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앨리스
  • 조회 수 1561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4년 9월 6일 21시 26분 등록

추석,

10기 김정은



부모님을 찾아뵈러 가는 길

시골집이 가까워지네

논밭이 펼쳐지네

황금빛의 풍요로움이여

해 지기 전에 자리잡은

노오란 보름달 아래

가을바람 살랑살랑

파도치는 아름다움이여

 

가까이서 본다

벼이삭은 내 어머니를 닮았구나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농민에서 노동자로

허리 한번 펴 보지 못한

내 어머니의 인생이여

가는 다리 힘껏

소중한 낟알들을 업고 서 있구나

가슴저린 먹먹함이여

 

일흔 다 되어 자식 등에 업혀

단풍 구경 꿈 꿀 수도 있으련만

그 곳 그 자리에 자리잡고 뿌리내려

지루한 장마 찌는 무더위

온몸으로 이겨내어 열매 맺어 고개 숙였네

 

쌀이 되어

밥이 되리라

술과 떡이 되리라

껍데기 벗어

집이 되리라

거름과 연료 되리라

인생의 겨울 오기 전에

이 한 몸 다 내어 주리라

낟알 낟알 사무친

내 어머니의 사랑이여

 

– <추석, > 김정은


추석 벼.jpeg


곧 추석입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 벼가 푸르릅니다. 대지에 뿌리를 내려 머리 숙인 벼의 모습이 엄마를 닮았습니다.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벼처럼 서 계십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자식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엄마는 이제 곧 일흔입니다. 일흔 평생을 지탱해 준 다리가 말썽인가 봅니다. 연골이 다 닳았다고 합니다. 엄마는 잘 걷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은 자라서 효도 관광 한 번 보내드릴 만큼의 여유는 생겼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불편한 다리 때문입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괜찮다, 괜찮다고만 하십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엄마 생각을 했습니다.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케트 주먹을 연상시켰던 장군님의 일기엔 온통 승리의 이야기들만 적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전쟁의 부상으로 인해 아파하는 또는 노심초사하느라, 잠 못 이루었던 밤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게도 젊은 시절 엄마는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케트 파워를 가진 원더우먼이었습니다. 저는 잘 자란 자식들 덕분에 엄마의 노년은 그저 행복만 가득할 것이라 상상해왔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엄마는 집안에서만 겨우 왔다갔다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엄마와 함께 한 소중한 추억들이 생각납니다. 저는 엄마에게 특별히 각별한 존재였습니다. 욱하는 성미가 있는 작은 딸이 돈키호테처럼 생각 없이 행동할 것을 대비해서 엄마는 항상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두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그때 그때 달랐지만, 엄마는 항상 저를 믿고 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도 영어 과목은 학원이나 과외가 성행했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하는 친구를 많이 부러워했었나 봅니다. 엄마는 저 몰래 제 영어노트를 가지고 동네에서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학원 영어 선생님을 찾아 갔었다고 합니다. 제 노트를 보여주며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인데 학원은 못 보내겠고 엄마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상담을 했었답니다. 그 선생님은 제 노트를 보시고는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잘 해낼 테니 그 아이를 믿어보라고 대답했답니다. 물론 이 일은 그 당시엔 제가 몰랐던 일입니다.


제가 고3 때 갑자기 대입입시제도가 바뀌어 본고사를 쳐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입니다. 본고사라 하면 논술 시험과 구술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들은 갑자기 바뀐 시험 제도 때문에 각자 원하는 대학의 시험 제도에 맞춰 전문 과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논술이나 구술을 접해본 적이 없는 저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그저 운에 맡겨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엄마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갑자기 네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시더니 매일 네 종류의 신문 사설을 스크랩해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매일 같은 사안을 두고도 네 개의 다른 신문사들의 의견이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그렇게 매일 네 종류의 신문 사설을 읽는 것은, 갑자기 바뀐 대입 본고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저는 신문을 보면, 네 종류의 신문 사설을 스크랩해 주시던 엄마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저는 얼마나 방황을 했는지 모릅니다. 신입생 설명회에서 알게 된 선배들, 동기들과 몰려다니며 세상의 술을 다 마실 듯 방탕하게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든 사건이 생겼습니다. 개강 후 처음으로 전공 수업이란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경영학과 1학년 1학기, 모두가 권총을 차게 된다는 악명 높은 과목, ‘회계원리과목의 첫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접하는 회계라는 과목이 두렵기도 했고, 대학교재가 한자로 되어 있어 생각만해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재는 미리 사두었지만 한번도 펼쳐 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개강 첫날 첫 수업 시간, 책을 펼치는 순간,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몇 백 페이지나 되는 그 두꺼운 교재,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로 된 계정과목들 아래, 작고 굵게 또박또박 엄마는 한글로 음을 달아두신 겁니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약시인 제가 옥편을 찾아가며 공부하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 미리 예상하셨고, 제가 술 마시며 돌아다니는 그 시간에, 저를 위해 옥편을 뒤져가며 회계원리교재 전체에 한자의 한글 음을 다 달아 놓았던 것입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도시락 편지, 영어 노트 사건, 신문 사설 스크랩, 회계원리 한자에 한글 음 달기 사건 등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제가 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더욱 그 때가 생각나곤 합니다. 지금보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읽으며, 이순신 장군이 부상으로 고통 받는 순간, 또 전쟁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밤잠 설치는 장면, 적은 배와 무기로 승리를 거둘 기막힌 작전을 짜는 모습에서, 엄마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엄마를 둘러싼 환경은 전쟁을 방불케 했을지도 모릅니다. 엄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밤 노심초사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케트 파워를 가진 원더우먼이었던 엄마는 곧 불편한 다리를 수술받습니다. 이제는 추석, 고향을 지키고 서 있는 벼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민들레 홀씨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엄마를 상상해 봅니다. 수술이 잘 되어 엄마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IP *.65.152.40

프로필 이미지
2014.09.08 10:29:07 *.134.108.144

회계의 시작에 대해서는 야마모토 요시타가의 "16세기 문화혁명"이란 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와 다빈치와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나옵니다. 16세기 예술, 과학, 의학, 산업 등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인 야마모토는 뛰어난 물리학도였으나 전공투 운동으로 공부는 접고 학원에서 물리과목을 가르치는 학원선생님입니다. 하지만 책의 방대함과 자료조사에 대해서는 페르낭 브로델을 방불케할 만큼 대단합니다. (이 책 앞부분에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원근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72 신의 섭리가 종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성스러운 산, 몬세랏(Monserrat) _사진 추후 첨부 예정 어니언 2014.08.25 2475
971 고풍스러운 고대 로마의 도시, 세고비아(Segovia) _사진 첨부 예정 [3] 어니언 2014.08.25 9404
970 예술과학의 도시 발렌시아 file 왕참치 2014.08.25 2134
969 아름다운 해변과 피카소의 생가가 있는 말라가 file 왕참치 2014.08.25 17176
968 서구의 콘스탄티노플, 이슬람의 메스끼다가 있는 코르도바 file 왕참치 2014.08.25 12963
967 9일째 마지막 날, 세고비아+아빌라+도하_구달칼럼#19 file [1] 구름에달가듯이 2014.08.29 16596
966 Por Ti Volare, 세비아 히랄다 탑에서 론다 절벽으로 file [1] 앨리스 2014.08.31 3557
965 #19 메스키타에서 돈키호테까지_정수일 file [1] 정수일 2014.09.01 1991
964 지상의 모든 기쁨이 머물고 있는 풍요로운 정신의 진수, 알함브라 file [1] 어니언 2014.09.01 2611
963 8월 12일 5일째 말라가 - 미하스 - 세비야 file [1] 희동이 2014.09.01 3251
962 8/10 시체스-타라고나-발렌시아 [1] 왕참치 2014.09.01 1936
961 몬세라트, 바르셀로나 file [1] 종종 2014.09.01 1584
960 마드리드 그리고 똘레도 file [2] 녕이~ 2014.09.01 1962
959 스페인여행의 첫째날....깃발이 펄럭인다 [1] 에움길~ 2014.09.01 1651
958 무의식과 달콤한 대화_찰나칼럼#19 [2] 찰나 2014.09.01 1604
957 3-19. 콩깍지가 벗겨질 때 신화(神話)의 처방 [1] 콩두 2014.09.02 2629
956 매일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삶 file [1] 타오 한정화 2014.09.03 1545
955 막걸리­_구달칼럼#20 [2] 구름에달가듯이 2014.09.05 1782
» 추석, 벼 file [1] 앨리스 2014.09.06 1561
953 #20 추석 - 넉넉함 희동이 2014.09.07 1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