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2218
- 댓글 수 3
- 추천 수 0
비밀이 사랑을 낳는다
이재무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삶은 누추하고
누추하여라 사랑하는 이여, 그러니
내가 밟아온 저 비린 사연을 다 읽지는
말아다오 들출수록 역겨운 냄새가 난다
나는 안다 내 생을 그대 호기심 많은
눈이 다녀갈수록 사랑이 내게서 멀어져간다는
것을, 오월의 금빛 햇살 속에서
찬연한 꽃 한 송이의 자랑을 자랑으로만
보아다오 절정을 위해 온 생을 앓아온
꽃의 어제에 더 관심이 많은 그대여,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직 우리에게 비밀이기 때문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살기 위해
소리 없는 처절한 절규를 쉬지 못한다
생의 이면이 늘 궁금한 그대여,
그 어떤 갈애가 그대의 잠을
앗는 날은 어둠이 실비처럼 내리는
여름의 서늘한 숲 속에서 한 마리 새의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걸어가보아라
그대는, 그대가 만들어내는 작은 발자국
소리에도 크게 놀라 두리번거릴 것이다
숲은 파고들수록 외경과 비의로 가득 차고
그대는 문득 살아 있다는 것의 존엄과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이 비루하지 않고 신성한
선물이라는 것을 보고 온 그대는 충분히
아름답다 내가 그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토록 간절했으나 여직 그대의 생에
내 기다림의 손이 가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 보아라, 생의 비밀이 사라진 뒤
지상의 거리에 넘쳐나는 그 무수한
추문과 널브러진 사랑의 시체를
---------------
경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펼쳐본 시집에서 들어온 시다. 아, 들켰다. 꺼냈다 넣었다 하던 천 년 전 비밀을 가만히 간직하라고 한다.
비밀은 왜 이리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는가.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이면서.
비 오는 달밤
깊은 새벽에 도착한 나를
경주는 대합실에 재워주었다
고분 앞에 숙소를 정할 때도 몰랐다
그곳이 그 곳인지를
어둠도 내리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나가니 그곳에 그가 서있었다
반갑고 어줍고
두 개의 우산을 하나로 걸었다
그도 그곳을 알아보는 듯 했다
천년 전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반갑고 어줍고
오래된 무덤은 두렵지 않게 높았고
만만하지 않게 위엄을 가졌다.
맞아 이곳이었어 신기하다 여기서 만나다니 여기서 묵다니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무덤 사이를 거닐 때 비는 여전히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달빛인양 무덤을 감싸 안을 때 우린 여전히
반갑고 어줍고
빗방울 머금은 잔디가 발가락을 간질이고
비 머금은 바람 살결 스칠 때
우산 밖으로 뛰쳐나가 강아지처럼 뛰라고 마음은 요동쳤지만
그의 곁을 선택했다
우산 덕분이다
아득한 예전 그때도 그랬다
어줍고 아련하고
비 오는 달밤
잿빛 구름 흘러가고
거미는 부지런히 은빛 거미줄을 하늘에 걸고 있었다
그는 거미줄 따라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남겨진 나 여전히
어줍고 아련하고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849 | [버스안 시 한편]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야 | 2014.08.23 | 2250 |
3848 | [버스안 시 한편] 영혼 | 정야 | 2014.08.22 | 2130 |
3847 | [버스안 시 한편]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 정야 | 2014.08.21 | 2453 |
3846 | [버스안 시 한편]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 정야 | 2014.08.20 | 2482 |
3845 | [버스안 시 한편] 내가 아는 그는 | 정야 | 2014.08.19 | 2290 |
3844 |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 햇빛처럼 | 2014.08.19 | 2756 |
3843 | [버스안 시 한편] 이타카 | 정야 | 2014.08.18 | 2868 |
3842 | [버스안 시 한편]주석 없이 | 정야 | 2014.08.16 | 2468 |
3841 | [버스안 시 한편]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 정야 | 2014.08.15 | 2489 |
3840 | [버스안 시 한편] 천 명 중의 한 사람 | 정야 | 2014.08.14 | 2529 |
3839 | [버스안 시 한편] 인연 [1] | 정야 | 2014.08.13 | 2430 |
3838 | [버스안 시 한편] 지상에 뜬 달 한줌 | 정야 | 2014.08.12 | 2456 |
3837 | 안부인사. | 햇빛처럼 | 2014.08.11 | 2248 |
3836 | [버스안 시 한편] 선천성 그리움 | 정야 | 2014.08.11 | 2363 |
3835 |
추억2 ![]() | 햇빛처럼 | 2014.08.09 | 2201 |
3834 | 추억 [1] | 햇빛처럼 | 2014.08.09 | 2084 |
3833 | [버스안 시 한편]만약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3] | 정야 | 2014.08.09 | 2923 |
3832 | [버스안 시 한편]무지개 [2] | 정야 | 2014.08.08 | 2140 |
3831 | [버스안 시 한편]바람의 집 [2] | 정야 | 2014.08.07 | 2725 |
» | [버스안 시 한편]비밀이 사랑을 낳는다 [3] | 정야 | 2014.08.06 | 2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