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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4일 05시 21분 등록

도덕경_구달리뷰#17

노자 지음

오강남 옮김

현암사

 

1. 저자에 대하여

노자(老子)

노자(기원전 6세기경)는 중국 고대의 철학자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로, 성은 이()이고 이름은 이(), 자는 담()이다.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생몰연대가 불분명한 인물이나, 사마천의 『사기』중 <노자열전>에 따르면 춘추시대 초나라의 고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초나라 사람으로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에서 국립 도서관 관리라고 할 수 있는 수장실의 사관으로 천문·점성·전적을 담당하는 학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유가철학과 더불어 중국 고대철학의 양대산맥인 도가철학의 창시자로, 무위자연을 바탕으로 도의 사상을 주창하였다. 노자의 생애는 베일에 가려진 면이 많아서, 공자보다 100년 후의 사람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실제의 인물이 아닌 도가학파의 형성 후 그 시조로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가 젊었을 때 그를 찾아 예에 관해 물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또한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며 은퇴를 결심하고 서방으로 은거하던 길에 관문지기를 만났다는 설도 있다. 이는 은거 도중 그가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관문지기 윤희의 요청으로 상 · 하 2편의 책을 써주었는데, 이것을『노자』라고 하며 『도덕경』이라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노자의 대표저서인 『도덕경』은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자로 시작되는 도경과 '()'자로 시작하는 덕경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81편의 짧은 글 속에 진정한 자기를 완성하는 도()와 진리의 길을 담고 있다. 그는 도()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무엇이며, '항상 그러한' 것이다.

또한 덕()은 도()를 추구하는 인간의 굳건한 태도이며, (), (), ()보다 앞서는 것이다. 특히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내용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는 형식으로서의 예를 비판한다. 도가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행위로 보았고, 노자의 『도덕경』은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요약될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겉치레를 중시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문명사회를 비판하고 무위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진중한 메시지로, 약육강식의 세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다

평역 : 오강남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 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가 있으며, 최근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움켜쥔 손을 펴라』를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등이 있다

2. 내가 저자라면

혹자는 ‘노자’가 기원전 6세기의 어느 인물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혹자들은 ‘노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일 것이며, 도덕경은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기도 한다. 무엇이 사실이던 간에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실존인물이었던, 당시의 사상조류를 흐름을 같이하던 무명씨들이건 그들 모두는 이제 지금은 없는 사람들이다. 글을 지었던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고, 글만 남았다. 지금껏 2,500년을 살아 전해지고 있다.

평역을 한 오강남은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그의 장점을 도덕경 해석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도덕경이 오늘날 다양한 종교들이 던지고 있는 화두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이런 것은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내어 평역을 했다는 점에서 도덕경의 새로운 맛을 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또한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성서의 유사한 구절들을 곁들어 해석해냄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주류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도덕경을 통해 동양의 고전을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고 있다.

도덕경의 기본원리를 다양하게 해석해내고 있는 점이 81개의 주제 글을 읽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있다. 몇 개의 기본원리(예를 들면 대극적인 갈등구조나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를 탈피해서 조화와 균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들을 반복하고 있지만 다양하게 접근함으로써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기본적인 맥락과 흐름을 잃지 않게 하고 있다. 그의 삶의 내공이나 학문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라고 여겨진다.

글의 분량과 문채 역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동양고전이라는 무거운 주제, 도덕경이라는 자칫 캐캐묵은 것처럼 비치는 소재를 그는 가볍고 부담 없이 써가고 있다. 분량도 한 꼭지당 3~4페이지를 잘 넘지 않는다. 자신은 전문가이면서도 눈높이는 독자에게 맞추어진 문채, 분량, 작은 사이즈도 맘에 든다. 심지어 한자를 적게 쓴 것조차도 편하게 느껴진다. 그의 책이 장수하는 비결일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서 무위자연이라는 말만을 떠올리고는 초야 묻혀 바람과 같이 물과 같이 사는 신선상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신비론적 도론에 근거한 이와 같은 노자의 모습은 실상 유가에 반하는 사상인만큼 사상적 지배자격인 유가론자들로부터 노자의 사상이 폄하된 모습이다. 노자의 사상은 유가와 정반합하는 사상적 대립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붕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력이 필요하듯 큰 바람이 꾸준히 불어주지 않으면 구만리를 날 수 없다. 자유는 이렇게 역경을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처럼 살자는 노자의 道無水有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양과 양생이 필요하며 사람이 물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뼈를 깎아내는 노력 없이는 완성하기 힘든 경지다. 이러한 구체적 사태를 신비론적 도론의 차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다.

1장부터 제 37장까지를 ‘상편 도경道經’이라 하고, 38장부터 제 81장까지를 ‘하편 덕경 德經’이라 나누어 놓은 것이 전통적인 분류 방법이다. ’도경’은 도의 존재론적인 면을, ’덕경’은 도의 기능적인 면을 좀더 많이 다루고 있다.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알기 쉽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도와 덕에 대한 경전’이라 할 수 있다.

5천자 남짓인 한문으로 짤막짤막하게 81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장마다 우주의 기본 원리인 ‘도’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덕’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노자 시대의 사람들이나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나 모두 ‘내면’의 충족에 대한 변함없이 추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면을 충족시키려면 말을 줄여야 하고, 물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 이것이 내면의 충족에 이르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노자는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려면 자기를 비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진리는 박식이나 박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를 알고 체득하는 길은 우리가 가진 잡생각이나 편견을 하루하루 없앨 때 생기는 직관과 통찰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잔잔히 들려주는 진리의 말들은 물질문명에 대해 지나친 믿음을 갖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3.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도’는 우주의 궁극실재 혹은 근본원리요, ‘덕’이란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힘’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은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인 ‘도’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덕’을 보라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p8

도덕경은 장자라든가 다른 서책과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기’ 위한 ‘일깨움’을 기본 특성으로 하는 책이므로 내용적으로는 의미상 차이가 약간 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노자님의 사상을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고 송두리째 떠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고 그와 함께 생각하며 내면적 대화를 가짐으로써 뭔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p9

영원한 도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해 주지는 않는다. ‘도’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p20

만일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 깊은 형안을 갖게 되면 전자인 실상계의 신비를 직관하게 되지만, ‘욕심을 가지고’ 사는 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만을 감지하고 살 뿐이라고 한다. p22

 “도대체 어찌하여 허공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계속했고,, ‘존재의 신비’니 ‘존재의 충격’이나 하는 말로 그 신비스러움을 표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고 했다. p22

분별의 세계, 일상적 상식의 세계를 초탈하라는 것이다. ‘도’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p26

우리말로 성인이라고 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인의 본래 뜻은 이런 윤리적 차원을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 도덕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p27

 

이런 성인은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무위’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그리고 장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행동 원리다. ...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 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p27

3장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노자님은 이런 상식적 관례를 깨어 버리라고 한다.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구하기 어려운 귀중한 것을 귀히 여기면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를 것이요, 탐날 만한 것을 보이면 그런 것을 못 가져 안달하거나 ‘상대적 빈곤’에 시달릴 것이니 아예 그런 것을 귀히 여기지도 말고 보이지도 말라고 한다. p30

그보다 여기서 노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만하다는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p31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32

4장 도는 그릇처럼 비어

도가 육신이 되어 세상과 하나되고, 그래서 세상에 거한다... 사실 세상의 세상됨이란 도가 세상과 하나됨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됨됨이가 도의 모습 그대로이다. 도는 전적으로 초월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내재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겸하고 있는 ‘변증법적 실재’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세상의 온갖 것, 심지어는 중국에서 최고의 인격신으로 모시는 하늘님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도는 구체적인 인격신과 차원을 달리하는 무엇이다. p37

5장 짚으로 만든 개처럼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 ... 일상 생활 중에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기 쉽고 쓸데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말 많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같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는 뜻이리라. p41

6장 도는 신비의 여인

나는 여성 운동가들이 ‘도덕경’을 여성 운동의 ‘성서’로 삼아도 좋으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장해 오고 있는 터인데, . 요즘 서양에서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여성 신학’에서는 이제 신을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는 대신 ‘하느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지만, 너무 길고 거추장스러우니까 둘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한다면 ‘하느님 어머니’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p45

요컨대 지금까지 공격성, 진취성, 지배성, 경쟁성 등 주로 남성적 특성을 찬양하고 이런 특성을 신과 결부시켜 신을 우리의 대장, 임금, 승리자, 정복자, 주님 등으로 생각했는데 종래까지의 이런 의식구조나 고정 관념을 청산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몇몇 미래학자의 예견이나 어느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p46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게 된 참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p48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역설의 논리다.

도덕경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 p49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이처럼 건전한 종교들의 기본 지침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란 말이 참으로 명언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명언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p50

8장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 힘을 다한 섬김 /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p51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물같이 되라”는 것이다. ‘도’처럼 된다든가 ‘도’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도의 최고 상징이다. p52

만물은 물 없이 못 살지만 물은 그들을 이롭게만 할 뿐 그 공로를 인정받자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 밑에서 묵묵히 섬기는 일을 할 뿐이다. ... 엄격히 말하면 물은 자기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것마저 의식하지 않고 있다. 구태여 부산하게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방식 그대로가 남에게 이익을 주도록 되어 있다. p54

9장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무디어집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재산과 명예로 자고해짐은 재앙을 자초함입니다.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 p56

그래서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물러남이 있을 때 새로 들어옴이 있다. 이것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이다. p59

10장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않고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p61

11장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p64

13장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

부처님은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법구경6:6)고 했다. 공자님도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일이 있나 염려하라” (논어1:16)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방되면 얼마나 홀가분한 삶이 될 수 있을까? 여론이다. 인기 관리다, PR이다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요즘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p75

15장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미묘 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 대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녹으려는 얼음처럼 맺힘이 없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계곡처럼 트이고, 흙탕물처럼 탁합니다.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아지게 할 수 있는 이 누구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점점 생동하게 할 수 있는 이 누구겠습니까?

도를 체득한 사람은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새로워집니다. p80-81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것도 흥미로운 표현으로, 도의 “티끌과 하나됨”과 같이 도인도 고고하게 자기 혼자만의 결백성을 주장하며 산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탁해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 세상과 하나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셈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83

17장 훌륭한 지도자는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삼가고 아낍니다. [지도자가]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고. p89

20장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나도 두려워해야 합니까?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입니까?딴 사람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봄철 망루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합니다.지친 몸으로도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딴 사람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은 결국 나 홀로 어머니 []먹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p101

공자님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여서 “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늘 밖에 없구나. (논어 14:37)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나의 멍에는 가볍다.”는 것. “내가 쉼과 자유를 주겠다.”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메시아로 임할 때 그들이 누릴 권력이나 부귀 등 세상적 가치 때문에 그를 따르던 뭇사람 혹은 그를 받아들일 줄 모르던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우셨다”고 한다. p104

역사적으로 이렇게 일반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지에서 고독했던 사람이 얼마일까? 인간 역사는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독 속에서 밝힌 진리의 등불로 이 정도라도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p104

22장 휘면 온전할 수 있고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갑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p110

결국 이런 트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한 면만 보는 데서 오는 단견에 입각한 자기의 입장을 관철하려거나 자기를 드러내려고 겨루거나 다투는 일을 하지 않는다. p113

24장 발끝으로는 단단히 설 수 없고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없고,

다리를 너무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밥찌꺼기 군더더기 같은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p119

26장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

그때그때 임기 응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약삭빠르게 온갖 편법을 써 가면서 수선을 떨고 사는 삶이 우선은 ‘성공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도덕경’에서는 우리에게 그런 삶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묵직하고 조용하게 사는 삶, 어느 면에서 우직하기까지 한 삶이 결국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런 경박한 삶보다 훌륭하기 때문이다. p130

27장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정말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습니다.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 맺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합니다. p131

그런데 일상적, 상식적 세계를 넘어서서 완벽한 선의 경지에 이르면 이런 외부적인 것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이다. p133

28장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협곡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협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

성인을 이를 사용하여 지도가가 됩니다.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자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p136-137

정신적인 영웅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그들의 정신적 모험이란 결국 최종적으로 이 ‘반대의 일치’의 자각에 도달하려는 정신적 추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칼 융도 “중국인들은 모든 생명 있는 것 속에 생래적으로 내재하는 모순성과 양극성을 인지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반대처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른 편에 대한 균형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고급문화의 징표이다. 일면성은 비록 그것이 모멘텀으로 유도하기는 하지만 야만성의 표지이다. 라고 했다. p138

원목이 쪼개져 구체적인 개체로 분화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타락‘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쪼개짐은 원목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행복한 타락’일 수 있다. 실낙원은 복낙원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p139

29장 세상은 신령한 기물

나라를 뜯어고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게 하겠다고 외치면서 혁명이니 계급 투쟁이니 인민 해방이니 하고 함부로 대들다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고통 당했는가? 결국 동유럽이나 기타 여러 나라에서 보듯이 평등한 굶주림의 사회로 끝장나게 하려고 그 동안 그렇게도 야단스럽게 설쳤던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 밑에서 신음하는 인민을 해방 시키겠다’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국민을 구하고 ‘백척간두에 선’ 사회를 지키겠다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모두 세상을 휘어잡고 세상을 한 번 바꾸어 보겠다고 무리하게 설치는 일이다. 그런 일로 세상이 좋아졌는가? p142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1:28)는 ‘성서’의 명령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천부의 권리라고 믿고 자연을 함부로 대하던 서양에서는 이제 환경보호 문제가 큰 이슈로 되어 이를 위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데 반하여,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연과 벗할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던 동양에서는 새삼 서양의 과거 전철을 밞아 가는 건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공해 문제가 심각하지만 이를 개선하겠다는 노력이 아직 미미하다는 것이다. p144

30장 군사가 주둔하는 곳엔 가시엉겅퀴가

무력을 써서 세상에 군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무력을 쓰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마련이어서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큰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따르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은 목적만 이룬 다음 그만둘 줄 알고,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습니다. p145

중국에서 유가, 불가, 도가의 사상가들, 심지어 묵자님 같은 사상가도 그 동기는 각각 달랐겠지만 모두 평화주의자였다. 그 가운데에서 노자님, 장자님이 가장 철두철미하게 평화를 주장하고 전쟁을 죄악시했다. p147

아무튼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나라를 방어하고 국민을 보위한다는 본래의 목적이 성취되었으면 거기서 끝나야 한다. 무슨 큰일을 이룬 것처럼 승전고를 울리면서 사열식을 하고, 전승 기념탑이니 영웅 추대식이니 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그것으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p147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

유엔에서 채택한 히브리 성서 이사야의 말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2:4) 한 것이 생각난다. p152

옛날 중국에서는 왼쪽을 양적인 것 곧 남성적인 것으로서 하늘, 동쪽, 생명 등을 관장하는 자리로 생각하고, 오른쪽을 음적인 것 곧 여성적인 것으로서 땅, 서쪽, 죽음 등을 관장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보통 때는 생명을 관장하는 자리인 왼쪽이 귀하게 여겨지지만, 전시에는 죽음이 판을 치므로 죽음을 관장하는 자리인 오른쪽이 귀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p153

그러나 이름도 없던 통나무가 쪼개져 마름질을 당하면 여러 기물이 생겨나고.., p156

33장 자기를 아는 것이 밝음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입니다. p158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는 히브리 성서의 말이 생각난다. ... 그리스도교 성서에서 바울도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웟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4:11~12)고 했다. 요즘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need)’ 보다도 ‘욕심(greed)’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p160

 

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깁니다. p170

 

만사가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 ‘도덕경’의 기본입장이다. 이렇게 변증법적 변화 과정을 꿰뚫어보는 것이 ‘미명’ 즉 ‘은근한 명찰’이라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도덕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기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다. p173

 

37장 하지 않으나 안 된 것이 없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무위도식’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지나치고 쓸데없고 허세를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고 속 깊은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다. p175

 

성 프란시스의 기도에 “주여,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시옵소서.”하는 구절이 있다. ... 스스로 해보겠다는 행위자가 아니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쓰이기만 할 뿐인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 프란시스에게 이처럼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이 있었을 때 그를 통해 그처럼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p176

 

욕심이 없어지면 고요함과 평화가 깃들게 된다고 한다. 부처님도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가르치면서 우리의 고통은 ‘집착’ 때문이라고 하였다. 집착을 끊은 상태 곧 ‘욕심의 불길이 꺼진’ 상태, 이때 가능하게 되는 시원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유의 경지가 바로 ‘니르바나(열반)’라는 것이다. 어느 종교나 나 중심의 생각, 거기서 나오는 덤벙거림을 청산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평화를 위해 불가결함을 강조하는 데는 다를 바가 없다. p177

 

38장 훌륭한 덕의 사람은

훌륭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기 않습니다.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합니다.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많습니다.

훌륭한 인의 사람은 억지로 일은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은 없습니다.

훌륭한 의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합니다.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많습니다.

훌륭한 예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기에, 소매를 걷고 남에게 강요합니다. p178

 

앞을 내다보는 것은 도의 꽃, 어리석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두꺼운 데 머무르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않습니다.

열매에 머무르고, 꽃에 거하지 않습니다.

후자는 버리고 전자를 택합니다. p179

 

39장 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이

‘하나’를 근본으로 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것을 꼴지어 주지만 스스로 어떤 꼴을 취해서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수적으로도 그것은 모든 숫자의 시작이며 바탕이지만 동시에 모든 숫자 둥 가장 작은 숫자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는 자기 낮춤의 최고 상징이다. p186

 

41장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한 가지 사물이 정반대되는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 사고방식에 지배 받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야말로 가소롭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그런 이상스런 것이 어디 있는지 좀 보여 달라고 한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서는 그야말로 웃기지 말라고 한다. 어리석은 자는 심중에 하느님이 없다고 한다는 성서의 말(시편53:1)을 연상시킨다. p194

 

43장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p201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란 물론 물입니다. p202

 

힘없는 민초의 힘이 결국은 철권을 휘두르는 강권 정치의 힘을 이기고 만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계속적인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신념이 있다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 반드시 어리석은 일만은 아니다. p203

 

‘없음’만이 틈이 업는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없음이란 자기 고유의 형체가 없는 것이다. 칼이 얇으면 얇을수록 베는 물건 속으로 잘 들어가듯이 자기 고유의 형체를 줄이면 줄일수록 좁은 틈 사이로 그만큼 더 잘 들어갈 수 있다. ...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자기 주장, 자기 줏대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섞일 수가 없다. 자기를 진정으로 비운 사람만이 거침이 없는 ‘무애’의 경지에서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p204

 

44장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한가?

그러므로 (무엇이나)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만큼 낭비가 크고, 너무 많이 쌓아두면 그만큼 크게 잃게 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p205

 

유교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군자가 죽어서 이름을 내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에 따라 이름내기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해 왔다. 물론 여기서 이름내기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뜻이기보다는 자기의 덕망이 모자라 결국 타의 모범도 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고 마는 일이 없도록 힘써 수도에 전념한다는 뜻이겠지만, 우리 주위에는 그저 유명해지는 것 그 자체가 마치 생의 목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도덕경>에서는 이런 천박하게 이해된 유가적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우리 몸이 명성이나 재산보다 더욱 귀하고 중하니 몸을 해치면서 명성이나 재산을 위해 애태우고 감투와 돈을 찾아 신기루 좇듯 하며 달려가는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권고 하고 있다. p207

 

신학자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가 생각난다.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p208

 

45장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함석헌 선생님께 무슨 질문이든 던지면 첫마디가 “글쎄요.”하는 것이었다. .. 진정으로 속에 서 우러나는 소견을 그때그때 듣는 사람의 사정에 알맞게 말씀하시려니 청산유수처럼 될 수가 없고 자연히 주저하는 듯, 더듬는 듯한 감을 줄 수밖에 엇었던 것이 아닐까? 미리 꾸미고 다듬은 말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말, 지극히 자연적인 마음 상태에서 나오는 말, 도에 입각한 말은 이렇게 눌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더 웅변적으로 듣는 사람의 심금을 움직이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p212

 

46장 족할 줄 모르는 것

그러면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도를 따를 때” 족할 줄 아는 마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시편 기자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하고 노래한 것처럼 더 높은 가치를 목자로, 안내자로 삼고 따를 때 이루어진다. p216

 

“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 임금 계통의 사람이요, 닭이 울면서 일어나 하루 종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척의 무리다. p217

 

47장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다 알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습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만큼 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훤하고,

억지로 하는 일 없이도 모든 것을 이룹니다. p218

 

요는 진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외부 현상에 대한 정보만 찾는 데 온갖 신경을 다 쓰면서 돌아다니기만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아버리면 사물의 밑바탕인 참된 근원을 간과하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p220

 

48장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 일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억지 일을 꾸미면 세상을 다스리기엔 족하지 못합니다. p222

 

그러니 도를 추구하는 길이란 이런 식으로 우리 머리에 들어 있는 궁극 실재에 대한 개념이나 생각을 하나하나 없애 나가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을 때 이런 매개 개념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에 접하는 일이다. 이렇게 궁극 실재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버리는 방법을 채택함으로 궁극 실재를 체득하라는 가르침은 세계 여러 종교가 공통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p224

 

49장 성인에겐 고정된 마음이 없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생각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p228

 

선성에서도 인간이 에덴 동산에 살 때에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런 상태가 바로 낙원 상태였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므로 선악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타락’하게 되고, 그리하여 자의식을 비롯한 모든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상태가 ‘원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복낙원은 엄격히 말하면 다시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비이분법적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p228

 

50장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에

사실 비이분법적 안목으로 볼 때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에서 만나는 것으로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물의 양면 정도에 불과하다. p234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p234

 

51장 덕은 모든 것을 기르고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도와 덕이 있어야 하지만, 그 밖에도 다른 물질이 있어서 하나의 개체가 모양을 갖추게 되고, 자연 환경이나 사회 여건 등의 영향력이 있어서 그 개체가 완성된다고 한다. 이런 외적 여건을 여기서는 ‘물’과 ‘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 , , 세 이 네 요건 중에서 물론 도와 덕은 근본 요인으로서 물질이나 영향력 같은 외부 조건보다 더욱 중요하므로 자연히 더욱 ‘존귀’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p237

 

도와 덕이 하는 일, 더욱 정확히 말하면 도가 ‘덕을 베풀어서’ 하는 일은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고 덮어 주는”일이다. ‘덮어 준다’는 것을 '묻어 준다‘고 해석하여 도는 만물이 나서 땅에 묻히기까지 생성 괴멸의 모든 과정을 돌봐 주는 일을 한다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p237

 

53장 이것이 도둑 아니고 무엇?

이천 몇 백년 전의 사회상을 묘사한 이 말이 어쩌면 이렇게도 정확하게,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주위를 직접 보고 우리 가운데에 편만한 윤리적, 사회적 부조리를 그대로 고발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p244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사람이 수두룩한데도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가만히 따져 보면 내가 번 돈이니 내 마음대로 쓴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말인가? ... 엄격하게 따지면 한쪽의 부란 다른 쪽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내가 번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보란 듯’ 흥청거리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p246

 

55장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이렇게 억지를 쓰는 일은 갓난 아이의 생활 태도와는 반대로 완전히 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곧 끝장이 나고 마는 법이라는 것이다. 도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역효과만 초래하므로 달력의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자연과 합일되어 구름 떠가듯, 물흐르듯 살아가는 삶에서 궁극적인 삶의 스타일을 찾도록 권고하고 있다. p255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입을 다물고, 문을 꽉 닫습니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신비스런 하나됨’입니다. p256

 

6세기경에 씌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이라는 문헌에도 “사랑하는 디모데야, 나의 간절한 기도는 네가 감각과 지각의 작용을 그리고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모든 것을, 그리고 존재나 비존재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로지 알지 않음(unknowing)을 통해 가능한 한 모든 존재와 지식을 초월하는 그분과의 합일을 향해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p258

 

“신비스런 하나됨”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지만 결국 도와 하나 되고, 그리하여 도 안에서 만물과 하나되는 천지인 합일의 경지를 이야기한다고 보면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비스런 하나됨”은 도가 사상을 비롯하여 세계 신비주의 종교 전통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p259

 

57장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된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올바름이 필요합니다.

전쟁에 임할 때는 임기 응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함이 없음 無事’을 실천하십시오. ...

세상에 금하고 가리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고,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무기가 많을수록

나라가 더욱 혼미해지고,

사람 사이에 잔꾀가 많을수록

괴상한 물건이 더욱 많아지고,

법이나 명령이 요란할수록

도둑이 더욱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억지로 일을 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바뀌고,

내가 고요를 좋아하므로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을 꾸미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부하게 되고,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되도다. p262

 

60장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로써 세상을 다스리면

귀신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귀신이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있어도 사람을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힘이 사람을 해칠 수 없다기보다는

성인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해치지 않으니

그 덕이 서로에게 돌아갑니다. p274

 

작은 생선을 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잘 익을 때까지 한참 동안 가만히 놓아 두고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특히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이와 같이 가만두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중앙 정부가 지방의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 체제를 채택할 것이 아니라 각 지방 자치단체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스스로 되어가도록 놓아 두라는 것이다. p276

 

61장 큰 나라는 강의 하류

큰 나라는 강의 하류,

온 세상이 모여드는 곳.

그것은 세상의 여인.

여성은 언제나 그 고요함으로 남성을 이깁니다.

고요히 스스로를 낮춥니다. p278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생 공영의 길을 걸을 수 잇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타국과의 관계에서 명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큰 나라는 솔선하여 작은 나라 아래에 스스로를 둬야 한다고 하고 있다. p279

 

64장 천릿길도 발 밑에서

그러나 도에 따라 사는 자연인, 자유인은 한 줌 티끌이나 한 줌 흙을 옮기는 기분으로 쉽게 일을 시작하여 꾸준하고 묵묵히 수행한다. 꾀를 내거나 자기를 드러내려는 인위적이고 표피적인 행동이 아니다. ‘함이 없는 함’이다. 그래서 결국은 태산이 이루어지고 구층 누대가 완성된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달라붙거나 집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족할 뿐, 뽐내거나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는 일이 없다. p295

 

67장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세상 모든 사람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지만

쓸모없는 듯하다고 합니다.

크기 때문에 쓸모없는 듯한 것입니다.

만약 쓸모있었으면 오래전에 작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지니고 보존합니다.

첫째는 자애

둘째는 검약

셋째는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입니다. p307

 

68장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는다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이기는 자는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길이 있고, 이렇게 이길 때 완전히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p314

 

특히 직장의 상사는 오로지 부하를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일을 더욱 잘 하도록 밑어세 떠받치고 뒤에서 밀어 주기 위한 사람, 그들을 섬기기 위한 사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밑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면 앞에서 계속하여 말한 것처럼 저절로 사람들이 그에게 모이고 자신은 자연히 그들의 으뜸이 된다는 것이다. p315

 

70장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 실행하기도 그지없이 쉬운데

세상 사람들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합니다.

말에는 종지가 있고, 사물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사람들 이를 알지 못하기에 나를 알지 못합니다.

나를 아는 사람 드물고, 나를 따르는 사람 귀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인은 굵은 칡베옷을 입지만

가슴에는 구슬을 품고 있습니다. p321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불경에 의하면 성불한 후 사람들에게 가서 가르치기를 주저하였다고 한다. 첫째 대부분 사람의 경우 우선 먹고 살고 지지고 볶는 데 바빠 상식 세계를 넘어서는 이런 진리 같은 데 관심이 없을 것이고, 둘째 그 진리 자체가 너무 심오하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이 이해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p323

 

조셉 캠벨의 이론에 의하면 위대한 정신적 영웅은 이렇게 일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refusal to retur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영웅의 예에서 보듯 긴 영적 여정에서 이 마지막 고비를 넘어 결국 사람들에게 나아가 가르치게 된다.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박해나 죽임당하기까지 한다. p324

 

소크라테스도 자기나 아테네의 모든 사람이나 모두 무지한데,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p327

 

73장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비폭력주의 같은 소극적 대처 방안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처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어릴 때 듣던 “물은 물대로 간다.”는 말이 생각난다 p337

 

74장 위대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 일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아무리 사형으로 위협한들 소용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자기가 믿기에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경우이다. 어느 경우든 죽음이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이다. p339

 

76장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집니다

온갖 것, 풀과 나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 죽으면 말라 뻣뻣해집니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사람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사람은 삶의 무리입니다. p346

 

77장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그 부자가 자기 집 양은 아까워서 안 잡고 이 가난한 집 암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부자의 철면피함을 개탄하고 그에게 벌을 내리라고 명했다. 나단은 이 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p352

 

우리가 크리스마스 카드나 추석 선물을 우리보다 가난하고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가, 아니면 우리보다 더 잘 살고 힘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가? 우리의 선물이나 카드가 여유 있는 데서 덜어져 여유 있는 쪽으로 바치는 것인가? 우리는 하늘의 도를 따르는가, 사람의 도를 따르는가? p353

 

78장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다

물이 가진 이런 특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스스로 물처럼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천이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물처럼 되는 것이 손해 보는 일, 어리석은 일, 비능률적이며 전시 효과도 없고 화려하지도 못한 일이라 여겨 물처럼 되기를 기피한다. 그러나 물처럼 되어 보라고 한다. ‘부드럽고 여림’의 진리를 몸소 실천해 보라고 한다. 여기서는 특히 물의 정화 작용, 더럽고 궂은 것을 떠맡아 깨끗이 하는 일을 강조하고 그런 일을 해보라고 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면 가히 나라를 다스릴 자격을 갖추는 셈이라고 한다. p356

 

“바른말은 반대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낮춤으로 올라가고 죽음으로 살게 된다는 겸비와 승귀, 죽음과 부활의 변증법적 진리를 말하는 역설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 “진리는 역설”이라는 말이 새삼 의미 있게 들린다. p357

 

80장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노자님의 이상 사회는 사람들이 살아 있음을 고맙게 여김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회, 그래서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더 나은 삶을 찾는다고 떠다니는 일이 없는 사회이다. 비록 배나 수레가 있지만 사람들 멀리 이사 가거나 여행하지 않기 때문에 타는 일이 없고, 방어전을 대비해서 갑옷이나 무기를 비치해 두었지만 이웃과 싸우거나 내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쓸 일이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회이다. p365

 

81장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변론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제한된 생각이나 고정관념을 평소 달달 외우고 있던 틀에 맞추어 독단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주장하는 일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모두 판에 박은 듯이 청산유수로 말한다든가 어는 종교에서 열성파 신잔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만을 달달 외워서 타교파 사람을 공박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 한 가지 생각, 곧 자기가 가진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선은 무지의 특권인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말할 수 있다. p369

성인은 쌓아 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욕심이 없으니 재물을 저축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럴 능력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사람들을 위해 다 내어 준다. 그러건만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도와 하나가 됨으로 이제 우주가 내 집이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더 탐나겠는가?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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