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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일 21시 51분 등록

바퀴자국_구달칼럼#17

 

비 온 후 길바닥을 기어가는 지렁이, 자신의 자취를 남기며 어디론가 끊임없이 간다. 온몸으로 기어 온, 꼭 그 만큼만 길게 자취가 남았다. 까마득히 하늘을 치솟는 제트기 또한 푸른 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가 달려온 길을 하얗게 수 놓는다. 이렇듯 만물은 그 자취를 남긴다. 그들 중 최고는 별의 발자국이었다. 하룻밤 사이 별의 운동을 사진으로 기록한 별의 궤적이다. 한껏 조리개를 열고 오래 노출하여 찍은 사진인데 고호의 별 흐르는 밤 그림을 연상시킨다. 검은 밤하늘을 외줄기 별빛이 실타래처럼 질서 정연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별이 흘러온 흔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 내 인생의 자취는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항해를 할 때도 항해사는 배가 달려온 자취를 해도 위에다 그려 넣는다. 목적지까지 그어진 뱃길을 따라 삐뚤삐뚤 자취를 남기며 끝없이 나아간다. 때론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어진 뱃길이 있기에 목적지에 도달하고야 만다. 첫 항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을 출발하여 미국 서부 포틀랜드로 향했다. 둥근 지구 위에다 최단 거리로 뱃길을 그으니 알류우산 열도에 바싹 다가가는 북태평양 대권항해길이 그려진다. 항해하는 거의 2주간 동안 쉴 틈 없는 황천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심한 배멀미로 탈진되어 갔다. 브릿지 기둥에 묶인 오물 통에 누런 똥물까지 다 토해낸 후에 남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육지였다. , 신이여 우리에게 육지를 주소서!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 때 어디선가 홀연히 날아온 흙 냄새. 참 신기한 것은 그 흙 내음, 육지 냄새가 코를 간질일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심하던 멀미가 싹 가셨다. 보름간의 항해를 마치고 목적 항에 도착하자 해도를 살펴본다. 거기에는 우리가 그 동안 사투하며 달려온 뱃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삐뚤 빼뚤 지그재그로 왔지만 결국 목적지에 오고야 말았다. 나는 4B연필로 그려진 해도상의 달려온 길의 흔적과 함께 누군가의 땀과 오물로 얼룩진 자취 조차도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스페인 여행을 떠나기 전 사전 공부를 위하여 도서관을 찾았다. 서가의 한 줄이 스페인 여행 관련 책으로 꽉 차 있었는데 불과 네댓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티아고 데 까미노란 순례길에 대한 여행기였다. 스페인 현지인이나 서양 사람들은 은퇴 전후의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주로 이 길을 걷는다는 데 유독 우리나라 젊은 여자들이 이 길을 많이 걷고 있어 스페인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800킬로, 부산서 신의주에 달하는 거리이며 40~50일이나 걸리는 이 기나긴 길을 걸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걷는 걸까?

 

중세 수백 년간 고행의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 때는 늑대와 강도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성지라고 부르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초자연적인 신과 조우하여 세속과는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일까? 현대로 오면서 이 길은 마치 산책길처럼 안전해 졌지만 그 길이로 말미암아 작심하고 나서야 갈 수 있는 순례길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 길을 걷는 여행자들은 서로 국적이 달라도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굳건한 동지애를 느끼며 서로 교감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 탐색에 나선다. 산티아고로 가는 사람들은 도보여행자로 떠났다가 순례자로 돌아온다고 한다. 순례의 육체적 시련은 자기 자신과의 재회를 준비하는 통과의례가 된 셈이다. 길을 걷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시야가 바뀜으로 인해 평상시 느끼던 시공간의 세계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자로 반평생을 숨가쁘게 살아오던 서명숙이도 이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나서 제주 올레길을 만드는 것을 그녀의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창 선배도 은퇴하면 이 길부터 걷고 싶다고 했다. 이 길은 사람이 인생전환을 모색할 때 거치는 의례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유독 우리나라의 젊은 여자들이 전환의 모색에 절박함을 느끼는 걸까? 반면 남자들은 처자식 먹여 살리노라 짬을 내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걷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서인가? 여하튼 어떤 이는 걷는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했으니 걷는 것만큼 사람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강건하게 해 주는 것도 드문 건 사실이다. 걸음 걸음 축적된 흔적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아로새겨지는 모양이다.

 

네이버 카페에서 반달곰이란 필명으로 아들과 함께 자전거로 우리나라 해안선을 따라 일주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직장인으로 매 주말 자전거에 몸을 싣고 아들과 함께 떠난다. 지난 주에 여행을 마친 지점으로 고속버스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동한 다음 여행을 이어가는 것이다. 2년째 계속하여 서울 출발 당시 초등생이던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다. 이 여행으로 반달곰 부자는 심신의 건강은 물론이고 더할 나위 없이 끈끈한 동지애로 뭉친 부자가 되었다. 자전거 여행을 통하여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들 인생의 큰 자산이 되었다. 반달곰은 자신과 아들이 함께 그린 자전거 바퀴자국, 그 흔적의 이야기를 인터넷 카페에 연재해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걸어서 여행하든, 자전거를 이용하든 주어진 여건과 선호도에 따라 여행 방법은 선택하면 될 것이다. 내가 만약 산티아고 길을 간다면 자전거를 이용하고 싶다. 그 먼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의 순례길이 될 것이고(물론, 걷는 사람들은 이 이유 때문에 걷지만),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기에 자전거를 타도 나름 충분한 여행의 재미와 순례의 의미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바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 위에서 맛보는 그 바람의 시원함과 장쾌함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가 없다. 수영할 때 온몸을 애무하는 물처럼 자전거를 타면 바람이 물결 같이 온몸은 물론, 골수까지 파고들어 내 영혼을 고양시킨다.

 

자전거 여행이든 도보여행이든 사람마다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겠지만 여행을 통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얻고자 하는 점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기억이란 메모리가 있어 여행의 흔적들이 축적된다. 이 기억 속에 특별한 의미로 주어진 자신만의 이야기가 추억이 된다. 이런 추억이 이어지고 이어져 진정한 자기에게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창 선배가 산티아고 길을 걷고자 하는 것도, 내가 자전거의 바퀴자국을 끝없이 남기고 싶어 하는 것도 결국 추억이란 자신만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짐작해 본다.

 

이번 데카상스의 스페인 여행이 부디 자신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추억의 길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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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3:29:48 *.104.9.216
이 글을 보고 그 순례길을 찾아 보았습니다.
제주 올레도 좋았습니다만 이미 너무 갖추어져 있다 싶더군요.

저는 걷고 형님을 굴리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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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7:18:43 *.196.54.42

걷기 좋아 하시나요, 피울선생?

뭐니뭐니해도 기본은 걷기죠, 많이 걸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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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6:11:46 *.113.77.122

이미 가기전에 글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번 휴가때 자전거 여행을 기획했다가 결국 저는 집에 있고 부자가 춘천 일일 코스로 변경을 했지만 둘이 갔다와서 아주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다음번게 같이 한번 가시죠~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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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7:24:09 *.196.54.42

찰나님의 사고가 가슴아프네요, 좋아하시는 자전거도... 그토록 가고픈 스페인도... 후일을 기약하며 치열하게 공부하시겠죠, 신영복 선생처럼^^  하여튼 속히 쾌차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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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18:26:33 *.94.41.89

항해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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