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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의 막간 휴식, 가락국수
가락국수는 여름 피서다. 피서, 더위를 피하러 가는 길. 무조건 강원도였다. 망상, 하조대, 화진포, 낙산사, 강릉. 바다가 깨끗하니까, 아버지는 한결같이 동해안을 피서장소로 택하며 그리 말했다. 하긴 서해안의 황토 섞인 듯 탁한 물빛과 달리, 동해 바다는 한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시퍼런 물빛이었다. 그만큼 차서, 한참을 물 속에서 놀다 보면 어느새 입술이 보랏빛이 되고 온몸이 후덜덜 떨려온다. 이 한 여름의 한기를 녹일 수 있는 방법은 햇볕에 달궈진 뜨끈한 모래찜질 뿐이다.
피서길은 이른 아침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해 한참을 달려 해가 중천에 오를 무렵, 중간기착지인 휴게소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을 때리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 것이다. 그러고도 또 한참을 달려 차만 타면 멀미에 시달리는 내 얼굴에 노란 꽃이 필 무렵이면, 드디어 고속도로 아스팔트 위로 두둥실, 바다가 떠올랐다. 바다, 저 거대한 물 그릇. 냉면 그릇처럼 넉넉하게 둥근 저 바다.
일단 바다에 도착하면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미숫가루 언덕 같은 모래밭과 거대한 바다 앞에 모든 것이 풀어지는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북쪽 끝, 수유리 산자락에서 복닥대며 학교를 다니고 살림을 하고 회사를 다니던 우리 식구가 동해의 시원하게 짙푸른 바닷물에 발을 담그려면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지금이야 서울-춘천간 고속도로가 생기고 산들이야 거기에 있건 말건 가로질러 갈 수 있게 뻥뻥 뚫어놓은 터널이 있으니 끽해야 두세 시간이면 가는 길이다. 그러나 당시에 동해를 가려면 그저 그 험난한 산들을 생긴 모양대로 조심조심 타넘어야 했다. 한계령, 미시령, 대관령, 진부령. 그 끝없이 이어지던 령(嶺)들. ‘고개’라는 말이 무색하게 까마득한 절벽을 구비구비 타고 넘어야만 하는 그 길을 쌩쌩 달린 순 없었으므로, 가는 길이 그만큼 험하고 더뎠다.
처음으로 피서를 가본 것은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서 단체로 고속버스를 빌렸다. 전 직원과 가족들이 함께 하는 단체피서. 이런 것을 요즘도 가나? 아버지는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내가 다른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서 멀미약을 먹이고 가는 내내 병자 뒷바라지하듯 살폈다. 바다가 나올 때까지 나는 가능한 좌석을 뒤로 제껴 놓고 늘어져서 줄곧 잠이 깨는 일이 없기를, 그래서 익숙치 않은 버스의 진동과 메스꺼운 기름 냄새를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며 여섯 시간을 버텼다. 서울 촌놈 바다 구경 한번 하기가 참, 그땐 험난했다.
일단 타면 맘대로 정차할 수 없는 단체관광버스에서 해방되어 우리 식구들만의 오붓한 피서길에 나서게 된 것은 아버지가 차를 마련하면서부터다. 크림빛의 우아한 차체, 널찍한 뒷좌석, 엄마 무릎 위에 막내가 앉아가면 여섯 명 우리 식구의 탑승에도 불편함이 없었던 차, ‘스텔라’였다. 지금은 단종되어 볼 수 없지만 이 차는 ‘포니’의 성공 이후 현대가 야심차게 내놓은 첫 준중형 세단이었다. 기계류라면 뭐든지 새 것을 사고 보는 얼리어답터 아버지는 1983년 스텔라가 출시되자마자 낡은 포니를 팔아치우고 바로 신 모델을 장만했다. 수유리 산자락 밑 낡은 단층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에서, 이런 멋진 차를 가진 집은 우리 집뿐인 듯 했다. 우와, 우리도 이제 부자가 되었구나. 열 한 살 나는 이 새 차에 타고 ‘드라이브’를 나설 때마다 동네 아이들이 주위에 없나 둘러보며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래도 차만 타면 두통과 구역질에 시달리는 멀미를 졸업하지 못했지만, 원할 때 정차할 수 있는 자가용을 이용하면서 우리의 피서길도 훨씬 우아해졌다. 가다 경치 좋은 언덕이 나오면 잠시 내려 바람을 쐴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침이 자꾸 넘어가고 목구멍이 조여오는 멀미의 전조 증상이 있을 때면 언제든 튀어나갈 수가 있으니 일단 맘이 편했다. 그리고 화룡정점은 바로 고속도로 휴게소! 버스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고 맘 놓고 주전부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제일 좋았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고속도로 휴게소가 편의점, 스넥바, 식당이 완벽히 구비된 장소라기보다는, 간이식당과 과자류 몇 개를 놓고 파는 구멍가게의 조합이었다. 여하간 규모가 작든 크든 고속도로 휴게소의 기본 메뉴는 단연코 가락국수였고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락국수를 먹으러 여행을 가는지, 여행을 가기 위해 가락국수를 먹는 것인 지 모를 정도로, 나는 고단한 피서길의 유일한 낙을 가락국수에서 찾았다.
가락국수는 면발이 일단 좀 불어야 한다. 워낙 면발이 두껍기 때문에, 그냥 잘 익힌 정도로는 국물과 혼연일체가 된 국수가락의 황홀을 맛볼 수 없다. 가락국수는 간간하고 구수한 국물 맛이 듬뿍 밴 굵은 면발 위에 고춧가루 한술을 훌훌 뿌려서, 넉넉히 식초를 두른 단무지와 함께 후루룩 뚝딱 먹어 치워야 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음식이다. 가락우동, 가께 우동, 각기 우동, 간판에 어떻게 써있든 본질은 같다. 뿌리는 우동이다. 가락이 굵은 국수, 즉 우동을 순 우리말로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만든 조어가 가락국수라고 했다. 가께 우동, 각기 우동은 일본어 ‘카케우동’(掛け饂飩)이 변형된 것이고.
‘카케우동’이 우동면과 가쯔오부시 장국만으로 이뤄진 가장 기본적인 우동인 것처럼, 가락국수는 중면보다 굵은 면발을 충분히 삶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멸치나 디포리로 낸 국물을 부어낸 간단한 국수다. 고명이라야 얇게 채 썬 유부 몇 조각, 쑥갓 정도. 여기에 고춧가루를 듬뿍 얹어 단무지 서너 조각과 함께 기차역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후루룩 뚝딱 먹어 치우는, 싸고 간편한 한국식 패스트푸드다.
이제 피서라는 말은 여름휴가에 밀려 사라졌다. 정말 큰 맘을 먹어야 떠날 수 있는, 일년에 단 한 번 뿐인 온 식구의 바다 구경, 피서는 그렇다. 에어컨 따위 구경하기 힘든 시절, 선풍기 하나로 온 식구가 버티던 그런 시절에 혹독한 더위를 피해, 고단한 일상을 피해 잠시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 그것을 피서라 불러야 한다. 주말이면 산으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주 5일제의 여유 있는 생활에 피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그냥, 휴가다. 주말여행이다.
이제는 가쯔오부시를 넣은 일본식 우동을 흉내내느라 맥없이 달달하기만한 프랜차이즈 우동에 자리를 내 줘 찾기 힘들어진, 멸치국물이 구수했던 가락국수를 생각한다. 긴긴 피서길, 자동차 뒷좌석에서 엉덩이로 자리 다툼을 벌이던 어린 오빠와 동생을 생각한다. 운전을 하다 가끔 뒤돌아보며 어린 자식들에게 농을 던지던 젊은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일년 내내 주말도 없이 일하던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3박4일의 피서길, 구불구불 아찔했던 그 고갯길들을 추억한다. 어찌나 높고, 어찌나 좁은 지, 안 그래도 뒷목이 서늘해지는 이 까마득한 길에 올라서기만 하면 해가 쨍쨍하다가도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고, 자동차 바퀴에 밀려난 흙이 절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여하간 늘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고갯길의 드라이브를, 나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두근두근한 스릴을 은근 즐기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도 운전을 하지 못 한다. 길이 무섭고, 내가 무서워서 엄두를 못 낸다. 이토록 겁 많은 아이가 왜 그때만 유독 대담해졌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아버지가 운전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다행히 건재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이번 여름에는 어디든 여행을 가고 싶다. 이제는 편안히 뒷좌석에 앉아계실 차례이건만, 마흔이 넘도록 자전거 타기와 운전을 마스터하지 못한 허당 딸내미는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이럴 때면 유난히 든든해지는 존재, 우리 아들 아빠, 우리 엄마 사위가 있으니. 그래도 가락국수는 내가 사드릴 거다.
맞아요,기차역 가락국수 짱!
멋진 시도 하나 있지요. 역전 앞 가락국수...
역전 가락국수
포장마차 분위기는 몇 십 년 전이나 똑같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가락국수 맛도 변함이 없다.
춥고 매운 겨울의 새벽공기가 수증기에 섞여 날린다.
몇 십 년은 쓴 것 같은 양은 대접에
퉁퉁 불은 국수와 어묵 몇 개가 담겨져 있다.
양쪽으로 터진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국물을 마신다.
멸치국물 맛이 밴 면발과 함께 구수하게 넘기고 있다.
노파는 국수를 맛있게 먹는다며
뜨거운 국물을 더 얹어준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도
어묵 몇 개를 굳이 국물 속으로 다시 넣고 있다.
시세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자꾸만 덤으로 주는 부담감에
자릿세도 안 나올 것 같다고 했더니
누가 감히 자기한테 자릿세를 받겠느냐고 한다.
이 자리에서만 이삼십 년 국수를 말았다고 호탕하게 말하면서
나도 한두 번쯤 본 것 같은 인상이라고 했다.
아마도 한두 번 쯤은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때 그 노파가 지금 이 노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기 모양새나 그녀가 말아주는 국수 맛은 똑같다.
홍등불빛이 넘치던 골목입구를 틀어막고
세상과 홍등가를 구분 짓는 성벽처럼
단단하게 서있는 포장마차였다.
밤거리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억세 보이는 노파는
골목을 털어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새벽을 깨우며 여전히 가락국수를 말고 있다.
김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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