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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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2014.08.25
10기 찰나 연구원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地)’이라 하였습니다.
-장자의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 장자』 中-
노자의 『도덕경』이후로 기대되는 책이 『장자』였다. 많은 기대를 하고서 첫 장을 펼쳤는데 위의 첫 번째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 이것을 봤을 때 북쪽 깊은 바다에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고, 이 물고기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등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 ‘붕’이라는 새로 변했는데 이 새는 날아서 남쪽 깊은 바다인 천지로 간다는 것이다. 이게 왜 제일 중요하다고 처음에 넣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대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SF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인식되고 현실감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물고기가 새가 돼?
갑자기 백두산 천지의 괴물 출현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럼 이 괴물은 ‘곤’이 날아서 이미 천지에서 터전을 잡은 ‘붕’인가? 생각해볼수록 현실감이 떨어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어느덧 사물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이 하나의 것으로 고정되어 물고기는 물고기고, 새는 새로서 인식을 할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이야기를 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한다. 마치 『조나단 갈매기』에서 조나단 갈매기가 더 높이 날아가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미친 갈매기라고 욕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에게 ‘날기’는 먹이를 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물고기에게는 물속이 최고다. 물 밖을 꿈꾼다는 것은 제대로 숨 쉴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늘 물속에서의 생활만을 꿈꾸고, 물 밖 생활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고기에게 최적인 지느러미만 있다고 생각하지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새는 자신을 잡아먹는 영원한 ‘갑’이기에 새를 증오하고 혐오하고, 기피 대상인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장자는 이 이야기를 맨 앞에 두었을까?
단순히 물고기가 새가되었다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어지는 설명을 보고 알았다.
순간 내가 바라본 세상과 장자가 바라본 세상은 이렇게 다르구나! 그리고 이러한 얘기를 재미난 스토리로 표현할 수 있는 장자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실존적 한계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의 범위일까 궁금해졌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른다. 나의 한계성은 어디까지이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과연 그것을 내가 어느 범위로 까지 확대해나갈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20대 때만해도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말이 멋져 보이고 꿈과 희망이 느껴졌는데 40대에 맞이하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말 앞에는 왜 자꾸만 작아지는 것일까? 과연 2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데, 변화의 방향을 어디로 둘 것인지에 따라서 변화의 바람은 크기가 달라진다. 당장의 ‘쓸모’에 그것을 둘 것인가 ? 아니면 ‘쓸모없음의 쓸모’에 둘 것인가?
나 또한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 현대사회가 일에 대한 전문화가 되면서 일이 세분화되고, 세분화되다보니 나무는 보지만 숲은 못 보게 되고, 자본주의가 깊어짐에 따라 인간의 능력은 ‘돈’으로만 환산되고 역설적으로 돈으로 계산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당장의 ‘쓸모’에만 썼고, 계산된 만큼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이고, 그 능력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로서 생긴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당장의 쓸모에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다보니 나의 가능성은 자라지 않고 늘 조그만 ‘알’로 머물러 있었다. 물고기와 붕새도 시작은 알에서 시작되었지만 알에서 나와서 자신을 무한히 키워나갔고, ‘영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물고기가 붕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를 당장의 쓸모에만 집중해서 보내다 보니 하루하루가 힘들고 피곤해서 지쳐 잠들고 그 다음날은 또 다시 일어나서 다시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꿈은 밤에만 꿀 수 있었고, 무한 가능성을 펴는 꿈 꿀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었다.
작년에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 안에 있던 유물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것이 기원전에 가능했을까 충격적이었다. TV나 책에서 봤을 때는 늘 들어보고 보아오던 것이라 그랬나 보다 했는데, 피라미드 앞에 섰을 때, 그 크기와 규모에 압도당하고, 유물들의 디자인과 디테일을 봤을 때도 현대에 사용해도 아무 손색이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피라미드의 신비이지만,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은 어쩌면 능히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를 만들고 꿈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뇌의 10%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나머지 90%를 활용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세상에서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 팔지 말고,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를 위해서 이제는 ‘마음을 굶기는 심재(心齋)’를 실천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옛날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변화되지 않은 나에서 변화된 나로, 익숙하고 편한 나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나로, 자기중심적인 나에서 나에게서 해방된 나로, 나의 오상아(吾喪我)를 통해서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늘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변혁의 날개를 달고 붕새처럼 날아갈 수 있고 꿈도 낮에 꿀 수 있게 된다. 꿈은 밤이 아닌 낮에 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