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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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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09시 07분 등록

어느 날의 기록..



 4월에도 태풍이 몰아친다.

  번개가 들끓고 천둥이 몰아치더니 감당할 수 없는 세찬 비가 내린다. 지독한 폭풍이다. 기억에 치매가 찾아와서 과거 지금과 같은 봄날에 세찬 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때문에 이런 비가 반가울 리 없다. 어떻게 내리치든 천둥, 번개, 세찬 비의 3박자를 감당해내야 하는 하루는 버겁기만 하다.

  익숙할 지라도 폭풍은 무서움을 조장한다. 늘 마주쳤던 한여름과 초가을의 태풍은 어쩐 일인지 그러려니 하게 되는데, 4월의 천둥번개는 더불어 폭우는, 낯설다. 하늘의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있고 없던 모든 내 사소한 잘잘못들을 생각나게끔 한다. 그러한 잘못으로 혹여나 벼락에 맞는 것은 아닐까를 염려한다면 너무나 소심한 것인가. 아니면 정직한 것인가. 필시 내가 큰 죄를 지었다면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어떤 이유로든 벼락을 맞았으리라 생각하며 어제까지의 모든 소소한 잘잘못에 면죄부를 준다. 그럼에도 천둥번개가 그치기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대범한 사고라도 치고 벼락을 맞는다면 억울하지 않을 텐데, 지금이라도 사고를 쳐볼까라는 별별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천둥번개를 흘긴다.

태풍이 올 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나오는 텔레비전은 이미 4월의 폭우를 예상해 조심을 경고했고 이에 질세라 사람들은 이를 대비한 안내방송과 식량준비를 해 갔다.

  “낼은 태풍 온단다. 태풍. 나오지들 마”

  겁나게 내리는 비는 무조건 태풍이다. 사람들은 태풍을 피해 라면을 샀고 간식거리를 샀고 술을 샀고 담배를 샀다. 잔치라도 하는가 하는 사람들의 물음에

  “태풍이여, 태풍, 낼은 움직이지 마”

하며 서로의 조심스런 하루를 기원해댔다. 뭐 그렇다고 딱히 뭔 일들이라도 있겠는가 싶지만 말이다.

엊저녁 늦은 밤부터 조짐을 떨던 폭우에 맞춰 이른 움직임들을 한 때문인지 사람들 모습이 전혀 없다. 시계를 쳐다보니 8시 50분, 9시 30분, 이렇게 흘러들 갔다. 한없이 어두운 탓에 아침인지 저녁인지 전혀 분간되지 않는 시간을 마주하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은 새까만 크레파스가 부러지도록 덧칠한 것 같이 어둡고 그 어둠 속에서 한마디 하는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소리는 낮으면서도 무섭다. 쉴새없이 내지르는 소리는 리듬감도 없고 박자도 없다. 잠시 쉬는 듯하더니 또다시 터지는 소리 소리. 우르릉 쾅, 쾅, 쾅. 그 잠시 쉬던 틈을 타서 냅다 고구마와 무를 먹어댔는지 어찌나 기찬 소리로 꺼억 꺼억 끼어대는지, 멍멍한 귀가 적응될 틈도 없다.

  이런 폭우를 청승스레 헤벌쭉 하면서 쳐다본다고 노처녀끼가 다분하다고 악담을 해대던 은화년이 생각난다. 그네의 탁월한 영감과 예지력 덕분인지 그네의 예언에 한사코 다가가고 있는 바다. 그 애는 어디서 살고 있는지. 이렇게 예기치 않게 누군가가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이 최첨단 통신시대에 몇 다리만 건너면 필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지만 나는 찾아보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리워하고 보고파하는 건 아마 그 애가 아니라 그 애가 있던 그 시점의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니 자연히 떨어질 것들은 떨어지고 붙을 것들은 계속 붙어가더라. 나는 누군가에게는 계속 붙을 것들의 하나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또한 계속 떨어질 것들일 것이다. 새삼스레 그 틀을 삐거덕하고 싶지 않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겨둬야 제 맛이다. 애써 찾은 그리움은 한순간이고 할말 없어 머뭇거리는 정적은 항상 길었다. 오랜 시간 소식 없던 친구를 우연히 마주칠 때라도 그러할진대, 굳이 애써서 어색한 침묵을 만들 필요는 없다. 어쨌든 가끔 그리워할 친구들은 2~3년 안에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올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도 필시 나처럼 노처녀 진행 중일 테지.

폭우가 칠 때의 무서움도 그칠 때의 기대감으로 바뀔 때가 있다. 천둥번개가 돌아가고 난 다음 날의 하늘을 보라. 너무나 선명하고 투명하여 가슴이 벅찬다. 거리에 수북했던 오물도 싹 쓸려 없어지고 땅과 하늘이 오랜만에 통일한 이 역사적인 기운. 격랑이 지나간 다음 날의 이 치밀어 오르는 희열은 과연, 안도인 걸까.

 그러나, 왜인걸. 폭풍이 흘러간 이 동네에는, 늘 폭풍이 있었다. 요란하기 그지없고 청명한 하늘과 땅을 기대할 수 없는….

오늘도, 여전히 그 폭풍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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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8 10:46:20 *.134.108.144

칼럼이 헤르만 헤세의 단편 "폭풍"을 연상케합니다. '그 후 나는 어른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이 최초의 그림자가 침범한 어린시절의 나의 생을 계속하여 지탱하기 위하여, 나는 이 거리를 떠났다.' 어린 시절과 단절하여 새로운 시기로 들어가는 프라운 호퍼선같은 단절적 경험이 폭풍이라는 매개체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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