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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1일 23시 58분 등록

카를 융 기억 꿈 사상_구달리뷰#19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음

A. 아페 편집

조성기 옮김

김영사

 

1. 저자에 대하여

 

<칼 구스타프 융의 연보>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 정신과 의사이며 분석심리학의 개척자.

* 1875 7 26= 스위스 투르가우 주 케스빌에서 태어나다. 아버지 요한 폴 융은 스위스 개혁 교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 에밀리에 프라이스베르크는 돈 많은 명문가의 딸이었다. 칼 융은 이 부부의 넷째로 태어났으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였다.

* 1876= 융의 아버지, 라우펜으로 발령을 받다. 융의 어머니 에밀리에가 정신적 혼란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에밀리에가 밤이면 귀신이 나타난다는 말을 곧잘 한 탓에 칼 융은 어릴 때부터 공포에 시달렸다.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고 병으로 자주 입원함에 따라 아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런 현실이 융의 여성관에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

* 1879= 융의 아버지가 클라인위닝겐으로 발령을 받는다. 에밀리에가 친정과 가까운 이곳으로 옮기면서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다.

* 1987= 칼 융, 바젤 인문 김나지움에 입학하다.

* 1895= 과학과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바젤 대학에 입학하다.

* 1900= 바젤 대학을 졸업한 뒤 취리히의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에서 오이겐 블뢸러 교수 밑에서 일하다. 여기서의 활동은 1909년까지 이어진다.

* 1902= 취리히 대학에서 ‘소위 신비현상의 심리학과 병리학에 대해’(ON THE PSYCHOLOGY AND PATHOLOGY OF SO-CALLED OCCULT PHENOMEN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다.

* 1903= 스위스의 부자가문 출신인 엠마 로첸버그와 결혼하다. 둘 사이에 아이가 다섯 태어났다. 엠마가 19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의 결혼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융은 몇몇 여자와 염문을 뿌렸다. 러시아 출신으로 최초의 여성 정신분석학자였던 사비나 스피렐레인(SABINA SPIRELREIN)과 동료였던 토니 볼프(TONI WOLFF)와 깊은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 1905=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의학 강의를 맡다. 이 강의는 1913년까지 이어졌다.

* 190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서신 교환을 시작하다. 이듬해 빈에 있던 프로이트를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꼬박 13시간 동안 프로이트와 대화를 나눴다.

* 1907= 『조발성 치매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DEMENTIA PRAECOX)을 쓰다.

* 1909= 취리히의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을 그만두고 프로이트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다. 그러나 융이 『무의식의 심리학』(PSYCHOLOGY OF THE UNCONSCIOUS)을 집필하는 사이에 프로이트와의 관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둘은 리비도와 종교의 본질에 대해 의견대립을 보였다. 또한 융은 1909년에 스위스 퀴스나흐트에 정신분석 의료기관을 열고 죽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운영했다.

* 1910= 세계정신분석협회(IPA) 회장에 선출되다. 『변용의 상징들』(SYMBOLS OF TRANSFORMATION)을 쓰고 미국 뉴욕의 포드햄대학에서 강연을 하다.

* 1912= 칼 융이 자신은 프로이트와 학문적으로 다르다고 선언했다. 『무의식의 심리학』 발표하다.

* 1913= 세계정신분석협회 회장직을 내놓다. 이로써 프로이트와 최종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환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자신이 정신분열증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레드 북』의 집필을 시작하다. 융은 이 책을 16년 동안 쓰다가 옆으로 밀쳐놓은 뒤 틈틈이 손질을 했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된다.

* 1919= ‘원형’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다.

* 1920= 영국 콘월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다. 이후 두 번 더(1923, 1925) 영국에서 세미나를 연다.

* 1921= ‘심리유형’을 발표하다.

* 1923= 북미의 푸에블로 인디언 방문하다.

* 1925= 동아프리카로 심리학적 탐험을 떠난다. 케냐와 우간다 등을 돌면서 그곳 원주민들의 심리학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 1929= 중국 도교 서적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에 대해 언급하다.

* 1932= 취리히 국립폴리테크닉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취임하다. 이 학교에서 칼 융은 1940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친다.

* 1937= 인도를 여행하다. 힌두철학은 상징의 역할과 무의식의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 1944-1945= 바젤대학 의료심리학 교수가 되다. 『심리학과 연금술』(PSYCHOLOGY AND ALCHEMY)출간하다.

* 1948= 취리히에서 칼 구스타프 융 연구소 설립하다.

* 1950= 『욥에 대한 회신』(ANSWER TO JOB) 발표해 논란을 불러일으키다.

* 1957= 자서전 『기억 꿈 회상』(MEMORIES, DREAMS, REFLECTIONS) 출간.

* 1958=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 집필 시작. 이 책은 1961년 융의 사후에 출간됨.

* 1961= 취리히 근처의 퀴스나흐트에서 세상을 떠나다. 향년 85.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의 창시자이다.  1875년 스위스 북동부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스위스 바젤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1900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 밑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1904년경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제일 먼저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S.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을 입증하고, ‘콤플렉스’라 이름 붙였다. 이어 1906년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08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키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1907년 이후에는 프로이트와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며 한 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고,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여겼지만 성격과 견해 차이로 인하여 5년 만에 결별했다.

그는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되어,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무의식세계를 탐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경험한 강렬한 꿈과 환상 등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연구하면서 신화와 역사, 연금술에 심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분석작업을 통해서 얻은 방대한 경험자료를 토대로, 원시종족의 심성과 여러 문화권의 신화, 민담,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종교현상들을 비교 고찰한 결과, 인간심성에는 자아의식과 개인적 특성을 가진 무의식 너머에 의식의 뿌리이며 정신활동의 원천이고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인 많은 원형(原型)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의 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모든 정신 활동의 원천으로 그 속에는 마음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된 마음을 실현하도록 촉진시키는 자가 조정의 중심핵이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자율적으로 보상하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케 하는 핵심적인 능력을 갖춘 원형 즉, 자기원형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병리적 현상의 이해와 치료뿐 아니라 이른 바 건강한 사람의 마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모든 인간의 자기통찰을 돕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시대적 문화, 사회적 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신학, 신화, 민담학, 민족학, 종교심리학, 예술, 문학은 물론 물리, 수학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만년에 융은 역사를 꿰뚫어보는 시사논평으로도 명성을 얻었으며, 1961 85세를 일기로 퀴스나흐트에서 죽었다. 융은 심혼(心魂)의 의사(Seelenarzt)로서 자기실현의 가설을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20세기 유럽이 낳은 정신 과학자 중에서 동양사상(東洋思想)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함으로써 동서(東西)에 다리를 놓았으며, 새 천년(千年)에 인류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 인물이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정신분석의 이론』, 『심리학과 종교』, 『영혼을 찾는 현대인』, 『심리학적 유형』, 『미발견의 자아』, 『심리학과 연금술』, 『인간과 상징』 등이 있다.

 

<융의 일대기 정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정신의학자가 되다

칼 구스타프 융(이하 편의상 ‘융’으로 통일) 1875 7 26일에 스위스 북부 투르가우 주의 시골 마을 케스빌에서 개신교 개혁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융 가문은 본래 독일 마인츠에서 살았지만, 이 유명한 정신의학자의 할아버지(역시 의사였고, 역시 ‘칼 구스타프’라는 이름이었던) 때에 스위스 바젤로 이사하여 이후로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되었다. 융은 바젤 근교의 클라인휘닝겐에서 성장했고, 11세 때에 바젤의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융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심령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거짓으로 신경증을 일으켜서 학교를 빼먹기도 했으며, 자신이 두 가지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목사인 부친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특이한 꿈과 환상을 체험하면서 점차 품게 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인생 행보를 결정한 요인이었다. 1895년에 융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896년에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융은 대학에 다니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떠맡아야 했다. 1900년에 의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융은 정신의학자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의 책을 읽다가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의학은 아직 개척 중인 분야였으며, 의과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융은 정신의학을 통해 본인이 관심을 갖는 정신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영역의 조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190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 부설 부르크횔츨리 병원에 취업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1857-1939) 밑에서 연구와 치료에 전념했다. 융은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자유 연상’ 기법을 개선한 ‘단어 연상’ 기법을 제안해서 주목을 받았고, 아울러 환자가 지닌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다양한 생각의 집합”을 일컫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고안했다(지금은 흔히 ‘열등의식’과 동의어로 여겨지지만, 모든 콤플렉스가 열등의식까지는 아니다).

 

1903년에 융은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했다.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엠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서 융의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엠마는 훗날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에, 융에게는 이상적인 배우자 겸 동료 노릇을 해 주었다. 1905년에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더욱 명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융은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칼 구스타프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존경과 우정에서 시작되어, 사상적 갈등을 거치고, 결국 결별과 반목으로 마무리된 두 사람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현대 지성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일반적으로는 융이 프로이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갈등과 결별의 이유로 거론되지만, 히스테리 연구에 근거를 둔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열증 연구에 근거를 둔 융의 이론은 애초부터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두 사람을 ‘사제지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만났을 당시에 융은 이미 정신의학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중견 학자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환자와 손님이 찾아왔고, 취리히 의과대학에서는 재학생 이외의 일반인 수강생도 많아 강의실이 초만원이었다. 따라서 비록 19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융은 학자 대 학자라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교우할 수 있었다.

정신분석 운동의 초기에 융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을 읽고 나서,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온 이 새로운 이론이 자신의 고찰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흥분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동조자가 되는 데에는 적잖은 위험이 따랐다. 융이 논문과 저서에서 프로이트의 입장을 지지하자, 주위의 동료들은 자칫 학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충고를 빙자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융은 이렇게 응수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편에 서겠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융은 프로이트와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으며, 1907 2월에 빈으로 찾아가 프로이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우리는 낮 한 시에 만났다. 그리고 열세 시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융의 지지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융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닌 장점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 위주의 정신분석 운동에 비()유대인인 융이 가담함으로써, 이 운동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줄어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 까닭이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운동에서 융을 기꺼이 2인자, 또는 황태자로 인정하려는 의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입장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 대한 융의 비판이었다. “나는 꿈과 히스테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프로이트처럼 어린 시절의 성적 외상(트라우마)에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또 프로이트처럼 성을 과도하게 전면에 부각시키지도, 성이 심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1909년에 융과 프로이트는 7주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두 사람의 결별을 가속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서 융은 프로이트가 “진리보다는 개인의 권위”를 더욱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프로이트의 이론이 일종의 도그마와 개인숭배로 변질되었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꼈다. 프로이트 역시 융이 종교나 신비주의 같은 미심쩍은 “고대의 잔재”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1910년에 융은 국제 정신분석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양쪽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1913년에 이르러 융과 프로이트는 마침내 결별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사적인 관계를 모두 중단하기로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융도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시인했다. 이후로 프로이트는 융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결별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는 증언이 있다. 융 역시 프로이트의 사상에서 받은 영향을 기꺼이 인정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없었더라면, 나는 (심리학 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독자적인 정신의학 이론의 전개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3년에 융은 오래 몸담았던 취리히 의과대학에서 사임했고,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시적인 고립에 빠져들었다. 융은 “방향상실 상태”인 동시에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신비 현상을 체험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는 대규모 재앙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유령을 목격하거나 의미심장한 꿈을 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라를 치료의 도구로 응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융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을 수행했고, 그 부산물로 여러 권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을 얻게 되었다. 이런 기록 가운데 하나를 읽어보는 특권을 누렸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융은 그 자신이 걸어 다니는 정신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원의 최고 의사이기도 했다.

융의 이론에 내재된 이중적인 성격은 아마도 그의 관심이 평생 동안 심령과 과학으로 양분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의사인 동시에 신비체험자였던 그는 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쉽게 규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 새로운 세계를 규명하려는 후반기의 저서는 종종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융은 종종 과학자를 빙자한 공상가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서도 융은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해명을 시도했다.

1922년에 융은 취리히 호수 인근의 볼링겐 마을에 땅을 구입하고, 수도나 전기 같은 편의시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소박한 별장을 지었다. 설계와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33년간 증축을 거듭한 볼링겐 별장은 융의 사상적 발전과 업적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그는 동양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이 번역한 [황금 꽃의 비밀(太乙金花宗旨)]를 읽고 연금술의 의미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으며, 여러 차례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면서 유럽 이외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관심을 넓혔다.

 

*나치 동조자라는 비난과 말년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정신의학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학계에서 퇴출되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반면 융은 스위스 국적에 비()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며 활동을 펼쳤다. 이후 독일 학계가 노골적인 친()나치 입장으로 선회하자, 그 일원인 융도 자연스레 나치 협력자, 또는 반()유대주의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비롯된 비난은 지금까지도 융의 이력에 그늘을 드리운다.

융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남긴 것도 사실이며, 독일 학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칫 나치에 악용될 수 있는 빌미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융을 반유대주의자나 나치 동조자로 모는 것은 속단이다. 나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39년에도 융은 프로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추모사를 발표할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

융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융은 미국의 앨런 덜레스를 도와 OSS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융은 나치 수뇌부의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으며, 특히 히틀러에 대해서는 궁지에 몰릴 경우 자살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쟁이 끝나고 논란이 일자 융은 “내가 나치이거나 나치였다는 것은 악명 높은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했지만, 이후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1944년에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그 와중에 그는 임사체험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차라리 이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다. 1947년에는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건강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다시 활발한 연구에 돌입했다. 1948년에는 취리히에 C. G. 융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욜란데 야코비(1890-1973)와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1915-1990) 등은 융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말년의 저서 중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분석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아이온](1951) [욥에게 보내는 답](1952), UFO 현상을 집단무의식의 발현으로 해석한 [현대의 신화](1958), 융 사상의 입문서로 유명한 [인간과 상징](1961) 등이 유명하다. 82세 때인 1957년부터는 5년간 집필 및 구술을 통해 자서전을 만들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자서전은 융의 생애와 이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신비 체험에 대한 증언을 담았고, 그의 사후인 1961년에야 간행되었다.

1955년에 취리히에서는 80세 생일을 맞이한 융을 위해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 해 말에는 반세기 넘게 해로한 부인 엠마가 사망하면서, 융도 급속히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 1961 6 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융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언젠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

 

*융과 분석심리학

1913년의 어느 강연에서 융은 자신의 이론을 ‘분석심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블로일러의 ‘심층심리학’과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프로이트가 ‘개인무의식’의 규명에 열중했다면, 융은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차원의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층으로 나뉜다. 우선 의식에 해당하는 자아(, 또는 에고)가 있고, 그 아래에 개인무의식(‘그림자’가 있는 곳)과 집단무의식(‘아니마’와 ‘아니무스,’ ‘원형’이 있는 곳)이 있고, 마음의 맨 한가운데에 바로 ‘자기’가 있다.

분석심리학의 핵심은 ‘개성화 과정,’ 즉 자아가 무의식의 여러 측면을 발견하고 통합하는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이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개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모습, 즉 ‘페르소나’를 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다른 인격적 측면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면, 그렇게 억압된 만큼의 보상을 치러야 한다.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균형이 깨지면 히스테리와 정신질환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꿈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 몰랐던 무의식의 여러 측면을 접한다. ‘그림자’는 무의식에 들어 있는 자아의 어두운 면, 또는 다른 면이며, 대개 의식이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성격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투사’ 작용을 행한다. 그림자와 유사한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이다. 아니마는 남성의 내부에 있는 여성적 경향의 인격화이며, 아니무스는 여성의 내부에 있는 남성적 경향의 인격화이다. 우리는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 의식에 통합시킬 수 있다.

 

융의 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은 바로 ‘집단무의식’과 ‘원형’이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라고 융은 설명했다. 또한 원형은 “집단무의식의 내용”이며, 그 중에서도 “고대의, 또는 원초적 유형, 즉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보편적 이미지”를 뜻한다. 원형은 칸트의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원형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 수 있다. 가령 ‘모성/부성,’ ‘영웅’ 같은 것이 그런 원형의 이미지이며, 신화나 민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기실현의 최종 단계인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 온전하게 통합된 것을 말하며, 우리의 의식을 일컫는 ‘자아’보다는 더욱 큰 개념이다. 융은 이것을 ‘자기원형’이라고 불렀으며, 그 궁극의 형태는 신(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도 유사한 개념이라고 간주해서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자기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경우에는 사람이 자칫 개인지상주의나 자아팽창에 빠져서 결국 과대망상을 품기 쉽다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융은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를 의미하는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융의 사상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심리학적 유형론이 아닐까. [심리적 유형론](1921)에서 융은 두 가지 유형(내향성, 외향성)과 네 가지 기능(사고, 감정, 감각, 직관)을 범주로 성격 구분법을 제안했다. 물론 이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진료의 편의를 돕는 도구에 불과했지만,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921년에 미국의 심리학자인 캐서린 브릭스와 이자벨 브릭스 마이어 모녀가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널리 응용되는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BTI)도 바로 융의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다.

 

*융의 이론에 대한 평가

융의 이론은 임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했다.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는 단어 연상을 통해 콤플렉스의 존재를 확인했고, 무의식의 영역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도 더 넓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계속된 탐구를 통해 그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원형,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자기)을 하나씩 접하면서 그 성격을 파악해 나갔다. 비록 물리적 증거까지는 없었지만 융은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비정통적인 접근까지 불사해 가면서 그 존재를 규명했다.

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융은 항상 프로이트의 광휘에 적잖이 가려진 느낌을 준다. 물론 활동 시기나 업적이나 명성에서 프로이트가 더 먼저인 것은 사실이며, 한때 융이 프로이트 학파에 소속되었다가 독립함으로써 사제관계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융은 프로이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신예 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융을 프로이트를 계승한 2인자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양쪽에 대한 비교가 사상적 특색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긴 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했다면, 융은 무의식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화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억압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한 반면, 융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무의식이 오히려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창조적인 기능을 발휘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해방을 도모했다면, 융은 무의식과의 화해를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융의 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광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사상이 “도처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쳤다고 한탄하곤 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범성욕주의로 비난을 받았듯이, 융의 이론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특히 신화와 종교는 물론이고 영지주의, 연금술, 만다라, 도교, 주역, UFO에 대해 연구한 글은 워낙 모호하고 불투명해서 갖가지 해석과 오해를 불러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비하자면 융의 이론은 뚜렷한 체계나 개념을 잡기가 힘들다고 평가된다. 정신의학자 앤터니 스토는 프로이트에 비해 “융이 이처럼 도외시된 것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쉬운 용어로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있는 사실을 기술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견해를 제시할 뿐입니다.” 융은 자기 이론이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도그마로 변질되지 않게끔 포괄적 이론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개별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만을 도모했다. “나는 자주 나의 정신치료법이나 분석방법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 (...) 치료법은 각각의 사례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이론이 개인적 경험을 넘어 보편적 이론이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융의 이론에 담겨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들도 많았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융과 함께 ‘동시성’ 이론을 연구했고,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조지프 캠벨은 융의 이론을 종교와 신화 연구에 적용하여 대중화시켰다. 정신과의 임상 치료에서부터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융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자주 논의되고 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본 인물인 “그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로렌스 반 데어 포스트) 있는 것이다.

 

2. 내가 저자라면

 

융은 전대미문의 특이한 길을 걸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자기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해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평생 초점을 두고 탐구한 것이 무의식의 세계였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홀로 묵묵히 갔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길이 있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간 선구자가 되었다. 그가 위대한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은 분야를 80 평생을 고독하게 간 사실이다. 견디기 힘들만큼 외롭고 고독했을 텐데 천복이라 여기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무의식이 주는 확신이었다.

 

융은 어릴 때부터 무의식의 세계를 암시하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체험을 자주 하게 되는데 남다른 점은 그것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그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 치열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끝까지 탐구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꿈의 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로 입문하게 되고 수수께끼를 풀 듯 무의식 세계의 비밀을 하나하나 캐낼 때 그는 삶아있음의 의미를 실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삶아 자기의 꿈을 분석하고 스스로의 무의식 세계를 깊이 파헤쳐 들어감으로써 타인의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오직 정신적인 사건들 만이 기억되고 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융의 철학으로 말미암아 이 책에는 아내와의 연애와 결혼생활이라든지 자식들 키워가며 겪는 인생의 희로애락 등의 외적 사건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환영 같은 내적 세계의 순례 이야기만 지루하게 이어져서 읽는 내내 마치 사막 길을 가듯 메마르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만큼 융의 세계는 내게 생소한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빙산이 물밑에 잠겨 보이지 않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듯이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의 세계가 무의식의 세계의 빙산에 일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부터 융이 왜 이렇게 두꺼운 책 속에다 반복하여 자신이 본 무의식의 세계를 여러 각도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보이는 세계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들어있는데 융은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작업을 평생 해 왔고 이제 그가 한 작업을 우리에게 이 자서전을 통하여 희미하게나마 소개해 준 셈이다. 스쳐가듯 한 일독 만으로는 융의 그림자도 이해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두 번 읽기를 통하여 다시 한번 그의 정수에 닿도록 시도해 봐야겠다.

 

3.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들

 

옮긴이의 서문

10

카를 융은 일생동안 종교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카를 융은 죽기 2년 전 bbc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런데 땅 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 융은 우리의 무의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육신은 꽃과 같아 시들어서 죽고 없어지지마는 자신의 행위와 인식은 뿌리와 같은 무의식의 세계로 녹아 들어 길이 이어지며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14

내 생애의 외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른 실체와의 만남, 거기는 항상 충만하고 풍성하여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23

나의 기억은 두세 살 적부터 시작된다. 나는 목사관, 정원, 세탁장, 교회, 성곽, 라인폭포, 뵈르트의 작은 성, 그리고 교회관리인의 농가 등을 회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호한 바다에 떠다니는 기어의 섬들뿐이다. 그것들은 서로 이어져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34

그 남근상의 추상적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수직이라는 말과 보좌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초원의 구멍은 아마도 무덤을 의미할 것이다. 무덤 그 자체는 일종의 지하사원이고 그곳의 녹색 커튼은 초원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커튼은 녹색식물로 뒤덮인 지구의 신비를 나타내는 셈이다. 그 양탄자는 붉은 피였다. .......남근상(phallus)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비슷한 팔로스는 빛나는 찬란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35

나에게 ‘주 예수는 어쩐지 일종의 죽음의 신처럼 여겨졌는데, 예수가 밤의 유령을 물리쳐주는 점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 자신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투성이 실체가 되었기 때문에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37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이를 테면 땅에 묻히는 매장식이 거행된 것이었다. 내가 다시 땅에서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갔다. 지금 나는 그 일이 가능한 많은 빛을 어둠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었다.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39

미술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클라인 휘닝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가 살고 있던 집은 18세기에 지어진 목사관으로, 거기에 격식을 갖춘 어둠침침한 방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고급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오래된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19세기 초 바젤의 풍경화였다. 나는 종종 그 어둡고 외진 방에 몰래 들어가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몇 시간이나 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애가 알고 잇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46

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그 돌 위에 앉아 생각의 유희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나는 이 돌에 앉아 있다. 나는 위에 있고 돌은 밑에 잇다’ 그런데 ‘돌도 나라고 말하며, 내가 여기 이 비탈에 누워있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의문이 일어났다. ‘돌 위에 앉아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돌이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은 그때마다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누가 누구인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 돌이 나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49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55

나는 놀라움과 은밀하고 지독한 부러움을 안은 채 그들이 방학 동안에 알프스, 그러니까 취리히 근처 저 ‘불타오르는 눈 덮인 산들’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바다에 갔다 온 이야기도 들었는데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그들이 도 다른 세계 즉 붉게 타오르는 눈 덮인 산들의 다다를 수 없는 영광으로부터 그리고 너무 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다로부터 온 존재들인 양 나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목사요 나는 그보다 더 가난한 목사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구두 바닥은 구멍이 뚫려, 젖은 양말을 신은 채 여섯 시간이나 수업을 받으며 앉아 있어야 했다.

나는 나의 부모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걱정과 염려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으나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로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머니가 좀더 강하게 보였다.

 

59

사태가 아주 나빠질 때는 다락방에 있는 나의 은밀한 보물을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를 테면 내가 쓸쓸할 때도 나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비밀, 즉 프록코트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인형과 돌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인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59

‘주 예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차츰 불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열한 살 때부터 신의 관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순이 없는 듯이 여겨졌으므로 어쨌든 나를 만족시켜주었다. 신은 나의 불신감으로 어수선해지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신은 예수보다 훨씬 독특한 존재로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은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사실 신은 아주 힘센 노인과 같은 그런 존재였으니 무척 흡족하게도 “너희는 어떤 형상이나 어떤 닮은 것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64

무엇보다 나는 신비로운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세계에는 나무들, , , , 짐승들,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 등이 속해있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그 세계로부터 멀어져 가면서 어렴풋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나는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빈둥빈둥 보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막연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 무렵 나는 자연으로 빠져들면서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는 누구냐?

68

이 시기에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체험을 했다. 그 일은 내가 살고 있던 클라인 휘닝겐에서 바젤까지 가는 긴 등굣길에서 일어났다.

한 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안개의 벽 같은 것이 나의 등 뒤에 있었고, 그 벽 너머에는 아직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나에게 내가’ 생겨났다. 이전에도 내가 존재하고는 있었으나 모든 일이 단지 우연히 일어났을 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이제 여기 있고, 내가 이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84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85

저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복된 평온함이 찾아왔다. 돌이 온갖 의혹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 천 년 동안 살아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자연과 사원

87

그 후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우리의 토론은 늘 만족스럽지 못하게 끝나버렸다. 그 토론들은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89

자연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자기 표현으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하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하느님의 형상이 단지 인간하고만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높은 산, , 호수, 아름다운 나무, , 그리고 동물들이 인간들보다도 하느님의 속성을 훨씬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인간들은 우스꽝스러운 의상을 걸치고 비열함과 어리석음, 허영심, 위선과 혐오스러운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90

그러한 세계 옆에는 또 다른 영역이 있었다. 그 영역은 사원과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도 변화되었다. 그는 우주 전체의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 자신을 잊을 정도로 다만 놀라고 경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그 ‘다른 인물’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느님을 숨어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개인적인 비밀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마치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똑같이 창조의 과정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다.

 

91

나의전생애에 걸친 제 1의 인격과 제 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제 2의 인격, 즉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 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두 인격의 어머니

96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 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 고독 속에서 신과 홀로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은 참으로 영적으로 의미 있는 순간이다. 인간의 영적 성숙이 이런 순간을 통하여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08

예수와? 그러나 그는 1860년 전에 죽은 한 남자였다. 왜 인간은 그와 일체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하느님의 아들’로 불렷으니, 그는 그리스의 영웅들처럼 반신(半神)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와 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기독교라고 불렀으니 내가 하느님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악의 기원

113

자아’라는 것은 나로서는 어쨌든 파악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였다.

첫째로, 나에게는 자아라는 요소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측면, 즉 제 1의 인격과 제 2의 인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저런 형태든 자아는 뭔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기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기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겪었다. 자아는 유치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애정결핍이며 탐욕스럽고 공정하지 못하며, 민감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며 그 외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유감스럽게도 자아는 덕과 재능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덕과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면 시샘하면서도 경탄했다.

 

116

하느님이 지선이라면 그가 창조한 세계와 피조물이 왜 이토록 불완전하고 부패하고 비참하단 말인가? 분명히 악마에게 침투당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마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었다. 나는 악마에 관해 읽어보아야만 했다. 악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116-117

어머니의 제 2의 인격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너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한 번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괴테의 훌륭한 최신판 전집이 있어 나는 거기서 <파우스트>를 찾아냈다. 그 책은 내 마음에 기적의 향유처럼 흘러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

 

121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악의 기원은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128

그 무렵 나는 제 1의 인격과 제 2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잘 보지 못하고, 2의 인격의 세계를 나 자신의 개인적 세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들과 끝없는 우주의 장엄한 세계의 숨결이 나에게 닿는 것 같았으며, 도한 오래 전에 죽었으나 아직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게 몰래 방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급전(急轉) snaps(신성한 힘)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129

책을 읽고 도시생활에 익숙해질수록 내가 지금 현실로 인식해가고 있는 것들은 시골에서 나와 더불어 성장해온 세계상과는 다른 사물의 질서에 속한다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그 세계상은 작은 마을의 강과 숲, 동물과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 마을은 햇빛이 비치고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고 모호한 것들로 가득한 밤의 어둠에 감싸이기도 했다.

 

130

사람들은 자신들이 질서 있는 우주 속에 신의 세계 안에 온갖 것이 태어나고 온갖 것이 이미 죽어있는 영원 속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131

‘신의 세계’가 지상에 나타난 것은 일종의 직접적인 메시지에 의해 식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관찰하는 자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창조자의 어깨너머로 그가 어떻게 장난감이나 장식품을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이 바라본 것과도 같았다. 이에 비해 인간과 정상적인 동물들은 자립한 신의분신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돌아다니며 서식처를 정할 수 있었다. 그 반대로 식물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장소에 묶여 있었다.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표현했다. 나무들은 트기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의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158

식물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오직 성장하여 꽃을 피우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숨겨진 비밀스러운 의미, 일종의 신의 뜻이었다. 식물은 외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철학적인 경탄을 가지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생물학자들이 식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흥미있기는 했으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식물은 분명히 순진무구한 신성한 상태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식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었다.

 

131

이와 같은 인상은 내가 고딕양식의 대성당들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심화되었다. 우주의 무한함, 의미와 무의미의 혼돈, 주관 없는 의도성과 기계적인 법칙의 혼란들이 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돌은 존재의 끝없는 신비, 영혼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돌과 나 자신이 서로 유사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 만물에 다 신성이 깃들여 있음을 느끼다. 식물에 대한 신성에서 무생물인 돌까지 의식의 영역이 확장되어 돌에 스민 신성을 감지한다. 생사를 초월하여 깊은 세계를 탐구하는 그 정신이 폭이 실로 광대하다.

 

138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147-148

단 한번 나도 방학 동안에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다. 열네 살 때였다. .....나의 지위상승은 내가 숙소 사람들과 함께 소풍에 같이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데서도 증명되었다. 이런 기회에 한 번은 우리가 증류주 제조장을 방문해서 술을 시음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고전의 구절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그 음료는 술이므로.......

 

나는 다양한 작은 술잔에 너무나 고무되어 예기치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의식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나와 타인, 1의 인격과 제 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당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 ‘기고 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술에 취했다. 그것은 마치 환희에 넘치는 깊은 생각의 바다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격렬한 파도의 너울거림 때문에 나는 눈과 손과 발로써 모든 단단한 대상을 부여잡고 출렁이는 거리에서 기울어지는 집과 나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했다. 이 경험의 결과는 괴로운 편이었으나 그것은 아름다움과 감각에 대한 하나의 발견과 예감으로 남았다.

=> 융이 처음 술과의 조우 장면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술을 좋아하는 것도 판에 박힌 일상에서 전혀 생소한 세계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융이 발견한 것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해 주는 것이 술이 미덕이 아닐지.

 

157

환상에 빠져 수개월을 매우 즐겁게 지내다가 결국 싫증이 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환상이라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백일몽을 꾸는 대신 점토를 회반죽 삼아 작은 돌들을 가지고 성들과 정교하게 방어시설을 갖춘 광장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직도 세세한 부분까지 보존되어 있는 휘닝겐요새를 표본으로 삼았다.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170

나는 제 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 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172

나는 나 자신이 점점 더 제 1의 인격과 동일화되는 것을 느꼈으며, 이러한 상황은 훨씬 더 포괄적인 제 2의 인격의 단순한 일부임이 판명되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더 이상 제 2의 인격과 동일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2의 인격은 사실 일종의 유령이었다. 세계의 어둠에 맞설 만큼 힘이 커진 혼이었다.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부분을 나의 개인적인 용어로 ‘제 2의 인격’이라고 일컬었다. 그것이 한낱 개인적인 흥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 서양종교에 의해 입증되었다.

서양종교는 분명 이러한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2천 년 전부터 내적 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193

나는 철학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던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200

니체는 인생 후반 그러니까 중년을 넘기고서야 제 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거기에 비해 나는 제 2의 인격을 이미 소년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니체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아르헤톤에 대해 마치 만사가 순조로운 것처럼 순진하게 조심성 없이 말했다. 나는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좋지 않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다른 한 편 그는 너무나 천재적이어서 아직 젊은 나이에 바젤대학 교수로 부임해 왔다. 자신 앞에 무엇이 가로놓여 있는지 예기치 못한 채 말이다. 그는 바로 그 천재성에 힘입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제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는 제 2의 인격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에다 그것을 거리낌없이 앞뒤 재지도 않고 밝혀버렸다. 그는 자신이 겪은 황홀경을 함께 느끼고 ‘모든 가치의 전도(顚倒)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리라는 유치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

말로 전할 수 없는 신비에 빠진 상태에서 니체가 온갖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우둔한 대중에게 그 신비를 선전하고자 했을 때는 그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니체는 과장된 문체, 도가 지나친 은유, 환희의 송가를 떠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는 줄타는 광대로서 자기 자신의 한도를 넘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알지 못했고 신들린 사람으로 주변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211

내가 내과의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같은 하잖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게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216

반 년 동안 나는 정신병원 생활과 그 정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나 자신을 수도원 벽에 가두고는 정신의학적인 사고방식을 익히려고, 정신의학 잡지 50권을 처음부터 통독했다. 나는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221

취리히 대학 정신병원인 부르크휠츨리에서의 수 년 간은 나의 수련기간이었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주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하는 화급한 의문이었다.

 

246

그녀의 환상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소녀시절에 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소위 신화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근친상간은 전통적으로 왕과 신들의 특권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상태, 즉 정신병이 생기고 말았다. 그녀는 이를 테면 지구 밖 세상에 존재하며 인간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멀리 우주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날개 달린 악마를 만나게 되었다.

 

꿈의 분석

249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어떤 분석에서는 내가 아들러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다른 분석에서는 프로이트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249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오늘날에는 예전과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변이(變異)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254

그는 분석자가 되기를 원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 스스로 실험 도구가 되어 자신을 재료로 자기의 이론을 입증한다는 것은 변경연의 핵심 원리이기도 하다.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261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참고)원형( Archetype) : 개인무의식 차원과는 상관없는 원시성, 고태성(古態性)을 띠는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한 지적 개념이 아니라 미증유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근원이다. 시간과 공간, 지리적 조건, 인종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성이 원초적 조건들이다. 시공을 넘어 보편적이고 반복적인 체험을 항상 재생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가능성, 혹은 그런 가능성의 틀이다. 원형은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신화와 민담의 세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270

우리 시대에 이와 같이 마음의 분열로 희생된 자들은 단지 ‘스스로 택한 신경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이러한 분열을 자신에게서 깊이 느끼고 있는 의사는 무의식의 심적 과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심리학자가 빠지기 쉬운 자아팽창의 전형적인 위급상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271

영혼은 개념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271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272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276

1900년에 나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었다. 1903년 다시 한 번, 꿈의 해석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치료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 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282

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욕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강압적인 형상을 슬쩍 바꿔 넣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것은 원래의 것에 못지 않게 성질이 급하고 요구가 많으며 강압적이고 위협적이며 도덕적으로도 양가성이 있었다. 심리적으로 더 강력한 공포의 대상에 신적이거나 악마적인 속성이 부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에게는 ‘성적 리비도(Libido) 가 숨은 신’의 역할을 맡게 된 셈이었다.

 

286

운명의 손에 넘겨져 꼼짝할 수 없게 된 니체는 스스로 초인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87

신성한 힘의 체험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일종의 신이면서 악마라는 심리학적인 진리를 좀더 고려했다면 생물학 개념의 한계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도 인간존재의 바탕을 좀더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아마도 감정의 과잉으로 세계의 가장자리 밖으로 나가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288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295

(프로이트)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때의 그 말이 나의 기억에서 영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말 속에 이미 우리 관계의 종말이 예시된 셈이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300

나는 꿈을 배후에 그 의미를 숨기고 있는 ‘가면으로 이해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식물이 가능한 한 자라나려 하고, 동물이 가능한 한 먹이를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306

꿈이 성배기사들과 그들의 탐구세계를 그려낸다는 것은 나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그 세게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 자신의 세계였으며, 프로이트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나의 전 존재는 진부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도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309

대개 근친상간은 고도의 종교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거의 모든 창조신화와 그 외 수많은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문자주의 해석에 집착하여 상징으로서의 근친상간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프로이트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311

()은 지하세계의 영()의 표현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 영은 ‘신의 또 다른 얼굴’ 즉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이다. 지하세계의 영의 문제는 연금술의 사고체계를 탐구한 이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래 이것에 대한 나의 관심은 프로이트와의 초기 대화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가 성의 현상에 대해 얼마나 깊이 감동하는가를 느꼈다.

 

311

프로이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의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무의식적 정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313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 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신화와 환상

316

“그렇소.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오.”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중단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319

이런 식으로 나는 온갖 무덤을 거쳐 12세기 시체가 있는 데까지 왔다. 그는 사슬갑옷을 입은 십자군으로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누워 있었다, 마치 나무에 조각한 모습처럼 보였다. 나는 한참 그를 지켜보면서 그가 정말로 죽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왼쪽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 꿈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무의식에는 고대 체험의 유물이 남아있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꿈과 비슷한 꿈들과 무의식의 실제체험을 통해 나는 이 유물이 결코 죽은 형태가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에 속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나는 내 후기 연구에서 이 가정을 증명했으며 여러 해가 지나면서 이것으로부터 원형설이 발전되어 나왔다.

 

326

나는 최선을 다해 환상을 기록해나갔다. 그리고 환상이 생기게 된 정신적인 전제들도 표현하려고 노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아주 서투른 말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나는 환상을 내가 지각한 대로 ‘장중한 언어’로 꾸미기 일쑤였다. 그것이 원형의 양식에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원형은 열정적으로 말하고 심지어 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 언어양식은 나를 당황하게 하고 기분을 언짢게 했다. .....나는 무의식이 스스로 선택한 양식으로 모든 것을 받아쓰는 수박에 없었다......처음부터 나는 무의식과의 대면을 내가 나 자신에게 부과한 학문적인 실험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그것은 나에게 부과된 실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어려움들 중 하나는 나의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필레몬과의 대화

334

나의 환상 속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엘리야와 살로메 외에 제 3의 형상, 크고 검은 뱀이 있었다. 신화에서 뱀은 영웅의 대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영웅과 뱀의 결합과 관련해서는 많은 근거자료가 있다. 예를 들어 영웅은 뱀 눈을 가지고 있다든가, 영웅이 죽은 후에 뱀으로 변하여 숭배를 받는 다든가, 뱀이 영웅의 어머니라든가 하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나의 환상에서도 뱀의 출현은 영웅신화임을 가리키고 있다.

 

334

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현상이다. 그녀는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이다. 엘리야는 지혜로운 노인 예언자의 모습으로 인식의 요소를 나타내지만 살로메는 애욕의 요소를 나타나고 있다. 두 형상은 로고스와 에로스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35

필레몬(신화 속의 인물)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다른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환상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내가 의식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말했다.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그러는 것을 정확히 지각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씩 내 운명을 내가 만들어가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끌려간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도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인가?

 

336

그는 내게 설명하기를 내가 나의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의 견해로는 그 생각들이 숲속의 짐승이나 방 안에 있는 사람, 공중의 새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당신이 방안에서 사람들을 본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 사람들을 만들었다거나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만든 책임이 있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츰 나에게 정신적인 객관성. ‘마음의 진실’을 깨우쳐 주었다.

 

필레몬과의 대화에서 나와 내 사고의 객체 사이에 있는 차이가 분명해졌다. 그는 이를테면 객관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이 아닌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것은 심지어 나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것들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심리학적으로 필레몬은 탁월한 통찰을 나타냈다. 그는 나에게 신비로운 형상이었다. .......그는 나에게 인도인이 구루라 부르는 존재와 같았다.

 

340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엇다. 십중팔구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의 ‘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혼이 왜 ‘아니마’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Anima)라고 불렀다.

우선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아니마의 부정적인 측면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 있는 것이 느껴지는 그녀 앞에서 나는 좀 주눅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다르게 맺으려고 시도하여 내 환상의 기록을 그녀를 향한 나의 편지라고 간주했다.

 

참고)아니마(Anima):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다. 남성이 원해부터 지니고 있는 여성적 요소와 여성에 대한 경험의 총체가 무의식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다. 아니마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무결단적 성격, 무기력, 자발성 상실, 감정장애 등이 일어난다.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는 남성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341

매일 저녁 나는 글 쓰는 일에 매달렷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342-343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아니마는 긍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이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이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10년동안 나는 기분이 언짢고 안정을 잃었다고 느끼면 늘 아니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 무의식에 무엇인가 배열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아니마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또 무엇을 하려는 거요?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소? 나는 그것을 알았으면 하오!

조금 저항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본 이미지를 항상 도출해냈다. 그 이미지가 나타나면 불안이나 우울은 사라졌다. 내 감정의 에너지 전체는 그 이미지 내용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 이미지들에 관해 아니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꿈을 이해하듯 그 이미지를 가능한 한 잘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344

현실이란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무의식이 내게 가져다 준 통찰을 통해 나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과제의 요점이 되었다.

 

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하다보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재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345-346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긴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파우스트> 2부는 무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연금술 용어임)의 한 고리다.  또한 세계의 다른 극점을 향한 탐험여행으로 대부분 인기가 없던 모호하며 위험하기도 하다.

 

346-347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대한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과 직업은 내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기반으로 남아있었고 그것은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했다.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방황하고 침체되어 있던 때이긴 했지만,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였다.

그러므로 나의 가족과 작업은 다행스럽게도 늘 현실감을 잃지 않게 했으며, 내가 정상인으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해주었다.

 

349

나는 영혼이 내게서 떠나 날아가는 환상을 기록했다. 그것은 나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영혼, 즉 아니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은 사자(死者)집단과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이것은 원시종족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소위 ‘영혼의 분실’ 현상과 일치한다.

 

351

내가 정신적으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은 다 초기의 명상과 꿈에서 나온 것이다. 1912년에 그러한 명상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거의 50년이나 되었다. 인생 후기에 내가 이루어놓은 것도 모두 초기의 체험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감정이나 이미지의 형태로 있었지만 말이다.

 

352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결국 무의식의 부정적 작용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자신의 인식을 윤리적 의미로 바라보지 않는 자는 권력원리에 빠지게 된다. 이로써 파괴적인 작용이 일어나 다른 사람뿐 아니라 이미지를 알고 있는 그 사람 자신도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무의식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353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난 내용들은 나를 이를테면 벙어리로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형상화하지도 못했다.  나 자신의 지적 상황이 의혹 덩어리 그 자체인 상태에서 젊은 학생들을 계속 가르친다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출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의 길을 쫓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 나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355

1918~1919년에 나는 피억류 영국인 수요소의 책임자로서 샤토드외에 있었다.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아침마다 노트에 작은 그림, 즉 만다라를 그렸는데, 그것은 당시 나의 내면적 상황과 연관된 듯이 보였다. 그 그림으로 내 정신의 변화를 매일 관찰할 수 있었다.

 

356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 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만다라 그림들은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자기, 즉 나의 전체성이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356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이제까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 일로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357

대략 1918~1920년에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분이다. 단일형의 발달도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시작단계에서나 있는 일이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중심을 향한다. 이와 같은 인식은 내게 확신을 주었고 차츰 내적 평안이 회복되었다. 자기의 표현인 만다라로 인하여 나로서는 궁극적인 것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361

내가 그 무렵 체험하여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 속에서 추출해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나 걸렸다.

 

최초의 환상과 꿈은 불에 녹아 흐르는 현무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단해져 돌이 되었고 나는 그 돌을 다듬을 수 있었다.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363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고)연금술이란? 비밀스러운 일련의 실험을 거쳐 연금술사가 얻은 영적인 계시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신기한 물질을 얻는 것, 고대의 대가들은 그것의 이름을 ‘화금석’ 또는 ‘현자의 돌’이라고 불렀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365

무의식에 관한 나의 작업은 오랜 기간이 걸렸다. 20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 환상의 내용을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런 증거를 찾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 생각을 증명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연금술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부족했던 역사적 기반을 나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367

연금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373

연금술에 대한 나의 작업에서 나는 괴테와의 내적인 관계를 보게 된다. 괴테의 비밀은 그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원형적 변환과 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파우스트를 필생의 역작, 또는 신성한 작품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생애는 이 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동하는 개체로서 초개인적인 과정이며 원형세계의 위대한 꿈이라는 것을 인상 깊게 지각하게 된다.

 

374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즉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모든 것은 이러한 중심점에서 설명되며 나의 모든 연구는 바로 이 주제와 연관된다.

 

377

내가 심리학을 위해 이루려고 한 것은 자연과학영역의 일반적인 에너지론과 같은 그러한 통일성이었다. 나의 저서 <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에서 내가 목표로 삼고 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컨대 나는 인간의 본능을 에너지과정의 여러 표현으로 여기며 열이나 빛들과 유사한 힘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자가 모든 힘을 이를테면 열에서만 끌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 역시 모든 본능을 권력이나 성의 개념 따위로 분류할 수 없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초기에 범한 오류였다.

 

성배전설과 동물상징

388

신들의 동물형상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들이 초인간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 이하의 삶의 영역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나타낸다. 동물들은 말하자면 신들의 그림자이며 그 성질 자체가 밝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작은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자신이 물고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혼의 치유가 필요한 무의식적인 본성을 지닌 심령들이다.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특기할 일은 꿈에서 결정적인 활동이 죽은 자에 의해 죽은 자에게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즉 의식너머의 세계, 무의식에서 그런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395

세계소멸의 관념은 이미 부처에 의해 그 단초를 갖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이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끊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은 소멸된다.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399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401

학문적 탐구를 통해 나는 차츰 나의 환상과 무의식 내용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다.

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나 자신이 인식들을 이를 테면 돌에 표현하거나 돌로써 고백해야 했다. 내가 손수 볼링겐에 지은 탑이 그 일의 시작이었다. 허무맹랑한 착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나는 실행에 옮겼고 그것은 나에게 깊은 만족을 주었을 뿐 아니라 큰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403

두 번째 탑 모양의 구조물을 정식 탑에 덧붙여 세웠다. 나는 이 두 번째 탑에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을 정했다.

외딴 방에 나 혼자 있다. 나는 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아무도 내 허락 없이 그 방에 들어올 수 없다. 그곳은 사색하고 환상에 몰두하는 은신처였는데, 대개 환상은 매우 불쾌한 것들이었고 사색은 고통스러웠다. 그곳은 영적 집중의 장소였다.

 

404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즉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미리 예감했던 것의 실현, 즉 개성화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청동보다도 오래 갈 기억의 징표였다

 

405

때때로 나는 내가 풍경과 사물 속으로 퍼져 들어가 각각의 나무속에, 출렁이는 파도 속에, 구름 속에, 오고 가는 동물 속에, 그리고 그 밖의 사물 속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405

탑에는 1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온갖 것이 생성되어 성장하였고, 그것들은 모두 나와 연합되었다. 모든 것은 그의 역사와 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 배후의 공간 없는 영역을 위한 공간이 있다.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옛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볼링겐에서는 고요함이 나를 에워싸고 사람은 ‘겸허하기 그지 않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산다.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들, 그에 따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여기서는 창조의 고통이 완화되며 창조성과 유희성이 거의 하나로 어울린다.

=> 융은 십 년이 넘도록 지은 볼링겐의 집은 그의 성소였다.  살며 사색하고 쉬고 치유 받는 회복의 장소이자 창조의 산실이기도 했다.

 

409

사람들에게 무의식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인상적인 경험이다.

 

카르마

417

내가 석판에 족보를 새길 때 조상과 이어져 있는 숙명적인 연대성이 뚜렷이 인식되었다. 나는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Karma)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 같이 늘 여겨진다.

 

418

이런 물음들이 그 성격에 있어 어느 쪽이 더 개인적이고 어느 쪽이 더 보편적(집단적)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게는 보편적인 쪽이 다루어야 할 사례로 여겨진다. 집단적인 문제가 집단적인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을 때는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 정신영역에서 뭔가 혼란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는 개인적인 영역이 장애를 받고 있지만, 당연히 일차적이고 보이는 장애도 오히려 이차적일 수 있고, 사회분위기의 참을 수 없는 변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례에서는 장애의 원인을 개인적인 환경에서 찾을 게 아니라 도리어 집단적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정신요법은 지금까지 이런 사정을 너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는 처음에는 인격의 이분화를 당연히 나 개인의 문제이며, 책임으로 여겼다. 파우스트가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고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이분성의 원인을 규명해주지는 않았다. 파우스트의 통찰은 바로 나의 경우에 맞는 것 같았다.

나는 환생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카르마라고 부르는 개념은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412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바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421

 옛 것이 한 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올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422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싸그라들고 만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하 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을 따라 가게 된다.

 

423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에 제약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다시 말해 무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조상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근원적인 즐거움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뒤지어 놓고 있는지, 혐오감으로 외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남게 된다. 우리의 내적인 평안과 만족은 개체를 통하여 인격화된 역사적 가족이 우리 현재의 덧없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거의 대부분 좌우된다.

 

424

볼링겐에 있는 나의 탑에서는 사람이 마치 수백 년을 사는 것처럼 산다. 그곳은 나보다 더 오래 남아있을 것이며 그 위치와 양식을 통하여 아득한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는 오늘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주 적다.....거기서 나는 ‘제2의 인격’안에 살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여행

425

내가 끝없는 시간의 연속과 그 가운데서도

거의 변함이 없는 존재의 모습들로 말미암아 깊은 감명에

여전히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내 회중시계가 생각났다.

그리고 유럽인의 가속화된 시간을 떠올렸다.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429

나는 말할 수 없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시기는 그들이 약간의 코란지식으로 도움을 받아 오랜 옛날부터 존재해온 원초적인 여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또한 그들을 위협하여 흩어지게 하려는 북방세력에 대해 방어를 하면서 그들 자신의 존재의식을 키워가던 때였다.

 

429

내가 끝없는 시간의 연속과 그 가운데서도 거의 변함이 없는 존재의 모습들로 말미암아 깊은 감명에 여전히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내 회중시계가 생각났다. 그리고 유럽인의 가속화된 시간을 떠올렸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는 이 사람들 머리 위에 위협적으로 드리운 불안하고 어두운 구름이었다.

그 사냥꾼은 다시 말해 시간의 신으로서 아직 영원을 연상케 하는 이들의 시간을 무자비하게 날과 시, 분과 초로 조각조각 잘게 쪼개게 될 것이었다.

 

431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짐을 가볍게 하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속력을 올리며 여행을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놓는다.

 

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452

인간의 제의적 행위는 신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응답이며 반응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이상의 것, 즉 적극적인 실현, 주술적 강요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의 압도적인 작용에 충분히 응답할 수 있으며 반대로 신에게조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개인을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닌 위엄에까지 이르도록 고양하는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457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인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창조주의 몫으로만 들려왔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인생과 존재를 정확하게 계산된 기계, 즉 인간정신과 함께 예지되고 예정된 법칙에 따라 무의미하게 계속 가동되는 기계라고 여기고 있음을 생각지 못한다. 그와 같이 암담한 태엽장치 식 환상에는 인간과 세계와 신의 드라마가 없다. 거기에는 새로운 해안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날‘이 없다. 단지 계산된 황량한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477

내 앞의 작은 계곡 깊은 곳에 흑녹색에 가까운 어두운 밀림지대가 있고 그 너머 계곡 건너편에 고원 가장자리가 솟아 있었다. 처음에는 밝음과 어둠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다가 모든 것이 빛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빛은 계곡 구석구석을 온통 환하게 밝혔다. 지평선은 저 너머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떠오르는 빛이 차츰 이를 테면 몸 속으로 파고들어 몸 자체가 안에서부터인 듯 밝아지며 결국은 채색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모든 것은 번쩍이는 수정이 되었다. 방울새가 지평선을 맴돌며 지저귀었다. 그 순간 나는 어느 사원 안에 들어와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것은 하루 중에서 가장 거룩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장엄한 광경을 식을 줄 모르는 감격으로 아니 더 낫게 표현한다면 무궁한 황홀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479

빛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다. 그 순간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순간의 원초적 체험이다. 우리가 태양이 신이라고 생각할 때 이미 그 체험은 상실되고 망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밤이 이제 지나간 것이 기쁩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단지 합리화에 불과하다.

 

479

사실은 자연의 밤보다는 그와는 전혀 다른 어둠이 그 당을 짓누르고 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수백만 년 동안 언제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했던 정신적인 원초적 밤이다. 빛에 대한 동경은 의식에의 동경인 셈이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488

나는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모두 피했다. 내가 그들을 피한 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진리로 만족해야만 했기 때문이며, 나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자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진리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나에게 도둑질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의 지혜 는 그들에게 속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이 나에게 속할 뿐이다.

 

490

사람들이 악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면 선 역시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나의 선’이 무엇이냐 혹은 ‘나의 악’이 무엇이냐 즉 무엇이 내게 선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악으로 보이느냐를 의미할 뿐이다.

 

491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 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 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495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만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부처는 인간의식의 우주진화론적인 위엄을 파악하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누군가가 의식의 빛을 꺼버린다면 세계는 무()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510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곳을 지배했던 정신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 충격을 받을 때, 그리고 거기 있는 성벽 잔해와 둥근 기둥 하나가 내 눈에 어제 막 새롭게 인식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법이다. 이미 폼페이에서 예기치 못한 사물들이 인식되었고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물음이 제기되었다.

 

환상들

511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516

나에게 남아있는 그것이 발 나9자아)라고 말이다. 나는 이를테면 남아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살되고 빼앗기거나 약탈당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도 했으나 한 순간 그런 느낌도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이 여겨졌다. 하나의 기정사실만 남았다. 이전의 일들과 다시 어떤 연관도 맺지 않고 말이다.

 

517

내가 살아온 인생은 자꾸만 시작도 끝도 없는 역사처럼 여겨졌다.

 

융합의 신비

525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527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 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529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개어나 생각했다.

,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꿈과 예감

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 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534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540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공간도 시간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다.

 

542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가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547

사후에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의식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 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있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556

죽음의 야만성과 전횡성은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느님도 없고 정의나 선도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은 이를 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에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

 

단일성과 무한성

560

재생의 관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카르마의 관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한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한 인간의 인생이 시작되도록 한 운명의 결정이 전생의 행위와 업적의 결과라면 여기에는 개인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 그런데 다른 경우 카르마가 이를 테면 출생에 의해 묶인다면 개인적인 연속성 없이 다시 구체적으로 생성될 것이다.

 

561

내가 살아가면서 감당하고 있는 카르마가 내 전생의 결과인지 혹은 내 속에 유산을 모아 남겨준 조상의 소산인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나도 답을 잘 모르겠다. 내가 조상들의 인생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의 인생을 다시 구현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옛날에 한 번 특정한 인격으로 살았고, 내세에서 이제 해방을 꾀할 수 있을 만큼 된 것인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563

카르마의 문제는 개인적인 재생이나 영혼의 윤회문제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재생에 대한 인도인의 신앙고백을 ‘자유롭고 빈 마음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들으며 나의 경험세계에서 재생의 경향을 보여준다고 당연히 생각될만한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지 어디서든 어떻게 해서든지 둘러보며 살핀다.

 

564

우리가 저곳(저승)에서도 이어지는 삶을 가정한다면 우리는 정신작인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삶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이렇게 이미 몰두하고 있는 내적 표상들은 저승의 존재에 관해 온갖 신화적 사변의 자료를 제공해준다.

 

572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573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오로지 삶의 공간을 넓히고 합리적인 지식을 어찌해서든지 증가시키는 데만 관심을 두는 시기에는 자신의 단일성과 유한성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단일성과 유한성은 동의어다. 이것이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엇다. 그렇게 되면 의식화라는 것도 없다. 단지 군중과 정치권력의 열광에서 표출되는 그런 것과 망상적 동일시가 있을 뿐이다.

 

만년의 사상

575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580

중독대상이 알코올이든 아편이든 또는 이상주의든 그 어던 형태의 중독이든 똑같이 모두 악에서 나온다. 우리는 선악의 대극에 더 이상 이끌려서는 안된다......악의 현실성을 인정하게 되면 선은 당연히 두 대극의 한쪽으로 상대화된다.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선과 악 (또는 불완전함)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가치가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며 특유한 심리적 결과가 뒤따른다.

 

588

50년도 더 지난 이전에 나는 집단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중심상징으로 보이는 이와 비슷한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만다라 상징이다. 그러한 발견을 시론적으로 1929년에 처음 출간하기까지 <황금꽃의 비밀>이라는 책으로 10년이 넘도록 나는 주제를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게속 관찰기록을 수집했다. 만다라는 원형상이며 그 존재는 수천 년에 걸쳐 확인되었다. 그것은 ‘자기의 통합성’을 나타내거나 심적 토대의 통합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화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안에 육화된 신성의 출현이다. 뵈메의 만다라와 대비하여 현대인의 만다라는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분열에 대한 보상이나 선취된 분열극복을 묘사하고 있다.

 

591

우리는 미지의 것, 생소한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꿈이나 어떤 착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들을 사람들은 마나, 데몬, 신 도는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무의식은 흔히 쓰는 말이므로 더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경험 가능한 것, 다시 말해 우리이게 익숙하고 가까이할 수 있는 일상적인 현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무의식은 사뭇 중립적이며 합리적인 개념이어서 상상과정에서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 개념은 다남 학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냉정한 관찰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요구를 하지 않으며 초월적 개념들보다 훨씬 적합한 편이다.

 

597

우리가 우주에서의 인간실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면 다시 말해 마음의 통합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인 그러한 관념을 가진다면 신화적 진술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는 셈이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613

정신은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신은 절대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고유한 양극성이 진술의 상대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615

정신이 늘 자신에 관해 진술한다 해도 결코 자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모든 이해와 모든 이해의 대상은 정신적인 그 자체이며 그만큼 우리는 온통 정신작인 세계에 어쩔 도리 없이 갇혀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장막 뒤에서 우리에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나 파악되지는 않는 절대적 객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할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618

고대의 에로스는 의미심장하게도 일종의 신으로 그 신성이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이해되거나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619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듯에서 우주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620

사랑은 그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회고

621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다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되었다.

 

비밀로 가득 찬 세계

623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624

소년이었을 때 나는 외로움을 느꼈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던 것을 알고 잇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대부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라들에게는 황당무게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625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게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626

나는 언제나 내적인 법칙을 따라야 했다. 나에게 부과된 그 법칙은 내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 법칙을 항상 따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일관성 있게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9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 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존의 견고함과 내 존재양식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편집자의 말

633

“나에 관한 책은 항상 일종의 숙명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나 자신으로 하여금 미리 어떻게 쓰도록 한다든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자서전도 지금 벌써 처음 내가 생각했던 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을 하루라도 중단하면 그와 동시에 불쾌한 신체적 증상이 따라온다. 그러나 내가 그 작업을 하면 금방 그 증상은 사라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진다. “

 

639

융은 자기 자신을 그 무엇보다도 의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치료에 있어서 종교적인 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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