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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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졸라서 조조로 명량을 보러 갔다. 고증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데, 난중일기를 읽고 나니 명량 해전 부분을 어떻게 생생하게 그려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7시 40분 조조를 보고 나오는데,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많이 생각났다. 그 책의 첫 번째 장면도 바다에서 시작한다. 불타는 갑판 위에 서있던 앤디 모칸이 죽음을 각오하며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높은 밤바다로 뛰어든다. 주둔지를 옮기기 싫어하는 병사들에게 이순신도 말한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
난중일기를 읽는 내내, 장군님의 침묵에 비해 내 고민과 근심들이 너무 가벼이 여겨져서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장군님은 내가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꿰뚫어보는 듯 인자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귀신같이 힘이 될만한 말을 캐치해 해주실 것 같은데, 우리는 책으로만 만나서인지 아직 그런 경지까지는 가지 못했다. 다만, 그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는 다정하고 엄격한 말에 나는 그만 얼이 빠져 팍 엎어지고는 아직도 못 일어나고 있다.
그의 담담함에 위안받으면서도 나는 스스로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한탄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장군님,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작전을 짜신겁니까?’라고 물어서 뭐라고 대답을 들어도 나는 해낼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나는 겁도 많고, 마음도 약하고 기본적으로 매우 의존적이다. 감정이 매우 불안정하고 들쭉날쭉하니 다른 사람들 곁에 있기가 두렵다. 그러니 이런 기질적 한계까지도 잘 다스려 뭔가 쓸만한 사람이 되기에는 애초부터 그른 걸지 모른다.
그래도 면의 전사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구절 즈음에서 조금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ㅡ난중일기, 정유년2
작년 가을,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전어가 제철이던 무렵 방문했던 고금도 충무사에서도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산의 이순신 장군 묘처럼 영웅의 기개가 느껴진다기 보다 그곳은 조용한 사택의 뒷뜰 같았다. 고요하고, 사람들도 별로 찾지 않는다. 소나무 숲에 와 닿는 파도소리는 어딘지 애잔하다. 사당은 완벽하게 돌보지는 못 하는 것 같고, 계단 돌이며 나무 난간도 약간 모자라게 보수가 되어 있어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조선의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의 뒷모습을 모는 듯하다. 이곳에 오면 그가 나와 같은 선상의 인간으로 보인다. 충무사는 묘한 곳이라 그의 그림자에 슬픔의 크기가 전해진다. 소리 내어 울지는 못하지만 그는 온몸으로 슬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힘든 것도,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그는 모두 극복해낸 것이 아니었구나. 위로 퍼부어지는 온갖 시련과 아픔과 답답함들을 어쩔 수 없기에 그저 받아들인 것일 뿐이었구나. 그는 심지어 전시의 최고 사령관이라 사적인 일로 마음 놓고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차분하고 꾸준하게 스스로의 오늘에 충실했다.
그렇다. 어쩌면 큰 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이 중요한 것일지 모르겠다. 무관으로서의 이순신의 커리어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그는 시행착오를 하는 와중에도 오늘,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거라면 충분한 걸지도 모르겠다.
추악한 적에게 함락된 지 장차 두 해가 되어 가는데 국가를 회복할 시기는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ㅡ난중일기, 계사년
영화를 보고 난 우리는 바로 꽃을 한 다발 사서 절두산 아빠 유골을 모셔둔 곳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규정상 성지에는 어떤 물품도 두고 올 수 없어서 우리는 잠시 꽃다발을 유골함 앞에 세워놓고 묵상을 했다. 아빠는 이걸 전부 다 알고 계셨던걸까? 물어봐주지 않아 기다리느라 퍽 답답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을 그렇게 열심히 쓰신건가? 그래도 내 삶까지 도움 받을 수는 없다. 스스로 부딪쳐보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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