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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09시 03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03.



1. 저자에 대하여 

 

■ 이순신 ■


•출 생

1545. 3. 8.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 출생 / 1598. 11. 19.

•활동분야

조선시대 무인. 군관. 삼도수군통제사.

•발 자 취

자는 여해(汝諧) , 시호는 충무(忠武)

1572. 훈련원 별과 시험 응시하여 불합격

1576. 식년무과 병과 합격, 32세

1580. 발포 수군만호가 됨

1582. 서긱 모함으로 수군만호 파직

1587. 조산보 만호, 조산보 근처 녹둔도의 둔전관 겸임,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1차)

1589 전라도 정읍현가

1591.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승진

1592. 거북선 완성,

4.13 임진왜란 시작 5.7 옥포해전, 합포 해전, 5.29 사천포 해전을 치룸. 완쪽 어깨 탄환 맞고 부상.

6.2 당포 해전, 6.5 제1차 당항포 해전, 6.7 율포 해전, 7.8 한산도 해전(학익진 해전), 7.10. 안골포 해전,

8.29 장림포 해전, 9.1. 화준구미, 다대포, 서퍙도, 절영도, 부산포 해전,

1593. 웅천포 해전, 일본 서진 막기 우해 견내량 봉쇄, 본영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정철총통 제조,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임명 교지 받음

1594. 제2차 당항포 해전, 명나라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항의, 9월 1차 장문포 해전, 10월 2차 장문포 해전

1595. 2월 둔전경영, 우수영 시알, 5월 수군 경영위해 소금 제조

1596. 2월 둔전 경영, 5월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위해 여제를 지냄

1597. 2.26 서울 압송 3.4 감옥 수감 4.1 감옥 나옴. 2차 백의종군,

4.13 모친상, 7.23 삼소수군통제사 재임명, 8.28 어란진 해전,

9.7 벽파진 해전, 9.16 명량해전, 10.14 아들 면 전사 소식 들음, 10.29 고하도 수군진영 설치

1598. 2.17 고금도 수군진영 옮김, 7.16 명나라 수군과 연합함대 편성, 1

1.19 노량해전. 이순신 적의 유탄 맞아 전사. 10명의 조선 장수 함께 전사

•저 서

난중일기

정조 19년(1795) 왕명으로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순신의 유고집 <이충무공전서>가 간행.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 그는 이.순.신


어릴 적부터 이순신은 위인이었다. 어린 내 기억 속에 너무나 당연했던 영웅 이순신. 우리나라의 위인전은 늘 그랬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명확히 이 사람은 ‘위인’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남과 다른, 뛰어난’ 특성을 갖추고 있어서 ‘아, 그래서 위인이구나’ 하게 만들었다. 한국적 위인전은 늘 특별했던 이들이 결국 특별한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늘 사람냄새 가득한 이들을 만나기보다는 경직된 듯 보이고 위엄에 가득찬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을 만나야 했다. 특히나 한국화폐공사의 모델이신 이순신인데, 아무리 지폐 아닌 동전모델이라도 그 위엄을 잊을리 있을소냐.

강제적으로 이순신은 자동 위인이 된 사람이다. 내 스스로 그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가기 보다, 내가 생각하는 위인과 영웅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기 전에 이미 위대한 영웅이며 위인이라는 도식으로 자리잡은 사람...그리고..또 어렸던 어느 날, 선생님은 이순신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원균의 모함으로 죄를 추궁받던 중 전쟁으로 다시 그의 자리에 복귀되었을 뿐이라 전쟁이 끝나면 다시 감옥으로 가게 될 것이었기에 죽은 것으로 위장하였다는,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이순신이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래서 그에 관한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왔음에도 딱히 재밌지 않은 이야기, 더 들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던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경남에서의 이순신 사랑은 더욱 각별하여 곳곳에 이순신 동상과 이순신 관련 문화유적지 조성이 이어지고 있었고, 연구원에서는 남해안 특별법과 더불어 이순신 프로젝트가 중대한 과업이었다. 이순신이 먹었던 이순신 반상이 만들어져 있고, 이순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금만 이순신과 걸쳐져 있으면 이순신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순신 프로젝트 중 ‘거북선을 찾아라’ 프로젝트, 해저유물탐사도 있었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차이, 이순신이 전쟁에 사용했던 총통들이 기억나는 것도 대대적인 프로젝트라 본 기억이 있다. 선거철이면 이순신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야기도 무지기수다. 어느 때인가는 이순신의 리더십에 과한 주제로 김훈의 초청강연까지 있었다. 그렇게 이순신 관련 보고서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보고서들이 넘쳐나고 이순신 강연이 이뤄지던 그 때에도 이순신은 ‘일’로 만나고 스치는 사람이었을 뿐, 강연의 내용보다 강연자에 더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 이순신!’이라는 공명을 느끼지 못했다. 딱히 느낄 여유도 없었거니와 이미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봤던 난중일기를 읽으며 타인들 때문에도 너무나 기대를 했던 탓일까. 몇 장 넘기고서 ‘이게 뭐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다 인가? 계속 이런 형태인 건가? 반복되는 ‘공무를 보았다’를 보면서 선생님들이 절대로 일기를 쓸 때 쓰지 말아야 할 구절로 강조했던 ‘나는 오늘 ~했다’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도대체 이순신은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무를 보았다’는 한 줄을 일기라고 적고 있는 건가. 이것은 일기가 아니라 그의 업무일지였던 것인가. 몇 번 본 난중일기의 내용이 이렇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라는 생각과 더불어 기대의 강도가 0을 향해 추락해 갔다. 계속. 그렇게 나는 난중일기를 읽었다. 0에 정지된 바늘이 올라갈 때까지.


이.순.신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로 두 형의 이름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그의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부모는 아들들이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한다. 그렇게 이순신의 인생은 임금을 섬기는 ‘신하’에 방점이 있는 것일까.


그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이순신은 무인이 되고자 했다. 그가 무인이 되고자 결심한 나이는 스물하고도 두 살 때였다. 그 당시의 연령대로 보면 늦은 나이라고 생각되는 그 때, 그는 하나의 꿈을 가지고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대대손손 문신 가문이었던 그는 그렇게 그는 무예를 닦기 시작했고 스물 여덟에 훈련원 별과 시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말에서 떨어져 실격되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32세가 되어서여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그는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다 47세가 되어서야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수군절제사가 된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이순신의 이름이 지금까지 드날리게 된 것은 임진왜란의 전투 때문이다.

전쟁에 참전한 이순신은 열세의 상황에서도 승승장구한다. 경상도 경상도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며 승리하였고, 잦은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1597년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된다.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죽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게 되면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전장을 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나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단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삼십여 척과 싸워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을 맞닥뜨려 싸운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무인이 되고자 했던 이순신은 무인으로서 죽었다. 그리고 그의 무인으로서의 기록을 남겼다. 문인이 되고자 했던 어린 날의 글공부 덕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어려서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현재 그의 사당인 현충사와 묘소가 이곳에 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그의 벗 유성룡을 만나게 된다. 그보다 3살 위인 유성룡과는 평생 벗이 되었고 일찍 벼슬길에 서 있던 유성룡은 이순신의 사람됨됨이를 칭찬하고 천거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회고한 글이 있으며 이순신이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활달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글씨를 잘 썼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1565년(명종 20) 20세의 나이로 상주 방씨(方氏)와 결혼했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고, 과거 급제 기록이 없는 군수라는 관직을 맡고 있었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1567년 출생), 이울(, 1571년 출생), 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가 무인이 되고자 한 것은 결혼 후라고 한다.


이순신은 무인이 되고자 한 10여년 뒤에 무관이 되지만 여러 곡절을 겪게 되는데 선조 12년인 1579년 2월 서울에서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어 근무하던 중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여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었다. 계급제가 철저하던 조선 시대에 낙하산 인사에 대한 반대의견을 편 이순신의 행동은 놀라울 만하다. 이 사건으로 이름이 알려진 탓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는데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때에 이순신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게 되었다. 이 때에도 이순신은 직속상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볼 때 이순신의 강직함과 올곧은 기개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순신의 성품이 다른 이들에겐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온 서익은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이순신을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시키게 만든다. 1581년(선조 14) 5월의 일이었다. 그가 수군만호가 된지 일년도 채 되지 못한 때였다.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 10월 건원보(현, 함북 경원군) 권관으로 나가게 된 것인데, 이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으로 다시 한달만에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 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이듬해 1월에야 소식을 전달받은 이순신은 3년상을 치루고, 1585년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현, 함북 경흥) 만호로 특진해 변방으로 나가 1587년 8월 녹둔도(현, 두만강 하구의 섬)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이 지역의 위험성을 알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곳이다. 아군 11명 전사, 군사와 백성 160여 명 납치, 말 15필이 약탈되었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지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하여 이순신과 이경록을 백의종군에 처했다. 그러나 1588년 1월 이일이 여진족을 급습한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반년 뒤에 이순신은 아산으로 낙향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 7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파격적인 승진으로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이 때가 임진왜란 1년 여 전이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에 의해서 일어났다. 왜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시작되어 7년 동안 이어졌고 이로 인해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효과적인 작전 수행으로 승리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은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나게 되는데 며칠 지나지 않은 4월 13일 그의 일기에 그토록 그리움과 애잔함으로 가득한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어 나흘의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정유년(1597)에 전쟁은 다시 일어났고 그 해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고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급속히 악화된 전황에 이순신은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서야 왕은 이렇게 전한다.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그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고 이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명량(鳴梁)해전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뤘다. 그러나 곧 아들의 셋째 아들 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지의 통곡하는 마음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10월) 14일 신미. 맑았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써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그리고,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적이 쏜 유탄에 맞은 이순신은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54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참고 자료



이순신 세계화 사이트 (http://yisunsinkr.prkorea.com/)

네이버캐스트 '인물과 역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10)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역자 서문


p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의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일기다. 임진년(1592) 1월 1일부터 무술년(1598)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짜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냈었다. 충무공이 무관 출신의 장수로서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 기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난중일기는 그의 문력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p7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직접 초서체로 작성한 것이다. 알아보기 어렵게 흘려 있어서 후대에 해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해제


p10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지금의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내침에 대비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 제조에 착수, 왜구를 막기 위해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해상과 육지전을 모두 대비해야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듬해 임진년(1592) 3월 27일에는 새로 만든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는 시험도 하였다.


p10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은 20여 만 명을 동원하여 배로 대마도로부터 온 바다를 뒤덮고 몰려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 끝이 보이지 않게 적이 몰려오는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했을지.


p10 그처럼 성실하고 면밀하게 작성된 일기에는 특이한 점도 발견된다. 예로 전쟁은 임진년 4월 13일에 일어났지만 전서본 난중일기에는 1월 1일자부터 적혀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년에 귀선을 만들고 군대를 정비한 것처럼 일기도 전쟁에 미리 대비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p11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은 주로 일신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p11 후대인들이 일기 문학 작품 중에서도 특히 난중일기를 대표작으로 손꼽는 이유는 결코 임진왜란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순신의 유일한 저작이라는 사실에 더해 작자 자신이 7년 동안 전쟁을 직접 체험하며 남긴 사실 기록이라는 점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 남아 있는 일기들 각각마다, 제각각의 특징으로 대표적인 일기라 손꼽던데....?^^:::


p13 난중일기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 일 등이며, 그 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임진, 계사, 갑오 일기) 또한 공사간의 인사 문제와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했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 일심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품목 목록도 적혀 있다.


p13 큰 전쟁이 일어난 해에는 일기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누락이 심한 반면 큰 전쟁이 없었던 해는 비교적 일정하게 이어져 있다.


p14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있어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한 한 해였다. 그는 정유일기 4월 13일에서 ‘모친의 상사로 매우 애통하여 다 적지 못하고 뒤에 대강 추록한다.’고 하였다. 제때에 글을 다 적지 못한다는 말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암시하고 있다.


p16 <충무공유사>는 이순신과 관련된 내용을 적은, 전사년, 전사자 미상의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이충무공 종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거승로 현재는 현충사 유물전시관에 초고본 난중일기와 함께 소장되어 있다. 이 기관 관계자의 기록에 의하면 “언제 누가 기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충무공 가문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짐작한다고 하였다.


p19 전서본을 만들 때 삭제한 내용으로 추정되는 을미일기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난중일기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기록이었다면 이것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을 위주로 적은 것이다. 특히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준다.


임진년 (1592)


p49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 기회가 기회인지를 모르니 후회를 할 겨를도 없다.


P54 2월 8일 맑았지만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스물아홉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았다.

⇒ 일기에서의 첫 거북선의 기록이라...


P54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더불어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은 참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통사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 한다.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 해괴하고 분통하고..이러한 문장들이 난중일기에는 많이 보인다. 그렇겠지. 전쟁이 아닌 일상을 늘 전쟁처럼 바라보며 분통해 하는데, 하물며 전란에서야.


p63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늦게 여필이 떠나갔다. 홀로 객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 또한, 이러한 글들도 많이 보인다. 홀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정자에 앉아 온갖 생각을 하는 일들이...심란한 그의 마음.


p66 5월 2일 왜적의 소식을 한 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군기 등의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오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 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

⇒ 전쟁 중에 장수가 기꺼이 싸우려 하는 이들을 만나면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꼭 한둘쯤은 피하려는 자가 있으려니. 어딘들 그렇지 않으랴. 하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p71 8월 24일 맑음. 아침밥은 객사 동헌에서 정영공과 같이 먹고 곧바로 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정 조방장도 함께 했다. 신시(오후 4시경)에 배를 출발시켜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삼경(자정 무렵)에 달빛 아래 배를 몰아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니 동녘은 벌써 밝아 왔지만, 새벽안개가 사방에 끼어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p71 28일 맑음. 새벽에 앉아 꿈을 기억해보니,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나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 또한 난중일기에서 많이 보이는 문장들. 꿈을 꾸었다. 꿈을 점쳐 보다. 유독 이순신은 꿈에 대해 민감하다. 늘 꿈 꾼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해석한다. 융을 보고 나서인지 이순신의 꿈에 대한 기록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관심이 쏠린다.


p71 일본은 해중 지역에 살고 있어서 비록 추운 겨울을 만나도 바람이 오히려 따뜻하여 장정들은 짧은 소매 옷만 걸치고 긴 옷에 겹주름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이제 흉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풍토에 익숙지 않아 한겨울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내기 어려워할 뿐 아니라, 군량이 이미 다함에 기력 또한 다하였으니,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왕실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한 해가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음 섬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 나폴레옹도 기후를 잘못 판단해 전멸하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 괜한 말이 아니다. 전체적인 조망도 필요하고 세밀한 것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


p75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 난중일기는 그의 부하들을 생각하는 마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윽하다고.


계사년 (1593)


p77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 없네


p84 22일. 매우 통분하였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를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 때문이다. 돛을 펴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 또한 많이 보이는 글. 원균에 대한 토로다. 원균과 이순신의 악연은 알고 있다. 다만 구체성을 모른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곳곳에 원균에 대한 비난과 한탄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백성을 생각하고 임금을 생각하고 모든 일에 다정인 그가 줄기차게 한 사람을 미워하고 그의 나쁜 성정을 토로하고 있으니 재밌다고 해야 하나. 그리하여 원균에 대해 더 알고 싶으나 이순신은 그냥 싫다라고만 하고 있다. 조금 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원균의 행사는 어떠했는지를 알아 그저 ‘이미’ 알고 있는 원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들과 함께 원균의 행동을 보고 싶은데 이순신은 구체적으로 적지 않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기록이니, 역사서가 아니니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의 감정이 그토록 울분에 이르게 된 원균의 행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p84 원수사는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p85 28일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 참사의 사후선 두 척이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는데 그 하는 꼴이 황당하므로 묶어서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본뜻은 군관을 보내어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들을 찾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초경에 아들 염이 왔다. 사회랑에서 잤다.


p86 30일 종일 비가 내렸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장수가 웅크리고 앉아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애처롭다.


p86 3월 2일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p93 요즘 도내의 인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후퇴시킨 뒤로 군대의 사정은 근심에 괴로워하고 원망하여 바로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릴지라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음이 있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은 필시 이러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 이순신은 홀로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세심히 그의 전장을 살피고 또한 사람을 살핀다.


5월


p104 글로 적기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이어 적는다.

⇒ 전장에 아닌 곳에 있으면서도 나도 늘 글 적기를 잊는다. 잊는다기보다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하다. 전장에 있음에도 늘 충실한 그의 기록을 보면 놀라웁다.


p105 4일 맑음.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 그의 기록에서 보이는 글, 늘 어머니를 그리고 기리는 아들.


p108 13.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이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

⇒ 얼핏 닭이 울고서야를, 장군이 울었다로 봤다.


p116 30일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윤봉사가 일 때문에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군량미 열네 섬을 싣고 왔다.

⇒ 정말 가소롭다.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위험지역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6월

p117 3일. 새벽에 맑더니 늦게 큰 비가 내렸다. 상선에 연기를 그을리기 위해 좌별선에 옮겨 탔다. 막 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었다. 한심스럽다.

⇒ 통영 제승당에서 이순신의 활쏘기 하는 곳을 보았다. 활을 쏘는 곳과 과녁 사이가 멀었다. 그리고 다시 활을 뽑기 위해 그곳을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그는 늘 그 거리에서 활쏘기를 연습하였던가.


p119 5일 종일토록 비가 쏟아져 사람들이 머리조차 내밀지 못했다.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저물녁부터 바람이 불더니 매우 거세져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이홍명이 왔다가 저녁식사 후에 돌아갔다. 경상 수사가 웅천의 적들이 혹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공문을 보내어 토벌하자고 하였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7월


p130 1일. 맑음.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p130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 시를 외우고 시를 짓고.


p134 29일 새벽 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다.


8월


p133 1일 맑음. 새벽꿈에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그 모습이 서울과 같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영상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임금님의 파천하신 일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는데 적의 형세는 이미 종식되었다고 말했다. 서로 일을 논의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무수히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p134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는데다 적을 소탕하는 일도 늦어지고 마음의 병도 침중하여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들 염의 아픈 데가 종기가 생겨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나왔는데 며칠만 더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 했다.”고 한다. 매우 놀랍고 한탄스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고 하니 다행임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라. 의사 정종의 은혜가 매우 크다. 

 

⇒ 그가 늘 병환으로 몸이 아프다고 하는 것처럼 그의 아들들도 병환이 잦다. 그의 근심은 이처럼 가족의 병환 때문에도 더 깊을 것이다.

p137 1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p139 25일. 맑음.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 그의 꿈에서 적의 형상까지가 보인다. 늘 그는 꿈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p140 30일 맑음.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했다. 참으로 음흉하다고 할 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스물다섯 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칠팔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다.


9월


p144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갑오년 (1594)


p147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p150 19일 소비포 권관(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어 간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원수사, 공여수, 이극성 들이 서로 눈독 들인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 참혹하기 이를데 없다.


p151 20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춥기가 살을 에듯 하였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 군필품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라니.


p157 몸이 불편하여 저녁 내내 누워서 신음했다. 큰 바람과 파도로 배들을 고정하지 못하여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2월


p157 3일 맑음. 새벽 꿈에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식후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p157 5일 맑음. 새벽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장 바위가 첩첩인 큰 산마루로 올라가니 산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그것이 무슨 징후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 눈이 먼 말을 꿈꾸다 다시 좋은 말의 꿈을 꾼다.


p158 바다의 달빛이 맑고 상쾌하여 잠들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p158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었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았다.


p159 아침에 미조항 첨사(김승룡)가 와서 만났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다. 종사관의 공문 세 건을 작성하여 보냈다. 식후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술 열 잔에 취하여 말에 광기가 많았으니 우스운 일이다.


p161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임시방편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들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3월


p164 수군이 많이 잡아오지 못한 일로 그의 수사(원균)가 매질을 하고 또 발바닥까지 치려고 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p176 오후에 원수사가 왜군 세 명을 붙잡아 왔기에 문초해 보니, 온갖 속임수를 쓰므로 원 수사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케 했다. 우수사도 왔다. 술을 세 순배 돌린 다음자리를 피하고 돌아갔다.


p176 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

p178 온종일 홀로 앉았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었다.


6월

p181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을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 원균은 도대체 잘하는 것이 무언가.


p182 11일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스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저녁 바람이 몹시 사나와져 걱정이 더욱더 심해졌다. 충청수사가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 달빛 아래 옥피리 소리, 소리를 듣지 않아도 처량하다. 그 처량함 속에 그는 또 홀라 앉아 있었다.



7월


p187 밤 이경 말에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는데 빗발이 삼대 같아서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p188 12일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또 면의 병세가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 애타는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유상(유성룡)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훼방하는 것이라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 유성룡은 그의 절친이다.


p189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다.


⇒ 어김없이 뒷날의 일기에 비가 내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꿈에 관한 점괘는 늘 제대로인가보다.

p191 19일 점심을 올린 뒤에 경상 원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지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 원균의 상차림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인가, 그것마저도 보기 싫은가.


p193 21일 저녁에 소비포 만호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원수사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한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빌려 갔다.


p195 27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의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는데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했다.


8월


p195 2일 초하루 자시에 꿈을 꾸린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쫒아 버렸다.

⇒ 부안의 첩? 이순신도 첩을 두었구나.

p198 원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여덟 순을 돌렸는데 원수가 몹시 취하여 자리를 파하였다.


p200 28일 아들 회가 편히 잘 갔는지 몰라서 몹시 염려되었다. ..원수의 장계로 인해 문책하는 글이 내려왔는데 급히 올린 장계에 오해가 많았던 것이다.

⇒ 아내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아들을 보냈다.


p201 30일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평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듯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곤양 군수가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아쉬웠다. 이경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늘 전장에 있는 그의 걱정은 이것이었을지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9월


p203 1일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 보니, “종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 것인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을 소식을 들을 징조다.

⇒ 그의 꿈이 길한 꿈이면 나도 기쁘게 된다.


p206 20일. 새벽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나 비가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흔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11월


p218 25일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과 서로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였다.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구태여 음탕한 계집을 두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또 수군 각 관청과 포구에 육전의 병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 켜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 아, 이런 한바탕 꿈이었다나니. 늘 잠을 잘 자지 못하는듯한데 거기다가 꿈을 꾼다.


p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p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병신년 (1596)

1



p230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이경명과 장기를 두었다. 장흥부사가 와서 만났다.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지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쓴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오늘이 바로 회가 전안하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 걱정에 시달리고, 다른 이들의 간계와 모험에 시달리니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2월


p233 9일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홀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다른 이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이 되어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의 움직임이 기이하다고 할만했다. 기이한 상서로움이 많은 것 같기에 적었다(일기초).

⇒ 꿈에서도 그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 그의 삶에서도 그러하였다.



6월

p252 조형도가 무고하여 장계하되 “수군 한 명에게 날마다 식량 다섯 홉, 물 일곱 홉씩을 준다”고 했다니, 인간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물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 인간세상일이란....늘 그렇지. 천지간에 이런 일들..천지간의 모든 일들, 사람 사귐의 일들도 모두 다 놀랍다.


7월


p256 1일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인종)이라 공무를 보지 않고 홀로 누대에 기대고 있었다.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일기초)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9월


p270 선수사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이 시를 비단에 적었다.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이 슬픈 정만 남으리

⇒ 이별이 정으로 남은 사람.


10월


p275 이날 밤 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 늘 날씨에 민감한 이순신. 오늘도 밤새 뒤척거린다.


11월


p279 15일 맑음.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는 생각에 품은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병신년(1596)


p289 12일 맑았으나 서풍이 세게 불어 추위가 갑절 더했다.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 다 의관을 벗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놓았다. 얼마 후 비바람이 억세게 퍼붓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를 되풀이하며 걱정하다가 말할 바를 알지 못했다. 일찍이 들으니 영의정이 천식이 심하게 걸렸다고 했는데 잘 나았는지 모르겠다. 척자점을 쳐 보니 바람을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 지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괘는 매우 좋다.

⇒ 척자점이라는 것도 있네. 이순신이 치는 모든 점괘들, 나도 한번 쳐볼까나.


p290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번잡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흥수를 불러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듣다가 밤 이경에 잠들었다.


p293 28일 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오시에 순찰사가 와서 활을 쏘고 함께 이야기했다. 순찰사가 나와 상대하여 활쏘기를 하여 일곱 푼을 졌는데, 섭섭한 기색이 없지 않았다. 우스웠다. 군관 세 명도 다 졌다. 밤이 되어서 취하여 돌아갔다. 우스웠다.

⇒ 얼마나 우스웠는지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5월

p317 6일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큰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비가 오기 전에 활 대여섯 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초저녁 무렵 총통과 숯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 때 조심하지 않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있게 한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울과 김대복이 배를 함께 타고 나갔다. 비가 크게 쏟아졌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했다.

⇒ 또 밤새도록.


6

p322 3일 흐림 아침에 제포 만호 성천유가 교서에 숙배했다. 김양간이 농사짓는 소를 싣고 떠났다. 새벽꿈에 어린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대여섯 달 밖에 안되었는데 직접 안았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금갑도 만호가 와서 만났다.

⇒ 그의 꿈엔 어린아이들이 왜 이렇게 나올까.


7월

p330 16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늦게 갰다. 북쪽으로 퇫마루 세 칸을 만들었다. 이날 충청도 홍주의 격군으로서 신평에 사는 사노비 엇복이 도망하다가 붙잡혀 수금되었기에 처형하여 효시하였다. 사천과 하동의 두 현감이 왔다. 늦게 활을 쏜 것이 세 번 관통하였다. 이날 저녁 바다의 달빛이 지극히 밝아서 혼자 수루 위에 기대었다. 이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p331 22일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종일 나가지 않았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었다.


8월

p334 4일 맑았으나 동풍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가 면, 조카 완 등과 함께 아내의 생일에 헌수잔을 올릴 일로 떠나갔다. 정선도 나가고 정사립은 휴가를 얻어서 갔다. 늦게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 늦게 대청으로 나가 활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오니 몸은 언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바로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녘 경상 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의 통증이 낮보다 배로 심하여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은 몰랐고 또한 마음 상하는 줄도 몰랐으리.


 8월


p341 12일 맑음.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여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 드렸다.

⇒ 어머니를 보고 싶은 그의 마음이 노를 젓는 손놀림을 빠르게 했으리.


p341 13일 맑음.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 늦게 하직을 고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유시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9월

p345 8일 맑음.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는데 나라 제삿날9세조의 제사)이라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침을 먹은 뒤 길에 올라 감목관에게 갔더니 감목관과 영광 군수가 함께 있었다.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저물녁에 동산원에 와서 말에 여물을 먹이고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에 이르니 여덟 살 된 이공헌의 딸이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과 함께 들어와서 알현했다. 공헌을 생각하니 참담한 심경을 이를 말할 수 없었다. 수경은 길에 버려진 것을 이염의 집에서 데려다가 기른 아이이다.


정유년1 (1597)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4월

p356 11일 맑음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서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 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p357 13일 맑음 아침 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나갔다. 도중에 홍찰방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 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냈을 때는 배가 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의 집에 왔다는 것을 듣고 홍찰방과는 작별하고 홍백의 집에 이르렀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후에 대강 적었다.


p357 14일 맑음. 홍 찰방, 이 별좌가 들어와서 곡하고 관을 짰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준비해 왔는데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했다.

 

p357 15일 맑음. 늦게 입관하였다. 아버님의 친구 오종수가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르게 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지 못하겠다. 관에 대해서만은 서운함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해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상복 만드는 일 등에 성심을 다해 주니 슬프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지 못하겠다.


p357 16일 궂은 비가 왔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p357 18일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p357 19일 맑음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지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노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하직을 아뢰었다. 금곡의 강선전의 집 앞에 당도하니, 강정, 강영수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였다. 또 보산원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와 있어서 냇가에서 말에서 내려 쉬고 갔다. 임천 군수 한술은 한양에 가서 중시를 보고 오는데 앞길을 지나다 내가 가는 것을 듣고 들어와 주문하고 갔다. 아들 회, 면, 울과 조카 해, 분 완 및 주부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원인남도 와서 만나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에 도착하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5월

p361 3일 아침에 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 의 음은 열 悅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p363 6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주관한다는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와서 이토록 근심하고 애달파한 것이니 비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형님들이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라 애통함이 더욱 간절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 것인가.

⇒ 하늘은 아득하기만 하고. 죽음을 바라는 그의 심정. 그의 고통이 너무 애달프다. 말로 할길 없는 전장에서의 이순신의 모습이 서럽고 서럽다.


p365 13일 맑음. 어젯밤에 부사가 이르기를 상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원균)의 일에 대해 많이 탄식했다고 한다. 늦게 정사준이 떡을 만들어 왔다. 순천 부사가 노자를 보내 주어 매우 미안하였다.

p368 21일 과천의 죄수 안홍제 등이 이상공에게 말과 스무 살 난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한다. 안은 본디 죽을 죄도 아닌데 여러 번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 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 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는 것이리라.

⇒ 즉게 되어 물건을 바치고 석방되다. 물건이 계집인가?


6월


p375 11일 어제 저녁 종사관과 이야기할 때 변흥백의 종 춘이가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어머님의 영연이 평안하신 것을 전한 것을 알았다. 사무친 애통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밤새도록 신음하는데 애태우며 고민한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 이날 아침 한산도의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썼다. 경의 모친이 보낸 편지 내용에 말하기가 매우 괴롭다며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하였다.

⇒ 그의 아이들 돌아가면서 아프다. 그의 근심은 끊일 날이 없다.


p376 16일. 맑음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와서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 그의 마음이 어떤지 아는데 무엇을 아뢰리.


p377 17일 아침 식사 후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많이 말했다. 

 

7월

p385 10일 맑음. 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여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구해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황종사관이 와서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늦게 서철이 와서 만났다. 정상명이 말의 뱃대끈을 종이로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답답하던 때 이렇게 탄식하곤 했지.


p387 16일 늦게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 그 꼴이 형편없어 어리석고 용렬해 보였다. 궁벽한 촌에 사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을 지켜서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 역시 소박하고 순후한 모습이다. 이날 낮에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는데 매우 예리하여 적장의 맨머리를 벨 수 있을 것이다.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떠나가는데 고될 것을 많이 걱정하여 침묵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p390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고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감정도 이와 같을까. 원균에 대한 원망소리가 높다.


p392 29일 늦게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었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8월

p397 25일. 맑음 그대로 어란포에 머물렀다. 아침 식사를 할 때 당포의 포작이 방목하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헛소문을 퍼뜨리되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헛소문을 낸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의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유년2


p407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8월

p411 17일 맑음. 이른 새벽에 길에 올라 백사정에 이르러 말을 쉬게 했다. 군영 구미에 이르니 온 경내가 이미 무인지경이었다. 수사 배설이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 사람들이 많은 군량을 임의대로 훔쳐 다른 곳으로 가져갔기에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날이 벌써 저물어 그대로 머물러 잤다. 배설이 약속을 어긴 것이 서운하였다. 

 

p411 21일 맑음. 사경에 곽란이 일어났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소주를 마시고 치료하려 하였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구토를 여남은 차례하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p412 22일 맑음.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용변도 보지 못했다.

⇒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는 것보다 용변도 보지 못할 정도라는 것이 더욱 실감나게 전해진다.


9월

p413 4일 맑았으나 북풍이 세게 불었다. 배가 고정해 있지 않아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

⇒ 해전에 임하니 늘 날씨를 걱정해야 하는 이순신.


p415 11일. 흐리고 비올 징후가 있었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불편해하였다. 

 

p416 1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그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이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로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 명량. 적은 배로 적을 섬멸한.


p419 16일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부르며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을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하니,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구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혹 몽둥이를 들어가 혹 긴 창을 잡거나 혹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기운이 다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사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아 죽이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넣은 붉은 비단 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어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

⇒ 명량해전을 승리고 이끈다.


10월

p424 14일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듣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 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 아들의 죽음을 보게 되는 부모의 심정.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통곡이란 글자가 모든 말을 막는다. 그 글귀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


p425 16일 막내아들 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통곡하지도 못했다.


p426 19일 새벽꿈에 고향집의 종 진이 내려왔는데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통곡을 하였다. 어두울 무렵 코피가 한 되 남짓 흘렀다. 밤에 앉아 생각하느라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이제는 영령이 되었으니 끝내 불효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어찌 알랴.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함을 억누를 수 없다.


11월

p430 1일 미시에 북풍이 크게 불어 뱃사람들이 추위에 괴로워했다. 나도 선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더니 마음이 무척 편치가 않아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 년 같았다.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북풍이 세게 불어서 밤새도록 배가 흔들려 사람이 안정할 수 없었다. 땀이 나서 몸을 적셨다.

⇒ 그의 하루 하루가 고되다. 그의 시간 시간이 고되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p432 23일 바람이 세고 눈도 많이 왔다. 이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하다. 아산의 집으로 편지를 쓰려고 하니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12월

p436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선전관을 통해서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진진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원칙)과 권(방편)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방편)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해남의 강간, 약탈한 죄인들을 함평에서 자세히 심문했다.


무술년 (1598)


p446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을 맡은 것이었다.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시끄럽고 대포 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 기개가 드높다. 그럼에도 애달프다.




3. ‘내가 저자라면’


■ ‘난중일기’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역자 서문

해제

일러두기


완역 난중일기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Ⅰ

정유년(1597)Ⅱ

무술년(1598)


교감본 난중일기

교감본 [임진일기]

교감본 [계사일기]

교감본 [갑오일기]

교감본 [을미일기]

교감본 [병신일기]

교감본 [정유일기]Ⅰ

교감본 [정유일기]Ⅱ

교감본 [무술일기]


난중일기 교감기

교감본 [임진일기]

교감본 [계사일기]

교감본 [갑오일기]

교감본 [을미일기]

교감본 [병신일기]

교감본 [정유일기]Ⅰ

교감본 [정유일기]Ⅱ

교감본 [무술일기]


참고 문헌

이순신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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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의 일기를 모은 책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작되어 그가 전사할 때까지 씌어진 일기이며 기록의 해는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 무술년(1598)이다.

이순신은 한글이 만들어지고 태어났지만 한글은 여전히 벼슬아치들에게서부터 널리 활용되지 못한 탓에 이순신은 전쟁 중에 초서로 몹시 흘려 쓴 일기를 남겼다. 특히 치열하게 전투가 일어난 해일수록 흘림의 정도가 심하였고 부분 부분 누락된 날들이 있다. 그만큼 치열하고 긴박한 날들을 이 일기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이순신의 일기는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었기에 후대에 이르러 그의 일기가 오독되어 전해진 글자가 많다고도 한다.

이 글은 그날 그날의 일들-그날의 날씨, 일어난 일들, 자신의 느낌과 감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년원일의 순으로 일기를 기록하며 하루에 한줄 기록을 남긴 날도 있으나 대체로 매일 매일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남의 일기를 읽는데 감동이고 뭐고를 따지는가. 그저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 아니, 격랑의 날들의 소소한 기록들이 애처롭고 애처롭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데, 공무를 보았다는 그 한줄마저도 마냥 가슴이 아린다.

 전장에서 기록한 그의 글 하나하나가 어찌 울림이 없을까. 갈수록 길어지는 그의 문장도 짧은 단문들도 그저 이순신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글들은 항상 애처롭다. 그리고 그의 기록들은 대체로 같은 패턴이다. 그의 일기 전반에 흐르는 이순신의 마음이 알리도 없음에도 나혼자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이 여겨진다.



■ 보완점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영웅 이순신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누차 들어왔다. 그렇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그의 일기 속에 늘 반복되는 것은 날씨.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임금과 나라와 부하 장수들에 대한 걱정들. 그리고 홀로이 외로움에 가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글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므로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적인 심정을 토로한 것이니, 그런 그의 글을 나중에 묶어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니, 여기에 목차이며 내용의 면면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 무엇하랴. 그가 작정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기록하겠다는 목적적인 글쓰기가 아니었을 터이므로 더더욱.

장수의 병무일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개인적인 토로인 것 같고, 개인적인인 토로라 생각하면 업무와 관련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다. 전쟁에서 어떻게 적은 무찌를 지에 대한 구체적인 병술일지도 아니거니와 기록된 글들을 읽다 보면 너무나 자질구레한 일들같이 느껴지는 기록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전쟁의 상황, 늘 긴장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그의 일상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신의 심정을 기술하면서 달이 밝은 밤에도 비가 오는 밤에도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그는 근심걱정이 마를 날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이라는 상황, 어지러운 나라에 중책을 맡은 책임감,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그의 일기는 자신의 마음을 가누기 위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시, 타인의 일기를 읽는 이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의 일기를 읽다 보면 답답한 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원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싶다. 그저 원균이란 자의 행태가 말이 간계하다라는 글만 적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떠한 원균의 행동과 처사가 그토록 다른 이들에게 애정을 가지는 그를 날이면 날마다 욕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글이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으로 적는 일기에 객관적인 사건의 개요를 요구하는 나는 참....

 날들마다 날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더욱 애잔한 마음이 가득한 느낌이다. 전쟁과 날씨, 그리고 병영의 소소한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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