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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5일 13시 33분 등록

 

 

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개똥아, 산아 안녕.

 

너의 외가, 나의 친정에 내려와 있다. 7시인데 밖은 벌써 햇볕이 뜨거워지려고 한다. 나는 연탄이 쌓인 쪽으로 창이 난 뒷방에 있다. 여긴 증조할머니의 영정이 걸려 있고, 외할머니 환갑선물인 돌침대와 외할아버지의 색스폰이 있다. 천 시간을 불면 소리가 난다면서 5년 째 꾸준히 불어오고 계시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뒷집의 빈터에는 키 큰 풀이 자란다. 그 너머는 중보 논이다.

 

사위와 아침을 같이 먹고서 서울로 보내시려는 너의 외조부모는 아직 들로 나가지 않고 계시다. 할아버지는 벌써 소밥을 주고, 들판을 돌며 이런 저런 일을 하셨다. 외할머니도 바쁘게 일하셨다. 마당에 나가니 둥근 대소쿠리에 들깨 한 말과 참깨 한 말이 씻겨져 있다. 누가 들기름과 참기름을 한 말씩 짜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소쿠리를 옮기다 힘에 부쳐서 외할머니의 맨발 벗은 발가락에 상처가 나고 말았다. 당뇨가 있어서 상처가 잘 안 아무신다. 나는 아까부터 외할머니가 밥을 하는 소리를 즐겁게 듣고 있다. 우리 엄마의 도마소리, 찌지직 달군 들기름에 호박을 볶고, 고등어자반을 굽는 냄새는 내게 음악이다. 소울 푸드의 향연이다. MSG가 들든 말든 내 몸은 우리 엄마 음식에 최적화되어 있다. 나뿐만 아니라 자식들, 손주들에게 뭐든 먹이려고 분주히 왔다갔다 하신다. 나는 곧 있을 냉동수정란 이식을 앞두고 사흘간 엄마 밥을 먹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냉동수정란은 성공률이 신선 배아 이식보다 높다. 시험관 2차인 이번 이식을 통해 너희를 만날 수 있을까? 욕심과 기대가 생긴다. 그저 진인사대천명 하면서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우리가 잘 준비되길 기도하자며 냄비에 넘칠듯이 끓어오르는 국 같은 그 마음을 지그시 눌러본다. 

 

두 분은 하루 일과는 5시에 시작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보통 5시를 전후해 일어나신다. 할아버지는 30년 넘게 써오고 있는 농사일지를 정리하고, 우사의 소들에게 사료를 주고 오신다. 소는 하루에 2번 밥을 준다. 소의 저녁밥 시간은 5시다. 소들을 키우면서부터는 어디 나가서 자고 오는 일정은 어려워졌다. 거세한 숫송아지를 사서 2년 먹이면 출하한다. 송아지값과 사료값, 우사에 넣는 왕겨값등 순수 생산비 만을 제하고 1마리당 1백만원 정도 남는단다. 농촌 사람들은 본인들의 노동비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 동안 할머니는 집안일을 하신다. 아침 6 30분을 전후해서 식사를 하고 들에 나가서 11시 반까지 일을 하신다. 폭염에 더는 어쩔 수가 없다. 새참으로 얼린 물 1병과 찐 떡을 가지고 나간다. 상추에 풋고추로 점심을 먹고 뜨거운 한낮에는 휴식을 취한다. 3시에 다시 들에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신다. 남의 집 일을 갈 때도 있다. 품삯은 55000원이다. 할머니는 하루도 노는 날 없이 집 일을 하지 않으면 품을 팔러 간다. 올해는 추석이 9월초로 이르다. 요즘 사과 과수원에서는 가을 사과(품종은 자홍) 출하를 위해 사과 잎 따기를 하고 있다. 햇빛을 가리고 있는 사과 이파리를 따 주면 붉게 색이 난다. 그 뒤엔 반사 필름을 바닥에 깔아서 사과의 궁뎅이까지 붉은 빛을 더 낸다.

 

우리가 내려온 건 형제들끼리 여름휴가를 맞춰서 내려오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씀 때문이란다. 생전 그런 말씀을 안 하시더니 올해 처음으로 주문을 하셨다. 매번 우리 가족도 여행 좀 가자고 노래를 했었는데 늘 아직 때가 안 되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했었는데 인제 그대도 된다고 판단하신 듯 하다. 그런데 어쩌냐 어른이 되어 제 가족을 꾸린 자식들은 제 가족 챙기는데 관심을 쏟는다. 어릴 때부터 같이 어울려본 적이 없으니 모이는 게 어색하다. 막내 삼촌이 삼척에서 회를 떠서 목요일 저녁에 왔어. 우린 금요일에 내려갔어. 토요일 점심 때 안동 외삼촌네가 왔고, 저녁에 봉천동 삼촌네가 도착했어. 안동에 2명의 사촌, 봉천동에 1명의 사촌이 있지. 모두 여자아이들이다. 10, 4, 1살이다. 한창 일철이라서 우리도 애기들과 엄마들은 집에서 있고 홀가분한 이들은 모두 밭에 나갔다. 내년부터는 이름 자체를 휴가말고 농번기 일손 돕기로 일정을 만들어야 할까보다. 벌써부터 할머니는 11월 초의 사과 수확 때 23일씩 꼭 사과 따러 오라고 신신당부 하신다.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면 사과가 얼어버린다. 그때 너도나도 수확을 하니 일손이 부족하단다. 명심해둔다.

 

오늘은 엄마의 가족에 대해 너희에게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중심으로이야기를 하려고 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원가족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한국전쟁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너의 외할아버지

 

너의 외할아버지는 권인득씨다. 육이오 동이고, 생신은 음력 12 23일이다. 권영경(권영필), 신공주씨의 둘째 아이인 권우일씨와 박용순씨의 딸, 아들 중 둘째다. 너의 외할아버지네는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대대로 살아온 가족이다. 너희 외할아버의 할아버지 대에서 마성면 신현리 봉생이에 살다가 남의 집 보증을 잘못 서주어 가은읍에 들어가 살았다. 6.25를 보내고 네 할아버지 8살 때 이 동네로 이사를 나왔다. 현재 65세이니 이 동네에서 57년 살았다. 이 집터에 산지도 50년 이상이다. 전쟁을 아프게 겪은 가정이었다. 1950 6 25일에 한국전쟁이 나고 음력 6 2, 그러니까 양력 74일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그 집의 둘째인 아들, 셋째인 아들을 잃었다. 바로 네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와 삼촌이다. 그 때 네 할아버지는 뱃속의 3~4개월 된 태아였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보도연맹사건은 전국에서 행해진 군인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었고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념대립 속에서 전쟁이 나자 혹시 인민군의 보급원이 될까 하여 후방의 민간인을 없애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군인 경찰에 의해, 단지 보도연맹에 들면 됫박쌀을 준다는 말에 가입을 했던 양민들이 무더기로 끌려갔다. 그때 이 집의 막내아들만이 유일하게 교육을 받았는데 남의 집 양자로 보내져 군인이 되었단다. 국군 경비대. 군인과 경찰 가족은 나오라는데 혹 동생에게 피해가 갈까 해서 두 장정은 그냥 남았단다. 문경 지소에서 영순 냇가로 옮겨졌다. 양민에 대한 발포 명령을 받은 경찰들이 냇가에 가서 납작돌 2개씩을 주워오라 했단다. 그런 도망가라는 말이지 않겠냐고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던 동네 아지매는 말했다. 그런데 두 형제는 군인이 된 막냇동생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 도망가지 않았고 죽임을 당했다. 그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의 어머니(신공주)와 두 며느리가 그곳에 갔다. 죽어 누워있는 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두 장정을 찾아냈다. 다음에 와서 수습하기로 하고 두 젊은이 사이에 삽을 한 자루 두고 돌아왔더란다. 다시 갔을 땐 그 곳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이라도 수습을 했더라면 한이 덜했을거다. 전쟁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겠나?  

 

네 외할아버지는 유복자로 그 해 음력 12 23일에 태어났다. 장남 집에 장남이 태어났다. 슬픈 탄생이었다. 같은 날 남편을 잃은 작은집 작은할머니는 1년 내에 개가를 했다. 1돌짜리 젖먹이 아들은 안고 가고, 3살짜리 큰 아들은 두고 갔다. 아버지 잃은 3명의 아이를 시어머니(신공주)와 큰며느리(박용순)가 길렀다. 살림이 어려워 3아이는 모두 초등학교 졸업으로 공부를 마감했다. 그나마 증조할머니는 작은집 큰아들과 당신의 딸이 동갑이라 수학여행을 가야 했을 때 당신 딸은 안 보내고 조카를 보냈단다. 딸이 안쓰러웠지만 너는 그래도 엄마가 있으니까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홀로 자라는 조카에 대한 연민이 담겼다. 농사일을 맡아 하시던 네 증조할머니는 네 외할아버지가 13살 때 개가를 하셨다. 아버지를 잃고서 어머니마저 헤어진 아픔을 겪으신 거지. 이후 네 외할아버지는 누나, 사촌형님과 같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살림은 딸냄이가 살고, 두 사촌형제는 농사일을 했다. 월남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사촌형님이 자원했다가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아직도 우리 집에는 그분의 일기장, 수첩 등이 보관된 작은 상자가 있다. 네 외할아버지는 이 분이 짜준 책상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다. 외할아버지의 누나도 고생을 많이 했다. 할머니만 계시니 15살부터 일 년 8번의 제사와 4식구의 빨래, 밥 등 살림을 살았다. 누나는 20살 때 가은읍 중구산으로 시집을 갔다. 그동네로 시집간 친척이 중신을 섰다. 노할머니를 모신 독자 가장이어서인지 외할아버지는 군대가 면제되었다.

 

유복자이고, 제사 모실 귀한 장남이라고 집안에서 아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동네 시제에 가더라도 동네 어른들이 쟤는 귀한 아이이라며 다른 아이들이 팥시루떡을 한 조각 받을 때 두 조각을 쥐어주었단다. 없는 살림 속에서도 어머니가 인삼을 다려먹였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반찬이 없어도 밥만 맛있으면 잘 넘어간다며 끼니마다 가마솥으로 새 밥을 해서 먹였단다. 근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학교에 낼 사은회 쌀을 못 내서 그냥 와 먹고 앉으라 했을 때 수치심을 느꼈다고 회상하신다. 대리 아버지가 되어줄 남자 어른이 여럿 계셨다. 동네에 초6때 은사님이 사셨다. 폐병으로 일찍 퇴직을 하고 동네에 사셨는데 그 댁 한 방 가득한 책을 네 외할아버지가 읽도록 허락하셨다. 신문지로 싹 싸서 읽고 돌려드리면서 사제가 한나절 동안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어릴 적에 우리집 시렁에 있던 많은 고전들은 그 분에게서 얻어온 것이었다. 그 책을 다 읽었으니 학교는 많이 못 다녔어도 독서를 통해 공부를 많이 하셨다. 또 한분은 외할아버지의 외삼촌이셨어. 사과농사를 짓는 분이었어. 아주 무서운 분으로 호가 났는데 어쩐 일인지 두 분은 죽이 잘 맞아서 서로 그리워하고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가 길었단다. 이 분의 영향으로 사과농사를 짓게 된 듯 하다. 공부에 대한 한과 콤플렉스를 자식들을 통해 풀길 바라셨던 것 같아. 그래서 우리 4형제는 모두 4년제 대학을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아픔이었다. 사진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의 주민등록증인 도민증을 찍을 때 딱 한 번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단다. 그 사진이 유실되었고, 무학자이므로 졸업앨범에도 얼굴이 없다. 친척집 대소사에 얼굴을 남긴 것도 없다.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본 이들이 아버지가 아들과 똑같다고 해서 내 얼굴과 비슷한가보다 짐작하며 살았단다. 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위원회가 노무현대통령 때 설치되고 전국에서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네 외할아버지는 그 때 동네 이장이었는데 방송하면서도 우리집안의 일은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때 아직 직장이 정해지지 않은 자식들이 여럿 있었거든. 연좌제의 잔재겠지만 혹시나 그런 것들이 자식들의 길을 막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외할아버지는 어쨎든 그 이야기를 싫어하신다. 내가 관심갖는 것도 싫어하신다. 나는 그게 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외할아버지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마음 아파하시니까 외할아버지더러 굳이 보라고 하진 않을 거다.    

 

외할아버지는 인내심과 의지력이 강하고 성실한 분이었다. 성실에 대한 에피소드를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지금은 농사트럭을 타지만 경운기를 몰 때는, 동네에서 아침 6시만 되면 경운기를 몰고 들판을 살펴보러 나가서 그걸로 자명종을 삼는 이도 있었다. 삼교대로 하는 10년 광산 일을 만근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한 일은 지하 수십 미터의 갱에서 갱을 뚫는 기계를 잡은 기술자의 바로 뒤에서 파내는 일이었다. 탄광박물관에 가면 그 장면을 볼 수 있다.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3교대 광산일을 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했다. 과수원을 시작한 이후 30여 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저녁때까지 열심히 일하심은 말할 것도 없다. 노동하지 않고 밥을 먹으면 부끄럽다고 농한기인 겨울에도 한 나절은 뭐라도 일을 하신다. 이런 저런 것을 연구를 해가면서 일을 하신다. 지금은 친환경저농약 사과를 농사를 짓고 계시다. 일하기 어려운 노후에도 계속 일을 하기 위해 비탈밭보다 평지밭에다 사과를 개량해 심고, 우물을 파서 물주는 시스템을 설치해 가뭄에 대비한다. 될 때까지 하는 뚝심도 있어서 인디언기우제가 가훈인가 할 때도 있었다. 강직해서 속으로 부르르 하실 때가, 삭히는 게 많다. 한편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절대로 안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서 지금도 그렇게 믿으신다. 자수성가형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남 이야기를, 아내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절대로 듣지 않으신다.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분이다. 술을 좋아하신다.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술을 드시면 말씀을 하신다. 대구경북의 골수 새누리당 지지자다.

 

엄마는 외할아버지한테 사랑받은 기억이 아주 많구나. 내가 그리며 노는 종이인형을 가위로 오려주고, 광산에 갔다가 소먹이를 해서 지게로 져 내려올 때 단에 섞인 야생화를 따서 꽃다발을 만들어 주셨어. 고등학교에 갔을 때는 시내의 빵집에 돈을 맡겨놓고 친구랑 빵 먹으러 가라고 하셨지. 3때 봉고차에서 졸다 내리면 아버지가 골목까지 배웅을 나와 있다가 내 가방을 메고 가셨지. 자식들이 사고를 쳤을 때(나도 사고 쳤다)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빌러 가는 역할도 외할아버지가 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이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가는 첫번째 스승이셨다. 그런 만큼 영향이 강력했지. 나는 나의 자아가 약한 상태에서 너무 휨쓸려서 나중에는 그 말뚝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성공한 가부장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딸은 자신도 성공할 거고, 남들이 자신을 사랑할거라고 맘 속 깊이에서 확신한다는 글을 읽었다. 나는 아버지를 성공한 가부장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개똥아, 산아, 보도연맹에 대한 엄마 집안의 일을 너희에게 말해주면서 조금 염려되는 것이 있다.너희의 뿌리이기 때문에 알려주지만 엄마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피해자의 자손으로서 가해자에 대해 원한과 분노를 품으라 선동하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전쟁의 아픔으로 보아주길 바란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누구 편을 드는 쪽으로 마음을 쓰지 말고 말이다. 이건 내가 노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엄마는 언젠가는 이 일을 가지고 소설이나 동화를 써보고 싶구나. 내가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쓰기를 훈련해 가다가 언젠가는 이 꿈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소처럼 일평생 열심히 일한 너의 외할머니

 

너의 외할머니는 안옥님씨다. 생신은 음력 12 2일이다. 외할아버지보다 한 살이 어리다. 두 분은 모두 양력으로 하면 동지 이후에 태어났다. 안칠백, 김금이씨의 첫째 딸(금순), 둘째 아들(석희), 셋째 딸(석남), 넷째 아들 (석조), 다섯째 딸(옥님), 여섯째 아들(석상), 일곱째 딸(옥연) 중 다섯째다.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삼형제가 있었는데 두 작은 집도 같은 동네에 살았다. 외할머니의 어머니 김금이씨는 상주 낙동 외서 사람이었다. 위로 오빠,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외가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단다. 외삼촌과 이모가 집으로 다니러 온 건 본 적이 있단다. 지금은 모두 대구로 나가 산다. 외할머니가 소녀였을 때는 여자가 친정에 자주 갈 수 없었겠지. 그런데 나도 어릴 때는 외갓집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외가에 간 건 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어. 그 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반에서 1등 하고, 달리기를 하면 악바리처럼 달려서 1등을 하고, 핸드볼 선수를 했다. 운동신경이 있고 흥이 있다. 동생들 업어주라고 학교 가지 말라는 날이 많아 속상한 적이 많았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동생을 등에 업고 있는데 하얀 칼라를 댄 교복을 입고 있는 친구를 만나 담 뒤로 숨기도 했단다. 내가 고등학교에 갔을 때 교복자율화가 되었어. 그 때 외할머니는 내가 교복 안 입는 걸 은근 섭섭해 하셨단다.

 

아버지는 집의 농토가 적으니까 남의 집 머슴을 살았단다. 그런데 세경을 받아 빈 손으로 올 때가 있었단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 외할머니의 어머니는 가장이 없는 집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데리고 농사일을 하고, 명주 길쌈을 하고, 두부와 묵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팔았단다. 촌사람이었지만 머리를 반듯이 빗어 쪽을 찌고, 옥양목 저고리 깃을 하얗게 다려 입는 분이었단다. 부엌일이든 농사일이든 일을 아주 깔끔하게 했단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무서웠다고 이야기를 해 주신 적 있어. 밥상을 차리는데 덜 짠 행주로 닦아서 물기가 많이 남아있을 때 지나가는 개라도 이렇게는 차려주지 마라. 다시 차려와라무섭게 호령했단다. 남아선호 사상이 투철했다고 들었어. 둘째이자 장남인 아들이 피부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리자 고치려고 백방 노력을 하고 근심걱정을 많이 하셨단다. 결국 아들의 병은 고칠 수 없었단다. 남아선호 사상이 투철하면서 큰 아들은 아프고, 둘째 아들도 있는 집의 다섯째 딸인 네 외할머니는 사랑을 많이 받았을까?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겠지만 아들들에 비하면 관심이나 사랑을 덜 받았을 지도 모른다. 거의 장애로 볼 정도로 아들의 피부가 심해지자 속이 썩는다고 하지. 어머니는 병이 들고 말았다. 51살에 돌아가셨다. 이 외삼촌은 결국 병을 고치지 못했고, 피부에 혹이 많이 난 모습으로 살았다. 결혼하거나 일을 할 수 없었다. 어릴 적에 그 아픈 외삼촌이 우리집에 찾아와 외할머니의 이름을 부르면 외할머니는 뜨거운 물을 데워서 삼촌을 씻기고, 빨래를 해서 밥솥 위와 보일러 위에서 밤새 말렸다. 외할머니의 팔순된 아버지가 어둔 눈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딸이 보고 싶어 오셨을 때도 그렇게 했다. 나는 나의 큰외삼촌이 주던 용돈을 받은 기억이 있다. 너의 외삼촌, 나의 동생 중 하나는 동네 아이들이 그 분을 따라다니며 놀리는데 자기도 같이 했다는 기억을 가졌다. 외할머니더러 내가 그 분이 너무 가엾다고 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한 몸 건사하며 사는 게 뭐가 어렵냐? 자식 새끼 안 굶기고 가르치려고 일하는 게 무섭지내가 특수교육과에 가려고 했을 때 그 많은 반대를 했던 건, 아마 큰 오빠를 지켜보는 게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런게 아니까 나는 나중에 짐작했다.  

 

외할머니는 열일곱살에 엄마를 잃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서울 자양동의 큰 언니네 단칸살림집에서 먹고 자면서 메리야쓰 공장에 취직한 지 1달이 되었을 때다. 처자가 손이 야물고, 일하는 사람들 밥도 해 줄 수 있다니까 공장에서 계속 일해달라고 했단다. 외할머니는 일하는 게 좋았단다. 그런데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왔다. 당장 내려갔다. 점촌의 서울의원에서 1달 입원을 했었다. 위의 형제들 중 몸이 아픈 형제는 집에 있고, 두 언니는 시집을 가고, 오빠는 집을 떠난 뒤라 외할머니가 집에 남은 아이들 중에서 제일 연장자였다. 다섯째 딸이 아픈 엄마를 따라 병원에서 먹고자면서 수발을 들었다. 입원실에서는 연탄을 갈아넣어야 했다. 퇴원 후 1달 더 집에 와서 간호를 했지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위암 같단다. 복수가 차서 눕지를 못하고 앉은 채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럽게 밤을 새던 모습을 기억하신다. 임종을 옥님(17), 석상(13), 옥연(7) 세 아이들과 남편이 보았다. 숨이 지던 순간 딸깍 소리가 나더라고 회상한다. 외할머니는 17살부터 혼인하던 21살까지 친정 살림을 살았다. 17살부터 김장을 하고, 된장 간장을 담그고, 제사상을 차렸다. 작은집 숙모가 와서 너는 어떻게 적을 이렇게 얇게 잘 부치나?’ 칭찬을 했었단다. 엄마를 일찍 잃은 후 죽음에 대한 무섬증은 나이가 들어서도 없어지질 않더란다. 그래서 서른 몇에 맞이한 시댁 할머니의 장례에도, 육십이 다 되어 맞은 시어머니의 상에서도 일단 숨이 지고 나면 무섬증이 들더란다. 그래서 입관할 때, 염할 때는 전혀 보지를 못하겠다고 한다. 아픈 큰 오빠는 따로 고향동네에 남고 아버지 옥님, 석상, 옥연이가 화전민으로 산골에 들어가 살았다. 옥수수 심고 고구마도 갈았다. 밥을 해 이고 산에 가서 아부지요, 아부지요부르면 메아리가 울리는 곳이었다.

 

처녀 적에는 침례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결혼 후에도 교회에 2년 정도 다닌 적 있었다. 결혼하고서 둘이 맞춰가는 초기에 힘든 시기가 있었는지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할 만큼 마음이 힘든 적이 있었단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고는 괜찮아져서 안다니셨다. 일년에 여덟번의 제사와 두 번의 차례를 모셔야 하는 장남 며느리로서의 의무와 제사를 금지하는 교회의 규칙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나 어릴 때는 엄마가 과자를 한 아름 사다놓고 크리스마스 전날 자정에 새벽성 돌러 오는 이들을 기다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집에는 안오게 되었지. 지금도 제사 모시는 의무가 끝나면 침례교회에 가겠다고 선언하신다. 내가 미션스쿨로 대학을 갔을 때 은근히 기뻐하신 이유다. 요즘은 내가 사다드린 십자가 목걸이를 내놓고 걸고 다니신다. 평생 마음 속에 십자가가 있었다. 나는 은근히 성당은 제사를 인정하니까 침례교회 말고 성당을 다니세요.; 라고 권해본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으신다. 

 

외할머니에 대해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다. 그분은 직접 나를 잡고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우린 친한 모녀가 아니었다. 첫번째 나의 엄마는 늘 일하는 모습이었다. 엄마의 냄새는 다래끼를 메고 콩밭에서 돌아온 땀냄새다. 외할머니가 어린 자식들이 치대는 걸 싫어해서 달려가 안기거나 매달린 기억이 별로 없다. 젖 먹이고 밥 먹인 뒤에는 할머니 차지였다. 나는 연녕생 동생을 보느라 7개월 때부터 밥을 씹어 먹였다니 더 빨리 떨어졌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그분은 자랑스러워했다. 밥 하고 반찬하고 자식들을 낳아 기르고 교감하는 것에는 의무는 다하지만 관심과 취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제일 쉬운 일이 밥하는 거라고 했다. 그보다는 일당을 확실하게 받는 일꾼으로 대접받길 좋아하셨다. 남보다 깡이 센 편이다. 도토리를 주으러 가도, 골뱅이를 잡으러 가도 남보다 2배는 더 자루에 모은다. 농사일만 하면 지루하니까 가끔 놀아주어야 하는데 놀 때도 돈을 벌면서 논다. 남의 집에 품값을 받는 품일을 가면 신경 안 쓰고, 밥 주고 새참 주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쉴 수 있다고 좋아하신다. 산에는 고사리, 다래순을 꺽으면서 가고, 여름엔 자신은 먹지 않지만 잡는 재미에 골뱅이를 잡으며 물에 가고,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워서 묵을 쑨다. 농한기에는 골프장 잔디 심는 일이라도 나간다. 내가 처음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는 너무 기뻐하시며 청소해 주려고, 고무장갑을 손가방에 살짝 넣어오셨다. 우리 딸 신경써 줘 고맙다며 내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의 가스레인지를 반짝반짝 닦아주었다. 내 월급을 매번 물어보면서 너는 일당 얼마냐? 우리 동네 여자 하루 품값, 올라서 35000원이다.” 확인을 한 뒤에 어이구 그렇게 많이 받냐? 돈 받은 값을 해라하셨다. 땅 한 뼘 놀리지 않고 콩, 땅콩, 참깨, 들깨, 토마토, , 배추, , 콩을 심고 밭둑에는 감나무 매실을 심었다. 30마리를 키우면서 과수원 일을 두 분이서 하자면 쉴 짬이 없는데 곶감을 말리고 매실청을 담는다. 김장도 혼자 하신다. 수수농사를 지었던 때는 수수를 떨고 그 대로 빗자루를 엮으셨다. 명아주 빗자루도 만들어 썼다. 엄마의 낡은 한복으로 재봉질을 해서 만든 치마를 나는 입었다.     

 

남자와 여자의 일에 대한 역할 구분이 뚜렷하시다. 남자는 절대로 부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니 집에서는 마누라 빤스를 빨아줘도 되지만 여기선 부엌에 오지 마라는 게 신조다. 실제로 외할아버지는 평생 밥을 하신 게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삼촌들은 외숙모들이 들어온 뒤에야 제사음식을 제기에 담아 상을 차리게 되었다. 그 전에는 여자들이 음식 준비해서 상까지 다 차려주어야 했다. 우리집 귀한 세 손녀는 차례에 들어갈 수 없고, 작은집 2살짜리 조카는 우리 조상에게 절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여러 번 유산을 한 며느리들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말하고 아들이라면 조부모가 이름을 지어주지만 딸이니 부부가 맘대로 지으라고 한다. 집에서 하던 대로 밥은 여자가 하고 설겆이는 남자가 하는 쪽으로 젊은이들이 하면 내가 한다고 해서 결국에는 여자들이 전담하게 하신다. ‘내 귀한 아들 앞치마 입고 설거지 하는 거 보기 싫다고 하시는데 집에서는 다 잘 하고, 며느리와 딸도 다 귀한 자식인데 이건 왜 그러시나 싶으다. 명절 전 부칠 때는 아들들이 나서서 뒤집개를 잡아도 뭐라 하지 않는다.

 

우리 자랄 때 옷을 자주 사주지 않았지만 남의 옷을 얻어다 입히는 건 싫어하셨다. 남자 옷은 티셔츠라도 절대로 여자가 입어서는 안되고, 남자가 잘 때 절대로 넘어가면 안되고 돌아가라고 하셨다. 세 아들들에게 전세금, , 결혼비용을 똑같이 주려고 한다. 나는 어릴 적에 저녁 먹고 난 뒤 군고구마로 후식을 먹으며 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었던 걸 커다란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 따스한 추억에 대해 외할아버지한테만 감사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두 부부의 자녀양육의 역할분담이었다. 똑같이 일하고 돌아와 옷도 못갈아입고 씻지도 않은 채 밥상을 차리는 게 일하는 여자들의 일상이다. 밥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설거지, 빨래, 내일 쌀 도시락 등 일이 남아있었으리라. 집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을테고. 나라면 그렇게 못산다. 기계를 사든, 남편에게 역할분담을 요구하든 하는 게 당연하게 생각 된다. 나이 들고 보니 어릴 적에는 보지 못했던 여자의 삶이 눈에 띈다.  

 

보이는 게 중요하다. 내가 요리책을 보고 단호박떡케잌을 엄마 생신 케잌으로 만들어 간 적이 있다. 모양이 못났다. 이웃이 오자 이런 거 밖에 생일날 못 받는다고 할까봐 그걸 다용도실에 치워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케잌은 무조건 모양 그럴듯한 걸로 사간다. 옷은 절대로 안 사간다. 마음에 안들어 여러 번 바꾼다. 현금으로 드리는 게 최고다.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헐벗은 거지는 굶는다면서 외모를 깨끗하게 해 다니길 원하셨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세련하고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사위의 얼굴빛과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그동안 부부가 잘 살았나 못 살았나를 점수 매길거라고 했다. 선물로 드리는 것은 번듯한 걸로 드리는 걸 좋아한다. ‘우리 사위가 한우갈비 보냈다이런 자랑을 좋아하신다. 일다 보기에 좋게 해야 흡족해 하신다. 명확한 성격은 돈 거래도 분명하다. 가족간 돈거래를 일절 하지 않는다. 주면 반드시 받고, 빌리면 반드시 갚는다. 부모형제라도 형편이 안되면 거절한다. 누구한테 신세진 것도 반드시 갚는다. 그런데 자식에 대해서는 후하다. 말씀을 하실 때 거두절미 단도직입 한다. 나이 들면서 좀 부드러워지신 듯 하다. 성격이 세심한 면이 있어서 태풍이 불거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초저녁에 잠깐 자고 밤새 잠을 못 주무신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혼인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1971 5 15일에 혼인하셨다. 그 때 두 분은 각각 22, 21살이었다. 영수네 할머니가 두 사람을 중신 섰다. 우리 골목 끝 집이다. 그 집 딸이 외할머니의 친정동네인 무릉으로 시집을 갔다. 스댕그릇이 10벌이고, 소가 있고, 디딜방아가 있고, 논이 40마지기라고 중신어미가 얘길 했는데 뻥튀기가 좀 된다. 그 때 스댕그릇은 4개였고, 소와 디딜방아는 있었지만 농토는 논과 밭을 합해 9마지기였다.

 

친형처럼 같이 자란 사촌형을 월남에서 잃고 얼마 뒤, 누나가 시집을 갔다. 네 외할아버지는 그런즈음에 결혼을 한 거였다. 결혼에 큰 뜻이 없었는데 연로한 할머니가 내가 살면 얼마나 사냐면서 걱정을 하고, 형도 잃고 누나도 시집을 가버려서 단 두 식구만 남아 모두가 외로왔기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을 거다. 손주 빨리 보고 싶다는 어른의 타령도 한 몫 했을 거다. 두 사람은 외로운 집이라 아이들을 많이 낳겠다고 작정을 했단다. 그때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제한 구호가 외쳐지던 때였다.

 

외할머니 혼인하기 이태 전부터 외할머니의 아버지가 혼수 이불 해 준다고 목화솜 농사를 지었다. 2년 농사지은 걸 모아서 이불을 꾸며 주었다. 모란 무늬가 있는 이불을 농암으로 시집간 둘째 언니가 와서 바느질을 하고 언니의 형부가 지게로 져다 주었다. 그땐 그 부부가 첫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새 신부가 아들 낳길 축원하며 아들 낳은 이가 져주는 풍습이 있었던가 보다. 이 이불은 혼인한 지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할머니는 장롱 아래에 간직하고 계시다. 혼수는 스스로 수놓은 십자수로 옷을 걸어둔 걸 가리는 가리개, 방석, 테이블보, 상보를 만들었다. 가난한 아버지는 그 후에도 시집간 딸을 위해 부들 장석과 방석을 만들어 지고 오시곤 했다.    

 

두 분은 결혼 초에는 찌그럭거렸던 것 같다. 결혼 사진은 물론 가족 사진 한 장 벽에 걸지 않았다. 뭔가 모르게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10년 동안 세 아이를 낳았다. ,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이다. 큰 딸을 낳은 건 22살 때였다. 7개월에 둘째가 들어서서 다음 해에 연년생으로 낳았다. 젊었기 때문에 젖이 많아서 짜 버려야 할 정도였다. 둘째는 젖을 3년 안고 먹였다. 셋째는 경기를 해서 업고 병원으로 뛸 때가 잦았다. 너무 어려서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 이쁜 줄 모르고 키웠다고 하신다. 젖만 먹여놓으면 외할아버지의 할머니가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도 으레 배가 부르면 증조할머니에게로 가야하는 줄 알고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서 외할아버지가 광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첫째 아이를 낳을 때는 닭고기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돼지뼈를 한 포대 사다 주어 고아서 뽀얀 뼈국물을 마셨다. 그때 광산 관주날에 맞춰 여러집이서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고기는 근수대로 나누고, 머릿고기와 내장은 그 자리에서 삶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셋째까지 낳을 동안 출산할 때 남편이 집에 함께 있었다. 막내가 태어날 때는 집에 없었다. 만근을 해야 수당이 더 나오므로 광산에 일하러 갔었다. 네 번째 출산은 역아에 난산이었다. 집안형님이 도와주었지만 죽다가 살아났다. 애 낳는 게 징글징글해서 한 치레만 보내고 점촌 산부인과 병원에 가서 배꼽수술을 해 버렸다. 위의 세 아이는 시할머니가 산구완을 해주었고, 막내는 개가한 시어머니가 오셔서 일주일간 해주셨다. 일주일 후에는 직접 산모가 밥 해먹고 빨래 했다. 32살에 단산을 했다. 가난했다기 보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네 아이들의 백일 사진, 돌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어른은 새댁더러 가장이 하늘을 두 개 쓰고서 번 돈을 함부로 쓰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단다. 그 당부대로 알뜰히 살림을 살았다. 종종 갱이 무너져 인사사고가 났지만 천만다행으로 외할아버니는 다친 적이 없었다. 광산촌은 경기가 좋아서 면내에 3개의 술도가를 운영하고, 초등학교가 4개였다. 한 겨울에 장에서 호박을 사다 먹는 이웃 새댁을 욕하면서 지냈다. 광산에서 10년 일한 후에 대출을 끼고 뽕밭을 사서 개간을 했다. 포크레인을 부를 형편이 안되니까 서른 초반의 젊은 부부가 곡괭이로 일일이 손으로 뽕뿌리를 캐냈다. 뽕나무는 뿌리가 매우 구불구불하고 거칠었다. 곡괭이로 그걸 파내자면 힘이 들었지만 꿈이 있어서 신이 났다. 그 밭에다가 사과 나무를 심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우리 막내가 나던 해였다. 그 해 가을에 외할아버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방에 아침저녁으로 밥을 떠놓고 곡을 하면서 1년 탈상을 모셨다. 밭을 사느라 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외할아버지는 다시 광산에 몇 년 더 다녀야 했다.

 

나 어릴 적에는 아침만 먹고 나면 이미 부모님은 들에 가시고 안 계셨다. 공부를 봐주거나 준비물을 물어보는 일도 없고, 학교에서 뭐 배웠냐고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공부하라는 소리도 들어본 적 없다. 아침에 각자 학교에 알아서 가곤 했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저녁마다 밥을 지었다. 부모님이 깜깜해서 도저히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야 들에서 출발을 하셨다. 외삼촌들도 각자 할 일이 있었다. 소죽을 끓이는 일이었다. 대신 막내 삼촌은 좀 외롭게 자랐다. 형제들과 터울이 지고, 할머니도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젖먹이를 이웃집 할머니한테 맡겨놓고 일을 다녔다.

 

농사일을 하고 와서 수도도 안 들어오고 세탁기도 없는데 4아이, 6식구의 빨래를 하자면 외할머니는 밤늦게까지 공동샘에 앉아 있어야 했다. 물도 물동이와 물지게로 길어다 먹어야 했다. 수도는 내가 중2때 들어왔다. 중학생이 3명일 때 외할아버지가 옥수수단을 베다가 미끄러져서 다리를 다쳤다. 대구의 대학병원에서 6개월을 입원했다. 그 때가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외할머니는 회상한다. 과수원에 모신 시할머니 산소에 찾아가서 하염엾이 울기도 했단다.

 

열심히 사과농사를 지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먹이고 입혔다. 위의 세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철둑 너머에 있는 밭에서 조회시간에 상받는 아이 명단에 자식들 이름이 불릴 때가 가장 신이 났다. 뭉클할 만큼 쑥쑥 힘이 나서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애들에게 일을 시켰다.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일절 농사일에서 빼주고 공부에 전념하게 했다.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곧잘 했다. 위의 두 아이는 교복자율화 남녀공학 고등학교의 동창이 되었고, 아래 두 사내아이는 교복을 입는 사립남고의 동창이 되었다. 어쩐지 애들은 스스로 실내화 한 번 빠는 일이 없었다.

 

세 아이가 모두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1명당 2개씩 도시락을 6개씩 싸야 했다. 세 아이가 모두 사립대학을 다닐 때는 등록금을 세 명 걸 내자면 새로 난 송아지 한 마리 팔고, 아들들은 번갈아 휴학을 시켜 군대에 보냈다. 사과 값이 좋아서 다른 걸 안쓰면 다행히 가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한테는 일절 돈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까 세 아이의 대학 졸업식 때 외할아버지가 모두 똑같은 양복을, 그것도 겨울 양복도 아닌 춘추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으셨더란다. 세 아이가 모두 다른 도시로 대학을 갔다. 살림집을 얻어주는 과정에서 이삿짐을 머리에 이고 고속버스를 타고 다녔다. 짤순이도 머리로 여서 날랐다. 이상하게도 대학에 가서 자식들이 적응을 잘 못했고 졸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자식들은 집에 잘 내려가지 않았고, 농사일도 안 거들었다. 매달 1일날을 어기지 않고 자식들 생활비를 보냈다. 막내더러는 전문대만 졸업하고 취직하라고 노래를 불렀더니 막내도 전문대 갔다가 4년제로 편입을 했다.

 

베이비붐, 경제개발 붐을 타기도 했지만 토양에 잘 맞는 걸 찾아서 농사종목을 잘 선택하고,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그 분들은 처음 출발할 때보다 몇 배로 잘 살게 되었다. 그리고 네 자식을 모두 대학을 가르쳤다. 그건 결혼 초 두 부부가 목표한 거였다. 두 분은 공부 못한 한이 있어서 자식만은 공부를 끝까지 시키려는 공동의 목표에 합의했었다. 지금 엄마의 세 형제는 결혼했고, 막내만이 남았다.

 

개똥아, 산아. 나의 역사이기도 할 부모님의 역사가 네 아버지 쪽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사를 쓰는 것보다 어려웠다. 객관은 없겠지. 쓰면서 나도 내 부모님에 대해 , 부모님의 고생과 사랑에 대해 만질 수 있었단다. 출발을 하게 되어 기쁘구나. 아가, 잘 있거라. 사랑한다. 엄마가. 2014. 8.15.

 

 

고맙습니다절을 드린 후 어른으로서의 내 길을 가길

 

Ps.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는 모든 고운 님들께 기도드립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썼어요. 그동안과는 관점이 다릅니다. 저는 자식이라는 제 입장에서만 살펴왔어요. 늘 주인공이 나였어요. 오늘은 부모님을 향해 선 자식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부모님과 나(결혼을 한 어른 나), 그리고 우리 부부의 미래까지 눈을 넓혀 부모님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런 시야의 경험 자체가 저에게 유익했어요. 이 편지의 첫번째 이득자는 저네요.

 

저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딸이었어요. 성격, 입맛, 체질까지 비슷했고, 어릴때부터 아버지와 보낸 이심전심의 시간이 많았고, 이야기를 직접 들을 때가 자주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쪽 역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 넘어서는 여자로서 사는 경험이 있고요, 결혼을 하면서 저는 그동안 잘 몰랐던 엄마 쪽으로 시선이 갑니다. 의식적으로 두 분을 동시에 보면서 두 분 앞에선 작은 딸이 되길, 두 분께 감사의 절을 드리는 연습을 해 봅니다. 엄마가 제게 복권되길 바랍니다. 인제 철 좀 들려나봐요.

 

엄마는 딸 뿐만 아니라 어떤 자식도 무릎에 앉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아니었어요. 내가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건 머릿이를 잡을 때 뿐이었어요. 학교에 갔다 와서 제일 보고 싶은 것도 엄마였고,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어?’ 물어봐주길 바랬지요. 한 번도 이루지 못했지만요. 아마도 엄마가 엄마의 엄마에게 그런 따뜻한 경험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테지요.   또 먹고 살기 바빴구요. 아버지 쪽 역사를 쓸 때보다 어머니쪽 이야기를 쓸 때가 더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저는 이번에 내려와서 밭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 사십몇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엄마의 엄마, 우리 외할머니의 이름은 뭐예요? 어디가 고향인 분이세요? 그 분은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엄마는 외갓집에 가 봤어요?” 어른의 질문을 처음 하고 한 여자로서의 엄마의 대답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외할머니의 임종을 본 이야기도 처음으로 들었어요. 참 가여웠어요.

 

내가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만큼 실제의 그 분들인지 아리까리합니다. 짧게 살펴보았지만두 분은 참으로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오셨어요. 부모님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다른 최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선과 최선 중에서 고른 게 아니라 그분들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부모님께 고맙습니다감사의 절을 드리고 어른으로 서고 싶습니다. 더 달라고 하는 의존을 버리고 나의 책임을 다하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두 분은 저의 최적의 부모님이십니다. 두 분이 서로를 신랑과 신부로 선택하고 혼인하심을 기뻐합니다. 두 분은 크시고 저는 작습니다. 두 분은 주시고 저는 받습니다. 두 분이 겪은 모든 고통과 선택에 동의합니다. 두분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듯 저도 제 후세대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음을 연습합니다. 자꾸 몸으로 말로 연습하다 보면 그 마음을 내는데 조금씩 익숙해지겠지요.

 

지금 내 나이 43세는 엄마가 첫째딸과 둘째 아들을 대학에 보낸 때입니다. 하지만 저는 종종 어린아이의 원망과 분노를 만납니다. 제 안에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여전히 칭얼거리고 헐떡거립니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른으로 선 채 남편의 손을 잡은 나를 믿고 아이들이 올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마흔 넘어서 이러기는 웃기지만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일 것입니다. 잘 안되더라도 자꾸 마음을 연습해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저는 부모님의 인생과 사랑을 더 복기하게 될 겁니다. 저희 가족을 옹호하여 주십시오. 아이들을 몸과 마음 건강하게, 선연으로 만나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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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 돈 끼호테 흔적을 따라 미친듯 스페인 여행 에움길~ 2014.08.25 1690
973 여기, 강렬한 햇빛 아래 찬란히 빛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어니언 2014.08.25 2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