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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4일 09시 24분 등록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사상가


임건순, 시대의 창, 2013.


1. 저자에 대하여


■ 묵자墨子 ■

출생/사

BC 479년경 ~ BC 381년경 추정

활동분야

중국 전국 시대 사상가, 병법가

 

• 발 자 취 •  

• 저 서 •

본명, 적(翟)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다.

墨子

      노동하는 존재.

     자기 몫을 지닌 존재.

     욕망하는 존재.

     계산하는 존재.

     분업하고 협력하는 존재.

     그리고 묵자만의 성악설

 

……

……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2000년 만의 복권.

 그 복권이 그 복권이 아니지만, 2000년 만에 보게 되는 로또다.

 전국시대에서는 묵자의 사상이 공자의 유가와 함께 양대 현학으로 꼽힐 만큼 널리 지지를 받았다 하는데 이토록 오랜 세월 묵혀 있어야 했던 이유는 무얼까. 나 역시도 오랜 기억을 되돌려 보아도 한비자는 생각이 나도 묵자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당연 중국 사상은 공자, 맹자가 좋다라는 듯한 강요를 받았고 그랬기에 노자의 사상을 무한 자유로 보아 노자 사상을 좋게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비자와 법가는 학창 시절엔 너무나 경직된 이미지였고. 그러던 중 나라가 갑자기 장자 열풍에 휩싸이는 듯했고 신영복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 묵자를 만나게 되었다. 왜냐고? 로또잖아.

 일본의 동양철학자인 와타나베 다카시(渡邊卓)가 “고대에 너무 일찍 근대를 지향했으며 그 때문에 절멸했고, 역시 그 때문에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되는 사상 집단”이라고 말했다. 가족 윤리와 군주의 덕목을 중시했던 당시에 보편적 윤리와 합리적 사회 질서를 주창했던 묵가 사상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좌파’적이라 비판받고 있고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대의 사회에 이러한 주장이 생겼던 이유는, 전국시대 그 토록 심각했다는 시대, 전쟁이 난무했던 그 시대가 지금 오늘날에도 되살아나는 걸까. 지금 이 시대는 그때와 다르지 않는 것인가. 아, 2000년 동안 세상이 변한 게 없단 말인가.

 오랫동안 잊혀져야 했던 이 사상이 궁금하기에 나는 묵자를 만난다.


1. 이름과 탄생연대


묵적에서 묵자(墨子)로


묵자.

 그는 묵가(墨家)의 창시자로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이다. 그는 다양한 사상들이 뻗어나가는 춘추전국시대의 하나의 학설을 세워 강학한 이로, 처음에는 유자(儒者)의 학문을 배우고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익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묵자의 사상의 뿌리는 공자의 학문에서 출발한다. 구체적으로는 공자의 주장에 대한 대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그의 학설은 유묵현학(儒墨顯學)이라 병칭되기도 한다.

 검을 ‘묵’자를 이름으로 하는 그의 본명은 ‘적(翟)’이라고 한다. 그가 ‘묵’으로 불리는 것에  대하여 묵(墨)은 입묵(入墨)의 형(刑)으로, 묵자는 수형자를 의미하며, 사회나 반대파가 그를 낮추어서 부른 것이라고도 한다. 묵자는 천한 계층이라 추정되고 있는데 공인 출신의 지식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묵자의 제자들, 묵가 무리들 역시 공인과 장인, 무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초기 노(魯)나라 사람으로 송(宋)나라를 섬겼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내용 중 노나라 양문군(陽文君)이 정(鄭)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했다는 것과 공수반(公輸般)을 설득해서 초(楚)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묵자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로서 나라의 방어를 잘했고 절용을 주장했다. 어떤 이는 공자와 같은 때 사람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보다 뒤의 사람이라 한다. -사기, <맹자순경열전>

   - 본문 중, p48


2. 묵자의 사상과 묵가(墨家)

 묵가의 사상은 <묵자>에서 전해진다. 그러나 이 저작은 묵자 자신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는데  『한서(漢書)』 지(志)에는 71편으로 되어 있다. 중심된 내용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묵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의 묵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하는 묵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검은색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은색은 노역과 노동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허식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신영복,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p364


 신영복이 핵심적으로 설명했듯이 묵자 사상의 핵심은 겸애와 비공과 의정이다. 겸애는 일종의 보편적 복지와 뜻이 통하고 비공은 반전, 즉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이며 의공은 의로운 정치를 주장하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10론(論)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현(尙賢) :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라.

・상동(尙同) :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정치사상에 대한 이론이며 천지론(天志論)은 그 기초다. 

・천지(天志) : 절대적・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겸애(兼愛) : 타인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QQLRHD으로 연결된다.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이며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이다..

・비공(非攻) :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한다.

・절용(節用) :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것

・절장(節葬) : 의를 간략하게 하라. 장례절차에 사치와 낭비가 심하다.

·비락(非樂) : 음악을 폐지하라. 음악을 하느라고 일하지 못하고 사치가 심하다.

・명귀(明鬼) :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비명(非命) :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다.


 묵가(墨家)는 이와 같은 사상을 주장하는 사상가 묵자(墨子)를 계승하는 학파이다. 신영복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묵가를 말하고 있다.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신영복, 강의, p367


 묵자 집단인 묵가는 결속력이 매우 강력한 집단이며 체계적인 결사체였다. 그들은 책과 문헌을 정리하는 설서(說書), 수공업 기능과 군사 기술을 익혀 몸으로 일하는 종사(從事), 사상 전파를 위한 논증과 언변을 갈고닦는 담변(談辯), 이렇게 세 가지 전공별로 전문가를 양성하여, 분업과 협업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그들 역시도 천민 출신이나 지식인의 자의식이 강하였기에 등용되기를 바라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일부는 진에 수용되어 진의 통일을 돕기도 하였다. 때문에 묵가와 묵가간의 다툼도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었다고 할까. 어쨌든 묵가는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집단이 당대의 지배적 질서 속에 수용되지 못하고 결국 스러져 오랜 세월 동안 묻혀지게 되었다.


■ 임건순 ■

출생/사

충남 보령

활동분야

 

 

• 발 자 취 •  

• 저 서 •

서울시립대학교 행정학과 역사학 전공

대동고전연구소 전통 학학 공부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제자백가 사상 전공

‘야구학교’, ‘엑스포츠뉴스’에서 야구 기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야구 논객

2012. 야구오패

2013. 생각이 많으면 진다-우리가 몰랐던 류현진 이야기

2013. 묵자

현재, <손자병법> 준비중

 

……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두산백과)

•신영복,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길잡이의 초대장


p12 묵자가 다시 세상에 나오고 세인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2000년 만의 복군’이라고 합니다. 2000년 동안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하다가 청나라 말엽에 필원과 손이양이라는 학자가 <묵자> 원문에 주석을 달고 정리하면서 묵자란 사상가가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신영복 선생님이 ‘2000년 만의 복권’이라고 했지요.


1. 묵자 여행 준비


p21 공자사상에 첫 번째로 반응하고 반대한 사상가. 공자사상을 알아야 묵자를 제대로 알 수 있음

⇒ 원체 사상의 흐름과 철학자들을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늘 공자에게서 직접 맹자가 수학한 줄 알고, 그렇게 사상이 이어져 온 줄 알았다. 어린 시절 각인된 이 교육에 의해 당연 뒤쪽 순서에 밀려 있는 묵자는 공자와는 아주 거리가 먼 때에 태어난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묵자에 대한 구구절절한 교육은 기억이 없다. 당연 진과 한나라를 설명하면서 법가와 한비자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는데...내가 기억이 없는 것인지, 우리의 교육이 묵자를 빠뜨린 것인지...더구나 공자와 묵자가 같은 동시대에 활동했음도 몰랐던 사실이다.


p21~22 묵자의 사상은 유가의 학설과 공자의 사상을 전면 부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나름 유가의 학설과 공자 사상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 내지 보완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상당했죠. 그렇기에 더욱이 공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공자의 사상, 공자만의 문제의식, 공자가 말하는 어짊(人)이 뭔지, 그리고 그것들이 가지는 한계와 약점이 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죠. 그래야 묵자라는 사람의 문제의식과 그 사상의 고갱이가 뭔지 알 수 있으니까요.

⇒ 너무나 공자 사상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교육이 공자의 뜻을 이어받은 맹자는 이야기해도, 그 사상에 반대한 묵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을 리가 없다. 즉, 내 정규 교육과정에서 묵자를 제대로 맞닥뜨린 적이 없다는 내 기억이 맞다는.


p24 묵자의 무리 중 적지 않은 수가 진나라에 베팅을 했습니다. 열렬한 반전운동가인 묵자 집단은 약소국 방어에 힘쓰고, 강대국에 가서는 침략 전쟁이 이롭지 못함과 의롭지 못함을 설파하여 적극적으로 반전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약소국 방어에 많은 조직 구성원이 죽어나가고, 기울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는 형편없고,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게 됩니다.

     묵가 무리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전 중국을 아우르는 통일 제국이 세워지면 전쟁은 없어질거라고. 그래서 강대국 진에 베팅해서 진나라로 들어가고, 대활약을 펼쳐 통일에 큰 힘이 됩니다.

⇒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전쟁?!


p24~25 먼저 묵가는 진나라에서 전문 관료로서 활동하면서 법의 세부 항목을 가다듬고 제국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묵가 집단에 관중(춘추시대 중기의 제나라 재상)이나 상앙(전국시대 중기의 진나라 재상), 오기(전국시대 초기의 초나라 재상), 범려(춘추시대 말기의 원나라, 제나라 재상)와 같은 슈퍼스타 재상은 없었지만 일선의 현장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중하위 관료로서 여럿이 활동했죠. 원래 묵가가 말하는 이상적 인간, 현자, 군자는 유가식으로 수양한 도덕자가 아니고, 현장에서 민들과 직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 해결형 인사입니다. 이런 문제 해결형 묵가 인사들이 진에서 활약하면서 시스템을 잘 만들어놓았습니다.

⇒ 묵자와 묵가는 실천적인 활동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p26 다른 제자백가 철학이 만들어지는 데 촉매제 내지 원자재 구실을 많이 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에 주목하는 관점과 논리적, 합리적인 사유는 순자가 가져갔고, 보편적 맥락에서 인간을 사유하는 건 맹자가 반짝 들어가고, 법을 통한 국가 운영과 지배, 관료 체제 확립은 법가가 많이 가져갔고요.

      이렇게 다른 사상가들에게 정말 겸애를 했던 묵자 사상은 겸애하면서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묵자만의 장점을 다른 사상가들이 가져가고 배워가고, 각자의 사상 체계 안에 소화시켜 자신들의 사상을 업그레이드하고, 그러면서 묵가만의 뭔가가, 차별화된 이야기가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 모든 것을 내어준 핵심을 빼앗긴 묵자의 논리와 사상.


p26~27 묵가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은 역시 묵가 가상 자체가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사상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유동성이 극대화된 세상에서나 생겨나고 선전되고 어느 정도 먹힐 수 있었지, 확고한 질서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이야기가 달라지죠. 국가권력의 질서가 확고히 잡힌 시대에는 하층민을 대면하는 사상이 환영받기는커녕 용인된ㄴ 것 자체가 어려울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생겨나기부터가 힘들겠죠.

⇒ 원인은 이것이었군. 사상이 지배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


p27 묵자 사상은 춘추전국 시대만의 특수성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당대의 무질서함과 극대화된 사회적 유동성, 그로 인해 생긴 틈과 공간 안에서 통용될 수 있는 사상이었고 논리였죠. 당대의 무질서함이 하층민에게 극한의 고통도 주었지만, 한편으로 하층민을 대변하는 묵자 사상이 싹트고 숨 쉬고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을 준 것인데, 진나라와 한나라의 통일 제국시대, 전제 왕권 시대가 열리면서 하층민을 대변하는 사상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어졌습니다.


2. 길잡이의 나침반


묵자 사상의 중심, 겸애


p32 공자의 문제의식 내지 중심 생각? 그가 말하는 인? 치인(사람을 다스림)의 우월적 지위에 안주하는 군주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수기라는 힘겨운 과제에 주력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가는 정치공동체의 조화와 평화.

     맹자? “이보라 왕, 인의 정치를 하라우. 그런데 인의 정치는 말이지. 우리지식인들이 하는 거니까 우리 지식인 대접을 깍듯이 하라, 알갔어?”

     장자? 국가나 권력에 의해 강제된 표준과 쓸모에 맞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쓸모를 찾아 사는 강호의 삶.

     한비자? 어떻게 간신배들을 누르면서 군주의 힘과 국가의 힘을 키울 것인가.

      노자? 천장지구!!!! 하늘과 땅처럼 왕이 장구하게 제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요령과 처세술, 자연으로 돌아가자? 문명 이전의 소박한 삶 추구? 모두 노자의 문제의식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철저히 군주를 수요자로해서 만들어진 사상이죠.

⇒ 요렇게 설명을 요약해주니 확 눈에 띄긴 한데, 느낌은 어린이용 책을 보는 듯한..


p33 묵자의 겸애란 바로 통치 체계, 사회 체계를 통한 최대 다수의 기본적인 생활 보장 내지 욕망, 욕구 충족입니다. 여기서 욕망, 욕구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바라고 가지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묵자는 공자 사상의 관념성에 문제의식을 품고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내 공자와 유가를 공격했는데, 그의 겸애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일 수는 없겠죠.

     그리고 묵가에서는 겸애를 말할 때 항상 ‘교상리’를 같이 이야기하거나 겸애를 교상리라고 풀이합니다. ‘교상리’란 서로 이롭게 하는 관계맺기라는 뜻으로, 겸애는 이렇게 이익과 결부되는 개념이지요.

⇒ 묵자의 겸애는 그러니까 현재 우리나라 이전의 민주노동당과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p34 돈 벌고 말고 하는, 물적 토대와 연관된 일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나 부지런함만으로 설명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눈을 사회구조와 시스템으로 돌려 봐야죠. 묵자는 실제 그런 것들에 눈을 돌려 봤습니다.

⇒ 그렇지.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분명 살펴봐야 한다. 이 구조 속에서.


p35 겸애는 정신적인 사랑, 관념적인 어떤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겸애는 이익과 관련된 문제죠. 당시 묵자는 물질적인 이익을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그것을 중심에 두고 사고했습니다. 묵자가 살던 당시에 백성들은 세 가지 고통에 시달린다고 묵자는 진단했는데요. 이른바 삼환, ‘추운 자 입지 못하고, 일한 자 쉬지 못하고, 배고픈 자 먹지 못한다.’ 이것이 당대에 바닥에 떨어진 인민 삶의 모습이었는데 세 가지 모두 물질적 이익과 연관되죠. 입고 쉬고 먹고 하는, 인민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과 동떨어진 도덕과 관념, 윤리를 묵자는 죄다 거부했습니다. 인민 삶의 최소한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도덕이고 윤리고 관념이고 다 필요 없다는 거죠.

⇒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의를 따질 수 있는가. 지금,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는 사람들조차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쓰임도 불확실한 ‘지역 예산’에 치중하는데.


‘이익’을 어떻게 볼 것인가


p36~27 묵자는 이익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利, 물질적인 이익이 묵자 사유의 가장 큰 중심은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보통의 사람은 기본적인 물적 토대와 경제적인 수익(이익) 없이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통치 체제 내지 사회시스템이라면 어떻게든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이익을 바람직하게 추구할 수 있도록, 안정된 테두리 안에서 보장해줘야겠죠. 그런데 이익, 한자로는 利 , 이것은 동양철학 특히 그중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해온 유학에서 백안시하거나 경계해온 것이었습니다. 항상 그랬죠. 공자부터 시작해서요.

⇒ 겉으로는 아닌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강력하게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수두룩. 그것이 현실.


p38 그런데 묵자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義, 利他” 義는 利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이익과 함께 가는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의 기초 내지 통치 질서의 정당성이 바로 ‘義’인데 이 ‘의’는 이로움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 의로움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묵자는 강력히 말합니다. ‘의’와 ‘리’를 대립적으로 보는 유가와 달리 묵가는 이익을 윤리와 정치사상, 통치 철학의 필요조건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p39 묵자가 말하는 이익은 그냥 이익이 아닙니다. 어떤 공유되는 이익, 분배되고 나누어지는 이익을 말합니다. 그것도 묵자가 생각하는 정당한 기준에 따라 나뉘고 공유되고 분배되는 이익입니다. 사회구성원이 생산하는 이익과 생산물이 독점되고 또 낭비되고, 그리하여 불평등,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또 생산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나누어지지 못하는 것, 이런 것이 묵자가 무수히 지적한 당대 사회의 모순이고 그들이 직접 겨누었던 문제입니다.

⇒ 이른바 사회주의 사상인가. 공동체. 함께, 같이.


p40~41 빵의 생산량이 20개 정도로만 늘어나더라도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 굶는 사람이 없고 모두에게 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묵자가 말하는 ‘의’이고 이런 ‘의’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나온 이로움의 확대가 바로 묵자가 말하는 겸애입니다. 그리고 묵자가 말하는 이러한 ‘의’가 바로 묵자가 생각하는 정당함, 정의로움, 올바름이고 기준입니다.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수직적인 신분 질서,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거기서 지키고 준수해야 할 것들을 ‘의’, 의로움을 이야기하지만, 묵자는 그들과 다르게 평등과 관련된 맥락에서 ‘의’를 정의하는 거죠. 곧 묵자가 말한 “義, 利他”는 이러한 ‘의’가 있어야, 이런 ‘의’를 따라야 진정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순자와 한비자는 엄연한 신분 질서에서 준수해야 할 것을 ‘의’라고 말하고 맹자도 어느 정도 비대칭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의’를 말합니다. 다들 어느 정도는 불평등한 관계를 전재하는데, 묵자는 다른 맥락에서 ‘의’를 정의하고 씁니다. 선진 시대(진시황의 통일 제국보다 앞선 시대의 중국)


p41~42 묵자는 ‘리’를 공자, 맹자 같은 유가 사상가들처럼 경계하거나 위험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적극 긍정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이익의 확대 내지 확장이 아니라 그것이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유되고 나누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 분배와 공유에는 묵자가 생각하는 의로움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이익을 분배받지 못하고 그 공유에 참여하지 못해 삶의 기초가 위협받는 사회구성원이 소수라도 존재한다면 의롭지 못한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이익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묵자의 생각입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도 말합니다. 전체 구성원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어야 그 사랑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p42 묵자 사상에서 의로움과 이로움은 철저히 같이 가는 것이고 의로움 없는 이로움은 성립할 수 없는데, 이것이 현실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강하게 주는 것 같습니다.

     정도가 심한 부의 불평등, 정도가 심한 재화의 불균등한 분배와 소유가 이루어지는 정치공동체인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에서는 국익, 국가 경제력 강화, 국가의 부 축적 같은 추상적인 구호와 프레임 아래 국민의 삶을 옥죄는 여러 가지 모순을 은폐하고 그것을 외면하도록 사람들을 길들여온 거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돌아가고 분배되는, 눈에 보이는 실직적인 이익보다는 국부의 증대, 국력의 확대 같은 추상적인 전체 국가의 이익을 말하면서 당장의 분배를 외면하고, 그러다 보니 생산에 종사하고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한 몫의 배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이 말입니다.

⇒ 국력, 마냥 추상적이진 않다. 미국과 일본,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지만, 대책도 없는 국가의 이익을 이야기하며 분배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FTA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외면하고 국익을 위해서라며 마냥 농업을 등한시하는 정책이라거나 대기업에만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펴면서 그것이 국익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들.도 아닌 억지들.


3. 묵자, 그는 누구인가


묵墨의 무리


p48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로서 나라의 방어를 잘했고 절용을 주장했다. 어떤 이는 공자와 같은 때 사람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보다 뒤의 사람이라 한다. -사기, <맹자순경열전>


     한비자는 묵자의 사상이 유가의 사상과 더불어 양대 현학으로 당대의 사상계를 지배했다고 했고, 여불위가 펴낸 춘추전국 시대 사상의 백과사전 <여씨춘추>에서는 공자와 묵자의 제자와 무리들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했으며, 묵자의 사상을 극렬하게 공격했던 맹자는 양주와 묵자의 철학이 천하에 가득 찼으니 천하의 여론은 양주에게로 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간다고 했을 정도로 묵자의 사상은 대흥행을 했는데요.

⇒ 맹자, 그는 공자의 뜻을 따랐던 인물, 왜 이토록 묵자의 사상을 극렬하게 공격했을까?


p49 유가 사상이 줄곧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했기에, 유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묵자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우리가 묵자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게다가 <묵자> 원전을 읽는다 해도 <논어>의 공자처럼 묵자라는 사람의 인간적인 개성이나 특징이 일관성 있게 그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더욱 묵자란 사람, 개인에 대해서 알기가 어렸습니다.

⇒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마르크스 사상을 불온시하며 ‘분서’하는 일들을 벌였듯이.


p49~50 이견이 많지만 그의 성으로 알려진 墨이라는 글자 자체가 어떤 집단을 나타내는 글자입니다. 어떤 집단인지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대개 어떤 특수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데요. 묵자란 사람은 사실 어떤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어떤 집단의 대표자, 또는 그 집단의 의견을 모아 종합 정리한 자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학자마다 이 ‘墨’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그의 출신과 그가 대변하는 계층을 설명하려고 해왔는데요. 어떤 학자는 피지배층으로 노동자 계층이다.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얼굴이 검어서 ‘묵자’라 했다고 하고, 또 어떤 학자는 그의 무리가 검은 옷을 입어서 묵자라 했다고 합니다. 묵자 무기를 군사 집단의 성격도 띠고, 학파의 성격도 띠고, 종교 집단의 성격도 띠었는데, 오늘날 사제들을 보면 검은 옷을 많이 입고 스님들은 회색 옷을 입죠. 종교인들이 주로 어둡고 단조로운 색의 옷을 입는데 묵자 무리도 종교 집단으로서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습니다. ‘묵’이라는 글자를 형벌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이도 있습니다. 당시에 묵형이란 게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뜨는 형벌로, 이 형벌을 받은 집단 또는 계층을 가리킨 데서 묵자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또 ‘묵’자는 나무나 돌에 직선을 긋는 데 쓰는 먹줄, 잣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工人 집단에서 묵학이 기원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p50~51 묵자 무리가 피지배층, 천인 계층 출신이라는 것은 <묵자> 원문 곳곳에서 보이는데, 예를 들자면 묵자가 초나라로 가서 그 군주를 만나고 초나라의 신하 목하에게 자기주장을 펼치니, 목하는 기뻐하면서도 ‘당신의 주장은 훌륭하지만 천한 사람의 것이라 왕께서 쓰지 않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또 묵자 스스로 자신을 ‘북방의 천한 사람’ㅇ라고 천민 출신임을 인정한 부분도 <묵자> 원문에 있습니다.

     그리고 묵자 무리가 단순한 천민들이 아니라 수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특히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고 지키는 무인들로 이루어졌다는 데도 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합니다.

⇒ 참...지금 우리라고 안 그러고 있는가!


p52 묵자는 분명 묵가라는 집단의 지도자이고 큰 스승이 맞습니다. 유가의 공자처럼요. 하지만 ‘인’이라는 사상을 중심으로 전통문화 내지 관습이었던 ‘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층 내지 지식인의 각성 내지 자각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철학을 혼자의 힘과 개성으로 만들어낸 공자와 달리, 묵자는 혼자의 힘으로 겸애를 비롯한 사상 체계를 만들어낸 것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묵자>에 담긴 사상은 누가 만들어낸 것이며, 묵자 개인이 만든 게 아니라면 묵가 무리에서 묵자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묵자는 특정한 어떤 개인이라기보다는 특정 집단과 특정 신분계층의 자의식을 대표하는 지도자라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굳이 그 인물이 누구냐 하는 데 매달리지 않아도 좋다 보는 것인데 더 부연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수공업자, 무인, 거기에 가혹한 삶의 현실에 절망하던 피지배층과 천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연대했고, 그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고 하면서 어떤 합의 내지 조율된 의견, 그것에 기초한 사상과 그들만의 시대정진이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묵자>라는 책으로 묶인 게 아닌가 합니다.


p53 묵자라는 사람이 노자나 열자처럼 허구의 인물은 아닐지라도 공자, 맹자, 장자, 순자, 한비자처럼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통찰력으로 사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 사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당시에 하층민들의 여론과 불만, 절박한 목소리들이 잘 조합되고 수렴되는 과정이 있었고 묵자는 그 과정을 잘 만들어낸 무리의 수장 내지 리더 정도에 그쳤기에 그 인물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적은 게 아닌지. 저만의 가설이지만 사실 묵자 한 사람이 독창적으로 <묵자> 원전의 사상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견은 심심찮게 제기되어 왔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묵자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은 것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요.

⇒ 노자와 열자가 허구의 인물이라고요?


p54 <묵자> 원전의 사상이 전제로 하는 것이, 사람은 저마다의 몫이 있고 각자가 대등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견 합의 과정이 소수에게 끌려가거나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결론이 내려져선 안 되겠죠. 처음부터 합의에 참여한 사람들 각각이 대등한 지분을 가졌으니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최대한 잘 조화되어 결론이 나고 합의가 되어야겠죠. 대등한 몫을 가진 조합원들의 회의나 주주 각자의 지분이 대등한 회사의 주주총회에서, 한두 사람이 일방적으로 회의를 이끌고 독선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p56 공자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수해서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적극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바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논어>에 아주 잘 드러나죠. 사실 <논어>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텍스트 공동체의 어록집입니다.

     단순히 스승이 말하면 제자들이 알았어요 답하는 게 아니라 반대의견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스승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기도 하는데, 재밌는 건 단순한 반대나 다른 의견이 아니라 어떤 뚜렷한 노선 내지 정치적 입장에 기초해서 반론을 제시한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자로인데, 그 밖에도 자공, 염유, 재아, 번지, 자장 등은 안연, 민자건, 증자, 자유, 자하와는 상당히 색깔이 다른 인물들입니다. 전자의 인물들이 공자 문하 야당이라면 후자의 인물들은 공자 문하 여당이라고 할까요?


노나라가 낳은 사상가


p59 노나라든 송나라든 그의 출생지 내지 국적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물을 수 있겠는데요. 네, 단적으로 말해 묵자란 사상가의 출생지와 성장한 나라, 그의 활동 지역과 반경은 중요합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요. 사실 오늘날 중국만 해도 지역마다 사람들의 기질과 관습, 풍습 등이 다른데 통일 제국 성립 전에는 말할 것도 없었겠죠. 실제 춘추전국 시대에는 지역과 나라에 따라 사상적인 기풍과 학풍이 달랐기 때문에 묵자의 사상과 그의 출생지 내지 국적은 분명히 서로 연관지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여담


p64~65 노자 철학을 보면 옳으니까 해야 한다, 아니면 선한 동기가 중요하다, 백성들을 위해야 한다, 감싸야 한다는 가르침은 조금도 없습니다. 노자 문헌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며 지지 않으려는 악착같음이 잘 드러나고, 그 노자 사상은 서방 진에서 완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도덕경>은 춘추 시대 문헌도 아니고 <논어>보다 훨씬 늦게 만들어진 책인데, 전국 시대 말기에 진에서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분명히 노자 철학에는 동방의 학문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가의 문제의식과 일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법가 철학이 환영받고 완성된 지역에서 노자 철학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 노자의 사상이 너무나 좋은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악착같음이라기보다 자연과의 일치와 자유스러움이 특징이라 기억나는데 악착이란 단어가 붙으니, 내가 아는 노자 사상이 맞는가 한다.


p66 노자는 노골적으로 이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또 전쟁을 실패한 정치 행위라고 보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악착같은 투지(정확히 말해 궁중에서 왕이 어떻게 해야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가 노자문헌에 잘 드러나고, 노자 문헌에서는 줄곧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냉철한 인식 능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유연함을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는 ‘허虛’가 바로 그것이죠. 비움을 위한 비움이 아닌, 상황에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왕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이 바로 ‘허’입니다. 비움으로써 냉철하게 상황을 읽고, 그러고 나서 물처럼 유연하게 변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모두 병가에서 영향을 받았지요. 아니 병가에서 기원하다시피 했지요.

⇒ 놀라운 일, 노자의 사상이 병가로부터 기원한다니. 병가와 노자의 맞물림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역시 노자의 사상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p67 변화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 그리고 냉철함을 강조하는 것은 법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법가는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수시로 법을 바꾸고 갱신해야 함을 말합니다. 한 가지 원칙을 고집하는 것은 수주대토하는 얼간이나 하는 짓입니다. 실제 수주대토라는 고사는 <한비자>에 나온 것이죠. 그리고 동기주의나 온정주의가 아닌 냉철함으로 말합니다. 그래야 국력을 극대화하고 신하들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있다고 하죠. 법가 역시 병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법은 누구에게든지 차별없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것이 아주 엄정해야 한다고 자주 강조됩니다. 역시 병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4. 시간적 배경


어떻게 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가


p71 <맹자>책에 이런 말이 나오죠. “온 세상에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무리가 가득하다.” 맹자는 이런 말을 하면서 묵자의 공격에 대해 유가 사상을 잘 방어하겠다는 신념과 다짐을 드러내는데요. 이것만 봐도 묵자가 공자와 맹자 시대 사이의 사람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공자가 등장한 뒤 도전자 묵자가 나타나 공자 사상을 반대하며 자신의 사상을 크게 흥성시켰고, 그 뒤 맹자라는 사람이 등장해 다시 묵자 사상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 춘추전국 시대 철학사의 흐름이죠.

⇒ 이렇다는 것은? 묵자의 사상이 당대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 아닌가.


p73 단순 시간적으로는 공자와 크게 차이 아니 않지만 살았던 환경이 크게 달랐다는 건 그만큼 급변하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는 것인데, 예 그렇습니다. 묵자가 살았던 시기는 전국 시대적 논리와 환경으로 급변하던 시대였습니다. 급변하던 시대 사람들이 느낀 위기감과 피로는 정말 장난 아니었을 텐데 묵자가 그런 시대의 사람이었죠. 그래서 전국 시대가 묵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급변하는 시대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걸었던 사람이기에.


p73~74 전쟁이 일상화된 시기, 각 나라는 전쟁을 잘 수행하고 국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군주 중심의 일원적인 중앙 집권 체제 형성에 안간힘을 기울였습니다. 전쟁이 일상화된 원인으로 생산력의 큰 발전이 있었는데요, 생산력이 발전해야 전쟁 수행 능력도 커지고 또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커지게 마련인데, 전국 시대는 본격적으로 철기가 도입 내지 정착된 시기입니다. 이 생산력 발전이 전쟁의 격화뿐 아니라 여러 가지 춘추 시대와는 다른 모습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죠.


p74 묵자가 주장했던 것 중 유면한 것이 바로 ‘비공非功’이라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상입니다. 묵자는 비공을 사상으로만 주장하지 않고 실제 현실에서 열렬히 몸으로 부대끼며 운동으로 전개했고, 많은 제자들이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걸곤 했습니다.


p77 공자 시대만 해도 여러 제후국들 간의 통일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일단 당시 공자가 꿈꾼 이상은 이렇습니다. 중원의 각 나라가 공자 자신이 말하는 어진 정치를 하고, 그러고 나서 그 나라들끼리 사이좋게 이상적인 연대를 하는 중원 정치공동체, 이것이 바로 공자가 꿈꾼 이상이었습니다. 공자 시대에는 통일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정확히 말해 통일을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죠. 통일을 위해선 전쟁이 불가피하고, 통일 전쟁을 완수하려면 생산력이 크게 확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 나라가 국력을 극대화하고 총동원할 수 있도록 사회 체제가 크게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자 시대만 해도 각 열국의 상황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p78 나라 國자를 한번 볼까요. 國자 구성요소를 보면 가운데 창을 뜻하는 戈자가 있고, 그 안과 밖에 작은 네모와 큰 네모가 보이시죠? 큰 네모 口는 말 그래도 큰 울타리를 뜻하는 것이고, 작은 네모는 그냥 입구 자가 아니라, 축문이라는 기도문을 담는 그릇을 뜻합니다. 제사에 쓰이는 아주 중요한 도구죠. 무기와 제사 도구를 감싼 큰 네모, 그건 바로 城을 말합니다.

    읍은 그런 겁니다. 같은 조상을 모시며 같이 제사지내고 외부의 공격에 같이 방어하는 사람들이 사는 성과 그 주변, 외부의 이질적, 적대적 존재를 대비해 성을 쌓은, 제사와 전쟁 공동체로서 존재합니다. 그 공동체의 수장이 바로 제후, 곧 춘추 시대 열국의 왕이었습니다.


p82~83 묵자는 통일을 적극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전쟁 종식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가 말하는 이상인 겸애, 최대 다수의 기본적인 생활 보장인 겸애는 정치 단위의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정치 질서가 안정되고 일사불란할수록 달성될 여지가 높기에, 한 천자 중심으로 전 중국이 다스려졌으면 한다고 묵자는 자주자주 말했죠. 천자가 정점에 서고 그 천자 밑에 각 나라를 총괄하는 제후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때 묵자가 말하는 천자는 춘추 시대 주나라의 천자같은 허수아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 중국을 총괄하는 군주였고, 또 여기서 묵자가 말하는 제후는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어 중앙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독자적 정치 단위의 수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뜻을 어기지 않는 지역 행정관을 가리켰죠. 묵자는 천자가 중심에 확고히 서고 그 천자 중심으로 중원이 돌아가는, 그런 질서에서 자신들의 겸애를 실현해보자 했고, 또 그런 질서가 섰을 때에야 겸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p84 그들이 표준과 기준, 규범을 장조한 데는 그들이 애초에 공인 집단이었던 까닭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묵가 집단엔 상당수 무사가 있고 무사로서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많다고 했지요. 표준과 기준, 규범은 물건을 만드는 공인들의 작업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국방에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전쟁사학 분야에서 훌륭한 저술을 보여주시는 임용한 성생님의 글에 따르면 부대마다, 그리고 병사마다 전투력과 무기의 질, 작전 수행 능력 등이 천차만별이던 군대가 강해질 수 없는 노릇이니, 고대 어느 국가든 전쟁 수행 능력과 국방력을 극대화하려는 나라는 무기의 질, 전투력 등을 군사마다, 부대마다 규격화・표준화하려고 애썼다네요.

 

p85 묵자 무리가 그렇게 표준과 기준을 강조하고 집착한 것은, 어쩌면 그들이 무사였고 또 일선 현장에서 자주 실전 경험을 해봤던 사람이기에 표준과 기준, 규격화의 중요성을 의식했던 까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묵자> 원문엔 군사 관련 이야기도 많은데 후반부는 실전에 유용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어와 축성, 대오 만들기 등등. 거기서도 그런 측면이 잘 보입니다. <묵자> 원문 자체에 표준화된, 규격화된 군사 매뉴얼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구체적인 수치까지 정확히 제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묵자는 표준과 기준의 통일을 중시했습니다.

⇒ 묵자 집단의 정체성, 하층민들. 공업, 수공업 등의 노동자 층뿐만 아니라 무사까지도.


씨족공동체의 일원에서 보편 인간으로


p89 공자 사상은 씨족공동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살던 시기에도 그것이 적지 않게 무너진 상황이었지만 분명 공자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닌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같인 사는 공동체에서 자연스레 배우는 효과 공손함,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태도를 충분히 익혀서 이것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나가자고 합니다. 그의 정치철학을 보면 왕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공자 사상에서 군주는, 지역 주민들의 지배자라기보다는 보호자에 가까웠던 씨족공동체의 대표, 그 사람과 같아야 하고, 그 사람처럼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과거의 씨족공동체는 여러 원로들이 모여 공동체의 일을 토론, 토의하는 원시적 민주제의 전통이 강했는데, 그래서인지 공자 사상을 보면 왕이 홀로 독주하지 말고 여러 지식인들을 우대하고 그들을 국정의 주체로 분명히 인정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공자의 <논어>, 그리고 <맹자>에 ‘더불어, 같이, 함께’를 뜻하는 한자 與자가 괜히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p91~92 새로운 통치 철학과 체제 개편 말고도 새롭게 사유의 지평을 열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바로 인간이란 문제. 이제 인간을 다른 각도 내지 시각에서 생각하고 연구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인데요. 기존에는 ‘가’ 단위로 누구 집안의 사람, 어떤 조상의 후손하는 식으로 사람을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전국 시대 들어서서 씨족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하나하나 개체화되다시피 한 사람들을 국가에서 상대, 관리해야 하고, 또 적극적으로 전쟁을 통해 적국의 백성들을 자국의 백성들을 편입해야 하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균질적인 인간, 평균적인 인간, 개체화된 인간, 그리고 보편적인 인성에 대해 논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p93 처음으로 보편적인 맥락에서 인간을 사유하고 이야기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묵자입니다. 성선설의 맹자, 성악설의 순자 등 인간 일반은 보통 어떻다고 한 저 사람들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맥락서 인간 일반을 사유하고 이야기한 사람은 묵자이고, 맹자든 순자든 모두 묵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특히 맹자는.

⇒ 맹자는 묵자 다음의 사람. 공자의 사상이 묵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묵자의 사상이 다시 맹자에게 여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공자 사상을 묵자가 반대하자 공자의 사상을 따르는 맹자가 다시 묵자를 비판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


5. 묵자가 본 인간


노동하는 존재, 자기 몫을 지닌 존재, 욕망하고 계산하는 존재


p98 인간은 본래 노동하는 존재하는 것이 묵자의 생각입니다. 일해야 산다. 일하는 존재다. 역시나 하층민, 피지배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일하는 사람은 어때야 할까요? 우선 일한 사람은 자기 몫을 가져야 합니다. 일해서 뭔가를 만들어냈는데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일하는 존재인 인간, 이런 인간관을 가진 묵자는 인간이 자기 몫을 가진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일했으니 당연히 자기 몫을 가져야 하고 몫을 요구할 수 있죠. 그리고 그것을 통치 체제가 분명히 보장해줘야 합니다.

⇒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p100 일해야 하는 존재 인간, 노동이 본질인 인간, 일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몫을 분명히 가지는 인간, 그 인간이 반드시 누려야 할 몫이 뭔지 여기서 말해주는 것 같네요. 먹을 것, 입을 것, 쉴 수 있는 여건이죠. 이 몫들은 통치 체제와 사회 체제가 보장해줘야 할 최소한의 것이고, 그것을 모든 만민에게 보장해주자는 것이 바로 묵자의 겸애입니다.


p102 묵자 집단부터가 이렇게 특화된 기능을 중심으로 나누어 교육하고 운영하는 집단이었고, 그들은 국가 정치와 행정도 분업과 협력의 원리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곧 묵자는 인간을 분업하고 협력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던 것입니다.


p103 묵자는 인간이 이득과 결과적 효용을 계산하고 더 이득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낙관하는데, 그렇기에 묵자가 말하는 겸애는 단순한 이타주의 내지 희생을 통한 사랑이 아닙니다. 앞서 욕구를 가진 존재, 자기 몫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본다고 했는데 욕구를 품고서 자기 몫을 챙기려는 인간은 당연히 이익에 민감한 존재였겠지요? 그래서 자의 겸애는 이익에 민감해 이익을 계산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에 속한 것입니다. 너 자신을 희생해라, 나보다 남을 위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의 사회 시스템 설계와 국가 청사진을 따르면 타인이 이롭고 사회 전체도 이로우며 결국 당신도 이로울 것이니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설득하는 것이죠. 묵자는 상대의 계산 능력을 믿고 겸애를 선택하도록 설득하고 유도합니다.


p104 묵자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으며 천지를 따를 수도 있고 안 따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걸 전제한 후 인간이 천지를 따르면 그에 따르는 이득이 생긴다고 설득하고, 또 따르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와 손해가 생긴다는 것을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죠. 그 상황에서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 모두 인간의 몫일 뿐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이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게 옳다는 말도 하지만요.

 

묵자는 성악론자


p107 인성론은 보편적 맥락에서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것은 전국 시대적 배경에서 가능한 이야기였다는 것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고 싶고, 또 보편적 맥락에서 인간 이야기하기의 포문을 묵자가 가장 먼저 열었다는 것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선설을 포함해서 인성론은 상당히 정치적인 논쟁임도 기억하세요. 단순히 심심해서 인간 일반이 선하다 아니다를 논한 것이 아니고, 인성론은 누가 정치를 해야 하고 무엇으로, 어떤 기준으로 정치를 해야 하느냐와 직결되는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 인성론을 단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예에 관한 논쟁이라 생각했다. 역시 정치적 논쟁이다.


p108 순자의 성악설, 지식인이 본 현실입니다.

     법가 특히 한비자의 성악설은 군주가 본 현실입니다.

     도가의 성악설, 장자의 성악설은 주변부 지식인이 본 현실이고, 노자의 성악설은 왕이 본 현실, 아니면 왕을 중심으로 놓고 역사를 살핀 지식인이 본 현실입니다. 그리고 묵자의 성악설은 하층민이 본 현실에 기초한 것이지요.

     모두 현실에 눈을 두고 현실의 혼란과 무질서, 갈등을 직시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인간을 가장 악한 존재로, 정마 극단적일 정도로 인간을 부정적인 존재로 보는 한비자의 경우는 왕이 본 현실이기에 그렇습니다. 왕에게는 신하들은 물론이거니와 부인과 자식도 권력 투쟁의 경쟁자지요. 그 경쟁에서 실패할 경우 굉장히 가혹한 현실이 그를 기다립니다. 바로 죽음. 그러니 극단적인 성악설의 입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이 글에서는 이런 식의 정리가 많다. 일단, 그래서 편하다.


p109 인성론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이렇다 저렇다고 어떤 결정론적 입장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습니다. 인성론에서 ‘성’은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니고 오거나 부여받은,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인성론은 그저 현실의 인간에게서 보일 수 있는 일반적인 경향성을 우선 보고요, 그런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원인과 기제(대표적으로 성악설에서는 욕망과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고 변할 수 없는 본성이나 본질을 전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악설이라 해서 인간이 구제 불능의 존재로 태어났다거나 날 때부터 악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의 인간이 어떤 부정적인 경향성을 보이며, 그런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게 뭘까 생각해보는 거죠. 물론 성선설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착하다, 날 때부터 착하다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인간에게서 선한 경향성 내지 선한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이고 이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 그러니까 성격검사 같은, MBTI같은.


p111 맹자의 인성론과 성선설은 유가적 지식인, 또는 유가적 지식인으로 변신한 귀족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도덕감정과 도덕이성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하면서도 맹자는 그것을 잘 키운 사람은 따로 있고 그들이 국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키운 사람들이 백성들에게서도 대접받고 왕에게서도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구요.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 선한 마음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잘 키우고 기른 건 소수이며 그들이 국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맹자의 인성론과 성선설은 사실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볼 수도 있죠. 그것도 특권층을 옹호하는.


p113 장자는, 목마른 두더지가 물가에 와서 물을 마신다, 딱 필요한 만큼만 먹고 두더지는 자리를 뜬다 합니다. 두더지가 배 아플 때까지 마시겠습니까? 장자가 보는 본래의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구하고 그에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회와 문명과 제도가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 그 문명과 제도를 비판하면서 인간을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지요. 배 터지도록 아니 배가 찢어지도록 먹게 부추기지 말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냥 타고난 본인의 순박한 성대로 살게 말입니다. 성악설에 서 있는 장자의 시각은 이렇습니다.


p114 유가식의 도와 덕하고는 이야기가 다르죠. 유가식이 도와 덕은 ‘바람직하니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노자식의 도와 덕은 철저히 수단적, 공리적입니다. 이렇게 따르면 어찌 되든 당신은 오래 살 수 있고 천수를 누리니 해보라는 거죠. 윤리적이니 아니니, 뭐가 옳고 그르니, 동기가 선하니 악하니 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p116 독약과 불로 서로를 공격하고 해치고, 가족끼리도 화합하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재화와 사회적 자원을 독점한 사람이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다고 하네요. <묵자> 원문의 다른 부분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공격하고,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더 뺏으려 안달하고, 지혜 있는 자가 지혜없는 자를 업신여긴다고 말합니다. 정말 묵자는 당대 현실의 끔찍함, 무질서와 혼란을 만들어낸 인간들의 어둠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묵자는 의로움을 말합니다. 한 사람의 의로움, 열 사람의 의로움, 근데 각자가 주장하는 의로움 때문에 무질서와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니, 어째서 ‘의’가 혼란의 원인이 될까요? 앞서 언급한 대로 여기서 말하는 ‘의’는 자기 입장에서 당당한 것, 곧 자신의 이익주장, 자기 몫 주장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자기 몫을 주장하다 보니 그런 혼란이 왔다는 것이지요.

그럼 ‘의’가 나쁜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사회공동체에서 통합, 조정, 합의되어 재탄생한 ‘의’는 겸애와 직결되지만 위의 글에서처럼 분리된 개인이 혼자서만 으르렁대며 주장하는 ‘의’는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 모두가 자기 몫을 지닌 이익 향유의 주체이기에 각자의 ‘의’가 부정되어선 안 되지만 만인이 제각각 각자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죠. 그래서 묵자는 사회구성원들끼리 잘 합의해서 표준적이며 보편적인 사회의 공의를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p119~120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의 인간이 일탈 행위와 혼란,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통치 권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통치 권력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결국 이렇게 귀결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라…….

     그리고 묵자는 물들임을 말합니다. 염색에 비유하면서요. 실을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되는데,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물들어야 한다. 특히 국정의 주체들은 그리 물들어야 한다. 그래야 당대의 무질서와 혼란이 질서와 평화로 바뀔 수 있으며, 또 그래야 궁극적으로 하층민 모두가 삶의 기초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염색에 비유해서 인간의 변화를 말한 묵자의 주장은 맹자와 격렬하게 논쟁한 고자의 인성론과 많이 닮았습니다. 고자는 食과 色, 곧 ‘음식남녀’로 말할 수 있는 식욕과 성욕이 인간의 본성이며, 묵자처럼 욕망과 욕망의 추구를 인성이라고 말하면서, 인성을 소용돌이치는 물에 비유합니다.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가는 물과 같다는 거죠. 이에 맹자는 버럭하면서 아니라고 합니다. 물은 항상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과 상관없는 어떤 특정한 성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선한 마음이고 거기서 ‘인’과 ‘의’가 만들어진다고 하죠.


p121 성악설은 인간의 타고난 욕망과 감정에 주목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 자체는 사실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욕망인 식욕과 성욕이 없다면 인간은 개체로서 생존도 못하고, 자손 번식 다른 말로 사회구성원의 재생산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살다 보니 욕망을 채워줄 재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 모여 사는 생활에 질서가 없으면 혼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과 좋지 못한 성향을 말하면서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를 말하는 거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싹수가 노랗다, 틀려먹었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인간이 어떻게 욕망을 추구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바람직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바꾸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죠.

⇒ 그래. 욕망은 가치중립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자꾸 욕망에 대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p122 거기에 뭘 쓸 것인가 하는 생각의 차이에 따라 묵자는 천지에서 연역해낸 겸애, 순자는 예, 노자는 도, 법가는 법을 말한 것이겠죠. 그러나 다들 백지라고 보는 건 똑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백지로 보기도 하는 성악설은 나름 인간의 긍정성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인정한 셈이기도 합니다. 종이에 이미 까맣게 얼룩이 져 있거나 다른 잡설들이 쓰여 있다면 무엇을 써넣을 수 있을까요? 또 배운 것, 가르친 것을 기억하고 습득할 수 없다면 백지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요? 최소한 인간이 어떤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 내지 그것을 받아들여 스스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 확실합니다.


p123 성악설은 어쨌거나 현실의 혼란과 무질서를 직시해서 해결하고자 하는데, 항상 현실의 혼란과 무질서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그것들 맨 앞에 정면으로 노출되는 이들은 하층민이죠. 그래서 성악설은 하층민의 편에 더 가깝습니다. 하층민 편이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하층민에게 이익이 될 여지가 많다는 거죠.


p124 노동하는 존재.

     자기 몫을 지닌 존재.

     욕망하는 존재.

     계산하는 존재.

     분업하고 협력하는 존재.

     그리고 묵자만의 성악설(통치 권력과 체제, 하느님 뜻으로 귀결되는)

⇒ 묵자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 되나.


6. 묵자의 하느님


동양 사상의 하늘, 하느님


p128 묵자의 천은 다른 사상가들의 천(天)과 다른 이미를 지니고 또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었으며, 사상 체계 내에서 천이 차지하는 비중도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무척이나 컸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다른 학파 사상들에 비해 천에 대한 진입 장벽이 아주 낮았다는 점, 그리고 천이 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타 학파 사상보다 훨씬 높았고, 무엇보다 천이 그냥 당장 주어진 현실과 현실의 지배 질서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이념, 제도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묵자의 천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하늘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도 번역이 가능하죠. 다른 사상가나 학파의 천과 달라요. 다른 학파의 천은 하느님으로 번역하면 상당히 어색합니다. 아니 아주 틀린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p131 <중용>이란 책을 흔히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가 사상에 대한 관념적,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유가의 우주론과 인간관을 집약한 책이라고. 그런 <중용>의 첫머리는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네요.

    하늘이 명하여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性)’이라나요. 사람은 날 때부터 그렇게 하늘이 준 성을 지닌 존재이며 그래서 모든 가치를 실현할 능력과 책임을 지닌 존재이고, 그 성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道)’ 곧 사람이 길이라고 천명한 중용의 이 첫 구절은 유학의 천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비록 순자의 천 관념을 담아내지 못하고 주로 성리학적 맥락에서 해석되어 왔지만 주류 유학의 천 관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저 구절을 깊이 음미해보지 않아도 우리는 유가의 천이 어떤 도덕 내지 인간이 해야 할 당위와 연관되는 것임을 알 수 있죠. 사람은 도덕적인 하늘에게서 부여받은 성을 지닌 존재고 그 성을 잘 키워 항상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무난합니다.


p135 맹자도 이야기하죠. 자신의 마음을 다한 다음에 자신 안에 내재된 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리고 나서야 천과 만난다고. 천에 접근하는 사람을 막는 문턱이 참 높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자와 맹자뿐만 아닙니다. 순자와 도가, 법가 모두 마찬가지죠. 유가처럼 도덕적인 천, 윤리를 투영해서 읽는 천을 부정하고, 객관적이 자연 법칙 내지 원리로서 천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예, 법, 도 등 자신들이 말하는 가치 내지 기준의정당성을 설명하는 그들 엯 그런 법칙과 원리를 아무나 이해하고 궤뚫어보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질 않았죠. 교육의 수혜자 중에서도 일부, 아니면 도통한 사람, 아니면 아주 극소수 이상적인 군주가 가진 어떤 특출한 지혜 내지 통찰력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38 묵자가 말하는 ‘천지(하늘의 뜻)’는 ‘묵지(묵가 무리의 뜻)’이고, 또 ‘민지(인민의 뜻)’입니다. 묵자 집단의 자의식, 하층민들의 염원과 희망 등이 투영되고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천지’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천지의 핵심이 ‘겸애’인 바, 겸애가 구현되는 세상을 묵자 집단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p141 삼표법은 간단히 말해서 앞서 말한 두 가지 근거에 성왕의 지도 이념과 실제 행적을 더해 이것들로 기준 삼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공의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왕의 지도 이념과 정치적 업적 역시 묵자 무리의 의사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p143 '천지‘의 핵심은 겸애입니다. 통치 권력이 분배하는 기본적인 물질적 혜택의 범위를 늘려보자는 겸애가 하느님의 뜻이니, 그 겸애를 실현하는 통치 시스템을 만들어보자, 곧 국가와 국가 체계를 하느님의 대행자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고 이상이죠.

⇒ 겸애가 묵자 사상의 핵심.

 

묵자의 天, 현실과 단절된


p151 절대자의 뜻이란 게 신비화된 무언가가 아니라 명확히 언어로 설명되는 합의된 것이라는 점에서, 묵자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사실 묵자 철학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정말 이질적인 사상 체계죠.

현실과 단절된 절대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논리적 주장 전개와 글쓰기 등 논리에 대한 강한 집착, 자신의 주장에 어떻게든 근거를 들어 설명하려는 태도, 용어와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 선진 시대 철학 중에 묵가만이 가지는 개성인데 상당히 서구적임.


p151 정녕 세상을 바꾸려면 투쟁도 좋고 조직 활동도 좋지만, 일단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알리고 설명하고 설득할 것인지 그 수단과 방법을 아주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또 자신들이 말하는 이상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그치지 않도록 반드시 현실화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과 프로그램, 매뉴얼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최소한 묵자 무리만큼은 노력을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들처럼 착취없는 세상, 인민을 위한 공의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요.


7. 기축 시대의 스승, 묵자 종적질서와 논리, 그리고 횡적 질서와 논리


p160 기축 시대를 만든 변화의 소용돌이와 흐름에서 개체 의식의 성장, 낯선 익명의 사람과 만나고 갈등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부와 권력, 폭력이 불균등하게 소유되고 그것이 합쳐져 종적인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종적인 질서를 긍정하는 관점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종적인 질서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안정되고 오래가게 할 것인지, 그리고 종적인 질서를 어떻게 포장해 세련된 수사로 세탁해서 사람들의 불만을 막을 것인지, 또 종적 질서의 핵인 폭력을 어떻게 구사할지,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종적 질서에 대해 반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p161 이렇게 종적 질서를 놓고 반성적으로 사고하며 대안을 일구고 대안의 기초가 될 윤리와 철학, 종교를 만든 사람을 가리켜 ‘기축 시대의 스승들’이라 하고 공자와 부처,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기축 시대의 간판스타로서 말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p161~162 공자의 유가 이전에 중국 사상의 시작이 있다고 했죠. 윤리와 도덕의 범주에 넣기 어렵고 또 어떤 체계적인 통치학과 정치철학으로 영글진 않았어도 공자보다 분명 선발 주자였던 사상, 바로 병가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병가의 사상은 기축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종적 질서를 반성적으로 사고한 것은 아니죠. 병가의 사상은 종적 질서가 가진 폭력의 힘을 극대화하자, 아니면 안정된 토대 위에서 그 힘을 구사하자는 생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병가의 대표적인 스타가 바로 <손자병법>의 손무인데요. <손자병법>이 대략 공자의 30대 후반 무렵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다는데, 묵자가 ‘공자 선생, 그건 아니오’하고 나왔다면 공자 역시 ‘손자 양반, 그건 아니올시다’하면서 나왔다고 볼 수 있죠. 체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손자에게, 공자는 ‘거, 우리 말로 합시다’ 이렇게요.


p166 어쨌든 여전히 억압과 착취에서 자유롭지 않은 세상을 사는 우리, 어쩌면 그런 억압과 착취가 더욱 교묘해진 시대를 살고 있는데요. 종적 질서를 순화하거나 정당하게 행사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종적 질서를 아예 횡적 질서로 바꾸고자 꿈꾸는 사람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같은 꿈을 먼저 꾸었던 선배들의 생각도 사상을 참고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남미의 해방신학, 우리나라 민중신학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합니다.

⇒ 계속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러나...


p169 지금 이 땅에 묵자가 있다면 이익 관련 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 그것 자체로 좀 바라보고, 섣불리 국민이니 국가니 하면서 어설프고 기만적인 윤리적 수사로 갈등 상황 자체를 뭉개지 좀 말자고 할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밥그릇이란 말에 우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도 꼬집을 것 같고, 또 그렇게 분위기 몰아가는 언론에 특히 강하게 경고할 것 같아요. 제 생각엔 한국처럼 도덕 과잉, 윤리 과잉인 사회(정확히 말하면 도덕적, 윤리적 말치레 과잉인 사회)는 도리어 매우 나쁜 비도덕, 비윤리적인 사회, 공동체가 아닐지요.

⇒ 맞아. 지나치게 과잉적으로 대처하면서 정작 그들은 전혀 최소한의 도덕과 예의를 무시하는. 무언가 드러나고서야 짐짓 잘못한 듯,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들의 웃음과 미소가 소름..


8. 공자와 묵자, 유가와 묵가


먼저 공자가 있었다


p185 유가에선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변해야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공자와 그의 후배들이 그랬죠. 그 말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분명 사람 하나하나가 변하는 데서 변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하지만 개인의 변화만으로 세상이 다 변할 수는 없겠죠. 각자 처한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정치공동체의 평화와 화합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 개인만의 변화만으로 한계. 지금 이 구조에서는. 변화에 대한 의지도 박탈되어 가고.


仁에서 겸애로, 다시 대동사상으로


p192 춘추전국시대도 그랬는데요, 그 혼란과 위기의 시대에 당시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먼저 기존의 질서 틀을 부정하지 않고 질서를 틀 상위에 있는 지배 계층의 거듭남을 강조하는 운동 내지 주장이 있었습니다. 공자의 사상이 그렇죠. 반대로 기존의 질서 틀에 회의를 푸고 그 질서 틀을 다시 짜보자, 재구성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겠죠(틀 자체를 완전히 부수고 전적으로 횡적인 질서를 수립하자는 주장은 최소한 묵자와는 상관없습니다. 묵자의 주장은, 재구성하자는 거죠). 새로운 기준으로 질서를 재편하자, 위에 있는 사람들 내려와라, 아니면 우리도 좀 그 틀에 끼워달라고 어떤 사람과 집단이 목소리를 냅니다. 춘추전국 시대뿐만 아니라 위기와 혼란의 시대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인데요. 그런 현상을 대변한 집단이 묵자 무리였습니다.


p193~194 도덕의 영역에 국한된 공자의 ‘인’ 대신에 이익을 다루는 ‘겸애’라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겸애를 위한 새로운 질서 틀 재편의 기준인 ‘상현’을 제시하고, 또 새 질서 틀의 운영 방법과 메커니즘으로 ‘상동’을 제시하고, 그 밖에도 묵자는 여러 가지를 주장합니다. 이렇게 정치하자, 공동체를 개선하고 바꿔가자고요. 그것들을 포괄해 ‘묵자 10론’이라고 합니다. 겸애, 비명, 비공, 상현, 상동, 천지, 명귀, 절용, 절장, 비악.

⇒ 묵자의 핵심 사상은 이렇다.


p195 묵자는 10론 외에도 어떻게 성을 견고하게 쌓고 무기를 잘 만들고 진을 치고 나라를 방어할지, 국방・군사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탁월하고 충실한 의견과 실용적인 매뉴얼을 내놓았습니다. 비록 방어에 국한되었지만요. 사실 방어에 국한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요. 침략 전쟁을 반대한 사상가였으니.

     이렇게 묵자는 전쟁으로 해가 뜨고 지던 당시에 정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었던 거죠. 시대적 수요에 정말 충실히 응했습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 쳐들어가지 말고 약소국 침범하지 말자, 명분없는 전쟁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방어력을 키울 방법을 고민하고, 그래서 실용적인 군사적 방어 기술을 개발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했죠.


p196~197 <묵자>는 대부분 편의 제목이 해당 편의 주제를 분명히 말해주고, 그 해당 편의 내용을 보면 제목이 드러내는 주제에 대해 충실히 논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제별 글쓰기는 묵자가 선진 시대 처음으로 해낸 것인데, 선진 시대 사상가 중 주제별 글쓰기를 가장 충실하게 한 사람은 순자입니다. 그가 쓴 <순자>라는 책을 보면, 총 32가지 주체를 선정해서 완성해낸 32편의 충실한 논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자>를 완성한 동아시아 지성의 큰 봉우리 순자도 사실 묵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p197 묵자는 유가를 쳐야 울리는 종이라고 말합니다. 치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수동적이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자 자신은 스스로 울리는 종이 되겠다고 말하는데, 현실에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문제 해결형 지식인이 되겠다는 뜻이고 그러기 위한 실용적인 통치 철학과 사상이 준비되었다고 자신하는 겁니다. 묵자는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여러 가지 국정과 관련해서 주제별 논의를 하고 정책 방침을 마련했고요.

⇒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책 방침을 마련하는 것도 한 출발점이 됨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p202~203 그래도 묵자는 어느 정도 유가적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치 측면에서 비슷한 것이 많은데, 첫째 공리적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으냐를 따지고 선한 동기를 중요시합니다. 법가든 병가든 도가든, 동방의 철학이 아닌 사상들은 철저히 공리적입니다. 이득이 되니까 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우리 말을 따라야 왕이 살아남고 전쟁에 이길 수 있고 국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따지지 않습니다. 묵가는 결과적 효용과 이득을 말하긴 하지만 옮음과 당위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합니다. 옳고도 이로우니 하자고 하지 이익만 가지고 설득하지 않습니다.

     둘째, 묵가는 무턱대고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비동방 사상가들은 밖으로 나가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밖으로 뻗어나가 다른 나라의 재화와 인민들을 편입시켜 국가의 덩치를 키우자고 하죠. 상앙은 국력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전쟁을 통해 그것을 써먹어야 한다는 말까지 합니다. 하지만 묵가는 유가만큼은 아니어도, 또 유가보단 사고 단위가 넓어도 밖으로 뻗어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선은 자신의 나라가 인민들이 살기 좋은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셋째, 비록 유가는 위에서 아래로, 묵가는 아래에서 위로, 선 지점과 시각이 다르지만 백성을 동정하여 온정적으로 보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법과 수단은 달라도 그들이 꿈꾸던 이상이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네요.

⇒ 묵가와 유가의 차이



9. 유가와 묵가의 사고 단위, 그리고 전국 시대의 통일


국지적인 유가, 전체적인 묵가


p214 묵자는 다릅니다. 그는 일단 국가권력의 정점에서 내려가자고 합니다. 자, 우산이 있습니다. 우산 위에서 물을 붓습니다. 그러면 그 물이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흘러가겠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국가가 있고 국가를 구성하는 하부 단위로서 100개 지방이 있다고 합시다. 유가는 각 지방이 스스로 알아서 자율적으로 이상적인 정치 단위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묵자가 보기에는 국가권력이 정점에서 모든 지방을 관할 내지 관리해야 하는 것이죠. 단순히 관리를 위한 관리 내지 관할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국가 내 모든 구성원의 기초적 삶을 중앙의 통치 권력이 보장해줘야 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 전 지역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관할하자는 것입니다.


p215 묵자가 말하는 사랑은 바로 물질적인 이익의 보장이고요, 그것에 소외되는 사람은 없어야 진정한 인이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신하이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대상이니 거기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힘이 있어 전 지역을 장악한 국가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00개 지역이 있는데 99개 지역이 잘 돌아가도 나머지 한 지역에서 굶는 사람,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 인간으로서 삶의 기초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묵자가 말하는 인이 아니고 겸애가 아닙니다.

⇒ 반복되어 온 묵자의 논리, 겸애. 최소한의 인간권 보장, 사회복지에서 강조하는 것.


p216 묵자 사상 자체가 큰 정치 단위, 국가의 큰 덩치를 생각하는 쪽으로 가기 쉬워서 진에 베팅한 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묵가는 법가나 병가처럼 뻗어나가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나라의 재화와 인민을 귀속시켜 덩치와 힘을 불려나가는 것은 분명히 반대한다고 했죠. 자기가 있는 나라에서 제대로 국정을 펴, 그 나라를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을 우선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앞서 열거한 이유로 인해 사고 단위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은 통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p217 그런데 통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실 전쟁은 분명히 통일을 위한 아주 유효한 수단이거나 때론 유일한 수단일 수 있습니다. 통일을 원한다면 전쟁, 전쟁을 통한 상대국 편입을 생각하기 쉽고 사실상 전쟁이 결론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기에 묵자 무리 중 일부가 진에 투신해서 통일 제국 진을 만들기 위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진에 투신한 그들의 행보가 완전히 이해되시나요? 묵자하면 반전과 비공 아닙니까. 그렇다면 진에 투신한 묵가 무리의 선택과 행보는 자신들의 사상 중 중요한 부분인 비공, 반전과 모순되는 행보였을까요?

 

시詩와 변辯


p221 묵자 쪽은 시가 아닌 다른 소통의 수단을 제시했죠. 바로 변.

⇒ 언변과 논리에 진보정당 쪽이 확실히 강하다.


p221~222 묵자는 말을 중시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관료와 지식인의 요건에 분명 말 잘하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묵가의 교육과정에는 아예 담변이라는 과목이 있어 제자들을 집중 교육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묵자가 강조하는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시비를 분명히 가려내고, 논쟁에서 상댈ㄹ 이기고, 또 개념과 용어를 분명히 정의하고, 근거를 들어 자기주장을 분명히 논증하는 기술과 방법을 뜻합니다. 논쟁적, 설득적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말과 언어죠.

⇒ 볼수록 묵자는 진보정당쪽의 느낌이다. 이 사람이 현대에 살아 있다면 진보정당의 총수?쯤 되었을까? 이른바 좌파, 진보들의 성향이 이러한 특징을 나타내는 듯하기도.


10. 진나라의 묵가, 진묵


묵자들이 진으로 간 까닭


p231 사상이란 게 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바꾸고 그것을 넘어 여러 나라를 통합하는 통일의 밀알이 되기 위해선 왕 아닌 다른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사상과 주장대로 법과 제도를 만들면 왕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환경과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전망을 보여줘야죠.


p235~236 애초에 묵가 무리는 왜 진에 갔고, 진에서 왜 볍과 제도정비에 매달렸는가?

     묵자 철학 자체의 비귀족적 측면, 법 친화적인 면과 통일 지향적인 면, 극단적인 왕권 중심적으로 갈 수도(악용될 수도) 있는 경향 등.

    인류 최초의 반전운동가 묵자, 그리고 그의 제자들. 묵자 무리는 수없이 약소국에 갔습니다. 가서 강대국들의 침입과 공격에 맞서 약소국 방어의 일선에 섰다가 무수히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중원 열국이 통일되면 전쟁이 종식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 뜻과 겸애에 깔린 사고 단위, 사유 단위는 태생적으로 넓고 크다는 것. 하지만 이것들이 진묵이 나타난 원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묵가가 하층민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사(士)였다는 점입니다. 묵자 무리는 분명 사였습니다. 국가와 사회를 이끌 비전, 이념, 게다가 구체적인 정책까지도 보유한. 사실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 모두 지식인으로서 공유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죠.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취직, 등용이 되어야 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실현해줄 군주를 만나서 정치 현장에 등용되어야 하고 또 국가를 이끌고 만들어가는 담당자로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시 지식인들, 사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을 단순히 피지배층으로 생각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왕과 같이하는 지배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왕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등용하고 부와 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존재인 왕의 위치를 확고히 할 사상과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러면서 국정을 이끄는 관료 내지 정치인으로서 자신들이 백성들과 구분되는 특권과 명예 등을 가지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죠. 이 점에선 묵자 무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기원이 노동하는 하층민에 있고 그들의 의식을 대변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렇다면 등용해주고 대접을 잘해주는 나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겸애와 반전사상, 통일적 사고는 둘째치고, 지식인으로서 묵자 무리가 진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는 거죠.

⇒ 이것이 한계일까, 특징일까.


p237 묵자 무리, 비록 스스로가 자신들을 사, 지식인 내지 예비 관료로 여기는 자의식을 지니고, 이론적으로 자신 있게 무장하고 준비를 했어도 사실 출신은 귀족이 아니라 하층민입니다. 그렇기에 귀족의 힘과 목소리가 강하고 그들이 고수해온 관념과 관습이 강한 나라에서는 묵자 무리가 비집고 들어가 등용되기가 힘들었겠죠. 태생이 노나라이고 노나라에서 제자들을 모으고 가르쳤지만 괜히 노나라와 그 근처 나라에서 중요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 세력이 강하고 그들이 친 진입 장벽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에서는 묵자 무리가 취직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울타리가 가장 낮은 나라가 어디냐, 바로 동방과 가장 대척점에 있던 진나라입니다.


p241 묵자는 이익의 산출, 그냥 이익이 아니라 공유되고 분배되는 이익을 산출하는 이에겐 반드시 그만큼 상을 주라고 합니다. 반대로 타인의 이익, 공유되고 분배될 수 있는 이익을 해치고 파괴하는 자에겐 또 그만큼 벌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묵가는 어떻게 사라졌나


p245 사적으로 무력을 보유한 데다가 하층민을 대변하는 집단. 통일 제국은 그들을 더더욱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이제 탄압에 나섭니다.


p246 묵자는 하층민의 기본 생활 유지와 직결되는 분배 정의와 이익 공유를 항상 강조합니다. 그래서 지배층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관습에 반대했습니다. 지배층이 낭비해대면 결국 하층민들에게는 돌아가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진시황이 민력을 소모하고 재화를 낭비하기 시작함. 아방궁과 자신의 무덤을 초호화판으로 건설하고, 만리장성 같은 대대적 토목 공사를 벌이는 등 혈세를 낭비하고 착취함. 이에 묵자 무리가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묵자 무리를 점차 내쳤을 것으로 봄. 아마도 분서갱유 사건이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 될 것임.


p248 그 집단과 사상은 애초에 전국 시대라는 커다란 유동성의 시대,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와해된 혼란의 시대에서나 숨 쉴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었던,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였으니, 사라진 게 별스런 일이 아니라 존재했던 것이 별스런 일이었던 겁니다. 묵자는 예외적인 사상가였고 묵자 집단은 예외적인 존재였으며, 그렇게 예외적인 존재를 잉태해 출산한 것도 역시 지극히 예외적인 시대적 배경과 조건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라지고 절멸될 것, 2000년 넘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것, 그것은 의아스러운 일이 아니라 어쩌면 군인들이 삽질하고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는 일처럼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11. 묵가 사상의 비조, 그 이름 자로여


공자 학단의 야당 대표, 자로


p276 공자는 자로의 공유, 나눠 가짐에 대해 심하게 타작하진 않고 그냥 추고 좀 하고 마는데, 후에 맹자는 이 공유, 나누어 가짐의 정신을 핵심으로 해서 전국 시대를 들었 놓았다 한 사상가 묵자를 심하게 공격합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 논리를 ‘무부’ 곧 애비 없는, 부모 없는 놈들의 논리라고 폄하합니다. 묵자식 겸의 논리가 기초하는 것은 혈연공동체와 무관한 인간들끼리의 상호 부조 내지 연대의 정신인데, 그것에 위험성이 있다고 맹자는 본 것이고, 그것이 친족 질서를 부정했다는 것이죠. 묵자의 겸애가 공자의 인을 허물 위험성이 있고 맹자는 본 것입니다. 곧 친족공동체 안의 인간들을 전제하고 그 안에서 상호 친밀감에 바탕을 둔 인이란 이사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들 수 있는 파괴력, 그것이 겸애에 있다고 보아, 맹자는 부모 없는 놈들의 논리, 곧 친족공동체와 혈연애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헛소리라고 폄하한 것입니다.


 자공, 명을 받지 못한 아주 좋은 그릇


p283 묵자 무리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중시했던 사람들입니다. 논리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용어와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이견들 사에서 차이와 같음을 정확히 찾아내고,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게 묵가였죠. 그러니 법도 많이 만들어낸 것이죠. 법이란 게 두리뭉실, 애매모호하면 아무 소이 없죠. 논리적이어야 하고 개념 규정 명쾌하게 빈틈없이 해야죠. 그것이 법의 생명인데, <묵자> 원문 읽어보면 이 사람들, 법을 만들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진보당 사람들이 법안 발의를 많이 한다더라..


12. 묵자 읽기-묵자 사상의 예습편들


친사親士 


p297 친사. 사(士)를 가까이하라.
지식인, 사상가을 가까이하라는 것인데 바로 묵자 사상을 가진 지식인을 말하는 거죠. '우리 묵자들의 말을 경청해보라‘는 것.

인재를 놓치지 말고. 능력있는 인재의 영입과 활용이 필요함을 각국의 왕에게.


p300 묵가 지식인은 그들 스스로 쓸모와 능력을 갖추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니 능력 있고 쓸모 있는 지식인이란 바로 묵자들이겠죠. 앞서 말한 대로 ‘친사’에서 사(士)는 바로 묵가 지식인들입니다.

    그들 스스로 사(士), 곧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비록 피지배층, 생산에 종사하는 천인 계층이나 성을 방어하는 하급 무인 계층에서 출발했고 그들을 대변한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갈고닦아서 자신들을 지식인으로서 자부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지식인 중에서도 쓸모 있는 지식인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목소리도 국정에 반영해달라, 우리도 지식인이니 어느 정도 대접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수신修身 


p302 수신이라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오점 내지 얼룩을 제거하는 유가적인, 더 정확히 말해 성리학적인 수신을 떠올리는 분이 많을 텐데, 수신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쉽게 ‘어떤 변화’라고 생각합시다. 변하라는 것입니다. 국정을 맡을 사람은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떤 근본을 이야기합니다. 근본을 갖춰야 한다. 근본이 없으면 안 된다. 근본을 갖추는 방향으로 수신, 곧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p303 군자는 전쟁을 하는데 진법이 있다 하지만, 용기를 근본으로 삼는다. 장례를 치를 때에 예의가 있다 하지만, 슬픔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선비에게는 학문이 있다 하지만, 실천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근본이 안정되지 않은 사람은 지엽적인 결과를 풍성하게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묵자, 수신

 

소염所染


p305 묵자는 실을 물들이는 사람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며 ㄴ파래지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래지니,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깔도 변한다. 다섯 번 물통에 넣었다 보니 오색이 되었구나. 그러니 물들이는 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구나.” -묵자

 

p309 현명한 사람을 가려 뽑고 나서, 군주가 일일이 나서기보단 국정의 상당부분을 현명한 인사들에게 맡기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염>, 곧 물들임 편의 결론은 단순히 그렇게 귀결되지는 않습니다. 신분, 귀천,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을 기준으로 하는 인사 행정, 신화와 관료들을 존중하며 왕이 독주하지 않는 정치, 이런 것들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결국 물들임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법의法義 


p314 묵자의 인간관이 보이죠. 묵자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p315 물들임은 묵자의 인간관과 인성론을 구성하는 핵심이죠. 공자와 맹자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 감정을 주목하기에 인간 안의 것을 중시합니다만 반대편의 묵자는 인간 밖의 것에 주목하고 인간 밖의 기준에 인간을 물들이고자 합니다. 자, 인간 밖의 것을 찾아보자.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다스리고 국정을 운영하자. 그 기준이 하늘이라고 합니다.


p316 크고 작은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하늘의 고을이며, 나이가 많고 적고 귀하고 천하고를 막론하고 모두 하늘의 신하다 -묵자, 법의


p317 현실에선 나라별로 약육강식의 질서가 있고, 역시 사람들끼리는 귀천과 사회적 자원의 소유 여부에 따라 엄연히 불평등한 질서가 있지만, 하느님이 보기엔 다들 똑같은 존재이고 그 하느님의 시야에선 모든 차별의 울타리가 지워집니다. 모두 하느님의 나라고 하느님의 신하이니 하느님은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이롭게 하길 바라고, 서로 약탈하고 핍박하고 해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묵자는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하면서요. 그 하느님의 뜻이 바로 묵자가 말하는 의(義)이고 공동체 모두가 준수하고 통치 권력이 구현해야 할 공의(公儀)입니다.

 

칠환七患 


p320 일곱가지 환란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들, 방치해두면 나라를 무너뜨리는 일곱 가지 환란과 재앙을 열거하면서 묵자는 국방, 외교, 경제, 내정, 군주, 신하, 식량 등 국정을 구성하는 여러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대의 병리 현상을 다루는데요. 환란이라고 하는 걸 보니 묵자가 보기에 이들 병리 현상은 당대에 거의 재앙 수준이었나 봅니다.


p323 묵자는 단적으로 낭비, 절약하지 않음을 원인으로 말합니다. 일반 백성의 낭비가 아니라 지배층의 낭비를 원인으로 들면서 비판하죠.


사과辭過


p325 過 곧 지나침에 대해 辭한다, 곧 논한다는 뜻입니다. 한편 사는 물리친다는 뜻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지나침을 물리치거나 배격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죠. 여기서 말하는 지나침은 <칠환>편에서 거론된 지배층의 사치와 낭비입니다. <사과>편에서는 사치와 낭비의 행태를 비판하고, 그 낭비와 사치가 불러일으키는 폐해로서 국가의 혼란과 하층민들이 겪는 생존의 위협에 대해서 논합니다.


p327 묵자가 활동하던 시기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생존의 필요 이상으로 넘치게 추구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바로 지배층과 귀족들이었습니다. 지배층이 호화롭게 궁궐을 짓고, 다 먹지도 못할 산해진미를 탐하고, 튼튼하고 편리하기만 하면 될 수레와 배를 화려하게 꾸미고, 차림새 역시 추울 때 따뜻하고 더울 때 시원하기만 하면 되는데 갖은 치장을 다한다는 것이지요. 지배층이 사치와 낭비를 하는 데 재물을 쏟아붓느라 백성들이 생존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은 모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p328 귀족들의 낭비와 사치가 도를 지나쳐 결국 모든 이들이 누려야 할 자기 몫을 누리지 못하니 이는 큰 문제고, 이런 재앙에 가까운 병리 현상을 바로잡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뜻에 물든 위정자가 곧바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p329 옛날에 최고의 성인들도 첩을 두기는 했으나 그것으로써 행실을 그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 갇혀 있는 여인들이 없엇으므로 세상에는 홀아비가 없었다. 안으로는 갇혀 있는 여인들이 없고 밖으로는 홀아비가 없었기 때문에 천하에 인민이 많아졌다. -묵자

     요새 같으면 정말 돌 맞을 소리지만 묵자는 여자도 모두가 가져야 할, 누려야 할 몫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당시엔 남자만 사람인 세상이었죠. 그런데 여자는 배나 수레, 옷처럼 과거의 성인 군주가 인민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죠. 다만 지금의 왕들 시대와 다르게 과거의 성군 시대에는 지배층이 여자를 독과점하지 않아서, 모든 남자가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정말 돌 맞을 소리이고. 깨어 있다는 사상가들, 그리고 하층민들이나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한다는 이들도 하나같이 ‘여성’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정말 똑같다. 정말 깨어 있지 못한 것???


p330 여기서 묵자가 그렇게 강조하는 이익이 뭔지 좀 알 것 같습니다. 이익을 늘려라, 백성들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 이롭지 않으면 의로운 것이 아니다, 이익과 동떨어진 윤리와 도덕은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이 강조하는 이익은 단순히 재화 총량이 아니라 분배되고 공유되는 이익, 그러한 조건에 한정된 이익일 뿐입니다. 빵을 아무리 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각자 먹고사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빵이 돌아가고 굶는 사람이 없어야지, 빵 자체를 키우는 건 묵자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분배되고 공유되는 이익의 최대화, 그것이 묵자의 중심생각입니다.

⇒ 겸애. 지속적인 반복.


p330~331 <친사>편부터 <사과>편까지 정리.

     1. 친사 “내 말 좀 들어보세요”

     2. 수신 “왕께서 변화하세요(통치 권력과 시스템이 바뀌어야 해요)”

     3. 소염 “실이 물감에 물들어서 새 실이 되듯이 어떤 외부의 기준대로 변해봅시다.”

     4. 법의 “그 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 그 하느님의 뜻인 義를 본받아 변해야 합니다.”

     5. 칠환, 사과 “당대의 모순과 병리적 현상, 그것을 불러오는 원인, 그것들을 바로잡는 게 가장 급한데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정치를 할 때 가장 빨리 손봐야 할 일이며 항상 염두에 두고 씨름해야 할 국정 과제입니다.”


13. 묵자 읽기-계급 타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외침


p338 구체적으로 현명한 이의 덕목과 능력을 살펴보면, 첫째로 현자는 옳은 일을 한 자에게 상을 주거나 격려하고, 그른 일을 한 자에겐 응분의 벌을 주어 국가 질서를 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힘이 있을 때는 힘써 타인을 돕고, 재산이 있는 경우 부지런히 나눌 줄 알며, 지혜가 있거나 지식이 있을 경우 타인을 가르칠 수 있는 자입니다. 이제껏 말한 분배되고 공유되는 사회적 자원과 이익을 늘릴 수 있는 사람이죠. 셋째, 말솜씨가 탁월하고 논리에 밝은 사람, 곧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합의를 잘 이끌어내고, 정책과 국가 방침을 잘 홍보하며 사람들을 잘 설득하고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문적인 업무 능력이 있어 분야별 국가 행정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p340 묵자가 말하는 정치 일선에 등용되어야 하는 현명한 이는 정치공동체 안의 질서를 잡고 국가와 백성의 부를 충실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백성들 각자가 지닐 몫을 모두 챙겨주는 사람, 곧 겸애를 현실에서 구현해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묵자는 의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고, 義가 바로 현자의 덕목이며 정치인, 공무원, 관료, 관리의 자격 요건이 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p344~345 상현은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전본적인 논리로 비칠 수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을 쥔 귀족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 쓰일 여지가 많은 사상을 익힌 사람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죠. 대표적으로 유가의 거두 맹자와 순자가 있겠습니다. 그들은 묵가 사상을, 정치공동체 운영의 기초를 부정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폄하했죠.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선 묵자의 상현 사상이 통치 권력을 쥔 왕의 수요에 더 맞지 않았을까요?

     도덕만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종래의 귀족과 인척들은 언제든 왕과 권력 경쟁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사적인 인적 네트워크는 국력의 극대화와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구축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귀족과 인척을 대신해서, 정확히 말해 왕 아래에서 사적으로 라인과 파벌을 만들 우려가 없으면서 실무적인 능력을 갖춘 인사가 필요했을 텐데 묵자의 ‘상현’은 왕들의 구미에 맞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p345 묵자는 현명한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일단 그에게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과 위세, 권위를 주어야 하고, 그의 능력과 그가 일궈낸 결과에 걸맞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 경제적 보상도 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에게 그들의 통치 행위가 제대로 먹힐 수 있을뿐더러, 현명한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고 대접해주는 왕의 곁으로 모일 것이며, 또 사람들이 저마다 능력을 갖춘 현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한다는 것이죠.


14. 묵자 읽기-겸애 실현을 위한 조직론


태초에 질서가 없었을 때


p352 尙同. 동을 숭상한다. 높이 산다는 것이죠. 동, 같음을 정점까지 밀고 나간다, 같게 하는 것을 최대화한다는 것이고, 통일시킨다는 의미도 있죠.


p358 묵자는 보편적인 인간론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가 주장하는 것을 일단은 義라고 인정하고, 그것이 갈등을 불러일으킬지언정 모든 사람을 각자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 더 정확히 말해 어떤 대등한 지분을 소유하는 존재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역시나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신하라고 전재하고, 또 애초에 하층민으로서 자의식을 가진 사상가여서 그런지, 사람을 단순히 동질적인 단위로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일한 몫을 가진 존재로 보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사실 각자의 이익 주장이라는 義를 더 정확히 보면 노동한 자가 누리고 가져야 할 몫과 관련됩니다.

⇒ 각자가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토론도 될 수 있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인데.


하나로, 일원적으로, 통일로


p365 묵자가 보기에 왕과 통치 권력은 말이죠. 대등한 지분을 가지고 자기 몫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노동 인민에게 분배되고 공유되는 이익을 늘려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대등한 지분을 가지고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있는 인민의 의지와 뜻에 따라야 하고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묵자의 생각입니다.


p367 어떤 과정과 절차로 군주를 선출할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자질과 능력이 군주의 자격 요건이고, 어쨌거나 선출되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이건 상당히 혁명적인 사고죠. 현대 민주주의 정치 이론처럼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 선거와 투표로 정치의 수장을 뽑자고는 하지 않았지만요. 사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군주 자리를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고 현명한 신하를 선택해 물려주었다는 선양 신화는 묵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유가가 아니라 묵가가 선양 신화와 이념의 원조죠. 선양 신화와 이념 뒤엔 저런 묵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능력이 우선이란 생각이.

⇒ 혁명적 사고..주권이 과연 인민에게 있는가.


p370 무엇에 집중해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느냐 하면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입니다. 善이나 불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순해 보일 수도 있는데, 좋은 것은 인민이 생각하기에 국가가 보장해줘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고, 인간이 생존을 영위하는 데 꼭 있어야 할 것이라 보면 됩니다. <사과>편에서 말한 인간 삶의 필수 요서 다섯 가지, 더 줄여서 입을 것, 먹을 것, 쉴 수 있는 공간과 여건, 이렇게 세 가지. 그리고 나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것, 약자를 핍박하고 착취하고 타인을 해치고 타인의 것을 빼앗고 공공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이죠.


p379 상동을 정리하면,

     백성들의 뜻을 모으자.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의를 만들어내자.

     모은 뜻, 그 대원칙을 철저히 일원적으로 정비한 군주 중심의 통치 권력과 시스템으로 효율적으로, 빈틈없이, 온 천하에 집행하자.


15. 묵자 읽기-이것이 겸애다


별別과 겸兼, 별에서 겸으로


p386 묵자의 사상을 공자처럼 간단히 개괄하자면 어찌 되느냐, 바로 각자 따로(別)에서 모두 아우름(兼)으로의 전환, 별→겸입니다. 별이라는 모습으로 극단적 이익 투쟁이 전개되는 공동체를, 서로 이익을 공유하고 호혜적으로 이익을 주고받는 겸의 공동체로 바꾸려 하는 것, 이것이 묵자의 겸애입니다.


p388 겸애란 두루 사랑하라는 것인데,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亂’을 이야기하네요. 묵자는 우선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 병리 현상에 주목합니다. 묵자 사상과 묵가 운동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했고 상세한 문헌적 고증을 통해 설명했던 일본의 학자 와타나베 다카시는 그것을 敗世 정신이라고 하죠. 와타나베는 묵자 무리가 묵가 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항상 도처에서 발생한 난을 주목하고 또 증오했으며, 이 난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을 막을 방책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패세 정신이라고 명명했는데요. 겸애란 것의 시작, 그리고 겸애의 본질도 그것과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혼란과 부조리, 모순, 병리 현상, 그것의 치유와 개선, 거기서 겸애는 시작하죠. 모순과 병리 현상의 치유와 근절, 그것이 겸애의 시작이자 본질입니다.


p389~390 別, 나누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 나와 타인을 나누고, 또 나의 이익과 나 아닌 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갈라서 세상을 보는 시각, 내지 그런 시각을 가진 자가 꾀하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이 별 내지 別愛입니다. 묵자가 말하는 난은 이런 별, 별애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곧 별이 난의 원인이라는 것인데, 그냥 별은 난과 같은 것으로 봐도 좋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지배적 현상이라는 것인데 묵자는 별이 불러일으키는 난의 사례와 양상에 대해서 더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별이 난과 같은 것이니 그냥 별의 사례, 별의 양상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p393 결국 묵자가 말하는 난을 다스리는 일, 害를 제거하는 일은 평화롭지 않은 세상에서 약자가 겪는 핍박, 억압, 착취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나라와 나라, 집안과 집안, 사람과 사람,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형과 아우가 다툴 때 손해를 보는 쪽은 약한 편이니까요. 여기서 묵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을 통해 난이나 해, 곧 어지러운 상태와 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배타적 이익 추구에 몰두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겸애를 하라는 것입니다.

⇒ 문제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것. 그 문제라는 것은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천년전의 시대의 통치가 지금 현실이다. 이 어이없는.


p394 결국 묵자의 주장은 사람들 각자가 배타적, 파괴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에서 벗어나 호혜적으로 이익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상대를 대등한 이익 향유의 주체로 보고, 어떤 합의된 질서의 틀에서 조화롭게 이익을 추구하는 상태로 가자는 말이죠. 그런데 모두가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며 모두에게 변화할 것을 얘기하지만, 사실 묵자의 속내는 힘을 가진 자들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죠. 묵자가 정말 원하는 것은, 지배층이 하층민 역시 이익을 누리고 향유해야 하는 주체로 인정하는 것, 결국 통치 권력이 백성들도 이익 향유의 주체임을 보장하는 쪽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겸애 실현이지요.

⇒ 절대로 현재의 통치체제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사상. 겸애.


p397 또 묵자는 모든 개인의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하도록 질서 틀이 합리적으로 설계되기만 한다면 모든 이가 설득될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인간은 계산하는 존재, 저울질을 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니까요. 그 질서 틀, 겸애를 구현하기 위한 국가 운영의 틀은 다른 말로 義입니다. 그 의는 이로움을 주는 것이고 또 그 의를 통해야만 인민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선거철에만 강조되는 기초생활보장제도.


군주가 좋아하면, 이루어진다


p401~402 이렇게 묵자는 사람들더러, 당신들 스스로에게 더 이익이 되는 겸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인식도 전환하자고 합니다. 별로써 세상을 보지 말고 겸으로써 세상과 인간을 보자고. 또 행동도 바꿔야죠. 별의 행태에서 겸의 행태로. 그래야 모두에게 이득이 되니, 자 이렇게 거듭나야 하고, 그렇게 거듭날 것을 묵자는 낙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을 가진 자, 지배층이 인식을 바꾸고 겸을 위한 공적 질서 틀을 만들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늘이 원하는 겸애의 정치인 의정은 어디까지나 겸군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니, 군주로 대변되는 공적 기구와 그 공적 기구의 구성원들이 겸해져야죠. 아니면 겸할 수 있는 인사를 대대적으로 공적 기구에 편입하든가. 바로 묵자들.


p407 겸애의 중심 주체는 군주로 대변되는, 공적인 국가 기구이고 겸애를 구현하는 주된, 필수적 수단은 상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통 사람이 겸애의 행위 주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정치권력이 서기 전에, 어떤 대원칙으로 정치공동체가 돌아가야 할지 따지는 의견 수렴의 무대가 있습니다. 그 무대에 나와서 의견을 내놓은 것은 모든 인민들에게 주어진 권리로서, 그 인민들의 합의가 있어야 겸애를 실현할 정치권력이 만들어질 수 있죠. 그 수렴과 합의의 과정에서 인민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도 겸애의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올바른 대원칙을 실행할 공동체가 생기면 의견을 내놓은 인민들 모두가 그 공동체에 합류해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부지런히 일하면 되는 겁니다.


p411 겸애의 정치공동체라면, 그리고 그 공동체의 수장이라면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도 제 몫을 누리도록 의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거죠.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현상의 근절, 공유되는 호혜적 이익의 확대, 거기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권리를 보장하는 일, 그것이 바로 겸애 정치, 묵자가 말하는 의로운 정치입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신하이고 자식이고 누려야 할 몫이 있는 사람이기에 공동체에서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돌봐야 한다는 거지요.


16. 묵자 읽기-구체적인 겸애, 반전 <비공>편


p416 묵자에 관한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는 ‘非功’이 먼저 떠오를 것도 같네요.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비공>편입니다. 실제로 묵자들이 주력하여 현실에서 이루어내려고 한 것이 비공이고, 또 묵가 집단이 많은 주목을 받은 것도 비공 덕분이지요.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희생되었고요.


p418 묵자는 전쟁을 반대하는 비공 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반전운동가, 단순히 신념을 말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바쳐가며 강대국들의 공격에 맞서 약소국을 위해 방어 전쟁을 치러낸 사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묵자란 사람의 강렬한 인상과 그가 주는 울림은 상당 부분 헌신적인 반전 활동과 전적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p418 묵자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합니다. 하지만 옳음, 정당함, 정의와 분리된 이익이 아니죠. 의라는 리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고, 묵자에게 그것들은 새의 좌우 양쪽 날개같은 겁니다. 의는 이로워야 한다. 또 의로워야 진정 이로울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은 극단적으로 불의하고 불리합니다. 그러니 막아야 하고 줄여야 하고, 천하가 전쟁이 없는 상황으로 가야 하는 거죠.


p424 전쟁의 불의함을 모르는 것, 그것은 검은 것과 흰 것, 단맛과 쓴 맛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묵자는 말합니다. “조금 검은 것을 보고서는 검다고 하다가 많이 검은 것을 보면 희다고 하고, 조금 쓴 것을 맛보고는 쓰다고 하다가 많이 쓴 것을 맛보고는 달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17. 묵자 읽기-구체적인 겸애 2 節用 節裝 非樂 편


절용節用


p431 묵자는 나라의 힘이 국경 밖으로 뻗어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법가나 병가식으로 밖으로 전쟁을 벌여서, 밖에서 빼앗아 와 축적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이익을 늘리자고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없애고, 사업과 소비를 쓸모 있게만 일으켜야지요. 그리고 과거의 성인 군주들이 그렇게 했다고 덧붙이네요. 그러다 보니 백성들에게 돌아갈 이익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 성왕이 정치하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실용성을 기준으로, 곧 백성들의 생활에 실제로 이익이 되느냐 마느냐를 기준으로 생산과 보시를 해서 백성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늘리자는 것입니다.

⇒ 춘추전국시대의 그러한 혼란과 전쟁이 일상화된 시대에 전쟁을 반대하는 무리들로 이러한 의견을 내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하다.


p435 묵자는 귀족들의 낭비적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다가 갑자기 인구 늘리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과거 성광들 시대에는 남자가 스무 살이 되면 꼭 장가를 들고, 여자는 나이 열다섯이 되면 꼭 시집을 갔는데, 성왕의 시대가 아닌 현재에는 그렇게 일괄적으로 일찍 짝을 찾아 결혼하지 못하여 인구가 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들 일찍이 짝을 찾아 자식들 많이 나아 길러서 인구가 늘면 좋으련만, 지배층이 지나치게 사치해서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없고 또 전쟁이 잦다 보니 백성들이 짝을 찾고 자식을 낳아 기르기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만약 지배층이 스스로 절제하여 필요한 만큼만 소비해서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 많아지고 삶의 기초가 안정된다면, 백성들이 모두 제때 짝을 찾아 자식을 낳고, 그러면 인구가 증가해 국가가 튼튼해지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묵자가 산 시대에는 지배층의 이익 독점⇒백성들의 생존 불안⇒가정 꾸리기와 자식 생산, 부양의 부실화⇒인구 줄어듦, 이런 악순환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 현재 시대에도 지배층의 이익 독점으로 백성들이 생존이 불안하고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 실업의 장기화..방황하는 청춘들. 불안한 미래를 가정을 꾸리는 것은 더욱 불안을 자초하는 일이니까. 그러니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현재에도 해당되는 악순환 아닌가.


절장節葬


p443 묵자가 보기에 당시 지배층의 낭비가 가장 집중된 데가 장례였나 봅니다. 이것은 또 유가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무기도 되고요.

 

비악非樂


p448 <비악>편에서는 음악을 문제 삼는데요. 음악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음악 소비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역시나 지배층의 지나친 음악 소비 때문에 아래로 분배될 재화의 낭비와 소모가 너무 심하고, 이것이 민생 파탄을 불러온다는 거죠.


p452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사실 살 가치도 없다고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음악에 빠져 일하지 않고, 또 타인이 일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는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고 인간으로 살 가치가 없는, 인간 아닌 존재가 되는 거죠.

⇒ 노동하는 존재. 어쩔 땐 슬프게 들리는 말. 노동해야 하는 존재.


p456~457 인민에게 세 가지 환난이 있다. 굶주린 자가 먹지 모가고, 헐벗은 자가 입지 못하며, 일해서 힘든 자가 쉬지 못하나니, 이 세 가지가 인민의 큰 환난이다. 사정이 이런데 큰 종을 두드리고 북을 치며 거문고와 비파를 뜯으며 생황을 불면서 방패나 도끼를 들고 춤을 춘다면, 인민들이 입고 먹을 재물이 어떻게 얻어질 수 있겠는가? 나는 반드시 얻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묵자, 비악 상편


p458~459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 국가가 보장해줘야 할 최소한의 것이 무엇무엇 있을까 한번 생각해봅시다. 일단 사회적 안전망의 문제, 안심하고 아이를 키우고 안심하고 병원에 가며 안심하고 늙어갈 수 있도록 하는 복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죠.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 내지 심신을 안정케 하는 녹지 조성도 이야기할 수 있겠고, 또 군인들의 월급 현실화도 이야기할 수 있겠으며, 최저 임금 문제도 있습니다. 또 지방의 문화시설 확충도 말할 수 있겠죠. 묵자는 일한 자가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충분한 시간도 국민들이 누려야 하고 정치공동체가 보장해줘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살인적인 세계 최장 노동 시간도 공론화할 수 있겠고요.


18. 묵자 읽기-기존의 질서 부정과 하느님 非命 편


명命에 반대한다


p465~466 命은 어떤 사회 질서, 통치 규범과 통치 사상의 핵심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존의 통치 질서와 규범, 기존 지배층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들의 근거지요. 그런데 명, 그것에 대해 묵자는 아니다, 그르다고 주장합니다. 기존 통치 질서의 기초 내지 근거가 되는 명이 그르다고 했으니 그것이 왜 그르다는 건지 밝히고, 또 그것을 대신할 대안을 말해야겠죠. 그리고 명을 대신할 것은 묵자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통치 규범과 통치 사상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묵자가 주장하는, 명을 대신할 것은 바로 천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천지를 기초로 해서, 천지에서 연역해서 새로운 통치 규범과 통치 사상, 사회 질서를 만들어내자는 게 묵자의 생각이고요. 그 새로운 통치 규범과 사상, 질서는 겸애, 상동, 상현, 절용, 절장, 비악 등이죠.

⇒ 반복되는 말들인데도 보면 또 새롭다..


p469 수직적 질서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名이란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왜 능력 없는 사람들이 귀한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왜 좋은 명함과 간판 달고 살아야 하는데? 그리고 니들이 말하는 名의 근거가 命 인데, 아주 극소수가 독점적으로 깨닫거나 고집하는 것이거나 하늘과 소통해서 얻었다는 그 命이 말이다, 뜯어고쳐야 할 빌어먹을 名의 질서를 뒷받침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새로운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名을 부여할 것이다. 새로운 기준은 모든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하느님의 의지다. 더 정확히 말해 인민들의 의지가 투영된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名의 질서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수직적 名의 질서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질서 틀 자체를 리뉴얼하겠다. 이것이 묵자의 생각이죠.


p477 묵자는 천지의 뜻을 잘 구현할 정치적 방법과 수단을 강구해서 통치 권력을 통해 실천하면 뭐든 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지天志, 그들의 대안


p479 어쩌면 참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정해져 있다, 인간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무관하게 결과는 운명으로 결정된다. 특히나 지옥 같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하층민이 보기에 이런 논리로 정치판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정말 한심하다 못해 기생충 같은 존재로 보였을 겁니다. 저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묵자 입장에선 바로 유가입니다.


p483 묵자가 말하는 천지가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절대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어떻게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게 입증할 것이며, 존재를 입증한다고 해도 절대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혀내 모든 사람이 수긍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말하고 때론 팔아먹는 사람 내지 집단의 의사와 바람이 투영된 것이겠죠. 묵자가 말하는 하느님의 뜻은 민지이고 묵지, 그들의 바람이고 염원이죠.

 

p486~487 묵자의 天/천지와 인간/현실의 단절된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요. 묵자의 天이 현실과 또 인간과 단절됨을 봐야 한다. 그 단층을 주목해야 한다고요. 왜냐, 그 단절된 관계가 묵자와 타 학파가 어떻게 또 얼마나 차별되는지, 묵자의 사유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얼마나 개성적인 사유인지 보여주며, 또 그들이 하층민들의 사상을 대변한다는 걸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9. 묵자 읽기-현실을 만들어가는 하느님 天志 편


현실의 인간과 단절된 하느님


p499 현실에서 열성적이고 조직적으로 운동하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과 장치를 만들고, 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에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과 매뉴얼 등을 만들었습니다. 현실의 문제, 국정의 난맥상, 사상 수요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잘 읽어내서 해결책을 잘 마련했죠. 정말 묵자는 훌륭하게 해냈고, 묵가의 적지 않은 생각이 현실 정치 구상과 타학파의 사상에도 수용되었습니다. 그만큼 유용한 것들이었겠기에요.

⇒ 그러나 묵가는 멸망. 사라지고 만다.


현실을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하느님


p500 현실의 인간과 단절된 하느님, 그런데 그렇다고 하느님의 위상이 타 학파의 천보다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높습니다. 상대가 안될 정도죠. 묵가의 천은 뚜렷한 의지와 호오를 가지고 현실을 제조하고 끌고 가는 주체입니다. 타 학파에서는 이미 현실에서 드러났거나 관철된 적 있는 질서, 문화가 天보다 우선하고, 그 근거 내지 연결고리로서 천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예대로 하자’ ‘법대로 하자’ ‘도대로 살자’. 그들은 예와 법, 도를 우선 이야기하고 그것이 천의 명이나 자연의 객관적 이치라고 합니다.


천하를 두루 사랑하여 만민을 이롭게 하는 하느님


p508~509 하층민의 입장에서 출발했다고 하지만 묵자는 수직적 정치구조,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질서를 분명히 인정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겸애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저 정치구조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겸애를 행할 능력을 가져야 하는 등 엄격한 조거에 의해 구속됩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철저히 톱다운(하향식) 구조와 질서를 전제하고 이야기하죠. 백성 스스로 자신을 못 다스리고 위에 사대부가 있어 관할하고, 사대부 위에 제후, 제후 위에 천자, 그리고 천자 위에 하느님이 있다고 하네요. 명백히 종적 질서가 있고 기울기가 가파르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위에 계신 하느님은 하층민의 의사를 대변하고, 결국 수직적 정치구조는 수직적 구조 그 자체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공의를 실현키 위한 수답입니다.


p510 의를 좋아하는 묵자, <천지> 편에서 묵자는 의정을 말합니다. 의로운 정치, 묵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를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합니다. 유가의 인정과 대조되는 묵자의 정치사상이죠.


p514 하늘이 인민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다. 하늘은 해와 달, 별들을 내보내 길을 밝혀주고, 춘하추동 사철을 마련하여 질서를 삼았으며,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을 내려 오곡과 삼을 자라게 하여 사람들이 이용하게 했다. …… 또 인민의 선악을 감시하고, 왕과 제후의 자리를 정하여 어진 자에게 상을 주고 난폭한 자를 벌주게 하며, 쇠와 나무와 새와 짐승을 내리고 오곡과 삼을 가꾸도록 하여 인민들이 먹고 입을 재물을 만들게 했다. 이 모든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천지 중中 편


20. 묵자 읽기-묵자가 직접 묻고 답한 말들


P526 묵자께서 말씀하시길, 여섯 가지 치우친 감정을 버려야 한다. 침묵할 때는 생각을 하고, 말할 때에는 사람을 가르칠 만한 말을 하고, 행동할 때에는 의로워야 한다. 이 세가지를 번갈아 실천하면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이다. 여섯 가지 치우친 감정이란 기쁨, 노여움, 즐거움, 슬픔, 미움, 사랑인데 이것들을 버리면 인의(仁義)를 이룰 수 있다. 손, 발, 입, 코, 귀, 눈의 힘이 미치는 한 의를 실천해나간다면 반드시 성인이 될 수 있다. -귀의편


p542 흔히 유가를 동기주의라고 하고 법가를 결과주의라고 하죠. 거칠게 분류하는 말이지만 분명 유가에게는 선한 동기가 중요하고, 법가는 어떻게든 결과로써 설득을 하죠. 묵가의 경우는 이익을 앞세우다 보니 결과주의인 것처럼 흔히 이야기되는 것 같은데,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옳고 또 이득이 되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묵가에게는 옳은 동기와 행위자의 선한 의지가 중요합니다. 위 글을 결과주의 진영으로 묵가를 몰아넣곤 했던 그간의 오해를 한 큐에 불식하는 묵자의 발언이죠. 윤리 교과서에 묵자가 공리주의, 결과적 이익만을 말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나요? 그렇다면 정정 부탁합니다.





3. ‘내가 저자라면’


■ ‘묵자-’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프롤로그

길잡이의 초대장

 

1. 묵자 여행 준비

2. 길잡이의 나침반

  묵자 사상의 중심, 겸애 / ‘이익’을 어떻게 볼 것인가

3. 묵자, 그는 누구인가

  묵墨의 무리 / 노나라가 낳은 사상가 / 여담

4. 시간적 배경

  어떻게 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가 / 씨족공동체의 일원에서 보편 인간으로

5. 묵자가 본 인간

  노동하는 존재, 자기 몫을 지닌 존재, 욕망하고 계산하는 존재 / 묵자는 성악론자

6. 묵자의 하느님

  동양 사상의 하늘, 하느님 / 묵자의 天, 현실과 단절된

7. 기축 시대의 스승, 묵자

8. 공자와 묵자, 유가와 묵가

  먼저 공자가 있었다 / 仁에서 겸애로, 다시 대동사상으로

9. 유가와 묵가의 사고 단위, 그리고 전국 시대의 통일

  국지적인 유가, 전체적인 묵가 / 시詩와 변辯

10. 진나라의 묵가, 진묵

  묵자들이 진으로 간 까닭 / 묵가는 어떻게 사라졌나

11. 묵가 사상의 비조, 그 이름 자로여

 《논어》라는 화단에 핀 색다른 꽃 / 공자 학단의 야당 대표, 자로 / 자공, 명을 받지 못한 아주 좋은 그릇

12. 묵자 읽기-묵자 사상의 예습편들

  친사親士 / 수신修身 / 소염所染 / 법의法義 / 칠환七患 / 사과辭過

13. 묵자 읽기-계급 타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외침

14. 묵자 읽기-겸애 실현을 위한 조직론

  태초에 질서가 없었을 때 / 하나로, 일원적으로, 통일로

15. 묵자 읽기-이것이 겸애다

  별別과 겸兼, 별에서 겸으로 / 군주가 좋아하면, 이루어진다

16. 묵자 읽기-구체적인 겸애, 반전

17. 묵자 읽기-구체적인 겸애 2

  절용節用 / 절장節葬 / 비악非樂

18. 묵자 읽기-기존의 질서 부정과 하느님

  명命에 반대한다 / 천지天志, 그들의 대안

19. 묵자 읽기-현실을 만들어가는 하느님

  현실의 인간과 단절된 하느님 / 현실을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하느님 / 천하를 두루 사랑하여 만민을 이롭게 하는 하느님

20. 묵자 읽기-묵자가 직접 묻고 답한 말들

 

 

 <묵자> 이 책은 <묵자>의 원문에 대한 한문풀이 주해서가 아니라 <묵자>에 대한 작가의 완전한 이해를 설명해 주고 있다. 결국 작가는 <묵적>이 아니라 임건순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우리에게 낯선 사상가인 묵자에 대한 소개에서 시작하여 묵자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묵자의 사상이 나왔던 배경과 다른 사상과의 비교를 통해 묵자 사상을 설명해 나간다. 특히 묵자의 사상은 공자 사상에 대한 반론이 많기에 그 비교 대상은 공자의 유가사상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묵자 사상을 설명하며 묵자 사상의 정수들을 추려 이해시킨다. 이후 묵자의 실질적인 원전을 소개하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다만 완전한 원전읽기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추려낸 원전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이 책은 묵자 사상을 이야기하며 유가 사상을 비교 설명한다. 묵자 사상이 공자 사상에 대한 반론적 성격을 띠고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교 설명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묵자 사상이 나름 무리들을 형성하고 다른 사상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결국 소멸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당대의 사회현실의 토대 속에서 분석한 원인들이 와 닿았다.

 또한 아마도 보편적 복지 형태인 겸애에 대한 사상과 반전 사상에 대한 묵자 사상이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묵자는 그러한 사상들을 직접적으로 실천하였으니 그러한 하나하나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도 와 닿을 수밖에.

 오래도록 익숙했던 유가 사상에 이러한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유가 사상을 반복하여 비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사상의 느낌을 더할 수 있다. 물론, 제목을 봤음에도 잊어버리고 이 책이 묵자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나 싶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은 당대의 현실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사상적인 흐름에 대한 이해를 통해 특정 사상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음을 알았다.


■ 보완점이라기보다는..


 누가 <묵자>를 두려워하는가.  이 책은 너무 쉽다.

 <묵자> 사상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 없게 느껴진다. 모든 사상가들의 사상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봐야 하지만, <묵자>는 정말 직독 직해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읽은 것이 <묵자>원전이 아니었다. 더구나 원전에 아주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책을 펼쳐보니 많은 부분 작가의 풀이가 좌우하고 있었다. 원전에 대한 한문풀이 번역이 아니라 <묵자>가 가지는 주요한 사상에 대한 정리와 해석을 하고 있는 책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 언급된 <묵자>의 느낌이 강도를 더해서 전해졌는데 아마도 딱딱한 느낌으로 서술되었다면 <묵자>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들도 많을 듯하다. 그것은 마치 이른바 ‘일베’들이 좌파에 대한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게다. 그만큼 <묵자>는 좌파적인 사고를 담고 있다. 단지 사상뿐만 아니라 실천에 대한 강조까지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진보당의 사상과 공약들을 보고 있는 듯했다. 신영복 선생님도 <묵자>에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책은 <묵자>의 사상만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 묵자, 즉 묵적에 대한 설명과 묵가 무리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오늘날 이 사상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당시 이 사상이 왜 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묵자 사상 자체가 공자와 함께 하고 있기에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도 설명을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더불어 당시 다른 이들의 사상의 핵심과 비교를 해주고 있어 묵자만이 가지는 특색을 더욱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상당히 쉽게 설명되고 있긴 한데 간혹 너무 어린이들에게 말하는 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들이 여럿 보였다. 그로 인해 내가 쉽게 이해하면서도 ‘아니, 이거 어린이용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 작가 자신이 야구논객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블로그 글이나 쉽고 유행하는 말들을 사용한 글쓰기를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장점은 너무 쉽게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오히려 그렇게 쉬운 말투가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반복적인 설명과 강조로 인해 묵자의 대표적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학습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나, 조금 머리가 커졌다고 이것이 완전히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 즉 원문을 보다 많이 살펴보고 해석을 하고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쉽게 <묵자>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니 <묵자> 원전에 대한 욕심이 강하게 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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