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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5일 15시 58분 등록

막걸리­_구달칼럼#20

 

장소는 빈대떡 신사란 코믹한 옛날 가요가 생각나는 보신각 종루 뒤 골목에 위치한 종로빈대떡 집이었다. 스페인 여행을 함께 다녀온 한 분이 번개를 친 것이다. 마침 가을 비도 솔솔 뿌리고 마음도 뒤숭생숭하니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다. 막걸리에는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함께 마실 친구일 것이다. 이에 열흘 간 동고동락한 격의 없이 어울린 여행 벗들이 딱 맞아 떨어졌다. 각종 전에 막걸리를 파는 이 집은 꽤 넓은 집임에도 벌써 빈 자리가 없어 한동안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의 말소리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소란하고 시중드는 언니들은 밀려드는 주문으로 인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킨 술 한 주전자를 거의 다 비울 무렵에야 겨우 주문한 녹두전이 나왔다.  이 집이 왜 이렇게 비 오는 날 대성황을 이룰까? 비가 오면 파전에 막걸리가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 비 오는 날 저녁 막걸리 한 잔에 시름을 실어 보내고 싶은 것은 많은 직장인들의 소박한 바람 중 하나이다.  비와 막걸리를 핑계 삼아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잔을 기울이며 정을 도탑게 하고픈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벌써 몇 순배의 막걸리가 노란 양철 주전자에서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세상이 비로 젖어들 듯이 천천히 막걸리의 흥취에 젖어 들었다.

 

저녁에 마시는 막걸리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마시는 푸근함이 있어 좋지만 험뻑 취할 위험이 있다.  그에 비해 점심 때 마시는 막걸리는 짧은 시간에 적당한 양을 마셔 막 기름 친 자전거를 타듯 리드미컬하게 남은 하루를 절도있고 기분좋게 운영할 수 있어 좋다. 한 주에 한번 점심을 같이 하는 지인이 있다. 그와 나는 우선 죽이 잘 맞았다. 먹성도 비슷하고 특히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서로 만날 이유가 있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좀 이른 점심시간임에도 단골 식당은 이미 만원 이었다. 그래도 우리 둘이 앉을 공간이 있을 만한 곳은 이미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주방 앞 2 인석인데 자리가 좁고 식당 도우미가 부산스레 드나드는 곳이라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다.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자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 집은 앉자마자 지짐이 제일 먼저 나온다. 둥근 소시지, 버섯, 호박으로 전을 붙인 것인데 이것과 막걸리는 천상의 궁합이다.  오늘같이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면 이 집은 불 난 호떡집이 된다. 특히 막걸리 전문점이라 전국의 막걸리가 이 집에는 다 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막걸리로 지평과 소백산 있는데 지평은 약간 단 맛이 있으나 소백산은 그리 달지 않아요. 둘 다 맛 보시고 선택해 보세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사장은 단골을 알아보고 모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새로 도착한 막걸리를 소개 시켜 주기도 하고 당도에 따라 선별하여 추천하기도 한다. 그러니 자연 이 곳은 나의 단골집이 되었다. 술은 역시 맛과 분위기 그리고 같이 마실 친구가 있어야 제 맛인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나의 막걸리 역사는 제법 된다. 가난한 학창시절 즐겨 들리던 곳으로 고갈비집이 있었다. 이는 부산 남포동 뒷골목에 몰려 있었는데 구운 고등어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는 주점이었다.  주말이면 삼삼오오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참새 방앗간처럼 들리던 추억의 막걸리 집이다.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길을 걸을 때면 그때 그 구수하게 풍기는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나는 듯 하다.

 

여자친구와 있을 때는 체통상 고갈비집은 갈 수 없었다. 그 때는 갈대가 우거진 을숙도를 즐겨 찾곤 했다. 낙동강 하구에 있는 하중도라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는 운치도 있었다. 그 곳에는 갈대로 엮은 발로 담장을 친 초막 주점이 하나 있었다. 주인은 서울 모 대학의 음악 교수 하던 분인데 폐결핵에 걸려 요양 차 이 곳에 내려왔다고 했다. 더욱이 음대 출신 그의 제자들이 손님 시중을 들면서 악기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고, 주변이 다 갈밭이니 여자친구랑 추억을 만들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이 집의 주 메뉴가 막걸리와 파전이었는데 갈밭 속에서 여자친구와 마시는 막걸리는 그 품격이 달랐다. 해질 무렵 갈밭 사이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이 시간이 영원하길, 마지막 배가 끊기길 간절히 바라곤 했다.

 

대학 졸업반 때인가 1212사태로 계엄령이 내리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갈 곳이 없어 동래산성에 들어가 몇 개월간 행글라이드 동아리 캠프에서 산 적이 있다. 낮에는 글라이딩을 하고 밤에는 산성막걸리와 함께 살았다. 당시 산성마을에서는 흑염소를 키우면서 특유의 걸죽한 산성막걸리를 빚었는데 도수가 꽤나 센 명품이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으며 십리길을 걸어가서 막걸리를 사서 캠프로 돌아 오던 중 찔금찔금 마시다 도착해 주전자를 보면 반 넘어 줄어있기 일수였다. 시절이 하수상한 젊은 한 시절, 막막한 때를 막걸리가 달래 주었다.

 

자전거를 타게 되면서 자전거 길가에 왜 그렇게 막걸리 집이 많은지 의아해 했는데, 막상 자전거로 길을 달려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전거와 막걸 리는 환상의 궁합이었다. 라이더에게는 물과 에너지가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막걸리가 딱 맞아 떨어졌다. 특히 나 같은 장거리 라이더에게는 일용할 양식의 일순위가 막걸리이다. 해갈과 에너지 보충은 물론 정서적 순화까지도 이 서민적 친구는 다 해결해 준다.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천상병, <막걸리>

 

막걸리를 마시면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가 생각난다. 시인에게 술을 배웠다면 나도 참 괜찮은 주당이 되었으리라. 막걸리가 일용할 양식이 라는 생각은 나도 시인과 같다. 다만 평생을 막걸리를 밥 대신 마시며 막걸리가 시로 화하는 시인의 경지가 부러울 뿐이다.

 

IP *.196.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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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6 11:04:11 *.134.163.208

시인에게 술을 배우지 않으셨어도 멋진 주당이시네요! 

강 하구 갈밭에서의 막걸리라니...

마음 맞는 친구분도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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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8 00:04:33 *.104.212.197
산성 흑염소 좋죠. 금정산 등반후 흑염소에 막걸리. 부산 이야기가 나오니 웬지 반가운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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