유지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은 결코 인간의 최고 덕목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도와 하나되고, 자연과 인간

이 모두 도에서 하나되어 도덕적 요구 같은 것은 저절로 충족되므로 인이니 의니 하는 윤리적 차원 따위는 모두 잊어버

리고 신경쓰지 않는 상태가 최고라는 이야기다.

037 일상 생활 중에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기 쉽고 쓸데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말 많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같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을 옳은 일이 못 된다는 뜻이리

.

>….하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말씀이 많이시지만 실수를 한다거나 상처를 주시지는 않는데, 말이 많다는 것 자체가 옆

에 있는 사람한테 얼마나 큰 스트레스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을 끊임없이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나는 힘들

. 특히 나는 이비인후과 쪽이 약한데, 귀는 금방 피곤함을 느낀다. ….모든 것이 적당해야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도같

이 궁극적인 것에 대해 말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한다.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잔소리가 된다고 했다. 도는 행위로

보여주어야지 말로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6장 도는 신비의 여인 - 도의 여성적 특성

039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비의 여인.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과 근원. 끊길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릅니다.

040 여기서는 자식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여인, 생산적 기능의 상징으로서의 여인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고 했다. 약한 것 같지만 끊어지는 일이 없고, 쓰면 줄거나 없어질 것 같지만 언제나 이

어지고, 텅 빈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 내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이런 신비의 여인보다 의 항존성,

 수납성, 창조성, 생산성, 개방성을 더 잘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는 말에서 나는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다. 할 말이 없다. 엄마가 된 수 많은 여성

을 존경했고, 나도 드디어 엄마가 되었다는 즐거움이 있지만, 생산성이라는 말과 연계시킬 때 내 입에는 자물쇠가 채워

진다. 잠시 수면아래로 떨어뜨린 욕망은 가끔씩 고개를 든다. 숨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오는 돌고래처럼. 그것이 물 밖으

로 나올 때 큰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내 맘에도 깊은 파도가 친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뎌지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반쪽자리 여자임을 알지만, 온전히 인정하기가 아직도 힘들다. 아주 오래된 싸움이건만 생명력이 길어 불뚝불뚝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선다.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그것이 꺼지는 날 나의 숨도 함께 꺼질 것 같다.

040 무엇보다 여인도 계곡처럼 자기를 낮은 곳에 두고, 허허하고, 고요하고 탁 트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생

산한다는 면에서 서로 같다. 그래서 여기서는 계곡과 여인을 묶어 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반쪽자리 도가 되겠구나! 도를 완성할 수 없겠구나! 하기야 반쪽이라도 하면 다행이지.

041 ‘여성 신학에서는 이제 신을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는 대신 하느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

.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지만, 너무 길고 거추장스러우니까 둘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한다면

 하느님 어머니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느님 어머니가 더 자연스럽고 어울린다.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하네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는 삶

044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게 된 참삶을 뜻하

기 때문이다.

044 “자기 부정의 길이 곧 자기 긍정의 길이라는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참 자기가 새롭게 탄생된다는 것이다. 자기

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영존시키는 길

임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때, 부정하고, 버리고, 비울 대상으로서의 자기란 작은 자기’, ‘자의식으로 도사리고 있

는 자기’, ‘이기적인 자기라 보고 이런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라는 의식마저도 없는 활발한 자기’, ‘남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기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작은 자기를 진정한 자기라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해서 그 꿈을 키워보려 하다가는

큰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이런 작은 자기를 부정하고 비우면 큰 자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비본래적인 작

은 자기에 대해 죽으면, 본래적인 큰 자기가 되살아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역설의 논리다.

>! 어렵다. 뭔지 모르지만 어렵다. 어렵지만 내가 과연 이런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

046 이런 의미에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란 말이 참으로 명언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명언임

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실천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8장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물에서 배운다

047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

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받을 일도 없습니다.

048 물은 도의 최고 상징이다. 우선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이 없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이는 아예 처음부터 삶이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물은 실로 생명의 근원이다. 사람이 물을 마셔야 산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현상이다. 그래서 물을 생명수또는 생수라고도 한다.

049 물이 더러운 곳을 씻어 준다는 것은 남의 허물을 대신 떠맡는다는 뜻이다. 물에다 더러운 걸레를 빨 때 물은 걸레를

나무라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그것을 그대로 수납한다. 세상 허물을 대신 지고 가는 셈이고, 이렇게

세상 허물을 짐으로써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049 물이 장미를 아름답게 피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장미의 아름다움을 찬탄한다. 그러면 물은 밑에서 내가 도와

주지 않았다면 장미가 필 법이나 한 이야기요? 장미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기 전에 내가 한 일을 인정해야 할 것 아니오

하는 따위의 말로 장미와 경쟁하지 않는다. 또 장미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찬탄을 듣고 혼자 좋아하고 있으면 장미를 향

너는 내가 네게 해준 일을 고맙게 생각할 줄도 모르느냐. 그렇다면 그야말로 배은 망덕이지.” 하는 따위의 말로 장미

와 다투지도 않는다.

만물은 물 없이 못 살지만 물은 그들을 이롭게만 할 뿐 그 공로를 인정받자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 밑에서 묵묵히 섬기는 일을 할 뿐이다. 사실 장미 자체도 대부분 물로 된 것이 아닌가!

엄격히 말하면 물은 자기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방식 그대로가 남에게 이익을 주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스런 행동, ‘함이 없는 함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동을 행동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런 것을 가

지고 공로를 주장하거나 인정을 받겠다고 하는 마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자기 존재 방식에

따라 존재할 따름이다.

물의 존재 방식은 무엇인가? 모두가 싫어하는 곳,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자기를 낮추면서 흐르는 것이다. 모두가 높

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안달하지만 물은 그런 일과 상관없이 우주적 원리에 자기를 턱 맡기고 유유 자적 낮은 데로 임할

 뿐이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꾸준하고 조용하게, 성실하고 정의롭게, 오직 섬기는 자세로 시의 적절하게 움직이는

, 어느 누구와도 겨루는 일 없이 자기를 끝까지 낮추는 물, 과연 누가 이런 물을 나무랄 수 있을까? 여기에서도 자기

겸비가 자기 승귀의 길이라는 종교적 역설이 통하고 있다. 물처럼, 물처럼 되라.

9장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집착에서의 해방

051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무디어집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재산과 명예로 자고해짐은 재앙을 자초함입니다.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

052 아무리 바람직한 것이라도 지나치면 역효과를 가져온다. 칼을 벼려서 계속 갈고 있으면 어느 정도 까지는 계속 날

카로워지다가 정도가 지나치면 날이 넘어 도리어 무디어진다. 이른바 수확 체감의 법칙이라는 것인가? 논에 비료를 줄

 때 비료의 양에 따라 수확량이 올라가다가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비료의 양을 늘려도 수확량이 계속해서 비료 증가량

큼 늘지 않고 상대적으로 그 효과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지나치게 줄 경우 벼가 다 타죽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적

당한 정도에서 멈출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052~053 <도덕경>에서 밝히는 기본 가르침 중 하나가 되돌아옴의 원리다. (중략) 시계추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달도 차

면 기울기 시작하고 완전히 기울어 없어진 다음에는 다시 생겨서 차기 시작하고, 바다에도 물이 들었다가 그 극점에 이

르면 다시 나가기 시작하고 나갔다가 극점에 이르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고, 밤도 깊어져 가장 어두운 시점에 이르면

다시 밝아지기 시작하니 밝았다가 다시…. 계절도, 부귀도, 영화도, 희로 애락도, 승강기도, 정치 생명도 모두 이렇게 나름

대로의 작은 원, 큰 원을 그리면서 주기적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반복 작용을 하는데 이것이 도의 움직임이요, 우주의

 리듬이라는 것이다.

053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

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삶을 그만큼 여유 있는 자세로 대할 수 있게 하는 셈이다. 꼭대기에 올랐다고 너무 기뻐하거나 바

닥에 내려왔다고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 끝까지 오르지 못했다고 안달하거나 끝까지 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필

요도 없다. 인생의 기복에 그저 의연할 따름이다.

053~054 부유하든 가난하든 재산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인생의 더 깊은 면에 눈을 돌려 보지 못하고 평생을 그저 돈

 생각만 하다가 미쳐 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의 부귀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까지 갖게 되어 그만큼 위

험 부담이 크다고 할까? 가난한 사람도 물론 쓸데없이 비굴해지거나 부유한 사람을 질시하게 되는 등의 위험 부담을 안

고 있기는 하다.

누구나 자기가 할 일을 다 했으면 물러나야 한다. 처음부터 자기가 할 일도 하지 않고 은자의 생활이나 도피 생활로 죽

치고 앉아 있는 것도 문제지만, 할 일을 다 하고도 한 자리에 어물쩍거리거나 버티고 앉아 있는 것도 곤란하다. 둘 다 빙

글빙글 돌아가는 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라. 그래서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물러남이 있을 때 새로 들어옴 있다. 이것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이다.

10장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않고 순수한 자기 희생

055~056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

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057 수련의 결과로 어린아이 같은 부드러움, 어머니 같은 포용성, 티없는 마음, 맑은 형안 등이 생겼으면 이런 것을 혼자

만 즐기고 끝나는 것인가? <도덕경>에서는 이런 것들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058 결론적으로 도에 입각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도와 마찬가지로 여인처럼, 어머니처럼 만물을

낳고 만물을 그 품 안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소유하려 하거나 거기에 기대려 하거나 군림하거나 좌지

우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능력 내지 영향력으로 바로 현덕, 신비롭고 그윽한 힘이라는 것

이다.

11장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없음의 쓸모

061 우리는 이처럼 보이고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의 유익성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유익성을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것

의 유용성도 함께 알아보고 고마워 해야 한다는 것이다.

061 동양화에는 여백이 많다. 이 여백은 물론 물감이 모자라거나 종이가 남아돌아서 남겨 놓은 공간이 아니다. 여기 매

화 가지에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한 폭의 그림이 있다고 하자. 이 때 우리는 매화 가지와 참새를 그림의 주제로 생각

하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경우 궁극적인 의미에서 매화 가지와 참새는 이 그림에

서 주제가 아니고, 그 뒤에 공간으로 대표되는 무나 공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수단 내지 상징이다. 결국 인식

의 초점이 매화와 참새에서 그 뒤 공간으로 넘어가는 셈이다. 이렇게 초점이 뒤바뀌는 것을 인식의 천이라고 한다.

062 그림이든 시든 유를 통해서 무를,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현상 너머의 것을, 시간적인 것을 통해서 무시간적인 것을

 표현하고 그리고 우리를 안내한다.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역할을 하는 것이다.

있음의 세계 존재의 세계를 보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없음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를 인지하고 체득하라. 이것이 우리에

게 자유를 주는 체험이다.

12정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감각적 욕망의 극복

065 신나는 삶이란 이런 감각적인 것들에 전적으로 무감각하거나 무신경하거나 무관심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색깔,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맛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알아보고, 놀랍고 고마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만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 버리는 것, 탐닉하는 것, 몰두하는 것,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런 즐거움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지 않고 우리의 절대적 관심, 절대적 충성, 절대적 희생을

 요구하는 최고 가치, 최고 목표로 둔갑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를 쓰면 집착이요, 요즘 말로 하면 탐닉이요, 종교

 용어로 하면 상대적인 가치를 절대화하는 우상 숭배이다.

감각적인 즐거움이 외면적인 가치가 이렇게 우리의 궁극 관심이 되면, 우리는 우리의 삶 전제를 바쳐 좀더 보기 좋은

, 좀더 듣기 좋은 것, 좀더 맛있는 것, 좀더 재미나는 것, 좀더 수지맞는 것 등을 추구하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가

없게 되고 만다. 심하면 괴상한 모양, 괴상한 소리, 괴상한 짓, 괴상한 수단을 찾거나 꾸며 내게 된다. 이런 세상적 가치

가 최고 가치로 군림하게 되어 우리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를 경배한다. 우리는 꼼짝없이

 이런 것의 지배를 받는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즐거움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것을 섬기

게 되는 묘한 아이러니가 성립되는 셈이다.

066 그러므로 참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 의식적 현상 세계의 일을 최고 가치로 떠받드는 대신, ‘로 상

징되는 내면적이고 원초적인 내실을 우선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상 세계의 현란함에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마음이 들뜬 사람들인가? 아니면 이런 현상 세계 너머에 있는 실상 세계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내면적인 가치의

 추구자들인가?

>마음은 실상 세계를 보고 싶어 하나 눈은 현상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 눈이 마음을 따라가다가도 어느

새 보면 제 자리에 와 있을 때가 많아. 달팽이보다 더 더딘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에 언제 마음과 눈이 한자리에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데 이것이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한지도 모르겠네.

13장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 지도자의 요건, 자기 비움

069~070 수모를 당해도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고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라는 것일까? 첫째, 남의

 비난이 객관적으로 반드시 타당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판단은 어차피 불완전한 것이므로 이런 판

단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죽느니 사느니 억울하다느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으로 나 스스로를 살피고 반

성하는 계기로 삼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둘째, (중략) 남의 비난을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의 장성을 위한 촉진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 “내 몸이 있음때문이다. 따라서 남의 비난을 받아 자존심이 상하는 등 상처를 입는다는 기분이 들면 아하, 아직 내가

 무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구나.’ 하고 깨닫고, 이 깨달음에 따라 더욱 열심히 나를 비우고 죽이는 정신적 훈련에 매진

하게 되는 것이다.

070 <법구경>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

. 공자님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일이 있나 염려하라.”고 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방되면 얼마나 홀가분한 삶이 될 수 있을까? 여론이다, 인기 관리다, PR이다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요즘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기에 더욱 값진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것이 가능

한 사람이라야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같이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이 마음에서 무한대로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매여있는 나를 보면서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살고 있나? 나는

왜 내가 한 없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표현을 하고 사느냐 하지 않고 사느냐 일뿐인데.

14장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도의 신비적 초월성

073 사실 절대적 궁극 실재로서의 도는 세상의 제일 큰 것보다 더 크고, 동시에 제일 작은 것보다 더 작다. 이처럼 가장

 큼과 가장 작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무엇, 무한히 크기도 하고 무한히 작기도 한 무엇을 어찌 보통의 말로 표현할 수 있

으며 보통의 생각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073~074 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넘어서 초합리적이고 초이성적인 것으로서 독일 종교학자의 거성인 루돌프

 오토가 말한 엄청난 신비라는 것보다도 더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것이다.

도의 근본 자리는 결국 없음의 세계이다. 그러나 도는 그 자체 형상이 없고 모양도 없지만 모든 형상, 모든 모양을 가능

하게 하는 형상 자체, 모양 자체이다. 이렇게 말로만 엮어 나가도 어질어질하고 아물아물한데 도 자체는 오죽하겠는가

? 그야말로 앞도 뒤도 모르는 두루뭉수리 같은 존재 아닌 존재로서,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무엇이다.

15장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도인의 외적 특색

077 딴 사람이 보기에는 무너가 어색하고 모자란 듯 보인다. 사물을 도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을 딱부

러지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열린 마음 때문에 글쎄요하는 정도로만 대답하니 끊고 맺는 데가 없어 보인다. 요즘 말

로 해서 나사가 좀 풀린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도인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도와 하나가 되므로 틀에 박힌 규범이나

주의 주장 등 인위적인 모든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워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도인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한테 익숙하지 않은 나는 앞으로도 알아

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세상은 어지럽고 도인은 없다고 한탄할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만큼 볼 수 있기에.

077~078 “흙탕물처럼 탁하다” (중략)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탁해지지

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

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 세상과 하나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셈이다.

16장 완전한 비움 뿌리로 돌아감

081 엄벙덤벙 살아 가면 아무리 설치고 부산하게 일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결국 미망으로 재난을 당하는결과밖에 가

져오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삶을 삶답게 하고, 일상의 허망한 생각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는 참자유를 누리려면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진리를 궁구하는 데 전념하는 일밖에 딴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바쁘다는 것은 인생의 재난이다. 많은 것을 잃고, 잊게 만드니까.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생각도 꿈도

 다 잊게 만드니까. 나로 살아가지 못하고 타자로 살아가게 만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쁘면 유능하고 그래서 벌어

들인 수입이 다라고 생각하고 살게 될 테니까.

081 영원한 진리를 알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중략) 옹고집이나 독단은 눈녹듯 사라지고 쓸데없이 다투

거나 조그만 일로 안달복달할 일이 없어진다. 통이 큰 사람, 여유 있는 사람,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된다. (중략) 그것을 아

는 저공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는 거기에 구애되지 않는 여유를 보일 수 있다.

082 이런 사람은 도와 하나되므로 작은 라는 것이 없어진 무사, 무아의 사람, 로 새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죽음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비록 몸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영원한 나는 없어지지 않으므로, 그야말로

를 두려워하지 않는경지, “죽어도 살겠고의 경지에 이르는 셈이다.

17장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네 종류의 지도자

083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084~085 이른바 무위자연의 다스림, ‘가만둠의 다스림이다.

두 번째 유형은 유가에서 이상으로 삼는 덕치주의 지도자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유형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지도자이다. 법가에서 떠받드는 법치주의 지도자이다. 진시황제나 요즘 우리 주위에

서 흔히 보는 독재형 정치 지도자다.

넷째, 가장 저질의 지도자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부류이다.

086 다스림은 지배나 강압이 아니다. 뒤에서, 밑에서 북돋아줌이다.

18장 대도가 폐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윤리적 차원의 한계

089 우리가 보통 귀히 여기는 이런 윤리적 가치가 강조된다는 사실은 결국 그런 윤리적 이상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 준다는 뜻이다.(중략) 사랑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만큼 사랑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셈이다. (중략) 마치

 강력한 약이 많고 용한 의원이 많다는 것은 그 사회에 아직 질병이 많다는 것을 뜻하는 증거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089 이상적인 사회란 이런 덕목의 실천을 넘어서서 이런 덕목이 더 이상 문제되거나 필요하지 않은 사회, 윤리적 제약

이나 규범에 머물러 있는 단계가 아니라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환전한 자유의 경지를 구가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090 여기서 가르치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이런 약육 강식의 단계를 벗어나 인간답게 살려고 인의예지 등을 강조하게

 되었지만 자칫 이 두 번째 율법적, 윤리적 단계가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 영역이라 착각하지 말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19장 성스런 체험을 그만두고 소박성 회복

20장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 위대한 인물의 실존적 고독

097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사람은 이처럼 딱부러진 흑백이분의 논

리에 지배되지 않는다.

097 일상적 의식의 합리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이런 차원을 넘어선 사람을 보면 아주 흐리멍텅하고 답답하기 그

지없어 보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098 역사적으로 이렇게 일반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지에서 고독했던 사람이 얼마일까? 인간 역사는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독 속에서 밝힌 진리의 등불로 이 정도라도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런 분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기쁘고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다.

21장 황홀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 도의 존재론적 측면

100 덕이란 도를 따르므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 갈 수 있는 힘, 여유 같은 것이다. 물론 이런 덕을 가진 사람은 윤리적

으로 훌륭하겠지만 판에 박은 듯한 윤리 규범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윤리적 차원을 완성하고 이를 넘어

서 훌훌 자유로이 살아 가는 능력 때문에 ()’의 사람이 된 것이다.

100 <도덕경>를 체득함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100~101 도는 비존재이지만 그것은 일반적 존재를 초월하고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비보통적인 존재라는 뜻으로

서의 비존재이지 존재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비존재로서의 도는 존재의 근원으로서, 좀 철학적인 용어를 쓰면

재들보다 더욱 존재적이다.

22장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겸손의 위력

104 “휘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은 노자 이전부터 내려오던 말인 모양이다.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살아 가는 데 융통성,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중략) ‘휘어짐온전함’, ‘굽어짐곧아짐등이 양립

불가능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불가결의 상관 개념이라는 더욱 근본적인 사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105 성인이란 이렇게 반대의 일치라는 위대한 진리를 통찰하고 거기에 따라 살아 가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어느 한 쪽

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사물을 하나, ‘통전적으로파악함으로 의연함을 유지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세상의 본보기

 된다.

105 일반 사람은 모두 세상을 한 쪽 면으로만 보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절대적으로 더

좋다고 생각하고 그 한쪽을 위해 전심 전력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방식이다.

>나의 사고방식이다.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보는지 몰랐고, 한 쪽만이 전부라는 생각에 그 이외에 것

은 은근히 배척도 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을 때, 나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106 종교란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표로 하는데, ‘구원이란 온전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23장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

108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합하여 온갖 일을 이루어 내지만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하

지 않는다. 별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게 하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하는 등 대자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것을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말로 선전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도 <논어>에 비슷한 말을

 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사철이 순리대로 바뀌고 만물이 생겨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라고 했다.

110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결국 제2단계의 의식을 활용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필요한 단계

이기는 하지만 최상의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인간은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 속에서만 계속 살아갈 수가 없다. 말장

난으로서의 정치, 말장난으로서의 변론, 말장난으로서의 학문 등은 물론 타기해야 할 일이지만, 심지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합리적인 사고와 조리 정연한 말이라도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말로 할 수 없는 경지가 있

다는 것, 이성적 추구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경지를 궁극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경지다. 이것이 바로 신비스런 하나됨으로서 이런 경지가 되면 도마저 이를 기뻐한다고 한다.

>나도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말로 많이 포장하려 했다. 때로는 후회를 하게 된다. 내가 너무 많이 나를 내세우고 오지는

 않았나?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내가 노자를 만남으로서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24장 발끝으로는 단단히 설 수 없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의 역효과

111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없고, 다리를 너무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

은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113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그러다가 결국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한 삶, 그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비교급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차분하고 홀가분한 삶의 담백한 맛을 모르고 사는 비참한 삶이다.

>비교….내가 만약에 비교를 많이 했다면 난 대단히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비

교를 일치감치 걷어 치운 것이 내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되었다.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습관을 정말 잘 들인 듯 하다.

114 따라서 도의 사람은 이런 일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남이 칭찬을 하거나 오해하여 비난을 하는 데 신경쓰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소박하고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살아 갈 뿐이다.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삶

이 가져다 주는 자유와 청복을 누리며 살아 가는 해방의 삶이다.

25장 나는 그 이름을 모릅니다 근원으로서의 도

116 무질서하다는 식의 부정적 의미로서의 ‘chaos’가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포괄

하고 있는 분화되지 않은 무엇을 말한다.

116 <노자>, <장자>에서는 이 혼돈을 모든 것의 시원으로 본다. 통전적, 통일적 실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그 속에 머금

고 있는 완전한 무엇이다.

117 크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것, 무한하다는 것은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에

게 되돌아옴을 뜻한다.

118 ‘는 무엇을 본받는가?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다. 해석이 구구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산천 초목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대로 스스로 그러함이다. 영어로 ‘self- so’

‘spontaneity’로 번역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을 본받는다함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26장 가벼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 - 무거움의 힘

119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입니다. 조용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다닐지라도 짐수레를 떠나지 않습니다. 화려한 경관이 있을지라도 의연하고 초연할 뿐입니

.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임금이 어찌 세상에서 가볍게 처신할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120 땅은 스스로 무거울 뿐만 아니라 산이나 바다나 온갖 무거운 것을 지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사람, 특히 지

도자는 무거운 짐 지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120 ‘연처제비 둥우리라는 등 여러 가지 풀이가 있지만, ‘한가하게 거한다는 뜻으로 제자리를 지킬 뿐 분주하게 쏘

다니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떤 그럴 듯한 유혹이나 꾐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을 허둥지둥 따라가

는 등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물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사물의 어느 한 면만 볼 때 필연

적으로 따르는 단견, 이로 인한 흥분, 조바심 같은 것에 지배되지 않고 자기의 기본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하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1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면 근본을 잃을 뿐만 아니라 임금됨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임금됨을 잃어버린다

는 것은 임금으로서 자리를 잃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더 이상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어져 버렸다는 뜻

이다. 결국 자기도 망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도 망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121 지도자뿐 아니라 우리 자신은 어떤가? 우리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사랑하는가 혹은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화려한 결과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사랑하지만 눈앞에 나타나는 화려한 결과에 유혹되기도 하고 그 앞에서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타인의 평가와 시선으로부터 100프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21~122 그때 그때 임기 응변으로 세상을 살아 가고 약삭빠르게 온갖 편법을 써 가면서 수선을 떨고 사는 삼이 우선은

 성공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도덕경>에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은 그런 삶에 현

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묵직하고 조용하게 사는 삶, 어느 면에서 우직하기까지 한 삶이 결국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런 경

박한 삶보다 훌륭하다는 것이다. 하상공이 이 장을 중덕의 장이라 부른 것처럼, 이 장에서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거움의 위력을 알고 무겁게 살아 가라는 것이다.

27장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도에 따른 행동의 완벽성

125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단계를 넘어 도와 하나된 경지에 이르면 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

은 도가 하는 일이 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흔적이나 흠은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 아닐까?

125 이런 보통인의 차별주의적 단계를 넘어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대하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만의 잣대로 사람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작업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겉으로 온화한 미소를 보이면서도 마음 속에

 철저한 분리와 차별의 잣대를 품고 살았다. 모든 사람을 존엄한 인간으로 대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잣대에서 자

유로울 수 없었고 시시때때로 그 잣대에 휘둘리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속물근성이다. 습명의 경지….도달하고 싶

.

126 선함은 선하지 못함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익충과 해충의 관계이다. 익충은 해충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신선함과

 선하지 못함은 이처럼 둘이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선한 사람을 귀히 여김과 동시에 선하지 못한 사람을

아낄 줄 아는 트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깊은 뜻을 모르고 어는 일면만을 추구하는 일은 지혜로운 것 같

지만 미혹된 상태이다. 여기 바로 오묘한 신비의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28장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양극의 조화

127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협곡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협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

지 않고,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세상의 본보기가 되면, 영원한 덕에서 어긋나지

 않고, 무극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알면서 오욕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세상의 골짜기가 되면, 영원한 덕이 풍족하게 되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 성인은 이를 사용하여 지도자가 됩니다.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자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130 이렇게 원목이 쪼개져 구체적인 개체로 분화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타락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보면

 쪼개짐을 원목 상태로 다시 돌아가기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

틴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행복한 타락일 수도 있다. 실낙원은 복낙원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이렇게 구체

화된 의식 세계, 현상 세계의 사물을 사용하여 사람을 지도한다. 그러나 궁극적 이상을 말한다면 다시 원목 상태를 회복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해석이 구구하지만, 정말로 위대한 마름이나 제도는 쪼개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만은 분명

하다. 분석적,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해방되어 근원으로 돌아감으로 양면을 동시에 보는 통전적, 비이분법적 의식 구조를

 가지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29장 세상은 신령한 기물 외경의 자세

131 세상은 신령한 기물,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하는 사람 그것을

 망치고, 그것을 휘어잡으려는 사람 그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사는 (다양해서) 앞서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뒤따르는 것도 있고,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133 순리가 아니면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장자>에서 말하듯이 짧은 오리 다리를 길게 늘이려 하거나 긴 황새 다리

를 짧게 오그라뜨리려 하는 것은 고통을 가져다 줄 뿐이다. 나라나 사회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그 자체의 생리와 리듬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함부로 덤빌 수가 없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생각나는 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순리이지만, 세상이 원하는 것은 순리를 역행하는 것일

, 나는 어디쯤에 경계선을 두고 서 있어야 할까?

134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이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

.”(1:28)는 명령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천부의 권리라고 믿고 자연을 함부로

 대하던 서양에서는 이제 환경 보호 문제가 큰 이슈로 되어 이를 위한 노력이 전반적을 활발해지기 시작한 데 반하여,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연과 벗할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던 동양에서는 새삼 서양의 과거 전철을 밟아 가는

건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공해 문제가 심각하지만 이를 개선하겠다는 노력이 아직 미미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타임>

지 특집으로 중국의 공해 문제가 크게 다루어졌고 한국에서도 식수 오염 등 공해 문제가 크게 다루어졌고 한국에서도

식수 오염 등 공해가 심각한 정도다.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이겠지. 가지고 있는데 소중함과 지킬 것을 반복하는 것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게 되

. 악이 있음으로 해서 선이 존재하고 부각되는 것처럼, 떠남을 경험해야 소중함이 부각되는 것이지.

30장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전쟁의 비극

135 목적을 이뤘으되 자랑하지 않고, 목적을 이뤘으되 뽐내지 않고, 목적을 이뤘으되 교만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뤘으

되 할 수 없어서 한 일, 목적을 이뤘으되 군림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기운이 지나치면 쇠하게 마련, 도가 아닌 까닭입니다. 도가 아닌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끝장이 납니다.

137 ‘하지 말라는 말을 세 번이나 쓰고 있다. ‘이란 (부드러움)와 반대로서 도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

로만 줄달음치면 결국 쉬이 쇠망하고 만다.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138 ‘강장은 그리 좋아할 것이 못 된다. ‘강장은 쇠망으로 달음질치는 준비 단계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제국이

결국 이웃을 삼키거나 삼키려 할 만큼 강대해진 그 비대증으로 인해 패망을 자초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할 만큼 강대국이 아니었음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오직 남의 나라가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범한 역사

적 죄악을 미리 막아 주지 못할 정도로 방어 태세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은 과거 가지들이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한 역사가 없음을 영예로 생각할 뿐 수치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 무기여 안녕

139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군자가 쓸 것이 못 됩니다. 할 수 없이 써야 할 경우 조용함과 담담함을 으뜸으로 여기

고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이를 미화한다는 것은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살인을 즐거워하는 사람

은 결코 세상에서 큰 뜻을 펼 수 없습니다.

142 한편 남편이나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길모퉁이에서 이를 반대하여 데모하는 사

람들도 잠깐 화면에 나왔는데, 그 중 한 여인은 적군이긴 하지만 몇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살상당했는데 이런 축제

행사가 격에 맞느냐?” 고 말했다. 노자도 아주 외롭지만은 않은 셈이다.

>맞다. 전쟁의 가장 추악한 면은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을 잃는

다는 것이다. 살아 남은 사람 또한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와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고통을 격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구를 위한 전쟁이고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그들이 쟁취한 것이 누군가의 인생과 맞바꿀 만큼 소중한가? 그런 것이 존

재하긴 하는가? 힘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종이처럼 스러지는 것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고스란히 인터뷰하고 방송할 수 있는 언론의 존재가 기쁠 뿐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승리만을 부각

시켰을 것이고, 그 이면은 그늘 속에서 잠자는 대로 두었을 텐데….이런 소리까지 내보낼 수 있는 그들의 언론이 부럽다.

32장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도의 소박성은 지도자의 귀감

143 (다듬지 않은 통나무가) 마름질을 당하면 이름이 생깁니다. 이름이 생기면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세상이 도로 돌아감은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듦과 같습니다.

144 이름 붙일 수 없는 도, 가공하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한 도, 이름도 없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천하에 누구도 이를

 신하 부리듯 함부로 부릴 수 없고 오히려 모두가 거기에 순복하는 것처럼 이 도를 귀히 여기고 이를 지킬 줄 아는 사람

도 겉으로는 이름도 없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세상에서 누구도 그를 함부로 할 수 없고 오히려 모두가 그에게 모여든

다고 한다.

145 이런 현상 세계의 본질과 한계를 꿰뚫어보고 이런 대립의 세계에 계속 안주하거나 몰입하는 일을 멈출 줄 알아

함을 강조하고 있다. 멈출 줄을 알면 위험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조직이라는 것이 나의 순리와 나의 호흡과 같을 수 없겠지만, 어느 날 문득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뛰어내

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남편이라는 안전벨트가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내가 그 동안 달려온 거리

와 스피드를 생각할 때, 멈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그 판단을 지금도

 존중한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146 “범을 좇지 말고 깃을 가꾸라는 속담처럼 위정자나 사회의 지도자가 사람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실적

주의나 얄팍한 인기 전술 같은 잔꾀나 술수를 쓸 것이 아니라, 대우주의 기본 질서인 도와 함께하면 인심은 저절로 모이

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25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진리일까?

>범을 좇지 않고 잡지 않으면서 도를 따르는 사람을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을까? 눈은 온갖 화려한 것을 보며 옛날 사

람들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돌아다니는 경험을 하고 있지만 정작 봐야 하는 것들은 그 화려함에 가려져 볼

 수 있는 혜안을 잃은 것 같다.

33장 자기를 아는 것이 밝음 참 자아의 발견

147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입

니다.

족하기를 아는 것이 부함입니다. 강행하는 것이 뜻있음입니다. 제자리를 잃지 않음이 영원입니다. 죽으나 멸망하지 않는

 것이 수를 누리는 것입니다.

148 ‘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덮어놓고 힘을 쓰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움을 통해 얻을 수 있

는 내면적 강함이다.

14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라” (16:32)

149 요즘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도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 할 줄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그런데 상대적 빈곤감을 덜어 내었다고 생각하다가도 문득문득 고개를 치켜들 때가 있다. 나처럼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사람도 이것이 힘든데 분수를 알고 자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150 삶과 죽음의 상대적 이원성을 초월하여 도와 하나됨으로 도에 따라 생성 변화하고, 도에 따라 생성 변화함으로써

 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도의 것이로다

34장 큰 도가 이쪽 저쪽 어디에나 - 도의 작음

151 큰 도가 이쪽 저쪽 어디에나 넘쳐 있음이여

온갖 것 이에 의지하고 살아 가더라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일을 이루고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온갖

 것 옷입히고 먹이나 그 주인 노릇 하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욕심이 없으니 이름하여 작음이라 하겠습니다. 온갖 것 다 모여드나 주인 노릇 하려 하지 않으니 이름하여

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153 무슨 일을 하고 그것으로 남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이다. 수재민을 위해 얼마

를 기부하면 그 사실에 신문에 나든지 하여 남이 알아주어야 기부한 보람을 느낀다. 교회에 헌금할 때도 목사가 하나하

나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해 줘야 아까운 금전을 헛되게 쓴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다. 신문에도 나지 않고, 이름을

 불리지도 않으면 자기가 나팔이라도 불어 이를 알려야 직성이 풀린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기의 업적을 확대하거나 조

작까지 해 가며 선전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모두 제 이름을 드러내려는 일이다. (중략) 거의 모든 경우 이름을 내려

 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원조받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려고까지 하다. 말하자면 끈이 달린기부이다.

35장 도에 대한 말은 담박하여 별 맛이 진리의 단순성

158 오늘 같은 세상에서 이런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낚으려는 연목구어에 지나지 않

는 일인가?

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변증법적 변화 과정

159 물고기가 연못에서 나와서는 안됨같이 나라의 날카로운 무기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37장 하지 않으나 안 된 것이 없다 무위의 역동성

164 무위가 가능할 대 불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165 이른바 유혹이 언제나 따른다. 뭔가 그럴 듯한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그냥 놓아 둔다는 것이 어딘

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저절로 됨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스스로 달려들어 개입하고 조절하려

는 욕망이 생긴다. 자기 확대, 자기 과시욕이 발동하는 것이다.

166 부처님도 네 가지 거룩한 지리를 가르치면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집착때문이라고 하였다. 집착을 끊은 상

태 곧 욕심의 불길이 꺼진상태, 이 때 가능하게 되는 시원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유의 경지가 바로 니르나바(

)’라는 것이다. 어느 종교나 무욕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는 다를 바가 없다. 나 중심의 생각, 거기서 나오는 덤벙거림

을 청산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평화에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38장 훌륭한 덕의 사람은 덕을 논함

167 훌륭한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합니다.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168 도가 없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없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없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없어지면 예가 나

타납니다. 예는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 혼란의 시기입니다. 앞을 내다보는 것도 도의 꽃, 어리석음의 시작입니다.

168 1장부터 제37장까지 상편 도경이라 하고 제38장부터 제81장까지를 하편 덕경이라 하는 것이 전통적인 분류

방법이다.

170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 이를 추구하는 참삶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

러나고, 오로지 사회에서 떠받드는 고루한 윤리 체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 매끈하게 꾸미려는

 처신의 문제가 주관심사가 되어 버린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창조성이나 자발성은 없고 어떻게든지

 남의 눈치나 살살 봐 가며 남 하는 대로만 따라가려는 일률적 획일성만이 판치게 된다. <도덕경>은 이런 약삭빠르고

얄팍한 예의 껍질을 깨어 버리라고 권고한다. 이런 식의 예는 모든 혼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피상적인 것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동양은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공자의 인이 판을 쳤을까? 우리나라는 왜 유교사상을 받아들였을까?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면서 관습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수많은 행위들이 요즘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을 장손며느리라는 이

름으로 끝까지 끌고 나갈 자신이 없으며 이런 것을 자식에게 되 물림해주고 싶지 않다.

39장 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이 하나의 힘

173~174 ‘하나를 근본으로 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것을 꼴지어 주지만 스스로 어떤 꼴을 취해서 자기를 드

러내려 하지 않는다. 수적으로도 그것은 모든 숫자의 시작이며 바탕이지만 동시에 모든 숫자 중 가장 작은 숫자이다.

런 뜻에서 하나는 자기 낮춤의 최고 상징이다. 인간도, 특히 지도자도 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고 한다.

40장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 순환 원리의 보편성

176 도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도는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근원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 모든 것을 찾아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찾아감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나아가 그 존재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성을 가진 개체로 존재하게 해준

. 이런 뜻에서 도의 근본적인 특성을 창조성이라 할 수 있다.

41장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진리의 역설성

179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180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역설이라고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괄하기 때

문이다. 예를 들면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진리는 절대적이기 위해서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고, 동시에 가장 큰 것보다

더 커야 한다.

181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니라는 뜻이고, 역설적이 아닌 것은 궁극 진리가 아니다. 궁극 진리는

 언제나 일상적 의식을 근저로 한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2 도는 이런 역설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위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역설적 특성 때문에위대한 것이다. 위대하기

때문에 역설적이다. 이런 역설적 특성에 열린 마음으로 귀기울이느냐 아니면 무조건 조소하고 거절하느냐에 따라 사람

의 됨됨이가 저울질 되는 셈이다. 도는 숨어 있고이름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든 것의 존재 근원이요,

 모든 것의 생존 원리로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귀 있는 자른 들으라. 눈 있는 자는

보라.

42장 도가 하나를 낳고 도가적 코스몰로지

186 끝으로 노자는 세상에서 흔히 쓰는 말로 해서 강포한 자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사실, 좀 적극적인 표현을 빌리면

 자기를 낮추어 겸손함으로 서로 조화스런 관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강함을 버리고 부드러움을 취해야 한다

는 사실을 자기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는다고 공언하고 있다.

43장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 부드러움이 머금고 있는 힘

187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겨 냅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

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함이 없음의 유익을 압니다. 말없는 가르침, 무위의 유익에 미칠 만한 것이 세상에 드뭅니다.

189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신념이 있다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 반드시 어리석은 일만은 아니다. 합쳐진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 반드시 어리석은 일만은 아

니다. 합쳐진 달걀의 힘은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바위도 결국은 움직여 놓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190 물처럼 묵묵히 설치거나 조급함 없이 순리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것, ‘함이 없는 함’, ‘무위의 위가 더욱 확실하

고 유익한 방법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된다고 하였다.

44장 명성과 내 몸, 언 것이 더 귀한가?우선 순위의 확인

191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내 몸과 재산, 어느 것이 더 중합니까?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더 큰 관심거

리입니까?

194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능력을 주시옵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45장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고졸의 멋

196 ‘고졸古拙이라는 말이 있다. 고풍이 돌고 뭔가 서툰 것, 그러면서도 내면에서 풍기는 어떤 멋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음을 이른다.

46장 족할 줄 모르는 것 부지족의 위험

200 이렇게 비참한 전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도덕경>은 그것이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만족할 줄 모르는 마

이라고 본다. 족할 줄을 모르면 계속 뭔가를 더 얻겠다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런데도 그 갖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47장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내면적 성찰

203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다 알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습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만큼 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훤하고, 억지로 하는 일 없이도 모든 것을 이룹니다.

205 일단 우주의 근본 법칙인 도를 꿰뚫어 보는 능력만 갖추면 그 도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 만물이 어떠함은 그대로 알

 수 있을 터이니, 부산하게 밖으로 쏘다니지 말고 우선 도를 찾는 데 전념하라는 뜻이다.

>그럼 방구석에 앉아서 읽고, 깨우치면 도를 찾을 수 있을까?

206 최근에도 에리히 프롬 같은 사람은 우주선 발사 등으로 우주 공간에만 쏟는 우리의 관심을 내부 공간에 기울이고,

우주 공간을 탐색하는 우주인이 아니라 내부 공간을 탐구하는 우주인이 더욱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어는 면에서

노자는 내향과학을 강조하고 있는 셈인가?

>역시 뛰어난 사람이야!

48장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일손의 길, 부정의 길

207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십시

.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 일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억지 일을 꾸미면 세상을 다스리기엔 족하지 못합

니다.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이라 했는데, 나는 무엇을 없애야 하는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209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라는 경전에는 부라만이 “neti-neti”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어느 한 쪽

의 속성만을 지닐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것의 속성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때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브라만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그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에게는 알려진다고 하는 역설을 성립시킨다.

49장 성인에게 고정된 마음이 없다 이분법적 경직성 극복

214 이 장은 전체적으로 이 분의 세계,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는 합일의 세계, 통전의 세계에 들어가면 자기의 생각을 고

집하는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마음이 없어지고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셈이다.

50장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에 생사에 초연한 삶

217 장자는 죽음이란 한 가지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

난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세상에는 이와 못지 않게 다른 수많은 존재 양식이 있을 터인데, 이런 수많은 모양으로 나타나

는 것도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는 식이 말을 했다.

217 죽음이든 삶이든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사에 관계되는 모든 욕심이나 집착

의 줄을 끊고 초연해진 사람만이 육지에 다니든 전쟁터에 나가든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218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살아 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 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이 곧 죽어가는 연습이 아닐까? 다만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뿐. 삶과 죽음이 한 자리

에 있거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 죽을 것 처럼 살지 못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

하다.

51장 덕은 모른 것을 기르고 현덕

52장 어머니를 알면 자식을 알 수 있다 근원을 아는 것이 영원을 배우는 것

225 시작을 아는 것, 근원을 아는 것, 도를 터득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용히 욕망으로 가득한 입을 다물

”, 감각과 지각 같은 이원론적 의식의 문을 닫고”, ‘작은 것’, 내면적인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리고 쓸데없이 부산하게 일을 벌이거나 욕심스럽게 설치는 저돌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부드러움을 지킬 줄 아는 차분

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이요, 힘이기 때문이다.

53장 이것이 도둑 아니고 무엇?곁길 감의 폐해

229~230 도둑이 따로 없다. 노자에 의하면 한 쪽에서는 굶어 죽는데 우리가 이를 못 본 체 내 돈 내가 쓴다고 하면 흥청

거리면 그것이 바로 도둑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럴 경우 우리는 도둑보다 더 못할지도 모른다. 도둑은 자기가 한

 일을 잘못으로 알고 부끄러워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내 재산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줄

도 모르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 모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겠다.

>나는 나보다 큰 도둑만을 욕했는데 기준에 따라서는 어느 사람이 볼 때 나도 도둑일 수 있지 않은가? 바늘도둑이라고

 해서 도둑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은가?

54장 대대로 제사를 그치지 않는다 바른 길 감의 보람

232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그 다스림이 오래가리라.”

>후세의 자손이 나도 모르면서, 얼굴도 모르는 나의 제사를 지내는 일이 무엇이 중요할까? 살아 생전에 내가 행복하면

 그만일 뿐이지. 다행히도 내 글이 세상에 남아 누군가의 마음에 새싹을 돋게 해준다면 좋겠지만, 내 자손이 단지 조상

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내 제사상을 차리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 글이 남길 바랄 뿐

이다. 내 글이 남더라도 조상으로서가 아니고 작가로서 기억되고 싶다.

55장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 같은 삶

236 갓난아기 상태란 어떤가? 갓난아기는 아직 인위적이고 이분법적인 의식을 갖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아직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나와 바깥 세상을 구별하지 않는 상태이다. 주관과 객관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주객 미분의 상

태이다. 따라서 자연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238 이렇게 억지를 쓰는 일은 갓난아이의 생활 태도와는 반대로 완전히 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곧 끝장이 나고 마는 법

이라는 것이다. 도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역효과만 초래하므로 달력의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자

연과 합일되어 구름 떠가듯, 물 흐르듯 살아 가는 삶에서 궁극적인 삶의 스타일을 찾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와 동심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자연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고 동심은 유치함?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언어의 한계

239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241 도와 같은 궁극 실재는 일상적인 사고, 소위 이분법적 의식 구조를 초월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무지의 구름저편에서 발견될 수 있는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연히 도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문을 꽉 닫을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침묵이야말로 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장 웅변적으로 말하는 일이다.

242 이렇게 도와 하나가 되고 만물과 하나가 된 사람은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해롭게 할 수

도 없고, 귀하게 할 수도 천하게 할 수도 없다. 왜 그런가? 사람이 가까이하려 한다고 해서 일부러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멀리하려 한다고 해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가까이하려 한다거나 멀리하려 한다거나, 해롭게

하려 한다거나 이롭게 하려 한다거나, 귀하게 여긴다거나 천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런 데 구애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 친소, 이해, 귀천, 영욕 따위의 구분에 관계하지 않고 그저 의젓하고 떳떳하고 늠름하게 살아 갈 뿐이다. 그러기에 진

정으로 세상에서 추앙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진짜 이런 것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57장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된다 억지로 함이 없는 정치

243 세상에 금하고 가리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고,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무기가 많을수록 나라가 더욱

 혼미해지고, 사람 사이에 잔꾀가 많을수록 괴상한 물건이 더욱 많아지고, 법이나 명령이 요란할수록 도둑이 더욱 많아

집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억지로 일을 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바뀌고, 내가 고요를 좋아하므로 백

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을 꾸미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부하게 되고,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되도다.”

245~246 거듭 이야기하지만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지, 무욕, 무위, 무사 등을 우리 모두가 반드시 완전한 원시 상태

로 복귀해야 함을 뜻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법령이나 제도나 체계 등을 처음부터 부정하거나 무조건

정죄하고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아 가야만 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물론 도둑이 득실거리는 사회

에서 도둑을 벌하는 엄격한 법령만 짜임새 있게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도둑질이 성행하는 근본 원일

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도둑을 금하는 법령 자체를 완전히 없애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246 아무튼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의 개선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해 보겠다는 꿈이나 심리적 건강과 안녕을 통해

사이키아(마음의 이상향)’을 실현해 보려는 이상은 결국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런 것을 넘어서서 도와 하나되는 자연스런 삶에 근본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다.

58장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새옹지마

248 맹맹하다는 것은 어수록한 것, 맹물처럼 밋밋하고 별 맛이 없는 것이고, 똑똑하다는 것은 눈을 부라리고 잘 살펴 무

엇이나 효율적으로 빈틈없이 하는 것이다. 보통 생각으로는 정치란 이렇게 똑똑하게 제도와 기구와 조직과 행정 체계

등을 통해 물샐틈없이 다스려 나가는 것이라 여겨지겠지만, 그럴수록 사람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순수성이 사라져 서

로 더 잘 되고 더 높이 오르겠다고 경쟁하고 시기질투하고 치고박고 하는 사회로 치닫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할 정도로 맹맹하고 밋밋한 정치 아닌 정치가 있을 때 사람의 본래적인 성품이 손상되지 않고,

 손상되었으면 되살아나 건실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게 되므로 이런 정치야말로 실로 잘 되는 정치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도 요즘 자꾸만 정치인들의 목소리에 비판을 가하게 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도가에서 말하

는 사회와 역행하고 있는 듯 하다.

249~250 이런 식으로 행은 불행을 가져오고 불행은 행을 가져오는 일과 불행의 교차됨, 청실 홍실이 꼬여감, 전문 용어

로 변증법적 진행이 인생사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 상태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옳

은 것이라고는 없기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찾아 다녔다. 그것만이 진리고 답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유아기적 사고 방식은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게 하는데 긴 시간을 걸리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선이 최고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데 그 선이라는 것이 이중적인 얼굴일수도 있고, 입장에 따라서

악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이를 헛먹었다.

59장 검약하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아낌의 정치

252 “사람을 지도하고 하늘을 섬기는 일에 농민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사치와 낭

비는 금물. 순박한 농민처럼 알뜰살뜰 삶을 이어 가는 것이 지도자가 취해야 할 기본적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리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것 또한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가야 하는 것이기에 아껴써야 하는 것 아

닐까? 단지 지금 내가 쓰고 있으므로 내 것이라 착각하는 것일 뿐.

60장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놓아둠의 정치

255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256 작은 생선을 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작은 생선을 구울 때는 우선 칼로 배를 따서 내장을 뺀다든가 뼈를 추린

다든가 하지 않고 통으로 굽는다. 그리고 구울 때도 쓸데없이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쑤시지 않는다. 한 쪽이 다 익기

전에 이리저리 뒤집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작은 생선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이다. 잘 익을 때까지 한참 동안 가만

이 놓아 두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특히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이와 같이 가만두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자면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중앙 정부가 지방의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 체재를 채택할 것이

 아니라 각지방 자치 단체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스스로 되어가도록 놓아 두라는 것이다.

257 무위의 정치, 불간섭주의의 정치라고 해서 완전히 무관심하고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관심과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고단수 정치이다.

>어디 나라뿐이랴. 가정에서도 배우자나 자식에게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하면 어떨까? 무관심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고,

맡겨두는 것 말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자신이 찾고 행동할 시간을 주는 것이 어떨까?

61장 큰 나라는 강의 하류 대국과 소국의 관계

261 큰 나라도 이처럼 차분하고 의연한 자세로 스스로를 아래에 둘 때 작은 나라가 스스로 흘러 들어온다는 것이다.

류가 지류 위에 있으려면 지류보다 더욱 작은 물줄기가 되고 말 뿐이다. 이렇듯 큰 나라도 작은 나라 위에 군림해서 거

드름을 피우는 등 자만에 빠져 있으면 작은 나라보다 더욱 작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스스로를 낮춤으로만 작은 나라를 얻을 수있다는 것이다. 결국 긴 안목으로 볼 때 차분하면서도 겸허한 자세로 임하

는 외교가 허세를 부리고 강압적인 외교보다 딴 나라의 호응과 신임을 얻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강대국들이 노자의 가르침을 알았으면 좋으련만.

62장 도는 모두의 아늑한 곳 도의 포용성

266 도는 이렇게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에게만 중요한 것인가? 옛사람이 도를 귀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인가? 지도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도의 구체적인 호용성으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도를 가지고 있으면 구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둘째 도가 있으면 죄가 있어도 모두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하는 바를 얻기 위해

서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 제사를 지낸다, 희생 제물을 드린다, 굿을 한다 하면서 외부적 행위나 힘에 매달리

는데 여기서는 도에 따라 사는 내면 세계의 재정립이 관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도덕경>은 이런 의미에서 비신화화 운

동의 기수가 아닌가?

63장 어려운 일은 쉬울 때 해야 실기 하지 않은 자세

267 어려운 일을 하려면 그것이 쉬울 때 해야 하고, 큰 일을 하려면 그것이 작을 때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끝에 가서 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일을 이

루는 것입니다.

64장 천릿길도 발 밑에서 큰 일의 작은 시작

65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 무지의 정치

66장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낮춤

280 개천과 계곡이 물은 강이나 바다로 흘러든다. 모든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과 바다로 모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강과

 바다가 낮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도 이렇게 스스로를 낮출 때 모든 백성이 절로 그에게로 모여든다는 뜻이다.

280~281 물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그 본성 때문이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애쓰는 것이 아니

. 이렇게 아무런 사심이 없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면 결과적으로자연히 위에 오르게 되고, 진심으로  자기를 뒷자

리에 놓으면 결과적으로자연히 앞에 앉게 된다는 뜻이다.

281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

야 한다.”(22:26)

67장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285 여기서 말하는 삼보는 자애’. ‘검약’,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이라는 도가의 기본적 실천 윤리를 말한다. 첫째, 보물

자애는 무엇보다도 어머니 같은 마음을 뜻한다. 도는 세상의 어머니, 세상에 대한 도의 태도와 같이 낳고 기르고

 감싸 주지만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주기만 하는 마음이다. 둘째, 보물인 은 아끼는 것이다. (중략) 셋째,

물인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

286 이 세 보물 가운데서 으뜸은 결국 사랑하는 마음인 자애라고 한다. 자애로움을 원칙으로 하면 전쟁에 임해서도 승

리하고, 방어하는 마음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어 하늘도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사랑으로 그들을 호위

한다고 한다.

68장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는다 비폭력의 힘

289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는다

290 남과 물리적으로 힘을 겨루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하나됨으로 얻는 도의 힘, 자애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완전

한 이김이다.

291 누구나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해낼 수도 있지만 지도자로서 사람을 써서 그들의 힘을 활용하면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69장 오히려 한 자 정도 물러서야 방어전의 불가피성

293 이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지 말고 상대방에서 전쟁을 걸어 오면 어쩔 수 없이 방어전에나 참여하는 객체

입장이 되라는 말을 수도 있고, 전쟁에서 주인처럼 당당하게 주도권을 잡고 행세할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찾아간 손님

처럼 주인이 하는 데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는 정도로만 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70장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깨치지 못한 자의 무지

298 불립문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으면 손가락에 우리의 전적인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 아니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 자체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일깨움

을 따라 상징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말속에 갇힌 이분법적 논리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

어서는 참실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이다.

>이런 눈을 나도 갖고 싶다.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참실재를 볼 수 있는 눈 말이다.

71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300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

병을 병으로 알 때만 병이 되지 않습니다.

성인은 병이 없습니다.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병이 없습니다.

72장 생업을 억누르지 말아야 백성 사랑이 자기 사랑

73장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사필귀정

311 언뜻 보아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커서 어쩔 수 없이 성기기 엉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그것을 빠져 나갈 수 없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당장 무너가 설치면서 저돌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 같고, 비폭력주의 같은 소극적 대처 방안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처

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심을 가

지고 살라는 것이다. 어릴 때 듣던 물은 물대로 간다.”는 말이 생각난다. 약자의 변명에 불과한 것일까?

>하늘의 이치와 하늘의 생각을 누가 품을 수 있을까? 나도 때로는 하늘을 원망한 적이 있었지만 그 역시 인간의 짧은

소견일 뿐이다. 하늘의 일을 인간의 눈으로 심판하려 하지야 말고 그것은 하늘에 맡길 것.

74장 위대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 일 사형은 하늘에 맡겨

313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자기가 믿기에 궁극적으

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경우이다. 어느 경우든 죽음이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이다. 여기서는 특히 정치적 폭압이나

경제적 곤경 때문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므로 구태여 죽음이 문제되지 않는 사람을 놓고 죽음으로 위협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삶을 놓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 정도의 현실적 고통을 겪고 사는 사람들의 심정과 상황이….나는 얼마

나 행복한 사람인가.

315 이런 신의와 자애와 무간섭, 무탄압, 무감시의 정치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기에 더욱 그러한 상태를

그리워해야 하는 것인가?

>아마도 도가에서 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으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많은 폭력과 억

압에 어느 정도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갑자기 많은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

각이다. 평생을 복권에 당첨되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대부분이 파산이나 알코올중독, 도박, 이혼

 등을 겪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유든 돈이든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함이 우선이다.

75장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수탈 정치의 종식

318~319 어느 쪽을 택하든 요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 것, 삶에서 뭔가를 찾아 헤매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가적 입장에서 보면 살아 가는데 어던 모교를 정하고 삶을 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잘 살아 보자는 목적 의식이 없이 자연스럽고 허허하게 삶 자체를 향유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더욱 바람

직하다는 것이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고 한다. 그것을 따라잡으려면 자꾸만 우리에게서 멀어지지만 그렇게 하는 일을 그만두면 나비가 살

며시 우리 어깨에 와서 앉는다는 것이다. 행복은 고양이 꼬리에 달린 방울과도 같다고 한다. 고양이가 그 방울을 잡으려

고 빨리 돌면 돌수록 그 방울은 그만큼 빨리 도망간다. 고양이가 방울 좇기를 그만두면, 방울이 고양이를 따른 다는 것

이다. 다스리는 자나 다스림을 받는 자나 모두 부국 강병이다 뭐다 요란을 떨며 억지를 부리지 말고 순리를 따라 살아야

나라가 잘 된다는 것이다.

>억지로 되는 것이 무엇이 있으랴. 억지로 된다 한들 그 행복이 오래 갈까? 추구하되 억지를 부리지는 말아야 할 것이

.

76장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 생명의 원리로서의 부드러움과 여림

77장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공평하고 균형잡힌 사회

78장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다 물의 역설적 위력

330 <논어>에 보면 상나라의 탕왕은 내가 죄를 지었으면 백성에게 그 해가 돌아가지 않게 해주시고, 백성이 죄를 지었

으면 그것이 내게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서소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멋진 왕이로구나! 적어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탕왕을 왕으로 모시는 그 백성

들이 부럽구나!

331 “바른말은 반대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낮춤으로 올라가고 죽음으로 살게 된다는 겸비와 승귀, 죽음과 부활의

조화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 진리는 역

이라는 말이 새삼 의미 있게 들린다.

79장 깊은 원한은 한이 남는다 척짓지 않는 삶

80장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도가적 이상 사회

81장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움과 변론과 박식함을 넘어서서

3 내가 저자라면

스페인을 가지 전 마지막 주에 노자를 만났다. 내 생활 속에 녹아 있는 노자를 발견할 때마다 그를 모를 때부터 존재했던 인연의 고리에 기뻤고, 한편으로 그가 말하는 진리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함을 뒤돌아보며 부끄러움과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매력적인 언변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그래 이것을 다 할 줄 알면 내가 노자지라는 말로 위안을 삼는다.

<목차와 뼈대에 대하여>

 

<마음에 드는 장과 절>

019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지만 그 이름에 나를 다 닮을 수 없는 것처럼, 도라는 것 자체도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 한정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미 도에 갇히는 것이지 않을까? 내 이름….나를 지키는데 내 이름은 많은 힘을 주었다. 자존감, 자부심 이런 것들이 내 이름과 더불어 나를 지키게 했다. 지금은 좀 더 넓어지고 자유로워진 의미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이름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속성을 바꾼다면 바뀌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그전 내가 사용하던 의미의 이름이 답답하고 고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좀 더 자유로워진 나의 이름이 필요하다. 나에게서 참치와 바람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029 ‘무지’ (중략)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얻어진 일상적인 지식, 세상을 도의 입장에서 보지 못한 단견, 소위 분별지로서의 지식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잘못된 배움을 없애 가는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 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학한 무지근래 들은 말 중에 참으로 멋진 말이다. 나도 박학한 무지를 갖고 싶다. 제한된 안목에서 벗어나 겸손해지며 계속 버리고 받아들임으로써 도달 할 수 있는 경지 말이다.

033 (중략) 너무 혼자 맑은 체 도도하게 굴거나 하지 말고 양쪽을 함께 포용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라는 것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태 내가 해왔던 거잖아. 똑 같은 사람인데 말이야. 어차피 종이 한장 차이인 것을 뭐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살았는지 몰라.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원래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인데 말이야. 사실은 물릴까봐 두렵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지. 진정으로 강자였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두려움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047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받을 일도 없습니다.

125 이런 보통인의 차별주의적 단계를 넘어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대하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습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만의 잣대로 사람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작업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겉으로 온화한 미소를 보이면서도 마음 속에 철저한 분리와 차별의 잣대를 품고 살았다. 모든 사람을 존엄한 인간으로 대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시시때때로 그 잣대에 휘둘리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속물근성이다. 습명의 경지….도달하고 싶다.

<보완점>

이렇게 적은 단어로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울림을 주는 책이 또 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이다. 요즘 세상에 꼭 필요한 글귀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에서 삶의 진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보완점이라고 할 것은 책을 좀 더 크게 만들어 활자가 컸으면 좋겠다.

IP *.218.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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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22:44:32 *.101.168.170

와우~ 발빠르네, 왕참치님^^

난 김아무게가 쓴 노자를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 오강남이 걸로 다시 주문하여 읽고 있소.

아무래도 오늘 밤 새워야겠네 ㅜㅜ

 

촘촘이 정리한 글에서 한주일간 그대의 치열한  땀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네, 애 쓰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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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0:13:15 *.218.175.50

감사합니다. 다 매장 알바 덕분이에요. 근데 리뷰에 힘을 너무 뺐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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