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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00시 40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저,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14. 9. 7


1. 저자에 대하여


성웅(聖雄)이순신, 1545~1598.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치고 충무공을 숭상하여 사모 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표상이다. 이름 앞에 ‘성스럽다’는 표현은 천부적인 그의 탁월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역경과 고난을 온몸으로 돌파해 온 치열한 완성에 대한 경외의 말이다. 하필이면 ‘성서러움’이 꽃 핀 곳이 전장이라는 것은 인간사의 가혹함을 단적으로 밝혀준다. 그의 탁월함은 단연코 ‘평범의 비범’이다. 밖의 적과 안의 적에 애워 쌓여 노심초사 공포의 날들을 지켜낸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취한 인간’ 의 위대성과 만나게 되고 비로소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충무공은 1545년(인종 1년) 3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이다.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네 아들 가운데서 셋째 아들이었다. 비교적 순조롭게 이어오던 충무공의 가문은 조부 때부터 침체되기 시작하여 아버지까지 모두 과거에 나서지 못했다. 때문에 순신은 침체된 가문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직 서울에 살았던 순신은 이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유성룡과의 만남이다. 그래서 운명을 운명이라 했을까! 어린 시절 순신은 이웃에 세 살 위의 유성룡을 만나 함께 뛰어 놀았던 모양이다. 훗 날 이들은 나라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게 된다. 유성룡의 가장 큰 치적을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라고 한다는데 용의 눈에는 용이 보였던 모양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순신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햇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꺼려 감히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아산으로 이주한 뒤 1565년(명종 20년) 20세가 되었을 때 상주 방씨와 혼인했으며, 부인과의 사이에서  회, 울, 면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인은 방진으로 보성군수를 지냈는데 무장 가문이었다. 충무공이 처음과 다르게 무과에 뜻을 두게 된 것이 처가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1572년 8월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 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충무공이 다시 무과에 나가 급제한 것은 이로부터 4년 뒤 1576년(선조 9년) 2월, 이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첫 임지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최초의 공직 생활이 최전방 야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공은 <함경도일기>라는 진중일기를 남겼다. 초서로 쓰여진 이 책은 아산 현충사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공은 이곳에서 3년의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었다. 가장 궁벽진 곳에서 수도로 돌아왔지만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공이 반대했고,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정5품의 뜻을 종8품이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지만 여하간 공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때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

얼마 뒤 공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된 공은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표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관청의 물건이라고 제지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원칙중심의 강직한 성품은 고난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타고난 성품인 것을...불운과 악연은 계속되었다. 충청도 군관으로 좌천시켰던 서익과 다시 엮이게 된 것이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공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1581년(선조 14) 5월 공은 다시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율곡의 면담 요청도 거절하면서 훈련원에서 2년을 근무한 뒤 공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다행히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도 잠시, 그 달 15일 아버지가 아산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소식을  이듬해 1월에야 받게 되었다. 3년상을 치룬 후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하게 되었는데 이때 공의 나이 마흔이었다.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공의 관직 생활은 이 무렵 가장 큰 부침을 겪게 된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 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공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공은 이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공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이때 공의 나이 46세였으며 관직에 나선지 15년 만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르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만일 이때 공이 전라좌수사에 있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의 판도는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찔하고 아득하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난중일기의 본문에서 언급될 것이므로 소략 하기로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출몰하면서 임진년의 치욕이 시작되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보름 여만에 한양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5월 2일). 찌질한 임금은 여차하면 명으로 망명할 요량이었는지 의주로 도망갔다(6월 22일). 백성들은 분노하여 임금이 살던 집을 불태웠다. 개전 두 달 만에 멸망 직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풍전등화의 위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백성들에게는 임금도 나라도 없었다. 기득권들은 임금을 따라 함께 숨어들었다. 개차반도 이런 개차반이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를 지켜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의 첫 해전(5월 7일)은 옥포에서 벌어졌다. 적선 26척을 전멸하고, 이튿날 적진포에서 적선 11척을 격파했다. 5월 9일 본영에 돌아와서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한 사실을 알고 통곡 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군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잃은 왜군은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되면서 전황은 급격하게 호전되었다. 1593년 8월 드디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면서 수군의 활약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만들어 이길 수 있을 때 싸웠다. 연전 연승이다. 나라의 명운을 한 어깨에 짊어진 공의 부담감은 난중일기 전편에 고스란히 남았다. 위로 토하고 밑으로 싸고 잠을 이루지 못하며 크고 작은 병들이 잦아들지 않고 공을 괴롭혔다. 

공이 계신 곳으로 가면 살것이라는 백성들의 희망대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로서 공은 밖의 적과 함께 안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백성들의 희망과 믿음은 임금이어야지 신하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역적이다. 시련은 멀리 있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 1월, 구실만 찾고 있던 조정은 부산포로 들어오는 왜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공을 파직하고 서울로 불러들여 모진 고문을 가한 후 차마 죽이지 못하고 4월 1일 권율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케 하였다. 여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4월 13일) 슬픔이 보태어 졌다. 이 때의 심정을 “부르짖어 통곡하여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라고 하셨다.

한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조선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공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선조는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때 조선 수군의 함선은 모두 13척이었다. 이 조차도 공이 돌아다니면서 수습해 온 것이었다. 이 함대를 이끌고 명량으로 나아갔고(9월 16일), 공이 스스로 ‘천행이었다.’ 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냈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을 잃고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 던 공의 슬픔은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패퇴하던 적군과 함께 노량에서 끝났다. 이로써 전쟁도 끝이다. 공은 무거운 짐을 스스로 놓으셨다. 공은 피할수도 있었을 삶을 죽음으로 완성하였다.

공의 삼가함은 삼엄하다.

공의 글은 곧 공의 성품이다.

공은 중언부언 하지 않는다.

철저히 수사를 배제하고 사실에 입각 하였다.

내면의 힘이 밖으로 넘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산도 야음_이순신]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임진년(1592년)_48세

: 전란은 4월에 시작되었으나 일기는 1월 1일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미 전란의 징후는 가득하다.

공은 지금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다.


1월 4일 맑음. 동헌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 나는 이렇게 건조한 한 줄의 일기가 긴 장문을 읽는 것 처럼 부대낀다. 이 한 줄을 남기는 공의 의미에 닿지 못하는 직관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사 하나 없는 단정함이 당신의 풍모였을 것이다. 삼엄한 공의 내면이었을 것이다. 당신의 삼가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중언부언해도 당신의 한줄을 감당할 수 없다. 


1월 16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들과 색리등이 인사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 가수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서 공은 얄짤 없다. 원칙 중심에서 타협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성정은 생애 전반을 통해 나타난다. 꼬장하고 칼칼하다. 글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어지간한 일에는 수사가 없다. 절제와 담박이다.


>> 매일의 일기에서 날씨를 빼 놓지 않았다. 바다에서는 날씨가 생사를 좌우한다. 뭔가를 해 볼 수 있다 없다는 일기 변화에 달렸다. 많은 전장에서 공은 일기 변화를 읽고 써서 이겼다.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한 그의 행동거지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궁금하다.


2월 4일. 맑음. ... 북봉 봉화대 쌓은 곳에 오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 전혀 무너질 리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공은 부지런하다. 직접 가서 살피고 확인한다. 보고에 의존하지 않는다. 눈매가 좋다. 상황을 관하는 혜안이 있다. 세심하다. 공평무사를 위해 힘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일 중독자다. 사사로운 것 보다 공무를 먼저 살핀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다. 사소한 것을 미루지 않는다. 스스로 행한다.


2월 17일. 막음 나라 제삿날(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공일 많아 좋겠다.


2월 20일. 맑음. 아침에 갖가지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든 것이고, 무기도 역시 어느 정도 완비되어 있었다. ...

>> 유비무환의 현장에 있는 듯 하다. 일일이 직접 확인하고 점검하였다. 부하들은 피곤했을 법 하다. 꼼꼼한 상사는 괴롭다. 그러나 이런 준비 덕분에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곧 왜군이 밀려 들 것이었다.


2월 21일. 맑음. ... 신홍헌을 시켜 술을 걸러 전날의 심부름하던 삼반하인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했다. 

>> 언제나 이랬다. 나눠 먹었고 나눠 가졌다. 


2월 22일. ... 만호의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양 현감과 능성 현감 황숙도와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보느라 촛불을 한참 동안 밝히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 칭찬할 자리는 빼 놓지 않았다. 물론 필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늦은 밤까지 자리를 한 모양이다.


2월 25일. 흐림. 전쟁 준비에 여러 가지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죄를 처결하였으며,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가장 못한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그 죄상을 조사하지 못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출항 할 수 없어서 그대로 머물러 잤다.

>> 공이 공무를 대하는 태도는 한결 같다. 지시하고, 확인하고, 합당한 후속조치를 내렸다. 이런 루프는 경영의 기본이다. 문제는 지속성에 있다. 2월 내내 순시하면서 시찰하였다.


3월 5일. 맑음. ...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이 책을 보니 수전, 육전과 화공법 등에 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다.

>> 좌의정이 편지와 병서를 보내왔다.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다. 공의 든든한 후원자다. 


3월 21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 실록에 기록된 것과 같이 공은 병약했던 것인가! 일기 내내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아마 신경성이었을 것이다. 예민한 분이시다. 


3월 27일. 맑고 바람도 없었다. 일찍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에 갔다.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조일 기둥 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 이 때 이미 거북선이 준비되어 있었다.


3월 29일. 맑음. ...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  2월 14일 보낸 나장이 한달 보름여 만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평안하시다고 한다.


4월 2일. 맑음. 식사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밤새도록 신음했다.

4월 3일. 맑음.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4월 4일. 맑음. 아침에야 비로소 통증이 조금 그치는 것 같았다.


4월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늦게 여필이 떠났다. 홀로 객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 동생을 고향으로 떠나 보내면서 고향의 부모형제, 아내와 자식들 생각에 울적하셨던 모양이다. 온갖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당신께서 그저 평범한 아들이고 아버지였으며 약하디 약한 중년의 사내가 아니던가! 이미 나라의 짐에 당신 한 어깨에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인가!


4월 15일. 맑음.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해 질무렵에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첩에 “왜선 구십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삼백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 고 하였다.

>> 4월 13일 임진년의 치욕이 더디어 발발했다. 공은 이들이 도착하고 이틀 뒤에 알았다. 


4월 17일. 궂은비가 오더니 늦게 갰다. 영남 우병마사가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늦게 활 쉰 순을 쏘았다.

>> 활 쉰 순을 쏠 만큼 심사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


4월 20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이 왔다. “큰 적들이 치열하게 몰아쳐 와 그 앞을 대적할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마치 무인 지경에 든 것 같다.” 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지원해 달라는 일로 장계 올리기를 청한다고 했다.

>> 왜군의 초반 기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인 지경에 든 것 같다고 했으니...나라의 방비가 어떠 했는지 알만하다. 나라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받았는데 버티지도 못했다. 한양까지 싸우면서 간 것이 아니라 말을 달려 간 것이다. 


>> 23일부터 30일까지 일기가 누락되어 있다.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5월 1일. 수군들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이날은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고 남풍이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 첨사, 흥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지 않으니 실로 의사들이라 할만하다.

>> 공의 휘하는 대비가 되어 있다. 


5월 2일. 맑음. ...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현령, ... 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 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군기 등의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오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 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

>> 초기 공의 휘하와 주위 조선 수군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러난다고 갈 곳이 있는가! 나서서 싸울 수 밖에 없다. 


5월 3일. 아침 내내 가랑비가 내렸다. ...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

>> 추상같은 위엄이다. 군법을 집행하는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다. 공은 단호하고 삼엄했으나 따뜻했다.


>> 5일부터 28일까지 일기가 누락되어 있다. 7일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전투에 임했다. 긴박 했을 것이다. 5월 8일 적진포에서도 왜군의 배를 깨트렸다. 


>> 5월 10일 임금에게 보낸 장계에서 이순신을 이렇게 썼다.

적의 배들은 사면의 장막에 온갖 무늬를 그렸고 붉고 희 깃발들을 어지러이 내걸었습니다. 바람에 펄럭이니,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웠습니다. ... 전하의 가마가 의주로 옮겨가신 기별에 접하고 놀랍고 망극하여 장졸들이 서로 붙잡고 통곡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에게, 너희는 배를 한층 더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 신이 이번 싸움길에 연안을 두로 돌아보니 지나치는 살골짜기마다 피난민들이 모여서 신의 배를 보고 울부짖었습니다. 늙은이와 아이가 짐을 지고 서로 부축하며 흐느껴 울고 부르짖었습니다. 비참하고 불쌍하여 배에 싣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싸우는 배에 사람을 가득 태우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므로 태우지 못했습니다 ...


5월 29일. ...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은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곤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 사천해전이다. 이 싸움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 이 무렵 류성용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싸울 때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탄환을 맞았습니다. 사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했습니다. 어제나 갑옷을 입고 있느니, 상처가 곪아서 진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닷물로 씻어내고 늘 뽕나무 잿물을 바르고 있지만 아직도 쾌차하지 못해 민망하옵니다. 징병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백성들은 다투어 달아나고 있습니다. 민심의 흩어짐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무엇으로 수습하리까.


>> 이분의 <행록>에서는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날, 공은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공은 활을 놓지 않고 계속 독전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탄환을 꺼냈다. 깊이가 두어 치였다. 사람들은 공의 부상을 알고 놀랐다. 공은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 ...


6월 2일.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의 판옥선만 하였다. ... 모조리 섬멸하여 남겨 두지 않았다.

>> 당포해전이다.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6월 5일. 아침에 출발하여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왜적의 큰 배 한 척이 크기가 판옥선고 같았는데, 배 위의 누각이 높고 그 위에는 적장이란 자가 앉아 있었다. ... 왜장의 머리를 벤 것이 모두 일곱 급이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니, 남은 수효가 매우 적었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 당항포 해전이다.기밀문서인 일본 수군편성표를 노획한다.


6월 7일.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이 율포에 있다는 말을 듣고 ... 왜적의 머리를 합해 보니 모두 서른여섯 급이었다.

>> 율포해전이다. 마치 왜군 사냥을 다니는 듯 하다. 조용히 흐르다가 왜적을 발견하면 괴멸시킨다. 수색섬멸전은 이순신 함대의 기본 전술이었다.


>> 6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 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 때 그 유명한 한산대첩(7월 8일)과 안골포 해전(7월 12일)에서 승리하였다. 한산대첩은 견내량과 안골포 두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견내량에서 적장은 와카자카 야스하루였다. 와카자카는 김해로 달아났고 가신 마나베가 패잔병 4백을 이끌고 한산도로 들어갔다. 마나베는 한산도에서 할복했다. 이순신 부대는 이때 한산도로 추격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한산도에서 죽었을 것이다. 식량도 배도 없는 섬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없다. 이 전투를 계기로 왜군은 남해안에서 제해권을 상실한다. 바다를 통한 보급과 퇴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왜군은 진퇴 양난에 빠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서 눌러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왜군은 육지에서 승리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의 국면을 바꾼 대첩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함대의 세번째 출정이었다.


>> 7월 6일 출정하여 7월 13일 여수 좌수영으로 귀환하였다. 7박 8일간의 전투였다. 정헌대부로 승진하였다.


>> 이순신을 한산도 싸움의 여러 모습들을 다음과 같이 장계에 적었다.(7월 15일)

안골포의 백성들은 산속에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 적의 배를 모조리 깨뜨리면, 적들은 숨어 있는 조선 백성들을 도륙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물러나 밤을 새웠습니다. ... 적들의 시체를 12곳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적의 피가 포구에 가득 찼습니다. 얼마를 죽였는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8월 24일. 맑음.(네 번째 출정) ... 신시에 배를 출발시켜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

>> 네 번째 출정이다.


8월 27일. 맑음. ... 밤은 벌써 이경이 되었다.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편하지 않았다. 이날 밤음 꿈자리도 많이 어지러웠다.

>> 전장을 책임지는 장수의 심사가 편할 리 없다. 어지러운 심사를 비춰 놓은 일기 한 자락이 고맙다.


>> 8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31일까지 일기가 누락되었다.


>> 9월 1일 새벽에 몰운대 도착, 부산포에 정박중인 적선 오백여 척을 발견하고 6차례 전투로 적선 150여 척 격침. 부산포 해전이다. 이 싸움에서 공이 아끼던 장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했다. 


임진년의 기록은 여기까지다. 이제 겨울이 되니 싸울 수 없다.



계사년(1593년)_49세


2월 3일. 맑음. ... 이날 영남에서 옮겨 온 귀화인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이 명부에 오른 격군 팔십여 명이 도망 갔다고 보고하면서도,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 오지 않았다. ... 김호걸, 김수남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 장졸들 건사하는 것이 여간 곤란하지 않았을 것이다.


2월 10일. 아침에 흐렸으나 늦게 맑아졌다. ... 묘시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과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여전히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두 차례 유인했으나, 우리 수군에 이미 겁을 먹고는 나올 듯 하다가 돌아가 버려 끝내 잡아 섬멸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통분한 일이다.


2월 14일. 맑음. ...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짓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

>> 술 먹은 개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출몰한다. 


>> 일기 전편에 걸쳐 누가 와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공께서 직접 가셔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다만, 휘하를 살피는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청아하고 꼿꼿한 그의 성품을 이렇게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2월 22일. ...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하다가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 당한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후 진도의 상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는 짓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매우 통분하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을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 원균과의 반목으로 타는 속을 고스란히 일기에 남기셨다.  “원 수사는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고 말할 정도로 둘 사이는 문제가 있었다. 


2월 28일. ... 그 하는 꼴이 황당하므로 묶어서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본뜻은 군관을 보내어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들을 찾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 오로지 공치사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서 혐오감을 느꼈을 법하다. 사람의 머리로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으니 적의 머리든 아군의 머리든 상관없다. 참혹하다. 김훈은 그의 책에서 ‘모든 적들은 모든 적들의 머리를 잘랐다.’고 하였다.


2월 30일. 종일 비가 내렸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종일토록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공은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깊은 시름에 잠기셨던 모양이다. 이런 모습에서 자연인 이순신을 만나게 된다. 두려움이었을까 외로움이었을까 둘 다였을 것이다.


3월 6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가 육지로 다급하게 도망쳐 산 중턱에 진을 쳤다. ... 포로로 잡혀갔던 사천 여인 한 명을 빼앗아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 빼앗아 온 것이 맞는 것 같다. 구출이라거나 구조가 아닌 것이다. 그녀에게는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 지옥이다.


>> 4월 일기는 빠져있다.


글로 적기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새가 없어서 잊어 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이어 적는다.


5월 4일. 맑음.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5월 6일. ... 늦게 큰비가 퍼붓듯이 내리더니 온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와 개울에 물이 불어나더니 곧 가득 찼다. 농민들이 바란 것이니 매우 다행이다.

>> 세심하고 선이 고운 분이다. 


5월 7일. ... 떠나려 할 때쯤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했다. 순천의 이방에게는 급히 군무에 나아갈 일을 하지 않았기에 바로 회부하여 처형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 삼엄할 때는 또 이러시고...엄혹한 일을 해야 할 때는 글에서 처럼 감정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차가운 이성으로 처결할 뿐이다.


5월 13일. 맑음. ...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올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

>> 이렇듯 심상을 내어 보이는 구절이 많지 않다. 꼿꼿하게 버티다가 한번씩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5월 15일. 맑음. ... 조금 뒤에 윤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5월 16일. ...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오래 체류하는 것은 반드시 교묘한 계책을 내기 위한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던 차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점심 때 윤 봉사에게서 “서울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피난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참지 못했다. 어찌 세상사가 이렇게 가혹한가.

>>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함께 약해진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슬픈 소식들만 전해져 온다. 어찌 세상사가 이렇게 가혹한가! 공의 세상도 가혹하다.


5월 18일.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를 하고 나니 몸이 조금 편안해진 듯 하다.

>> 며칠 더 아프셨다.


5월 21일. ...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하게 했다. 군중에서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5월 27일. ...경상 우병사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내 ㄴ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계책을 꾸몄다고 한다. 우습고도 우습다. ...


5월 30일. 가소롭다. ...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원균) ...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 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6월 3일. ...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었다. 한심스럽다.  ... 등의 답장이 와서 보니, 어려운 사정이 많았다. 각 도의 군마가 기껏해야 오천을 넘지 못하고, 군량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했다. 적도들의 독기는 날로 더하는데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 이렇게 암담한 상황에서 잔장을 이끌어야 하는 장수의 심정이란 어떠했을까! 공의 부하들은 공에게라도 기대면 될 터였지만 공은 어디에 기댈 수 있겠는가. 외로웠을 것이다. 손 벌리고 아쉬운 소리 하는 사람들 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균 같은 이는 사사건건 대립하고 모략을 일삼는다. 힘들었을 것이다.


6월 4일. 종일 비가 내리니 긴 밤이었다.


6월 5일. ... 경상 수사(원균)가 웅천의 적들이 혹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공문을 보내어 토벌하자고 하였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6월 8일. ... 옥과의 향소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을 신중히 하자 않은 탓에 결원을 많이 내어 백여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양 거짓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효시했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 다음 날 수십 일 지속되던 장마가 끝났다.


6월 12일. 아침에 희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소문에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고 하니 참 불쌍하다.

>> 따뜻하고 세심한 분이 분명하지 않은가! 지극한 효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7월 7일. 맑음. ... 거제에서 포로가 되었던 한 사람을 데려와서 왜적의 소행을 상세히 물으니, “흉적들이 우리 배의 위세를 보고 후퇴하여 돌아가려고 하였다.” 고 하였다. ... 이 말은 거짓말이다.

>> 공은 전후 사정과 맥락을 훤히 꿰고 있었다. 


7월 9일. 맑음 ... 이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물과 하늘이 일색을 이루었다.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와 홀로 뱃전에 앉았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삼경 말에 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는데, “실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의 피란민들이 왜군 차림을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왜적이 아니라서 기쁘고 다행임을 이기지 못했다.

>>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다급한 것이었으며, 전황 역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보고는 잘못된 것이었다.

>> 공에게는 수 많은 정보(이야기)들이 올라 왔다. 참말과 거짓말과 간계가 뒤섞여 어느 것이 쓸 것이고 어느 것이 버릴 것인지 분간 되지 않는다. 본 것과 들은 것은 서로 달랐으며, 보고가 올라오는 구멍마다 이야기가 달랐다. 

>> 거짓 정보와 보고는 관리들과 명군에게서도 만연했다. 서로의 공을 부풀리고 남의 공을 깍아내리고 없는 공을 만들고 없는 죄를 덮어 씌웠다. 일기 곳곳에서 거짓 됨이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가소롭다는 표현히 수 없이 나타난다.


7월 14일.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겼다. ...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

>> 이날 본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전날 행주대첩 소식을 전해 들었다.


7월 15일. 아주 맑음.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7월 18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 며칠 째 몸이 불편하시다. 전란 동안 내내 공은 크고 작은 병마와 싸우셨다. 신경성이었을 것이다.


7월 21일. 맑음. 경상 수사와 우수사, 정 수사가 함께 와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함께 하는 일에 후환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의 아우 원연도 뒤따라 와서 군량을 빌려 갔다.

>> 원균은 공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눈이 먼 것이다. 소인배다. 일기 내내 원균에 대해 음흉하고 흉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이 얼마나 그를 싫어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도모해야 하니 서로가 고충이었겠다. 


>> 8월 내내 몸이 불편하셨다. 원균에 대한 노여움과 불신이 더욱 깊어간다.


9월 7일. 맑음. ... 종일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저녁때 탐후선을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오지 않았다. 해가 저무니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 바람을 많이 쐬어 머리가 몹시 아플 것 같다. 걱정스럽다.

>> 감성이 풍부하고, 소심하기까지 하다. 당신의 몸은 이미 병약하다.


>> 9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일기는 빠져있다.


>> 8월 1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으나 10월 9일 공에게 전달되었다. 최소한의 시스템이 기능하지 않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전시에 전장의 최고 지휘관에 관한 인사의 전달이 이 처럼 시간이 걸렸어야 할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되느니 마느니 분탕질을 하느라 늦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빌어먹을 붕당이다.


갑오년(1594년)_50세


1월 6일. 비. 동헌에 나가 남평의 도병방을 처형했다.

1월 8일. ... 남원의 도병방을 처형했다.

>> 단 한톨의 수사도 없다. 삼엄하고 건조하다. 그러나 속에서는 피가 솟고 뒤틀렸을 것이다.


1월 12일. 맑음.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1월 19일. 흐리다가 늦게 갰다. ... 소비포 권관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어 간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원 수사,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눈독 들인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1월 20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춥기가 살을 에듯 하였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 군량이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 되었다.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 장사 지내려고 임무를 맡을 사람으로 녹도 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1월 21일. 맑음. ... 저녁에 녹도 만호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이백열네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한다. ...

>> 지난 해 흉년이 들었다. 거듭되는 흉년과 전란으로 삶은 참담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굶어 죽었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다. 힘 있는 자들은 누릴 것이 많아 졌다. 여자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 부자가 서로 잡아 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 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징비록)

>>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난중잡록)

>>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난중잡록)


2월 2일. 맑음. ... 동궁에게 올린 달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 이 때 동궁은 광해다. 선조는 의주에서 이반 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서자였던 광해를 급히 세자로 삼아 자신을 대신해서 전장을 관장하게 하였다. 광해는 전국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전선을 살폈다.


2월 9일. 맑음. ...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살것인지를 물었다.


2월 12일. 맑음. 그 안의 비밀 문서를 내 보니 “여러 해 동안 해상에서 나라를 위해 앴는 것을 내가 늘 잊지 못하니, 공이 있는 장병으로서 아직 큰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을 치계하라.”는 것이었다. ... 영의정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며 애쓰는 일을 들으니 감개함과 그리움이 어찌 다하랴.

>> 아무것도 없는 왕은 무엇으로 상을 주어 위로 할 수 있겠는가. 


2월 16일. 맑음. 흥양 현감이 암행어사(유몽인)의 비밀 장계 초안을 가져왔는데 ...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싸움이 평정될 리가 만무하여 천장만 쳐다보게 될 뿐이다.


>> 3월 4, 5일 당포에서 적선 31척을 부수었다. 공이 직접 전장에서 지휘한 것은 아니다.


3월 7일. 맑음.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한 답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글모양을 이루지 못했다. 원 수사가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게 했지만 그 역시 매우 적합하지 못하였다. 나는 병중에도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을 시켜 써서 보내게 했다. 

>> 공은 글에도 뛰어났다. 부하들이 글을 만들지 못하자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앉아 글을 지었다. 직접 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 3월은 한달 내내 아프셨다.


4월 19일. 비가 내렸다. ...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 배에서 자는 것은 다반사다. 수군의 우두머리가 야전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4월 26일. 맑음.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심한 경우 정신을 잃으실 정도로 아프셨다.


5월 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


5월 16일. 저녁에는 큰 비가 내려 밤새도록 지붕이 새어 마른 데가 없었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 데 괴로울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6월 7일. 맑음. ... 오늘 무씨 두 되 다섯 홉을 심었다.


6월 15일. ... 또 아내의 언문 편지에는 아들 면이 더위 먹은 증세로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마음이 애타고 답답하다.


7월 3일. 맑음. ...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7월 12일. 맑음. ... 또 면의 병세가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 애따는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유상(유성룡)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 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이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 유성룡이 정말로 죽었다면 큰일이다. 나라의 정사는 누가 돌볼 것인가. 


7월 19일. 맑음. ...점심을 올린 뒤에 경상 원 수사가 혼자서 술 한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 명의 장수가 방문했다. 장수들이 성의로 예물을 줬다. 원균은 이에 더하여 술상을 따로 봤던 모양이다. 공이 이 모양을 보니 그 사람의 행동거지나 마음 씀씀이와 상 차림이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겉만 번드러하고 젖가락 갈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7월 23일. 맑음. ... 종 목년이 들어왔다.


8월 2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하루 자시에 꿈을 꾸니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 공은 꿈이야기를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꿈을 해석하여 길흉을 점쳤다. 꿈의 해석대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8월 30일. 맑고 바람도 없었다. ...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


9월 3일. 새벽에 비밀 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9월 5일. 달이 운 뒤에 머리를 긁어도 가려움을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긁게 했다.



을미년(1595년)_51세


1월 1일.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 새해 첫 날, 이런 저런 근심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또 노모에 대한 근심을 초조한 밤을 새웠다. 휘하의 여러 장수들에게 새해인사를 받고 술을 내렸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감회가 어둡다.


1월 21일. 맑음. ...장흥 부사가 와서 만났다.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지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쓴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 밥 버러지 같은 인사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고귀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4월 24일. 맑음. ... 곧 망기시로를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나누어 맡긴 항복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곧바로 머리를 베라고 명하였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난색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4월 30일. 맑음. 아침에 원수의 계본과 기, 이씨 두 사람의 공초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눌러 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 공의 일기에는 권율의 실기에 대한 지적이 다수 보인다. 다소 정치적인 성향의 사람이었던 듯 하다.


5월 16일.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은 평안하시다고 하지만, 아내는 불이 난 뒤로 심기가 많이 상하여 천식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매우 걱정이 된다.


5월 21일. ...투항한 왜놈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동료 왜인 산소가 흉포하고 패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기에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왜인을 시켜 그놈의 목을 베게 했다.


5월 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 분에 넘쳤다. 몸이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 읽어도 읽어도 심중을 헤아리기 힘든 대목이다. 


7월 1일. ...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 공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처지였다. 붕당에 속하지 않았던 터라 보시기에 지지고 볶는 정치판이 한심했을 터였다.


8월 27일. 맑음. 군사 오천사백여든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 상당한 군력이다. 일기 가운데 숫자를 정확히 기록한 부분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분명히 밝히는 분이었던 것을 알겠다. 사람들의 이름 지명 따위를 적시하는 것을 즐겨하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9월 14일. 맑음. ... 선 수사(선거이)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북방에 갔을 떼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11월 21일. ... 이날 저녁에 청어 만삼천 이백마흔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이종호가 받아 갔다.

>> 숫자도 정확하려니와 군량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병신년(1596년)_52세


1월 7일.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 바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 부하들 사랑노름까지 기록했다.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피어난다. 인류가 지속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1월 23일. 아침에 옷 없는 군사 열일곱 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 더 주었다.

>>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군대다. 궁박함이 이를 데 없다. 


2월 11일. ... 초저녁에 영등포 만호가 그 소실을 데리고 술을 갖고 와서 권했다. 어린아이도 왔는데 놔두고 돌아갔다. 땀을 흘렸다.

>> 어린아이가 궁금하다. 이 아이는 이튿날 저녁 여덟 시 전후에 돌아갔다.


2월 14일. ...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어들여 물긷는 일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이날 밤 바다의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았다. 혼자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3월 9일. ... 개(여자 종)와 함께 잤다.


3월 12일. 아침 식사 후에 몸이 노곤하여 잠깐 잠을 잤더니 처음으로 피로가 가신 듯 하다.


3월 17일. ...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셔서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까지 젖었다. 몸이 불편했다.


4월 24일. ... 식후에 목욕탕에 들어갔다.

>> 이 후 8일 연속 목욕, 피로를 푸셨던 모양이다. 노심초사 걱정이 마를 날 없다. 어머니, 아들, 가족, 군사들, 백성들, 나라...자잘한 걱정까지...분명히 소심한 양반이다.


6월 8일. ... 남도포 만호의 소실인 본포 사람이 허씨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투기 싸움을 했다고 한다.


8월 2일. ... 늦게 거센 바람이 크게 일고 빗줄기는 삼대 같이 굵어서 대청마루에 걸어 놓은 바람막이가 날아가 방 마루 바람막이에 부딪쳐 한꺼번에 바람막이 두 개가 깨져 산산 조각이 났다. 아까웠다.


윤8월 14일. ...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그 참혹함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우선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염려하는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9월 8일.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는데 나라 제삿날이라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9월 12일. 여진과...

>> 영광에 머물며 여진과 며칠을 더 보냈다.


9월 19일. ... 최철견의 딸 귀지가 와서 잤다.

>> 광주 목사의 딸이다.


정유년(1597년) _ 53세


4월 1일. 옥문을 나왔다.

>>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고, 28일간의 옥고 끝에 이날 석방되어 다시 일기를 썼다. 압송될 때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

>> 이 때 임금은 이순신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중앙에 정치적 동지가 없었던 그에게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있던 유성룡도 크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 이순신에게 가해진 고문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출옥 후 부축하는 사람 없이 걷거나 말을 타고 남해안까지 내려온 것으로 봐서 몸을 아주 망가 뜨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출옥 직후 술도 마셨다.


4월 2일. ...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이야기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헤어져 나왔다.


4월 11일. ...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4월 13일. ...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4월 16일. ...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4월 19일.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5월 7일. 아침에 정혜사의 승려 덕수가 와서 미투리 한 켤레를 바쳤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두세 번 드나들며 고하기에 그 값을 주어 보내고 ...


5월 8일. ...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니, 이는 곧 원수의 명령이었다.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서 흉악한 원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사 오라고 구실삼아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아내와 사통하려 하였는데, 그 여인이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나를 헐뜯는 것이 나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나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21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한다.”는 것이리라.


6월 16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와서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7월 16일.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이날 낮에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는데...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 아들 열이 떠나가는데... 사노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기에 연유를 물으니 ...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또 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 7월 일기는 대개 장황한데 이날 일기는 더욱 그러하다. 백의의 몸이라 상념의 시간이 길었을 것이다. 

>> 칠천량의 패전이 이미 예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서 이미 바람빠지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었다. 공의 말처럼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공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앞이 내다 보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당신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을 것인가. 그러나 죽지 않는다면(망하지 않는다면) 바닥을 쳐야 다시 설 수 있는 것이다.

>> 이날 조선 수군은 칠천량 에서 참패했다. 전함 3백여 척이 깨어졌고 수군은 전멸되었다.

>> 공은 이 소식을 18일 전해 듣는다.


7월 21일. ...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으며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8월 3일. ...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

>> 7월 23일 임명되었고, 남해안을 정찰중이던 이날 교지를 받았다.

>> ... 지난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 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 교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8월 6일. 일찍 출발하여 낙안에 이르니, 오 리의 길에까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인사하였다.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 까닭을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병사(이복남)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니, 이런 까닭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갔다.”고 하였다. 관사에 이르니 적막하여 인기척도 없었다. ... 늦게 보성의 조양창에 이르러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8월 6일.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히 쓰러져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고 곡하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하였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또 울었다. 아~~씨~~오백 년이 흘러도 달라진게 하나도 없냐 어째! 지금은 이순신도 없다. 내가 당신이 된 듯 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는 것 같습니다. 적막한 관사에 들면서 막연했을...이제는 더 할 실망도 없었을 당신의 외로움을 읽었습니다. 그저 담담하시려니...


8월 12일. ... 그 편에 배설의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더해지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8월 21일. 알이 새기 전에 곽란이 나서 심하게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하여 소주를 마셨더니 얼마 뒤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 했다. 앉아서 밤을 새웠다.

8월 22일. 곽란이 점점 심해져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8월 23일. 통증이 매우 심해져 배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여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 육지에서 잤다.

8월 24일. ...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비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8월 25일. 아침 식사를 할 때 당포의 포작이 방목하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헛소믄을 퍼뜨리되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9월 2일. 배설이 도망쳤다.


9월 12일. ... 배 뜸 아래에서 심회를 스스로 걷잡을 수가 없었다.


9월 13일. ... 꿈이 예사롭지 않으니 임진년 대첩할 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

>> 융의 꿈 이야기를 읽은 다음이라 공의 꿈 이야기마다 눈길이 한참을 머문다. 공은 내내 꿈이야기를 했다. 


9월 15일. ...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고 하였다.


9월 16일. 맑음. 이른 아핌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이백여척의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온다.”고 했다. ... 상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 고 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 라고 말했다. ...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 드디어 명량 해전의 아침이다. 이날 전선 12척으로 적선 330척을 상대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적선 33척이 깨어졌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 싸움으로 전쟁의 국면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적은 서해를 우회할 수 없게 되었다.


9월 17일. ...피난민들이 무수히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어외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10월 1일. 아들 외를 보내서 제 어머니도 보고 여러 집안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하였다. ... 아산 고향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10월 14일. ...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슨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10월 16일. ... 내일이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통곡하지도 못했다. 염한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울 수 없었다. 강막지의 집으로 들어 펑펑 목놓아 울었다. 


10월 19일. 어두울 무렵 코피가 안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느라 눈물이 났다. 

무술년(1598년)_54세


>> 2월 17일 고금도로 수군 진영을 옮겼다.

>> 7월 16일 명나라 진린이 지휘하는 수군 5백여 척이 고금도로 왔다.


11월 17일 ...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 공의 마지막 일기다. 이틀 후 철수하는 적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척이 깨지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통제공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날 전쟁은 공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 이제는 아파서 끙끙 앓는 밤이 없어 편히 주무실 수 있겠습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기록한 진중 일기다. 1592년(임진년) 1월 1일부터 1598년(무술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틈나는 대로 기록 하셨다.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치르면서 느끼는 단상들이나 몸과 마음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임진년 기록이 1월 1일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4월 13일 일어났으니 제법 앞서 일기가 시작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왜의 침략이 이미 예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중일기’ 라는 이름은 정조 때 초고본을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당시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 등으로 각각 분책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정유일기는 먼저 일기를 적었다가 나주에 다시 재 작성하여 두 책으로 만든 것으로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66일간의 일기가 서로 중복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직접 초서체로 작성한 것이다. 급박한 가운데 기록되었을 것이다. 심하게 흘려 써 놓으신지라 후대에 해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일기, 계사일기, 정유일기에서 두드러지게 흘려 써 놓으셨는데 특히 전장의 상황이 치열했던 해였다. 임진년에는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에서 해전을 계사년에는 웅포, 견내량에서 정유년에는 거제, 안골포, 칠천량, 벽파진, 어란포, 명량 등에서 해전을 치렀다. 특히 심하게 흘려 있거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된 것이 ‘정유일기’ 인데 이 때 충무공은 파직과 투옥, 백의종군, 모친상 등의 악순환 가운데 기록한 것임을 볼 때 상황의 급박함과 개인의 애통함이 미루어 짐작 되어 저절로 숙연해 온다. 아직까지 미상자와 오기한 글자 및 훼손된 글자들이 제대로 판독 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이런 점이 오히려 난중일기의 가치를 더해 주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편집할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심을 표명했었으니 이제 인쇄할 때에 와서도 역시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제 내탕의 돈 오백 민과 어영의 돈 오맥 민을 내려 주어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라.” ‘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을 지시한 정조는 이 처럼 사비를 털어 책을 내는데 보조할 만큼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8월 6일. 일찍 출발하여 낙안에 이르니, 오 리의 길에까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인사하였다.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 까닭을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병사(이복남)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니, 이런 까닭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갔다.”고 하였다. 관사에 이르니 적막하여 인기척도 없었다. ... 늦게 보성의 조양창에 이르러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8월 6일.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히 쓰러져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고 곡하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하였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또 울었다. 아~~씨~~오백 년이 흘러도 달라진게 하나도 없냐 어째! ... 내가 당신이 된 듯 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는 것 같습니다. 극도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라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담담하시려니...


10월 14일. ...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슨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10월 16일. ... 내일이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통곡하지도 못했다. 염한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울 수 없었다. 강막지의 집으로 들어 펑펑 목놓아 울었다.



[보완점 그 외]


일기를 써야 겠다. 매일 써야 겠다. 다시 써야 겠다.

중언 부언 하지 않는 삶과,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내게 삼엄할 수 있길 바란다.

익을대로 익어 스스로 떨어져 마감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축복일 듯 하다.

지독한 절망 가운데서 절망을 건져올린 공의 힘을 느낀다.

소심하면서도 대범한 기질적 특성이 내게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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