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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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와 오에 겐자부로는 소설가입니다. 두 사람을 관통하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외국어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윤기 선생은 많은 책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이고, 겐자부로는 자신이 번역한 책을 공식적으로 출판한 적은 없지만 번역 작업이 소설 집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두 사람이 번역에 몰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윤기 선생은 30여 년에 동안 2백 권이 훌쩍 넘는 책을 번역했습니다. 그는 <무지개와 프리즘>에서 오랜 시간 번역을 한 이유로 ‘생업’을 꼽습니다. 돈 벌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번역을 해온 또 하나의 ‘근사한 이유’도 있다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소설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지요. 사유의 연습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이었지요. 나는, 소설 공부 중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정독(精讀)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번역을 통하여 저는 더할 나위없는 정독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도장이 아닌 뒷골목에서 배운 태권도 같은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는 번역 작업이 소설을 쓰는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번역 작업을 통해 나는, 다른 작가들, 한다하는 다른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전하고 있는가? 이걸 엿볼 기회가 되었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어떨까요? 전문 번역가도 아니고 번역서를 낼 생각도 없었던 그가 번역에 열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겐자부로는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에 해당하는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내가 모르는 언어에 대한 강한 동경심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특히 “번역되기 전에 쓰여져 있던 원어(原語)에 대한 동경이 더욱 깊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동네 도서관에서 흥미를 돋구는 책의 번역본과 원서를 사전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번역서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과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원서에서 찾아 서로 비교해보고, 원문을 노트에 적고, 사전을 활용해 나름대로 번역하고 암기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런 독특한 과정은 그가 도쿄대 불문과에 입한 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평생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겐자부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불문학을 읽는다-영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기에 일본어 표현을 대치해 본다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는 불어 교과서-혹은 영어 교과서-와 일본어 교과서, 그리고 나(나의 언어)라는 삼각형의 장(場)에서 살아 있는 것이 가장 충실한 지적(知的) 또는 감정적인 경험이었던 셈이다.
나의 문학 생활에는 번역본을 출판하는 일이 끝내 없었지만, 그래도 삼각형의 자장(磁場)에서 세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언어활동이 소설가로의 준비였던 셈이라고 생각한다.”
이윤기 선생에게 번역이 ‘소설 공부’이자 ‘사유의 연습’이었던 것처럼, 겐자부로에게도 번역은 일종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원서와 번역본을 함께 읽고 여기에 필사(筆寫)와 번역을 더한 작업을 정신적 ‘전신운동’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훈련이 겐자부로의 소설 집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독특한 훈련은 자신의 문체를 다듬고 소설의 주제를 정하는 데 영감을 주었고, 소설에 쓸 소재를 발견하고 서사(Narrative) 능력을 키우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겐자부로는 “프랑스어 학습도 할 겸 새로운 번역을 원문에 맞춰 검토하는 데서 문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지금도 매일 오전에는 불어책 혹은 영어책과 사전, 밑줄을 긋기 위한 색연필과 여백에 적기 위한 연필을 옆에 놓고 읽기를 계속한다. 지금까지는 종종 그런 식으로 해서 오전에는 읽는 것을, 오후에는 소설을 쓰는 시간에 몇 구절을 번역해 본다. 이러한 독서를 계기로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 일도 있다.”
내가 이윤기 선생과 겐자부로의 번역 작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번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두 사람의 훈련 방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윤기 선생은 자신의 번역 작업에 대해 ‘도장이 아닌 뒷골목에서 배운 태권도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에 겐자부로의 번역 작업은 ‘도장이 아닌 집에서 교본을 참고하여 자기만의 교본을 만들며 배운 태권도’에 비유할 수 있을 듯합니다. 둘 다 일종의 독학(獨學)입니다. 내게 독학은 혼자서 하는 공부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독학은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 스스로 깨우쳐가는 공부,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훈련, 자기 고유의 방식과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답게 사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 이윤기 저, 무지개와 프리즘, 미래인, 2007년
* 오에 겐자부로 저, 김유곤 역,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문학사상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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