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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06시 46분 등록
빡빡한 일정이 끝나도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소풍날 아이처럼 눈이 저절로 반짝 떠졌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곳을 발견하게 될까? 여행은 놀이였다. 그것은 보물찾기였다. 우리는 토끼들의 땅이라고 불렸다는 스페인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는 토끼들처럼 지중해의 햇빛이 쏟아지는 이곳에 굴을 파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이리저리 방랑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늑대들-우리가 탄 버스에는 커다란 늑대가 그려져 있었고, los lobos(늑대 무리)라고 씌여있었음-을 타고 다녔다. 늑대잡이 가이드는 노래를 들려주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 땅이 키운 사람들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햇볕에 절여져 바삭거리는 올리브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돌로 된 산들 사이를 달려갔다. 한국을 떠날 때, 좌샘은 모든 여정들을 큰 종이에 멋진 글씨로 써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맨앞에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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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궁전은 라 사비카 언덕 위에 수수한 붉은 벽돌 성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랍어의 붉은 성 (al-qala, al hamra)에서 유래한 알람브라는 횃불이 비치면 붉게 빛나는 성벽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붉은색의 담이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성을 들어가자 성벽이 나타났다. 도시의 외곽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요새같다. 실제로 이 튼튼한 성은 9세기 군사용 요새로 출발했다. 성벽의 두께는 2미터에 달했고,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경비를 돌았으며, 대포가 상시 대기했고, 좁은 문을 들어서면 양 옆으로 지하 벙커가 있었다. 밋밋한 외부까지 왔을 때, 나는 조금 실망했다. 뭐야, 알함브라. 이정도였어? 나를 좀더 감동시켜 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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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현재 인구의 76%가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자신이 믿는 신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던 중세의 기독교도들조차 너무 아름다워 차마 부술 수 없었다는 다른 종교의 궁전. 이 가치를 제대로 보려면 약간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간단히 요약해 소개하자면, 스페인은 고대 시대부터 다양한 부족들이 문화를 이루고 살았다. 그 중 정확히 711년부터 750년간 이슬람 문화권의 지배아래 있었다. 몇 백년간 지속된 이 기간동안 기독교 세력이 야금야금  영토 확장을 하며, 1492년 마침내 마지막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시키면서 찬란했던 이슬람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영광의 중심에 알함브라가 서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멸망한 왕국 최후의 궁전이라니. 그럼 시대별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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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그라나다는 선사시대에 Ilbyr라고 하는 이름으로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로마가 침공하여 스페인 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하였을 때 여기에 도시를 건설하여 Illibris라고 하였다. 그라나다는 711년 무어인들이 알람브라 언덕에 살던 유대인의 도움으로  이 지역을 넘겨받았다. 당시 이 지역의 이름이었던 가에나타 하우드에서  그라나다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유래와 이름에 그다지 연관성은 없어보이는데 그렇다고 한다. 

이 그라나다라는 말 속에 스페인어로 석류를 뜻하는 의미가 담겨 있어, 그라나다에 가면 석류를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라나다로 향하는 도로에서는 넓은 석류 농장을 볼 수 있다. 석류라면 지하로 납치된 페르세포네를 유혹해 한 입 먹게한 것으로 그녀를 지하의 왕비로 머물수 밖에 없게 만든 탐스러움과 아름다움의 정점인 과실 아닌가! 이슬람에 적대적이었던 기독교 세력의 왕들조차 부술 수 없었던 숭고한 지상의 아름다움을 뽐낸 알함브라가 탄생하기 적합한 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슬람의 몰락은 서서히 다가왔다. 1212년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이슬람교도들이 패배한 이후, 1248년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격으로 세비야가 함락되었다. 이슬람 세력이었던 무하마드 1세는 이 군사적/정치적 혼란 속에서, 집시의 피를 받은 땅 그라나다에 나스르 왕조를 세웠다. 이 것이 이베리아 반도에 머물렀던 이슬람교도 최후의 왕국이다. (1248년에서 1492년까지 존속)  이슬람교도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처음으로 수도를 정한 곳이 코르도바라면, 그라나다는 이슬람교도 통치 3기, 즉 쇠퇴기를 장식하는 도시로서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250여 년 동안 존속했다. 

결국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유산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도 1492년에 카톨릭 왕 부처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로써 기독교도의 이베리아 반도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 완성되었다. 도시를 포위하는 동안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크리스토발 콜론(콜롬부스)을 맞이하게 되고 서인도 제도를 향한 여행을 시작하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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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주워섬기며 왕궁의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테두리 정도에 예쁘게 장식되어 있던 좁은 홀을 지나 거대한 문을 넘어 우리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내부 정경에 압도당해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우리는 왕국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천장과 벽과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계속 바라보아도 이 광경은 환상속에 있었다. 잡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현실이었다. 섬세하게 짜여진 레이스처럼 곱고 세밀한 무늬를 수놓은 돌과 치밀하게 잘라 붙여 만든 타일 장식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누가? 이걸 어떻게? 역사를 공부했든, 건축학을 공부했든 이 곳은 경이 그 자체다. 알함브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가서 보고, 현실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에 아예 멈춰버린 이 기이한 경험을 직접 느껴보아야 한다. 그제서야 나는 이 곳을 왜 지상의 모든 기쁨이 머물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하는 궁전이라고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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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금기 중에는 살아있는 동물은 조각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있다. 만약 조각해버리면, 나중에 그 조각가가 죽어 지옥에서 조각된 동물들이 달려와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한다. 신이 아닌 인간은 생기를 줄 수 없어 그는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 그래서 모든 장식은 수학과 기하학으로 정교하게 완성한 꽃과 덩굴만이 있다. 이 공간에 고요함을 더하는 요소다. 그런데 이 소재제한의 핸디캡을 이슬람의 건축가들은 훌륭하게 극복해냈다. 무늬에 그들 신의 말씀을 녹여넣은 것이다. 마치 여러 명의 무에진(이슬람 예배를 알리는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목소리와 음색의 기도로 이 성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또아리를 틀고 있던 뱀이 기어가듯 길게 이어지는 벽의 장식을 따라가다보면 아랍 문자를 읽을 수 없는 눈을 통해서도 신의 아름다움이 가슴까지 스며든다. 그것은 나나 함께 간 사람들에게 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정복군주 이사벨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벨 여황은 오랫동안 정복되지 않은 알람브라를 함락한 후 모두 부셔버리려 하였으나 그 내부를 보고 난 후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부수지 말 것을 명하여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었다. 훗날 칼르로스 1세도 알람브라 궁전의 측면을 허물고 르네상스 식으로 칼를로스 5세 궁전을 지었지만 궁전의 심장만은 허물지 않았다.

나사르 왕국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알함브라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 곳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자신의 백성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서야 알람브라 궁전을 떠날 수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떠나는 길 굽이마다 이 붉은 요새를 돌아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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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느새 헤네랄리페의 정원으로 왔다. 긴 직사각형으로 파인 연못, 그 위에 우아한 포물선을 교차시키는 아름다운 분수. 정원의 테두리에는 중앙 못과 이어지는 가느다랗고 섬세한 수로가 있다. 꽃잎을 띄운다면 운치있겠군. 그러고보니 둘러보면 주변에 싱싱하고 강렬한 원색의 꽃들이 잘 손질되어 놓여있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어디선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갈증을 채운다. 그야말로 든든한 오아시스다.  

알함브라의 아름다움은 온전히 지상의 것이다. 그것은 성당이나 교회처럼 천상의 것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일상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저 이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한다. 신이 지켜주시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는 태초의 약속을 상기시켜준다. 그 그릇위에 우리는 밋밋한 돌을 지상을 벗어날만큼 아름답게 탈바꿈시킨다. 하루를 통해 우리는 변화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노곤한 어깨를 두드려주며, 알함브라는 조용히 속삭인다. 다정하고 풍요롭고 조용하게 가꾼 정원을 거닐며 저녁 나절의 여유를 만족스럽게 느껴보라. 지상의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주변의 모든 것을 만나지만 동시에 모든 것과 결별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흘러가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흉내낼수 없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는 흘러가버리는 무상함도 그저 낭만적으로 들린다. 아름다운 인생이구나.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한들 어떠랴. 지금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 중 가장 아름다운 심성가닥만을 그러모아 행복한 지상 낙원을 인생에 실현시키리라. 무어인의 후손은 그렇게 알함브라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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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이 제법 알려졌을 즈음, 작곡자 타레가는 제자이며 애인인 콘차 부인과 이곳을 방문했다. 알바이신 언덕이 붉게 물들던 저녁,그는 콘차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날 밤 타레가는 슬픔에 젖어 달빛 속에서 콘차에게 보내는 연가를 작곡했다. 그 노래가 오늘날 기타 곡으로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그는 사자 열두 마리가 떠받치고 있는 분수와 여름 별장인 헤네랄리페 정원을 오가며 분수에서 솟아올라 떨어지는 물소리에서 음을 찾아냈다. 어둠을 뚫고 아스라이 먼동이 틀 때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실연의 아픔을 담아낸 것이다. 이 노래는 타레가의 알함브라다. 그의 조각된 기둥이며, 한땀한땀 붙인 색색깔의 타일이며, 분수의 포물선이다. 론도에 들렀을 때, 전망대 앞에서 허연 수염이 덥수룩한 거리의 할아버지 악사가 이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음악 속의 알함브라는 바닥에 잔잔히 깔린 슬픔까지도 성의 붉은빛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어딜 가든 물에 비친 알함브라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그렇다. 나는 상사병에 빠져버린 듯 하다. 그것도 아주 중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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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6 10:40:16 *.134.163.208

그 음악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사랑한  사람도  거절한  마음도  다  지나갔는데 아름다운 가락은  남아  먼  사람을  떨리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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