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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06시 46분 등록


오빠 먼저, 동생 먼저, 4천만의 컴포트 푸드 - 라면

 

뜨거운 여름의 끝, 흙 바닥이 죄다 갈라질 정도로 심한 가뭄 끝에 드디어 반가운 비가 내리나 싶더니, 광풍과 함께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진다. 오늘은 여름의 끝을 잡고 갈 시원한 빗줄기가 아침부터 여름 내내 뒤집어쓴 먼지로 흐리멍텅해진 동네를 씻어내고 있다. 이런 날은 당연히, 집에 눌러앉아 베란다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라면을 끓여야 한다.

 

비를 좋아하는 큰 아이는 이런 날 우산을 들고 골목 탐험을 즐기러 뛰어 나간다. 할머니가 숭덩 썰어낸 칼국수 면발 마냥 굵은 빗줄기에 흠뻑 젖은 아이가 돌아올 무렵이면, 밥솥에서 내어 놓은 밥은 알맞춤 식어있을 것이고, 나는 잘 익은 김장 김치에서 따로 꺼내둔 배추 꼭다리를 넣어 끓인 물에 라면을 투하할 것이다. 그냥 라면을 끓일 때보다 넉넉하게 잡은 시원한 김치국물에 살짝 덜 익은 라면 면발이 떠오르면 가스불을 끈다. 이제 냄비에 뚜껑을 닫고 숨이 죽도록 조금 둔 뒤, 꺼내둔 대접에 면발과 국물을 던다. 이 조합에 익은 김치는 기본, 친정 엄마가 여름이면 한 항아리씩 담아두는 소금물에 삭힌 오이지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김칭예술라면1.jpg

 


이중창으로 마감한 아파트는 창문을 열지 않고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비가 들이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창문을 열어 뱃속까지 시원해지는 빗줄기의 음향효과를 누리며 뜨거운 김을 내뿜는 라면을 한 젓갈 들어올린다. 눈을 가리는 뜨거운 김에 흐릿해진 큰 아이의 모습에 짧은 머리를 한 어린 내가 겹친다. 마른 체격에 목이 길어 ET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큰 아이는 확실히 제 아빠보다는 엄마를 닮았다.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이렇게 굵은 빗줄기가 우두두둑 떨어지는 창 밖을 내다볼 때면 어릴 적 살던 수유리 골목 끝 옛 집의 널찍한 마루로 되돌아간다. 덜컹, 드르륵, 육중한 소리와 함께 힘겹게 미끄러지던 마루의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처마 밑 위태롭게 비를 피하던 형제들의 신발들을 모조리 걷어 올려 마루 끝에 깐 신문지 위에 조심스레 진열한다. 이 비가 얼마나 계속될 지 몰라도, 하나 밖에 없는 운동화를 적시면 낭패다. 비에 젖은 운동화는 말려도 젖은 똥개 녀석 메리처럼 구리 구리한 냄새가 난단 말이다. 오빠랑 동생은 아까부터 라면을 끓인다고 부산을 떨고 있다. 웬일인지 이런 날은 라면에 관한 한 자린고비 노릇을 하는 엄마도 외출하고 없다. 덕분에 우리끼리 먹고 싶은 라면을 맘대로~ 끓여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라면은 스프, 스프는 삼양이라 자랑하던 삼양라면도 좋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노래하던 농심라면도 좋았다. 진짜 된장을 넣어 구수하다던 된장라면은 오빠가 엄청 좋아했다. 당시 가장 신제품이었던 안성탕면은 내가 챙겼다. 어차피 한 냄비에 끓이면 된장라면이고 삼양라면이고 간에 제 3의 맛으로 수렴될 운명이지만, 나름의 기호를 존중하며 투하한 각자의 라면이 사이 좋게 한데 끓어오르는 라면 냄비에, 오빠는 매운 고춧가루를 한 술 뿌려 오늘의 라면을 완성했다. 매운 거 좋아하는 나와 오빠는 신나게 국물까지 싹 비웠고, 아직 매운 맛이 힘겨운 어린 동생은 물을 몇 컵씩 들이키면서도 밥까지 말아 세 살 언니인 나보다 늘 더 먹었다.

 

그래도 그때 라면은 요즘 나오는 신라면을 필두로 한 매운 라면 계열에 비하면, 대개 쇠고기 맛을 강조하는 순한 라면들이었다. 라면도 순했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외치는 광고도 순했고, 엄마 없는 평일 오후, 어린 삼남매가 하루 종일 대문을 열어놓은 집을 지켜도 걱정 없는 동네 인심도 순했고, 한바탕 동네를 뛰어다니다 돌아와 젖은 털을 부르르 털어내며 영민한 눈빛으로 어린 남매 곁을 지키던 메리도 순했다. ‘쇠고기 맛라면처럼, 다들 순하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요리는 라면이었다. 적어도 1963[1] 이후 태어난 한국인들에게, 라면은 거의 예외 없이 각인된 일생의 컴포트 푸드이자, 제 손으로 만들어본 최초의 한 끼일 것이다. 뭐든 스스로 만들어보고 싶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공간 부엌은 금기의 매력으로 가득한 곳이다. 신나고 경쾌한 칼질과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를 볼 때마다, 남자 아이건 여자 아이건 내 손으로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고 커다란 국자로 간을 맞추어 마법처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그 순간을 어서 빨리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연금술사의 의식과도 같은, 신비한 생성과 창조의 행위다. 이 마법과 같은 첫 경험의 순간, 염려 가득한 엄마의 눈길에서 벗어나 내 손으로 가스 불을 켜는 순간이 오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요리는 십중팔구 조리하기 쉽고 맛도 좋은, 망쳐도 크게 아쉬울 것 없게 가격까지 만만한 라면이기 마련이다.

 

물은 한 컵 반 정도. 가스렌지에 불을 켜고 물을 채운 냄비를 올린다. 3-4분 뒤 물이 끓어 오르면, 봉지를 뜯어 라면과 스프를 넣는다. 이때 스프를 먼저 넣어 끓일 것이냐, 라면과 함께 넣을 것이냐를 놓고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인국 전쟁의 씨앗이 된 달걀반숙 어느 쪽으로 깔 것인가에 버금가는 해묵은 논쟁이 걸려 있지만, 초보자에게는 지나치게 난해한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자. 3분이면 끝이라던 라면 조리법을 지키느라 참을 인자를 백 번쯤 쓴 것 같은 긴장의 순간이 지나가면, 드디어 라면을 맛볼 차례다.

 

, 뜨거! 김이 올라오는 냄비를 바라보는 눈길에 하트가 어린다. 이토록 간단한 레시피대로 끓여낸 첫 라면을 후루룩 들이키며 흐뭇했던 기억이 내 손으로 만들어낸 최초의 한 끼를 맛보는, 라면의 대중화 이후 거의 모든 한국인들의 첫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 강렬하고 구수한 첫 경험은, 스트레스가 정수리까지 차 폭발할 지경인 순간에도, 빡빡한 빵과 느끼한 고기에 질린 출장길에도, 얼큰 시원한 라면을 가장 먼저 생각나는 한국인의 컴포트 푸드로 각인되게 하였다.

 

위키피디아의 정의에 따르면 컴포트 푸드는 향수를 자극하거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생각나는 음식으로, 대개 탄수화물 함량이 높고 요리가 간편하여, 먹고 나면 확실한 포만감과 함께 기분전환이 되는 음식을 지칭한다. 심리학자 리언 레퍼포트[2]에 의하면 젊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컴포트 푸드는 치즈가 든 마카로니다. 말만 들어도 느끼한 이 음식은, 캔에 든 것을 꺼내 전자 렌지에 몇 분 덥히기만 하면 되는 간편 음식으로 많이 즐긴다. 미국인들이 녹아 내리는 치즈의 고소한 냄새와 함께 텅 빈 위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탄수화물의 첨병 마카로니를 사랑하는 것은, 국물을 사랑하는 탕반(湯飯) 문화의 민족 한국인이 끓는 물에 3분이면 오케이인 라면의 얼큰 시원한 국물과 든든하게 속을 채워주는 면발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4천만의 컴포트 푸드, 끓는 물에 풍덩~ 3분이면 끝!이라는 라면도 취향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의 개별화가 가능한 창의적인 요리가 된다. 된장라면이 절판된 뒤 라면에 고추장을 살짝 풀어 넣었더니 그 맛이 난다며 자랑하던 오빠가 생각난다. 한때 나는 청량고추에 김치를 넣은 극한의 얼큰이 라면을 사랑했다. 버터 입맛 아빠는 라면이 한참 끓어오를 때쯤 계란을 넣어 반숙을 만들고 불을 끈 뒤 치즈를 한 장 얹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느끼 버전의 라면을 엄마에게 주문하셨다. 식구들의 취향대로 만들던 이런 저런 라면을 떠올리다 생각난 김에 지인들에게  나만의 라면 비법을 들어보았다. 이것 참, 그때 깨달았다. 라면은 표준화된 레시피에 갇힌 인스턴트 누들이 아니라 4천만이 각기 다른 비법을 보유한 가장 친숙한 컴포트 푸드였던 거다. 위안이 되는 음식, 나를 가장 편안한 시간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음식, 그게 라면이었던 거다. 그 따뜻한 음식의 추억을 공유한 누군가가 가족이고 친구였던 거다. 오빠 먼저, 동생 먼저, 우리들의 다정한 컴포트 푸드, 라면인 것이다.   


 

*  *  * 



지인들이 공유해준 나만의 라면비법, 혼자 간직하기 아까워서 공유합니다. 혼자 있는 오후, 한번쯤 시도해도 후회 없을 검증된 레시피들이죠!

 

  • 얇은 냄비, 센 불에 확! 꼬들하게 끓여낸 양은 냄비라면~

  • 너구리에 다시마 한 장 더! 감칠맛의 결정체, 다시너굴라면!

  • 그릇보다는 뚜껑, 뚜껑보다는 국자에 담아 몰래 먹어야 제 맛, 나혼자라면!

  • 파랑 고추랑 송송 썰어 넣고 끓이면, 칼칼한 엄마표 라면~

  • 자체 예술 신라면은 그저 마늘 한 알만 추가해도 완벽, 넘사벽 신라면~

  • 여름엔 오른손+왼손, 두 손으로 비벼도 되는 비빔면!

  • 보이차 우려낸 물에 스프는 2/3! 궁극의 담백함, 보이라면~

  • 야구 볼 땐 단연코! 류현진~라면에 계란 풀어!

  • 부셔 부셔, 스프 가루에 찍어 먹는닷! 콜라랑 완전 콤비, 생쫄병라면!

  • 바글바글 뚝배기에 끓여먹는 레알찌개면!

  • 부산 오뎅 잔뜩 넣은 부산갈매기라면!

  • 묵은 김치 꼭다리를 넣어 끓인 씨~원한 국물에 노른자가 1/3쯤 익은 수란이 예술! 김장예술라면~

  • 팔팔 끓인 라면 불을 끄고 화룡점정! 노란 치즈 얹어 눅진하게 녹은 치즈라면~

  • 오징어 조각과 콩나물 한 웅큼의 마법, 해장라면~

  • 냉장고 청소하고 먹는다! 각종 남은 야채와 쏘세지 투하, 완전 식품 꼬투리라면~

  • 김치, 스팸, 비엔나 쏘세지에 오뎅, 양파, 양배추까지. 호화롭게 부대라면~

  • 참치랑 김치 넣어 맛없는 경우는 없다! 찰떡궁합 참치김치라면~



[1] 1963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삼양식품에서 라면을 발매했다.

 

[2] 누들(크리스토프 나이트하르트,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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