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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00시 05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07.26 ~ 1961.06.06)

칼 구스타프 융은 스위스 콘스탄스 호숫가의 작은 마을 케스빌에서 개신교 목사 요한 폴 아킬레스 융과 그의 아내 에밀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융은 유년기의 아버지를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어머니는 결혼생활의 실망으로 우울증을 얻게 되고, 여러 달 동안 병원 생활로 인한 부재한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하여 우울증을 이어가게 된다. 이와 같은 부모의 특성은 융이 '사랑'에 대해 미심쩍은 느낌을 가지게 만들고, 자기 내부의 이중성을 형성하게 만든다.

어느 날 융은 학교 등교 길에서 지금 여기에 ''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 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주도적으로 자아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용기를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중학교 시절 그는 그의 내면에 다른 또 하나의 인격이 들어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또 다른

인격들에게 이름을 붙였는데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인격을 제1 인격, 실제의 모습을 제2

인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융은 전 생애에 걸쳐1의 인격’(외적인격)2의 인격’(내적인격)

간의 대립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 시절 그는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었으며 많은

종교 서적도 읽었다. 그러면서 그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정말 천재소년임에 틀림없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어려운 철학 책들을 가까이 하며, 또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이 많았었다니

말이다. 또한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는 자연과학 및 종교 현상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그의 호기심 많고 분석적인 성격은 사물을 의심하고 진지하게 바라보게 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

, 훗날 그가 개척한 정신 분석심리학이 확립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융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신학자가 되지 않았다. 신을 믿었으나 신학에서는 피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대해 누구도 확답을 내려주지 못한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그는 신학 대신 의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정신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1900 12월 융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1857~1939)를 보조하는 보조의사이자 연구원이 된다. 그는 이 시기부터 활발하게 정신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당시 정신의학은 정신과 환자들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융은 정신과 환자들의 증상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탐색하면서 치료하기를 원했고 1903년부터 사람들의 연상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03년 스페인의 유명 시계 브랜드 IWC社의 상속녀인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하였다. 큰 부잣집 딸이자 식견과 교양이 뛰어났던 엠마는 융의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한편으로는 연구를 돕는 내조자였다. 그녀 덕분에 융은 큰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와 해로한다.

1904, 그는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단어를 통한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정신병자들을 치료하고자 하였다. 그는 단어 연상법을 통해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해 제기한 억압이론을 입증하고, 그것을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심리학에 대한 연구는 프로이트와 자주 비교된다. 세계대전을 겪었던 90년대 초반은 심리학에 대한 새로운 학설들이 태동되던 기간이었고 프로이트는 심리학을 이끌던 대학자였다. 1907년 융은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 있는 프로이트를 찾아가 게 된다. 이후 그들은 서로의 연구에 공감하며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융은 점점 더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1908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미국 보스턴 클라크대학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트와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다. 그는 이후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정의하며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적인 이론을 비판하였고 이는 프로이트의 진노를 산다. 결국 융은 프로이트와의 오랜 교류에도 불구, 그와 결별하는 수순을 밟는다.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의 독자적인 정신 분석학인 분석심리학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자신의 이론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융은 내면의 불확실성 속에 사로 잡혀 지내게 된다.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 시절 돌멩이로 집 짓기 놀이를 하기도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이 가진 치유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다. 꿈 속에서 만나는 많은 인물들의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썼다. 그러다 그 이미지들이 다른 이미지들과 더불어 각각 그림자, 아니마, 즉 자신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융은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결국 심리학적 요소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인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였고 이론화하였다. 그러나 유일하고 독보적인 이론을 만들어 낸 반면 빈약한 논거와 잘못된 인식에 치우쳐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세기 최고의 신화 캠벨의 사상과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많이 인용되었고, 몰입의 저자 미하이칙센트 미하이의 이론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그리고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바탕을 만든 대학자였던 융은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바젤 대학교의 의학심리학 교수로 재직하다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정신분석학적인 이론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고, 나 또한 그의 사상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진다.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9. 자기실현은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13.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실험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여,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잇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14.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외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빈약한 편이다. 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15.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6.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 말

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

기도 했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

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43. 일곱 살에서 여덟 살까지는 블록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탑들을 세우고 나서지진을 일으켜 무너뜨리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난다. 여덟 살에서 열한 살까지는 늘 전쟁그림,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포격을 가하고 해전을 벌이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연습장을 모두 잉크 얼룩으로 가득 채우고는 그 얼룩들에 대해 개발한 해석을 하며 즐거워했다. 내가 학교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얻지 못했던 놀이친구를 드디어 거기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44. 나는 물건들이 금방 커졌다가 금방 작아지는 불안한 꿈을 꾸곤 했다. 예를 들어 상당히 먼 거리에 작은 공 하나가 있다고 할 때, 그 공이 점점 다가오면서 엄청나게 커져서 숨통을 누르는 물건으로 변한다. 또는 새들이 앉아 있는 전깃줄이 점점 더 굵어져 내가 잠에서 깰 때까지 나의 공포도 커져만 간다.

- 나 또한 어렸을 적 매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벽이 내 가까이 다가오는 공포스러운 느낌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곤 했던 것 같다. 내 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46. 그 담 앞쪽에는 비탈이 나 있었는데 거기에 약간 솟은 돌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 돌은 나의 돌이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그 돌 위에 앉아 생각의 유희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대게 이런 것이었다. ‘나는 이 돌에 앉아 있다. 나는 위에 있고 돌은 밑에 있다.’ 그런데 돌도라고 말하며내가 여기 이 비탈에 누워 있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의문이 일어났다.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돌이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단 말인가?’

-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논하던 장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편으로 어린 나이부터

대해 알고자 노력했던 소년 융의 모습이 대단하다고도 여겨진다. 천직을 잘 선택하여 제대로

수행한 행복한 인생이다.

 

47. 나 자신의 불확실성은 기묘하고 매혹적인 어둠의 느낌을 동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돌이 나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몇 시간이고 돌 위에 앉아 돌이 나에게 내준 수수께끼에 사로잡혀 있었다.

 

49.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자문해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59. 사태가 아주 나빠질 때는 다락방에 있는 나의 은밀한 보물을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쓸쓸할 때도 나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비밀, 즉 프록코트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 인형과 돌을 간직하고 있는다른 인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나도 이러한 것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쉽사리 나의 감정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고 기운을 줄 만한 나만의 비밀은 무엇이 되면 좋을까?

 

60.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신은 아주 힘센 노인과 같은 그런 존재였으나 무척 흡족하게도너희는 어떤 형상이나 어떤 닮은 것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비밀이 아닌주 예수를 대하듯이 신과 그렇게 친밀해질 수는 없었다. 나의 다락방 비밀과의 어떤 유사성에 대해 어렴풋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61 아무도 나에게 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러한 의문을 조리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격양시켰던 것은 a=b, b=c이면 a=c가 된다는 그런 공식이었다. 확정된 정의에 의하면 ab와 다른 것을 가리키므로 별개의 것이며 b와 똑같이 취급될 수 없는 것이었다. C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등식을 다루는 경우에는 a=a, b=b 등으로 말해지는 것인 것, a=b는 즉각 거짓말이나 속임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 요즘 경제를 공부하며 내가 느끼는 감정이다. 소비자를 합리적 인간으로 가정하고 만들어진 많

은 공식 때문에, 나의 상식과 나의 추측은 오답이 된다.  

 

67.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그 후로 부모님이 나를 염려한다거나 동정하는 어조로 나에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70. ‘그래, 그러면 너는 누구냐? 너는 마치 자기가 대단하다고 내세우는 악동처럼 반응하고 있구나! 게다가 너는 그 사람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열두 살에 불과한 학생이지만,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인 데다 집 두 채와 멋진 말도 여러 필 가지고 있는 세력가요 부자이지 않은가.’

 

71. 마차는 그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때 무엇이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는지,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다. 동경이라고 해야 할지, 향수라고 해야 할지, 재인식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라고 말이다.

 

74. 그러자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비되는 듯한 느낌 속에서 단지 다음과 같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인가? 살인? 아니다. 그것일 수 없다.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 죄를 짓는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저주받는 운명이 된다면 부모에게는 몹시 비통한 일이다. 나는 부모가 그런 일을 당하도록 할 수 없다. 나는 어찌해서든지 더 이상 그것에 관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80. 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즉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용기를 끌어모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잇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 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각 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내가 하느님의 가차없는 준엄함에 쓰러져 복종하자 하느님의 지혜와 선이 나에게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계시를 체험한 것과도 같았다. 내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81.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하느님은 용기에 대한 그런 시험에서 악한 어떤 것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도록 당신의 전능함으로 이미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82.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한 일에 나 자신을 넘겨주는 셈이 된다.

  

85. 돌이 온갖 의혹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89.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 대신 그는 자연과는 친밀하게 지냈다. 대지, 태양, , 기후, 살아 있는 피조물, 그 중에서도 특히 밤과 꿈, 그리고하느님이 내 마음속에 직접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가까웠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을 따옴표로 묶어놓았다.

 

91. 나의 전생애에 걸친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109.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 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파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113.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자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겪었다. 자아는 유치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애정결핍이며, 탐욕스럽고 공정하지 못하며, 민감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며 그 외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117. 나는 파우스트의 행동방식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나로서는 파우스트가 그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좀더 현명하고 또한 더욱 도덕적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영혼을 그토록 경박하게 도박에 거는 것이 나로서는 유치하게 보였다. 파우스트는 분명히 허풍쟁이였다

 

121.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23. 나는 광범위하게, 어떤 체계도 없이 희곡, , 역사 그리고 나중에는 자연과학서도 읽었다. 독서는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기분전환이 되도록 해주었다.

 

128. ‘그럼,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너는 흥분하고 있구나. 물론 그 선생은 너의 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다. 다시 말해 너와 똑같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인 것이다. 너는 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믿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며 소박하고 한눈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131.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돌은 존재의 끝없는 신비, 영혼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돌과 나 자신이 서로 유사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잇는 것이었다.

 

144. 나는 교회와 거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마음이 편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르간과 합창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49. 점점 더 새로운 깊고 먼 산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다가 마침내 나는 산꼭대기에 서게 되었다. 산소가 희박한 익숙지 않은 새로운 공기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조망 가운데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173.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 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192. 그 당시 내가 읽은 캉디드(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소설로, 라이프니츠의낙천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쓴 작품임-옮긴이)의 글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 모든 것은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그 정원이란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어디서나 마음은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었으나, C.G. 카루스의 경우처럼 마음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없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들릴 수 있는 철학적인 사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묘한 관찰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195~196. 내가 정말 어떤 세계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 매우 진지하게 자문해보았다. 그것은 분명 도시의 세계였다. 그 세계는 시골의 세계, 즉 산과 숲과 강, 동물과 '신의생각(식물과 수정을 가리킴')들의 진실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6.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월감을 잔뜩 부추기고 근거 없는 비판, 공격적인 성향으로 유도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그 옛날의 의혹과 열등감, 침울, 다시 말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끊어버리려고 결심했던 악순환이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그 문은 오랫동안 철저하게 닫힌 체로 있었다. 나는 소 두 마리가 도깨비마법에 걸려 그 머리들이 동일한 고삐에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한 늙은 농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의 어린 아들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대답했다. "애야, 그런 건 말하는 게 아니란다."

사람들은 작가, 신문기자, 또는 시인 들에게만 그와 같은 무례한 행동을 허용할 뿐이다.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 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202.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210. 정신의학에서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211.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가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의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 문득 마법의 파도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싶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229. 내가 정신치료법을 시행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이 한 어머니가 정신이 병든 아들 대신에 나를 자기 아들로 삼은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 이렇게 도와줄 수 있는 길이기에 나 또한 자꾸 심리, 정신 쪽에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239. 나는 바베트와, 그와 비슷한 다른 환자들의 사례를 열심히 살펴본 결과, 이제까지 정신병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사실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이 돈' 것들만은 결코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나는 그런 환자들에게도 그 배후에는 정상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간주될 만한 '인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따금 이러한 인격 역시 주로 목소리나 꿈을 통해 아주 이치에 맞는 발언과 항변을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몸이 병들어 있는 중에도 이런 인격이 다시 전면에 나타나 환자를 거의 정상으로 보이게까지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정신의 변이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그런데 정신 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 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를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251~252. 치료자는 자기 자신이 환자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시로 해명해야 된다.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잇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253.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254~255.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60~261.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265. 가벼운 바람은 어디든지 원하든 대로 가는 영이다.

 

272.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288.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301.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는 무엇보다 요술이나 속임수, 그리고 어떤 자의적인 것도 끼어들 수 없다.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반대로 나날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302. 자연(본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삶들은 물론 신경증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그들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310.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잇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 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316.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320.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잇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 놀이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 크나큰 체념과 굴욕감의 고통이 따랐다.

 

322. 물론 나는 내 놀이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자문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는 종교의식을 치르듯이 작은 말들을 세워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내 신화에 이른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건축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한줄기 환상을 풀어놓았다. 그 환상은 나중에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내 인생에서 늘 되풀이되었다.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나는 나를 다시금 안정시킬 필요를 매우 절실하게 느꼈고, 돌과 접촉함으로써 도움을 얻었다.

  

326.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327.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327~328.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돕는 자가 환자 옆에 있지 않느냐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332.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도 그와 같이 하려고 했다.

나를 수행하여 그 암살을 주도한 갈색 피부의 원시인은 원시적 '그림자(그늘)' 화신이었다. 비는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334. 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형상이다. 그녀는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이다. 엘리야는 지혜로운 노인 예언자의 모습으로 인식의 요소를 나타내지만, 살로메는 애욕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두 형상은 로고스와 에로스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41.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347.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였다.

 

361~362.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봐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371. 내가 연금술적 사고 과정의 미궁에서 실을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내 손에 실을 쥐어주는 아리아드네(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테세우스를 미궁에서 구하기 위해 실을 사용한 여인-옮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382. 목수의 아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구주가 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 능력을 제대로 알고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을 나는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가능한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421. 옛 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한 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 정신-옮긴이)을 따라가게 된다.

 

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 (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옮긴이)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449. 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을 바라보니 이런 견해가 생겨나게 된 외적 이미지가 어떠한 것인가 알 것 같았다. 분명 여기서는 모든 생명이 산에서 나왔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명백한 것은 없다. 나는 그의 물음에서 ''이라는 말과 함께 고양되는 감정을 느꼈고, 그 산 위에서 거행되는 은밀한 의식에 관한 소문을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누구든지 당신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450~451.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1. 우리가 온갖 유럽의 합리주의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한쪽은 넓은 대륙의 초원으로 다른 한쪽은 잔잔한 바다로 기울어지는 저 고적한 고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옮겨 놓을 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세계 의식성을 버리고 그 대신 그 너머에 놓여있는 세계 무의식성과 더불어 끝이 없는 듯이 보이는 지평(시야)을 확보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견해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456~457. 그 짐승들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며 풀을 뜯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맹금의 침울한 소리 외에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까마득한 태초의 정적이요, 언제나 비존재의 상태로 있어온 듯한 세계였다. 나는 동반자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혼자라는 느낌을 가져보았다. 그때의 나는, '이것이 그 세계다!'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그 세계를 방금 이 순간 실제로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470. 나는 아직도 원시 그대로인 땅에서 '신의 평화'를 만끽했다. 나는 헤로도토스가 말한 '인간과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일찍이 그와 같이 관찰한 적이 없었다. 온갖 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전보도, 전화도,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그것이 '부기슈 심리학 탐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였다.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 나도 융처럼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좀 더 태초의 나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장소로 떠나보고 싶다.

 

477.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적도의 어둠 속에서 돌발적으로 첫 햇살이 섬광처럼 분출하는 순간이다. 그 생명력 넘치는 빛 속에서 밤은 사라지고 만다.

 

478. 그 무렵 나는 마음속에 태초로부터 빛에 대한 동경이 깃들어있다는 것과 태초의 어둠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절실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밤이 오면, 모든 것은 빛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깊은 우수의 음조를 띠게 된다. 이것은 원시인의 눈빛에 들어 잇고 또한 짐승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짐승의 눈에는 슬픔이 베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짐승의 혼인지 혹은 저 태초의 존재가 표현하는 간절한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

 

478~479. 이것이 아프리카의 분위기이며 그곳의 고독에 대한 체험이다. 그것은 태초의 어둠이며 모성적인 비밀이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태양의 탄생은 흑인들을 압도하는 경험이 된다. 빛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다. 그 순간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순간의 원초적 체험이다.

빛에 대한 동경은 의식에의 동경인 셈이다.

- 매일 아침을 이렇게 압도되는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하루를 보내는 더욱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490. 인도의 정신성이 선과 악을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490. 인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완전성이 아니라 니르드반드바 상태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며 거기에 걸맞게 또한 명상을 통해서 형상이 없는 공()의 상태에서 이르려고 한다. 이에 반해 나는 자연과 정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생한 관찰을 고수하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491.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요즘의 나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이다. 자꾸 철저히 참여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변명 속에 숨으려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는 내가 되려고 오늘 또 다시 노력해보아야겠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495~496.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52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 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는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536.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

 

539.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의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542.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신뢰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546.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551. 오직 이곳, 대극이 서로 부딪치는 지상의 삶에서만 일반적인 의식은 고양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과제로 여겨지는데 '신화화'가 없이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채워질 수 있을 뿐이다.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555. 그 대극은 죽음이 한 번은 자아의 관점에서, 또 한 번은 영혼의 면에서 표현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재앙으로, 악하고 무자비한 힘이 한 인간을 때려죽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558. 시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무의식은 지각만을 처리하는 의식에 비해 더 나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후의 생에 대한 우리의 신화와 관련하여 꿈이 주는 약간의 암시나 이와 비슷한 무의식의 자발적인 발현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561. 내가 먼 옛날에 살았고 거기서 지금도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어떤 물음에 부닥쳤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내게 부과된 과제를 풀지 못했으므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말이다. 추측하기로는, 내가 죽으면 나의 한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한 문제는 내가 생의 마지막에 빈손으로 서 있지 않은 것이다.

 

562. 나의 존재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565.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584.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589. 해결은 사람들이 그렇게 일컫는 바와 같이 '은혜'로 여겨진다. 해결은 대극의 대립과 쟁투에서 나오므로 그것은 대개 의식에 있는 것과 무의식에 있는 것이 섞인, 깊이를 알 수 없는 혼합물, 그러니까 일종의 상징이다.

 

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의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는 법이다.

 

596. 우리가 우주에서의 인간실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면, 다시 말해 마음의 통합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인 그러한 관념을 가진다면, 신화적 진술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는 셈이다.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598. 신의 경우 대극의 복합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실과 허구, 선과 악이 다 될 수 있다.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607. 자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호조치의 도움으로 수천 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든 대극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은 뜨거운 것과 찬 것, 높은 것과 깊은 것의 충돌 등에서 시작되는 에너지론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의식된 정신생활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는 이런 현상들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식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식화되기 시작하면서 우선 마나, 여러 신, 데몬 등과 같은 형상으로 투사되는 듯이 보인다. 그것들의 누멘이 인생을 결정하는 힘의 원천으로 여겨지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러한 형태로 관조하는 한 실제로 그러하다.

 

611. 어떻게 하면 나의 환자들로 하여금 건강한 바탕을 다시금 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지식이 요구된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인식한 것을 다른 분야로 옮겨와서 실제로 응용해볼 때 소위 발견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X광선이 물리학적 발견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의학에서 응용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잇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612. 예컨대 내가 역사적이거나 신학적인 통찰을 정신요번분야에 응용한다면, 물론 그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전문분야에 한정된 채 남아 있을 때하고는 다른 조명을 받으며 드러날 것이고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 그는 일찍이 통섭을 시도했었나 보다. 정신의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존경스럽다.

   

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 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정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623.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624.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 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결정해버렸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626. 사람들이 내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 한 나는 많은 사람과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나를 그들과 연결해주는 것이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록 사람들이 나에게 말할 것이 더 이상 없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을 배우느라 애를 먹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생동하는 인간성을 느끼도록 일깨워주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심리학의 마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나타났을 때뿐이었다. 다음 순간, 탐조등이 그 빛을 다른 곳으로 향하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627. 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동시에 훨씬 덜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다이모니온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9.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결정적인 가치나 무가치를 확증할 입장이 못 된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존의 견고함과 내 존재양식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믿느냐 하는 것은 기질의 문제다. 만약 무의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면, 더 높은 정신 발달 과정에서는 인생의 의미 충족성이 점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가 그렇듯이 아마도 양쪽이 다 진실일 것이다.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의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주 많다. 식물, 동물, 구름, 낮과 밤,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 등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렇다.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 내가 저자라면  

자서전이기에 친근감 있게 융을 접할 수는 있었다. 주제에 맞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간 순으로 정리된 것 또한 글의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어서 좋았다.  그의 일생을 접하며 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열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며 환자를 치료하기 이전에 그 자신이 직접 그러한 상황을 겪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존경스럽기 까지 하였다.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했다는 그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했다. 신화와 노자 이야기 등이 반갑기도 했고 죠셉 캠벨이 융의 영향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어서 왠지 친근했다. 그처럼 아프리카로 떠나 여행하고 싶어지기도 했으며 원시적인 태양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자서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이론은 어렵고 복잡해서 가끔 나의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아마 배경 지식이 부족한 탓이리라.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현재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소 아쉬웠던 점이 있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편집자와 옮긴이는 독자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고자 노력한 흔적도 보이기에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거나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지 않는 것은 나의 탓이 크다고 생각된다. 다만 나중에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조금 더 친근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옆집 할머니가 된 기분으로 말이다. 여전히 융은 자서전에서 조차 딱딱해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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