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녕이~
  • 조회 수 265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8월 24일 19시 00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장자는 이름이 주이며 전국시대(기원전 475221) 몽종(蒙從, 지금의 하남성과 안휘성 경계 지점)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략 기원전 369년에 태어나 기원전 28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명가(名家)의 대표적 인물인 혜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장자는 어려서는 너무나 가난해 쌀을 꾸어다 끼니를 때우거나 짚신을 꼬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평소 옷을 누추하게 입었는데, 언젠가 한번 위나라 왕을 만나러 갈 때도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 갈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가난했을 지언정 장자의 사상을 미루어 보건대 그의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그러한 가난을 즐기며 소소한 행복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는 북송의 곽상이라는 사람이 그 때까지 돌아다니던 여러 가지 사본들을 정리하여 편집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65,000여자, 33편으로 줄여서 편집하고, 거기에다 자기 나름으로 주를 달았다. 이렇게 곽상이 편집한 장자가 바로 우리가 지금 보는 장자다. 곽상은 장자 33편으로 하고 이를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으로 나누었다. 분명하지 않지만 이 중 내편 7편은 곽상이 편집하기 전부터 묶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 내편 7편을 대체적으로 장자 자신의 저술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데 많은 학자가 동의한다. 한편 사기에 언급되어 있기로는 원래 장자는 10만자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니 삼분의 일정도는 소실되어 전해진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그는 노자와 같은 궤적을 보여지고 있으며, 일견 생각도 비슷하여 보이나, 노자가 시적인 잠언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반면 장자는 주로 산문형식의 우화로 표현했다. 장자의 사상은 그 언어가 생기 넘치고 발랄했으며, 많은 은유와 비유를 담고 있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 철학사에서 문학, 예술 등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당나라 시대에 와서 그것은 선불교를 꽃피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22. 장자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보다 개인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도가적정치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는 도가적삶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22-23. 그러면 장자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는가? 엄격히 말하면 가르쳐 주려는 것이 없다.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가 떠받드는 상식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 방식, 거기에 기초를 둔 맹목적인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등을 우리에게 스스로 깊이 살펴보게 해서 이런 것들의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발견해 없애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얼굴을 씻어 주고 단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거울을 들어 주는 셈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장자는 한 가지 체계적인 인식 내용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깨움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깨달을 때, 우리는 부자연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27. 붕새는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장자첫머리는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속이 후련하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첫째..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래적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발현해서 생긴 일임을 말한 셈이다둘째..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28. 끝없이 멀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붕새가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까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29.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거의 모두, 바람은 신바람이라고 할 때처럼, 우리 속에서 움직이는 생기 같은 것을 의미한다. 희랍어의 프뉴마’, 히브리어의 루악’,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 ’프라나그리고 한문의 기는 모두 바람이나 숨이나 생기를 뜻한다.

특히 히브리 지혜서에 나오는 창조 설화를 보면, ‘신령한 바람이 혼돈 위에 안장서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새와 같이 만물에게 각각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30. 종교는 우리에게 외친다. 바람을 타라. 생기를 찾아라. 그리하여 활기찬 삶을 살아라.” 이것이 건조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현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이라는 것이다.“

 

31.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 지낼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금 아는 것으로 많이 아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으로 긴 삶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33. 노자도 도덕경에서,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몹시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34. 극도로 엄청난 진리는 본래 역설적이어서 형식 논리에 사로잡혀 명석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웃음거리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웃음거리가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도 붕새처럼 변해 자유를 누려야 하겠지만, 당장은 매미나 새끼 비둘기처럼 어리석은 짓이나 말아야겠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나날이 없애 가는 도의 길을 걸으며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의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직시하고, 붕새처럼 이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신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봐야 하겠다.

 

37. 이렇게상징을 넘어서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바라볼 때 우리는변해서새로운 실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붕새의 변화와 초월과 자유에서 우리가 가진 실존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우리 스스로 변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38. 지인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은 공적에 무관하고, 성인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40. ‘장자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돼 무한한 경지에 노니는 절대 자유의 단계이다. 아무것에도기대지 않는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의 삶이다.

자기가 없고, 공로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나 공로나 명예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사람들이다.

 

43.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무슨 소원이든 말하라고 했을 때 지금 자기에게 비치는 햇빛을 가리지 말 것밖에는 달리 부탁할 것이 없다고 한 고대 그리스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이다.

  

50.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 신인들이야말로쓸모 없음의 더욱 큰 쓸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

 

52. 똑 같은 것을 가지고 쓰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게 아닌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들이 박으로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길 생각을 못 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했단 말인가?

 

57. 쓰임이 있지만 더욱 값진 쓸모가 있는데도 값싸게 쓰이는 것이 딱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생명을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써버리고 말 것이냐 더 원대한 일을 이루는 데 사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암시했다고 볼 수 없을까?

매미나 새끼 비둘기, 메추라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는 붕을 비웃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큰 시계를 보고, 사물의 더 크고 참된 쓸모를 찾으라는 것이다.

 

60. 제목을 어떻게 풀든 논의의 초점은에 있다. ‘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로 한다고 하여 각각 다른 사물을 일률적으로 획일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때의하나는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한쪽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양쪽을 다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62. 여기 이오상아장자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63. 옛 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내가 무덤에서 나오는, 깊은 의미의죽음과 부활이다. 불란서 철학자 데카르트가 라틴말로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지만, 여기서는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64.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

 

66.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대답했습니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1편의 바람이 우리가 타고신바람 나게날아가게 하는 바람이라면, 여기 나오는 바람은 퉁소 속으로 통과하면서 소리를 내듯 속으로 불어 우리를 움직이는 내면적 바람인 셈이다.

 

67. 인간은 이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보내느냐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한 소리, 생각, 의견, 심리 작용, 감정, 정서 상태와 다양한 정도의 생동성과 생명력 등을 얻는다

하늘 소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대지가 이처럼 다양한 소리를 내도록 해 주는 바로 그것, 그 자체로는 들리지 않지만 모든 소리들이 근원이 되는 바로 그것. 바람 혹은 기 그 자체, 바람이나 기의 근본인 도와 도가 발휘하는 힘을 의미한다.

 

68.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어 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우리 자신을 잃어 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닐까?

 

72. 장자는 이런 일상적인 마음,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주관한다고 착각하고 그 이상의 존재를 모르는 마음이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런 마음의 불완전함을 깨달아 이를 잃고 초극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77. 뒤집어 말하면 이런 분별심, 성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비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정신적 병폐 때문에 나의참주인’, 나의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80.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밝음을 얻음이라 한다.

 

83. 사물을 이렇게 통째로 보는 것이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고, ‘도의 지도리에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밝음이다.

 
91.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92. ‘하늘의 고름이란,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두 길을 걸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이런 것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인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97.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고 하고, 멈출 줄 안다고도 하였다. 멈출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남성다움과 여성다움’, ‘희고 검음’, ‘영광과 오욕등 일견 대립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99.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이 있으면 없음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 이전의 그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여기서는 뭘 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뭘 말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102. 털끝이 태산보다 클 수 있고, 태산이 털끝보다 작을 수 있다. 무한히 작은 도에서 본 털끝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큰 도에서 본 태산은 무한히 작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찬가지. 도는 아무리 긴 시간보다도 더 길고 아무리 짧은 순간보다도 더 짧다.

 

103. 혜자는만물을 두루 사랑하면 하늘과 땅이 나와 하나라고 했다.

 

104.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변론하고 시비를 가리면서부산하게 좇아다니지 말고”, ‘순수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라 타이른다.

  

108. 도는 마음에 간직하거나 체험으로 알아야지 사변이나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따지면 영원히 절대타자일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 ‘말로 하지 않는 변론도라고 할 수 없는 도를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은근한 빛을 감추고 있는 하늘의 보고이다.

   

123. 여희가 익숙한 환경에서 생소한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슬퍼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지금의 익숙한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 자기 중심적인 내가 자기에게 해방된 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익숙하고 편한 예전의 를 떠나 보내는 것이 마치 죽는 일처럼 싫은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이런 일상의 에서 놓여나기 위해 신앙의 도약을 감행할 수 있다.

 

125. 여희나 프시케처럼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에 안주하지 말고,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27. 문제는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삶이 꿈인 줄 알려면 이 삶에서 크게 깨어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큰 깨어남, 큰 깨달음, 큰 깨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생의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작은 일에 쌍심지를 켜면서 울고 불고 하는 내가 참으로 어리석어보인다. 큰 깨달음을 얻기는 어렵겠지만 일상의 작은 깨달음들이 모이면 큰 깨달음이 되리라. 생각해본다.

 

131.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맞다. 틀리다. 라고 서로 옥신각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저 주관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되는 의견을 통합하여 채택하면 될 뿐.

 

133. 인간은 너나할것없이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딴 사물에 의존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망량처럼 그 사실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영처럼 그것을 안다.

혼자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서로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34.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사물의 변화라 한다.”

 

135. 지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장자는 대각한 사람이다.

  

136. 이런 세계는 만물이 상호 합일하고, 상호 침투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연관하고 상호 의존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변화하고 상호 연기, 상호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 것이다.

 

137.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사물을 고정한 무엇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서로 어울려서 함께함을 볼 수 있다. 꿈은 우리에게 이런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는 매체 노릇을 해준 셈이다.

  

139.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생명을 북돋는 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141.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는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받을 정도로는 하지 마십시오. 오직 중도를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142.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일방적 지식 추구는 위험한 일이므로, 오직 중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도 보전하고 삶도 온전하게 되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곧보신’, 전생’, ‘양친’, ‘진년이다.

  

143. 도와 하나가 되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나 단견 같은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의식으로 얻은 지식을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더 얻지 못해 안달하며 쏘다니면 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앎을 버림’, 혹은배운 것을 버림에 이를 때, 비로소하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결국 지식이 아닌 직관으로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 셈이다.

 

144. 장자에게서 더욱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이 편에서 강조한 양생의 요체인 셈이다.

 

145. 희랍 사람들이 다이몬이라 하고, 로마 사람들이 지니우스라 한 것, 영어의것트’, 우리말로 표현하면 좋은 뜻으로 육감혹은뱃심을 따르라는 것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몸의 등줄과 옷의 등심이 모두 중앙에 있듯이 우리의 행동이 이리저리 치우치지 않고 증정이나 중용을 지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우리의 잔꾀에서 나오는 고의나 계략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 우리 깊은 속에서 솟아나는 어떤 활기나 기백에 따라 올바르게 나타나는 행동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잇지 않을까? 한마디로,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거기에 몸을 맡기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는 말이 갑작스레 막막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순리가 무엇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그저 어떤 상황이 닥치던지 그것을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느끼는대로 반응하고 그에 맞추어 즐기라는 뜻인 것일까?

 

150. 정이정력이라고 할 때처럼 성인의 활동력을 지탱해 주는 기본적인 요인이고, 기가기운이나원기라고 할 때처럼 사람을 건강하게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 한다면, 신은신난다고 할 때처럼 사람에게 활기와 흥을 돋워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2.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칼 하나를 가지고 19년을 써도 예리한 날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보통 생각으로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미식 축구 선수들 중에 가끔 이상스럽게도 자기를 공격하러 오는 상대방 선수들이 마치 고속 촬영을 한 영화 화면에서처럼 천천히 달려오는 것으로 보이고, 또 자기가 공을 던져야 할 곳이 훤하게 트여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럴 때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을 던지면, 그것이 성공하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골프 선수 중에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을 때 구멍()이 물통만하게 보여 그 큰 구멍으로 공을 쳐 넣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운동 선수들은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을 ‘zone’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머피는 이런 것을 두고 인간에게 있는초보통적 능력이라 한다.

 

153. 포정이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잊은 일종의 황홀 상태와 삼매 지경에서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사방을 둘러보고평상의 의식 상태로 돌아오면 말할 수 없이 흐뭇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권투챔피언 조한슨도 1959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내 오른손에 이상한 일,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 내 손이 전혀 내 모의 일부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빨라서 눈으로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나가서 명중을 할 때 흐뭇한 감정이 내 팔을 타고 내려가 전신으로 흘렀다고 했다.

 

153-154.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소위 성공한 지성인 사업가로 등장하는 상전이 불학무식한 하인 조르바의 신나는 삶, 거침이 없는 삶에 감복하여 결국춤추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이 난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어떤 것일까?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155. 사람의 모양이란 본래 두 발을 갖추는 것. 이로 보아도 외발임은 하늘이 한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소.

 

159. 마음대로 유유자적하는 것이, 새장 속에서 잘 얻어먹고 사는 것보다 더 나는 삶이라는 것, 이런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이 양생의 필수 요건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160.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했네.”

  

170. 옛 지인들은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왔다. 자기 하나 확실히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포악한 자의 행위에 간여할 수 있겠느냐?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이름을 내려는 것은 서로 삐걱거리는 것이고, 못된 앎은 겨루기 위한 무기이다. 둘 다 흉한 무기라 완전한 삶을 위해서는 써서 안 될 것들이다.

 

179-180. 안회가 말했습니다. “부디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마음의 재니라.”

재라는 글자의 본래 뜻은 굶다이다. ‘목욕재계라 할 때처럼 의식으로 하는 재는 물론 술이나 고기, , 마늘 등 자극성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181. 심재의 번역으로는 미음을 굶긴다고 하는 것이 원의에 더 가깝고 더 실감나는 말이다. 영어로는 ‘the fasting of the mind’이다. ‘마음의 굶음’, ‘마음이 가난함이다.  

기는 텅 비어 모든 것을 수용하니 이렇게 텅 빈 기로 사물을 대하면 그 빈 곳에 도가 들어온다. 이렇게 도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 ‘심재라는 것이다.

 

183.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받아 주거든 소리내고, 받아주지 않거든 잠잠하라.

 

185. 진정으로 심재를 하여 마음이 완전히 텅 빈 방과 같은 상태가 되면 그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곧 순백의 예지가 생기는 것을 체험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요에 머물러야한다. 가만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을 모으는 일이 기본 요건이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 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 운동인 셈이다.

 

186. ‘앎을 버림곧 무지를 통해서만 참된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무지란 물론 이분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앎을 비우는 것이고, 이렇게 비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참된 앎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187. 장자는 이 문제에 대해마음을 굶겨’, 내면에서 솟는 초월적인 힘을 체험한 뒤에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한 것이다.

 

188. 우리가 지금껏 붙들고 있는 우리의 자의식을 말끔히 비우고 진정으로 남을 위한 존재로 탈바꿈할 때 우리의 사회 참여가 이웃과 사회와 세계를 위해 진정으로 향내나는 산 제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195. 주어진 명령을 고치거나 꼭 이루려 너무 애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좋은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좋지 못한 일은 절로 되어 고치지도 못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 중심을 기르는데 전념하십시오. 이것이 최고입니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드는 것뿐.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임금에 대한 충성을 어쩔 수 없음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렇게 회피할 수 없는 일은 운명으로 알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덕의 극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슬픔이나 기쁨 따위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잊고’ ‘생사에 초연한 태도를 지니면 어디로 가든 문제될 것이 없으니,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면 걱정 말고 가라는 말이다.

  

196.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운명을 사랑함(amor fati)’과 비슷하다고 할까. “바꿀 수 있는 것에는 바꿀 능력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잇는 예지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 어느 성자의 기도가 생각난다.

 

200.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물임물됨을 잃는 일이 없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

 

204. 호랑이 사육사는 시간을맞춰먹이를 주고, 말을 사랑한 사람은 시간을못 맞춰말을 때렸다. 모든 일에 적기가 있음 알고 잘 맞추라는 것이다. 영어로 타이밍, 희랍어로 카이로스, ‘때를 따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도서 3:2-8)

 

209. 사물을 대할 때 함부로 쓸데 있다 없다를 속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쓸모 없음자체가 궁극 목표가 아니라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나무를 보고 왜 사당 나무가 되었느냐고 비난하거나 또 그것이 사당 나무라고 떠받드는 것은 사당 나무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간의 평가 기준으로만 따지는 빗나간 판단이라는 것이다.  사당 나무의 더욱 큰 쓸모란 무엇일까?

  

211.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십시오.” 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처럼 자질구레한 일에 쓰이기보다 도에 의해 쓰일 때 사람에게 더욱 참된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213. 조급하게 조그만 쓸모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공무원 임용고시다 사법고시다 무슨 자격시험이다 하는 것에 합격하는 것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고 거기에 목을 매고 사는 일은 곤란하다는 뜻이리라. 지금 당장 누구의 주관적 쓸모의 기준에 따라 쓰이지 않더라도, 심지어 요즘 많이 논의되듯 명예퇴직을 당하더라도,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박하게 이해한 실용주의나 실리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의미에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라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6.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이렇게덕이 곱추인 사람노자야말로 얼마나 자유스러운 사람이었던가!

 

219. 모두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옥신각신하는 세상에서 어느 한편을 위해쓸모 있으려애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고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접여는 가시나무가 무성한 길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가더라도 가시가 막거나 해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했다. 구애받지 않는 삶, 해를 받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세상에서 입을 모아 떠받드는 쓸모 있음의 쓸모를 넘어서서 쓸모 없음의 쓸모를 터득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220. 무조건 유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데 유용하겠다고 설치거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유용해야 한다고 애를 쓰면 정말로 유용해야 할 때 유용할 수 없으니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221.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마음을 굶기는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229. 첫째는 그(왕태)가 생사에 초연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아 설령 천지개벽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의연하고 의젓한 사람이며, 셋째로는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닌다는 것이 결국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자기 실현만을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했을 분인데도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신도의 머릿수나 지지하는 사람의 투표 수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오로지 자기나 자기 집단의 종교적, 정치적 세 확장에만 혈안이 된 요즘 세태와 얼마나 대조적인가?

 

232.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편안하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덕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지.

 

233. 내가 선생님을 19년 동안이나 따르며 배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내가외발임을 아신다고 내비치신 적이 없으시다네. 이제 자네와 나는 몸 안의 세계를 배우는 데 자네는 아직 모 밖의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으니 이것 역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234-235. 신도가 자신도 남이 자신을 업신여기면 화가 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아직라고 하는 의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라며 그럴 때마다 백혼무인 선생님에게 가서 그런 마음을 씻어 평정을 되찾고 자의식을 줄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235. 정자산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사람을 오로지 외모로만 판단하는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240. “새는 날다가 활에 맞기 쉽고, 고기는 헤엄치다 그물에 걸리기 쉽고, 짐승은 뛰다가 덫에 걸리기 쉽지만, 용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오른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얼마나 위대한 용인가!”

 

244. 애태타는 나서서 주창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화이불창이다. 이것은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를 의미한다. 물 같은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하고…… 이것은 완전히빈 배가 된 상태 ,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47. 애태타는 하늘이 준 본바탕을 보전했고, 그것을 밖으로 과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48. “평평한 것은 물이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밖으로는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을 이룬 사람은 조화를 이룬 사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249. 상황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음, 거울 같은 마음으로 마음의 조화와 평정을 유지하여 트인 마음, 즐거운 마음, 봄날처럼 안온하고 느긋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주어진 재질, 우리의 본바탕을 온전히 지키는 일, ‘재전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덕의 사람은 이처럼 자기 덕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낼 것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묵묵히 살아갈 뿐인데 사람들이 모여든다.

 

254. 외모에 마음 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외모 때문에 성형외과의 문전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마음을 쓰고, 신경을 써야 할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이니 어찌 된 일이냐는 것이다. 이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한심한진짜 잊어버림이라는 이야기 이다.

 

255. 성인은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 하늘이 알아서 먹여주고 길러 주는데, 일부러 설치면서 허우적거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면서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다. 장자는 하늘의 도, 하늘이 준 본래의 바탕, 이것이 성인을 위한 음식이니, 그야말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노래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257. “도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하늘이 자네의 형체를 골라 주었는데 자네는 지금 견백론 같은 것으로 떠들고 있네 그려.”

 

258-259. 일체의 이기심이나 집착, 사감없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무정이다. 따라서 무정이란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보통 감정을 넘어선 감정이란 뜻이다. 그야말로정일랑 두지 말라. 미련일랑 두지 말 자.” 하듯이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트인 마음, 빈 마음에서 작용하는 티 없는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259. 어느 선사가 노래한 것처럼,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하지 않고, 호수도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둘 다무심히드리우고 무심히 비출 뿐이다.

 

262.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서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입니다.

 

263. 우리 보통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사로 잡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우리 일생을 통해, 이런 저런 선입견에 한번 길들면 그것을 만고불변하는 진리처럼 떠받들고 산다. 말하자면 세뇌된 상태이면서도, 이런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271. 진인은 무엇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대립, 상극, 이원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이것도 저것도하는하나 됨의 경지, 막히고 걸리는 것 없는 통전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272.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밤낮이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모든 사물의 참모습입니다.

 

276. 대지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277. 도와 하나 되면 살아도 거기, 죽어도 거기. 밤중에 죽음이 찾아와 우리의 생명을 도둑질해 간다 해도 결국 숨을 데가 없으니 거기가 거기.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구분이 있을 수도 없고, 잃으니 찾느니 하는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281. 도는 체험의 영역이지 말의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한다. ‘터득할것이지떠들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떠들고있는가? 여기서는도는 이것이다.”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도에 대해서는 떠들 수 없다고 떠들고 있을 뿐이다.

도는 자본자근이라고 했다. 앞에도 나온 것처럼 모든 것이 그것에 의지해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에도 의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만물은 유대인데 반하여 도는 무대라는 것이다. 현대말로 하면 자존인 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라틴말로 ‘aseitas’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에 의’이란 뜻이다. 도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지금 그러함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290-291.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 조용하고 텅 빈 경지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기막힌 이야기이다. ‘도가구계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92. 네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마음에 막히는 것이 없어 결국 모두 벗이 되었습니다.

 

293. 각자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사귀는 벗이 훌륭한 벗이요, 그 중에서도필요할 때 도와 주는 벗이 참된 벗이어서 영어 속담에도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 장자에서 말하는 참된 벗이란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우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맺는 벗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차원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벗, 한번 같이 웃기만 해도 속마음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벗이 진정한 벗이라는 뜻이다. 참된 의미의길벗이라야 참된 벗이라는 것이다.

 

294. 공자도 논어 첫머리에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쉽게 찾기가 어렵기에 멀리서 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리라.

 

295.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는 말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296. 인생을 살면 몇백 년을 살겠는가? 하늘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한 것을. 길게 살았다 짧게 살았다 따지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299. ‘장자에서는 인간이 행한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는 인과응보라든가 업보를 같은 사상이 없다. 모두 자연이 그 순리에 따라 적절한 길로 만물을 변화시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300.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안달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나오는 도나조물자’, 혹은조화자가 결국은 만사를 선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믿음이 있을 때 삶이 그만큼 듬직해지지 않을까?

 

318-319. 그저 인간의, 나의 어쩔 수 없음을, 그 한계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어리석게 무엇을 탓하며 마음을 상하지 말자. 그저 최선을 다할 뿐. 그러나 만사여의 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자. 이른바기대 중독에서 헤어나라 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한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하는 길을 채택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 말한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운명론이 아니라 안명론이다.

 

322. 참된 지도자는 그런 인위를 넘어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얻은 그 감화력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알듯 모를 듯 이끌어 가는, 노자식 무위의 정치, 가만 놓아둠의 정치, 무심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최소한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다스림이라는 원칙에서 궁극적으로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다.

 

324. 직접적인 체험으로 얻은 앎이 진정한 앎이라는 것이다.

 

325. ‘도덕경에서도 참된 지도자는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고 했다.

 

327.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그 감화 아래서 모두가 저절로 되어 가도록 하고, 그렇게 잘 도어 가는 것만 확인하는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의 정치’, ‘놓아둠의 다스림이다.

새도 화살을 피하려 하늘 높이 날 줄 알고, 들쥐도 잡힐까봐 사당 밑에다 살자리를 마련하는데, 사람들도 도의다, 법령이다, 규정이다 하고 못살게 굴면 어디로 피하게 마련이니 제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스릴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이다.

 

328. 지도자가 될 요건으로 1) 마음을 담담하게 하라, 2) 기를 막막하게 하라, 3) 일을 자연스럽게 하라, 4) ‘를 버리라 했다. 결국 자기처럼 무명’, ‘무기’, ‘무공의 경지에 이르게 하라는 것이다. 

 

331. 참된 지도자는 이슬처럼 공기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 뒤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다스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이름을 들먹이지 않고’, 만사 이렇게 잘 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 스스로 잘해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341. 이렇게 초능력 같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구도의 길에서 이제 어디쯤 왔구나 하고 가르쳐 주는 일종의 이정표쯤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한눈 팔지 말고 계속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342. 아직 배움을 시작하지도 못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배움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거기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대접하고, 좋고 싫은 일이 따로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열자가 이제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가르는 일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343. ‘도덕경에서 계속 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쪼개거나 다듬지 않은 통나무는 도와 하나됨으로 원초적 비이분의 세계를 되찾았음을 상징한다. 흙덩이처럼 우뚝 선 모습이란 앞 5:23에서 말한 것 같이 일상적인 의식이나 분별심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무심, 무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결같이 일생을 보낸 열자의 이야기가 소요유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고….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히 노닐었다고 나와있다. 바람을 타고 나는 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345. 이름에 매이지 말라… ‘무위의 위를 염두에 두라…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 잔꾀나 지모의 주인이 돼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부정적인 방법을 버리고 무궁한 도, 사물이 근본을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 비움의 경지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하라. 이것이 바로 마음을 거울처럼 한다는 뜻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거울은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비출 뿐, 밉다고 쫓아 보내고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앞에 나타나 것이 슬프다고 함께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비췄다고 제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출렁거리는 것을 보여 준다고 같이 출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잔잔히 떠오르는 대로 비추는 거울, 이것이 자유인의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349. 옛날의는 진정한로 다시 태어나는변혁의 긴 여정을 완성하는 것이다.

 

358.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은 위대한 앎으로, 모든 참된 앎의 출발점이다.

 

362-363. 이제 이 개구리가 할 일은 정신을 가다듬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우물 밖으로 일생 일대신앙의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367.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상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해치거나 불리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속에 잠재한 열등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수가 많다.

 

369. 물고기와 하나가 되면 물고기의 즐거움이 곧 나의 즐거움이 아닌가.

 

370. 진리의 본질은 자유이다. 자유는 존재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놓아둠’..우리가 우리의 현존이 되게 그냥 그대로 놓아둔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다.

 

371-372.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 내가 시끄럽게 따라가며 울고 불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모르는 일이라. 그래서 울기를 그만 둔 것이지.  

 

372. 장자는 간디가 말한 일종의 진리파지를 체험했다고 할까, 진실의 깊은 면을 통찰할 때 죽음의 본질을 깨달아, 결국 울고불고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있었다면서 혜자의 오해를 풀어 준다.

여기서도 죽음을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로 본다. 죽음을 계절의 변화와 같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죽음을 극복한다는 이야기이다. 순명이요, 안명이요, 아모르 파티이다.

 

374. 남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 그대로 살고. 본성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성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와 닿는다.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하는 본성을 찾고 본성대로 살기에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375. ‘의식이 온전하다는 것은 의식이 둘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의식이 주와 객으로 완전히 나누지 않은 갓난 아기는 침대에서 떨어져도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는다. 술취한 사람이나 갓난 아기의 의식 상태는주객 미분으로 온전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얻은 온전함주객 초월로 운전한 것이다.

 

376. 19달생’(통달한 삶)이란 이처럼 주객으로 나뉜 일상적 의식이 외부적인 조건을 잊어버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이분법을 초극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생기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힘있는 삶을 의미한다.

 

377. 기왓장을 놓고 내기 활을 쏘면 잘 맞고, 허리띠 고리를 놓고 쏘면 주저하게 되고, 황금을 놓고 쏘면 마음이 혼란해진다. 기술은 마찬가지인데, 뭔가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어서 그 외면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무릇 외면적인 것을 중시하면 내면적인 것에 허술해질 수 밖에 없다.

달생편의 주제는 마음이 주객으로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모으는 것, 전일, 전신, 허심, 무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 내기 활을 쏜 사람은 상품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이런 마음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 이런 외적 조건에 좌우되어 흔들리는 것은 기술의 단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목수 재경의 이야기에서 재경이 귀신 같은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게 된 준비 과정 중의 하나가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고하는 생각을 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를 따르는 경지이다. ‘궁술궁도의 차이이다.

 

380. 덕이 온전한 상태, 완전한 허심, 무심에서 생기는 내면의 힘이 겉으로 허세를 부리는 공격 자세를 압도한다는 얘기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원리이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예로부터 나무를 깎아 만든 닭을 정신 수양을 위한 좌우명처럼 몸 가까이 지니면서 내면적인 힘을 배양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382. 숲에 들어가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모양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완성된 거를 보게 된 후야 비로소 손을 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둡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이 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기가 나오는 것은 일체의 외부적인 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완전히 한 점에 집중한 상태에서초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83.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입니다.

  

384. 인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본래 붙었다가 잘려 나간 다른 쪽에 대한 동경이라고 한다. 아무튼 떨어져 나간 제 짝을 찾아 찰칵하고 들어맞으면천생연분이라 삐걱거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식한다는 것은 삐걱거린다는 것인가? 물론 상대방을 잊을 정도로 서로 완전히 편하게 지내는 것과 등한히 여기거나 업신여기면서 잊어버리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를 것이다.

 

387.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이다.

 

390. 어진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어진 행동을 한다고 하지 않으면 어디 간들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391. 실컷 잘해 주고 욕먹는다는 말이 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면서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부리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남을 생각하는 마음, 겸허한 태도가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결국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훌륭하면서 그리고 훌륭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요, 이렇게 훌륭할 때 어디 가서라도 환영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392. 화공은 두 다리를 뻗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원군이 말했습니다. “됐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화공이다.”

 

393. 이것은 예술이란 물리적 사실보다 내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림은 붓을 자연스럽고 순간적으로 움직여 그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라고 했다. 참된 예술가는 내면적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기에 궁극적으로 인습이나 통상적 형식에 전혀 구애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394. 손숙오가 대답했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을 뿐입니다. 얻고 잃음은 나와 관계없는 것. 그러기에 걱정하는 기색이 없을 뿐입니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그 영예가 지위 때문인지 나 자신 때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위 때문이라면 나하고는 상관이 없고, 나 때문이라면 그 지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 나는 그저 의연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려 하는데, 어느 겨를에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 데 마음을 쓰겠습니까?

 

395. 집착이 없어 허허로운모습이다. 집착을 버리는 일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은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 네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를 요즘 말로 하면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법구경에는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듯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장자는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는 허허로운 마음을 중요하게 본 데 반해, 공자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심을 핵심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도가와 유가의 시각 차이를 말해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나를 발견한다. 어찌하면 집착을 버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저 자유롭기에는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배려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자유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갈등한다.  

 

396. 너는 네 모습을 바르게 하고, 눈길을 하나로 모으라. 하늘의 화기가 이를 것이다. 네 앎을 없애고 네 의식을 하나로 모으라. 신이 찾아와 머물게 되고, 덕이 너를 아름답게 하고, 도가 네 안에 살리라. 너는 새로 난 송아지처럼 사물을 보고 그 이유를 묻지 않게 될 것이다.

 

410. 도움이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적기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자는 사람 무서울 것 없다고 했지만, 도와 달라고 할 때 나중에 보자는 사람, 정말 믿을 것 없다.

 

412.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이렇게 쓸모 있는 것을 정말 쓸모 있도록 보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은 쓸모 있다고 하는 것을 쓸모 있게 하는 데 꼭 필요하다.

 

415.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 하는가?

 

Ⅲ. 내가 저자라면 

단순히 호접지몽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던 장자, 강의에서 처음 그의 발자취를 접하고 다시 그의 사상에 대해 자세히 읽게 되니 우리를 하게 만드는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너무 집착하며 살지 않았는지, 어떤 상황이 닥치던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일희일비 하는 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는 않았는지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비유와 은유로 이루어진 장자의 원문 내용은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자의 도움을 빌어 다시 읽다 보면 장자의 숨결을 생생히 느껴볼 수 있다. 역자는 단순히 장자의 원문을 해설하기에 앞서 본인의 경험, 일상의 사례, 성경과 동서양 고전들을 인용하며 역자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라 하겠다.

 

, 조금 아쉬운 부분은 챕터가 거듭될수록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거듭 인용되는 부분들은 다소간에 더욱 절제된 편집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역자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무릎을 탁 치며 그 의미를 이해하는 형식이기 보다는 이전에 독자 스스로가 장자 원문을 더욱 감미롭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자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직 그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IP *.124.78.13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