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녕이~
  • 조회 수 181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9월 14일 22시 10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창암이었다. 어린 창암은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먹는 등 개구쟁이 짓도 곧잘하던 소년이었다. 12세의 나이에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창암은 아버지에게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의 아버지는 청수리 이생원을 모시고 글방을 직접 차려 창암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많은 공부 끝에 응시한 과거에서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공부를 중단하기로 결심한다. 실리적인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3개월간 관상 공부에 매진하였으나 본인의 관상에 실망하고 이내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18세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가 된다. 이름도 김창수로 개명한다. 이듬해인 1894년 팔봉도 접주가 되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고 신천동 청계동 안진사댁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첫 진정한 스승인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된다. 21세의 백범은 중국으로 떠났다가 단발령 정지와 삼남 의병 소식을 듣고 이내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맨손으로 때려 눕히고 그의 칼을 빼앗아 가슴에 꽂고 만다. 그리고 거기서 흘러 나오는 피를 빨아먹은 후 을미년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보복하기 위해 일인을 시해하였다며 공표한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879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중으로서의 생활은 그의 천명이 아닌 것을 알고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절을 떠나게 된다. 결국 1899년 환속하여 해주 본향으로 돌아간다. 1900, 그의 나이 25세에 드디어 김구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1902년에는 여옥과 맞선을 보고 약혼을 하며, 기독교에 입교하기도 하였다. 1904년에는 드디어 최준례와 그녀가 공부를 계속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하게 되며 1905년 부터는 교육 사업에 매진한다. 1909년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복역 중 감형을 통해 1915년 출옥하게 되고 그 이후로는 농촌 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19, 31운동 후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을 역임했으며 1926, 그의 나이 51 6월에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백범은 즉각적으로 임시정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근본적인 개편을 해나갔다. 1928년부터 백범일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 보내기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국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사쿠라다몽 일본 국왕 저격 사건, 상해 홍구공원 일본 국왕생일 축하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세계 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그해 12 9일 바로 일제가 전란을 일으킨 다음 날, 즉각적으로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는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미국, 중국 등과 협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주 정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광복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 작전을 실시하는 등 열심히 독립의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5 815, 갑작스런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백범은 외려 우리 손으로 해방을 못 이룬 것에 대해 분개한다. 엄연히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임시 정부 산하의 광복군이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반대로 임시 정부는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진주하였다.

결국 백범은 그렇게 기다리던 해방 후 미군에 의한 임시정부의 해체와 신탁통치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는 외세에 기대기 보다는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길 바랬다. 지속적으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하며 교육 사업에도 열심히던 그는 결국 1949, 그의 나이 74세에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하게 된다. 백범은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추서 되었다. 그리고 그가 최후를 맞이한 경교장은 2013년 그의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 마음을 울리는 글귀
교감 원칙

5. 1) 현대성의 원칙 2) 순수성의 원칙 3) 비평성의 원칙 4) 현장성의 원칙 5) 보완성의 원칙


백범 출간사
13.
애초에 이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도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
유서 대신으로 쓰는 자서전이라니 더욱더 비장하게 느껴진다. 나 또한 추후에 자서전을 써본다면 어떤 느낌 일까.


14.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카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
정확히 그 당시의 현실을 꼬집는 것 같다. 물론 요즘도 우리는 자주 국가이긴 하나, 우리의 사상은 너무나 외세에 물들여있는 듯 하다. 나 또한 나만의 철학, 우리만의 철학을 탐독해본 적이 있었던가!

 

14~15.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 앞서 목숨까지 내 놓으며 우리 나라를 위해 힘쓰셨던 선조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렇게 소중히 지켜온 우리 땅을, 우리 나라를 우리는 어찌 지켜나가고 있는가. 왠지 탄식이 절로 나온다. 나 또한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고 싶지 않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에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왔다던 그의 인생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 또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지

 

백범일지 상권
*신 두 아들에게
19.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6~27. 나는 장련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아버님이 매 맞으시는 것이 퍽 시원하고 고소하였다. 할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들로 가서 수박과 참외를 실컷 사 먹이고,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종증조모 또한 아버님을 책망하시며 네 아비 밉다. 너희 집에 가지 말고 우리집에서 살자.” 하시며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해주셨다. 나는 여러 날 할아버지 댁에 묵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왔다.

>> 어렷을 적 위인전에서 읽은 이야기인 듯 한데, 이렇게 김구 선생의 자서전으로 읽으니 새롭다. 김구선생의 허물없음과 낙천적인 성격이 묻어나는 듯 하다. 이러한 웃어른의 무조건 적인 사랑이 그를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 키웠을 것이다.

 

27.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28.
아버님의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

29.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몸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

30.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 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
>>
자식을 위해 서당을 직접 만드신 부모님의 지혜가 놀랍다. 역시 부모의 사랑은 위대한가 보다.

 

31. 어느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33.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통감, 사략을 읽을 때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던 진승의 말,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행동, “빨래하는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한신의 사적 등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양어깨가 들썩거렸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37~38.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례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 부를 지어 과문 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나는 이처럼 과거길에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상의하였다.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하여 강가.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38~39.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 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 무엇 하나를 결심하면 열과 성을 다하는 선생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39. ‘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 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
습자지처럼 모든 지식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또 실천을 다짐하는 선생이었기에, 큰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저 좌절하기 보다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가히 본받을만 하다.

 

39~40.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

나이 열일곱 살 때 나는 1년간 일가 아이들을 모아 훈장질하면서 의미도 잘 모르는 병서만 읽었다.


42.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 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나는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43.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47.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판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 국가, 신 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어떤 곳에다 발을 드디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던 참이었다.

62.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분명히 살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일생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그르쳐 허다한 실패를 경험한바 민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다면 사랑도 하여 주시고 교훈도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못한다면 저의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고선생은 내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지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 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 김구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나 보다. 가감없이 본인의 상황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말이다. 아무튼 좋은 때에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그가 부럽다.


63.
그날부터 나는 밥을 안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겠고 고선생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고선생 사랑에 가서 놀며 지냈다. 선생은 고금의 위인들을 비평하여 주시고, 자기가 연구하여 깨달은 요체와 화서사언이나 주자백선중에 나오는 긴요한 절구를 가르쳐 주셨다.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실행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내게 보여주기 위해 책장을 접어두었다가 들쳐 보이곤 했는데, 그것만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열심히 나를 가르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천심수(문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절실히 필요한 바를 파악하여 말과 마음으로 전수하여 주는 것)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듯하였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며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
>>
정말 훌륭한 스승이다. 매우 과단성 있어 보이는 김구선생도 사실은 원래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니 놀랍기도 하면서 생각만 많은 나 또한 변해야 한다는 생각도 간절하다.


66.
지금은 누가 그런 뜻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자네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싶으면 그대로 실행하여 보는 것뿐이지.

3.
질풍노도의 청년기
86.
‘아비만큼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아드님에 대해 좀더 알지는 알겠소?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 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98. 먼저 왜놈 주인 이유를 국모보수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라고 밝히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 써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벽에 붙였다.

>> 참으로 호기롭다. 살인은 정당화되기 어려운 것이나 난세임을 감안할 일이다. 아무튼 이 일화만 보아도 김구 선생은 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100. 아버님도 다시 가원을 아니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104.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105. 어머님은 비록 농촌에서 생장하셨지만 무슨 일이나 잘 감당해내셨고 특히 바느질에 능하셨다. 무슨 일이 손에 잡히셨을까만,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리서 삼문 밖에 있는 개성사람 박영문이 집에 들어가셔서 이제까지의 일을 이야기하시고 그 집 동자꾼으로 써 달라 부탁하였다.


105~106.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ㄲ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다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 살리시기 위해 천중만금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 갈수록 나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더욱 느끼게 된다. 김구 선생이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부모님의 지극한 은혜 덕분인 듯 보인다.

114~115.
감리서 직원 중에서도 나와 이야기해 본 후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 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고,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일을 하여야 하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좋은 것만을 따와서 배우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이다.

 

119. 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럭저럭 저녁밥을 먹었다.


128.
나는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131.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마침내 두번째 생각이 이기고 말았다. 나오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스럽게 내 자리에 앉아서 눈짓으로 네 명을 하나씩 다 내보내고 다섯번째로 내가 나갔다. 나가서 보니 먼저 내보낸 네 명이 옥담 밑에 앉아 벌벌 떨기만 하고 감히 담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한 명씩 담 바깥으로 다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담을 넘으려 할 때, 먼저 나간 자들이 감리영과 옥을 통합하여 용동 마루를 송판으로 둘러막은 데를 넘느라고 요란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4.
방랑과 모색

136~137. “밥 좀 주시오하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사람은 듣지 못하고 그 집 개가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겠다는 듯 어지러이 짖어대는 서슬에, 주인이 머리를 내밀었다.

걸식을 할 터이면, 미리 시키지 않았으니 무슨 밥이 있겠느냐?”

여보, 밥 숭늉이라도 좀 주시오.”

>> 걸식마저도 이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니, 진정 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점점 선생에게 매혹된다.

 

137. 대로를 피해 시골 마을로만 길을 택하여 걸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를 가는 마을 사람 모양으로 인천부평 등을 지나갔다. 2,3년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감옥세계에서만 생활하다가 넓은 세상에 나와서 가고 싶은 곳을 활개치며 가노라니 심신이 상쾌하였다. 감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하면서 길을 갔다.
나는 정색을 하고 선생을 나무랐다.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는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 도망자의 신분으로도 시조와 타령을 부르며 상쾌한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그 낙천적인 마음과 호기로움이 멋지다. 또한 어떤 처지이건 본인에 대한 굳은 믿음을 잃지 않고 존중을 받을 줄 아는 모습도 존경스럽다.

 

152. “이 자리에서 노형과 결정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일단 절에 들어가 봐서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들 자 사이에 의견이 맞아야 하 것 아니오?” “그건 그렇겠소.”

곧 몸을 일으켜 마곡사를 향해 안개를 헤치고 걸음걸음 들어갔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 무조건 도전을 해보고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는 백범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듯 하다.


154.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155.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하도 많이 돌아다녔더니 나중에는 별세계 생활을 다 하겠다’ 이런 생각에 혼자서 웃다가 탄식하다가 하였지만 순종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
영웅이 운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156.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식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나보다. 기타 그의 행적을 보아도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바로 실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173.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지요”

174.
조금 누락된 것이 있다.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80.
,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
>>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기에 아마 김구 선생은 인복이 많았었던 듯 하다. 모든 이와의 인연을 살뜰히 챙기는 그 모습을 본받고 싶다.


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지극한 효심을 보여준다. 나는 부모님께 얼마나 지극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반성이 될 지경이다.


183. “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내 대답.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 아주 뚜렷한 기준이다. 김구 선생은 여러 번의 파혼과 부인들의 이른 영면으로 일면 처복이 없어보이기도 하나, 또 어찌보면 끊임 없이 여인과의 인연이 닿으니 여복이 있다고도 하겠다. 어찌됐건 본인도 아무 것도 일궈 놓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에게 저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자신감 있는 태도가 부럽다.

5.
식민의 시련

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 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
왠지 나 또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201. “죽은 말뼈를 오백 금으로 사는 것만은 아니고, 2세 국민을 가르치는 업무를 존대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리라. 나에게뿐 아니라 애국자라면 누구에게든 뜨거운 동정을 가지시는 것을 보았다.

202. “작은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 김구 선생의 이런 재치있는 대답이 나를 종종 웃게 만든다. 늘 침대 맡에서 이렇게 대응해줄 걸 하며 울분을 토하는 나로서는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그가 부럽다. 

 

203. 내 집안이 상놈 중의 상놈이지만 그대는 양반 중의 상놈이니, 상놈이기는 마찬가지라 생각되었다.

 

214.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정말 통탄스럽다. 왜 악인들은 쉽게 죽지 않는 것인지..

 

215.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221.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 나 또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큰 반성이 된다. 노력보다는 바라는 것만 많은 것이 아닌지..


236.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천배 만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
>>
참된 교육자의 자세다.

 

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 지독한 고문과 감옥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또한 비분 강개하고 가슴이 아팠다.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지킨 나라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또 아끼고 있는지 반성도 해보았다. 


239.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은 참 기쁘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죽는 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고 결심하였다.

246.
근 일고여덟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어주랴?”

우리 어머님은 참 놀랍다고 생각된다. 나는 17년 징역 선고를 받고 돌아와서 잠은 전과 같이 잤어도 밥은 한 끼를 먹지 못한 적이 있는데 어찌 이렇게 강인하신가 탄복하였다.
>>
역시 엄마는 위대한 가 보다. 강인한 어머니 덕분에 김구 선생은 더더욱 그 뜻을 굳건히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248. 그후부터는 나도 노는 입에 염불격으로 매번 식사 때에 나에게 전능을 베풀어 동양의 대악괴인 왜황을 내 손에 죽게 합소서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248~249.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옷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이른바 신부민이 아니고, 나의 정신으로는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왜놈의 법률을 복종치 않는 실제 사실이 있어야만, 내가 살아 있는 본뜻이 있는 것이다.


254.
그리하여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1.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267.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하고 호를 백범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거북)을 구(아홉)으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스러웠다. 또한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섬김을 전심으로 실천하는 모습 또한 존경스럽다.

 

269.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때는 그렇게 놀고 한때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6.
망명의 길
275.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하신다.

>> 지혜로운 어머님이다.

 

280.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나도 그놈의 오른쪽 팔을 힘껏 물고, 치하포에서 보인 방식으로 극단의 용기를 내어 저항하니, 노가는 그만 나의 물었던 팔을 놓고 물러선다.

>> 인간에 대한 따뜻한 눈을 잃지 않는 백범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강하게 대응한다.

 

290. “오늘이 선생님 생신이 아닙니까? 돈은 없고 해서, 의복을 전당하여 고기근이나 좀 사 가지고 밥해 먹으러 왔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290~291.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란 곳에서 혹을 떼러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 온 후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296.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31.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334. “선생님, 아이 좀 안아주시오, 내 맛있는 음식 해드리리다.” 하였다. 내가 아이를 안아주면 아이들이 잘 잔다고 하여, 부인들은 아이가 울면 내게 안겨주었다. 그런 까닭에 음식 박대는 받지 않았다.

 

335. 윤군의 기색을 살피니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농부가 논밭일을 나가기 위해 일찍 얼어나, 자던 입에 일부러 밥 먹는 것을 보면 할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348. 저씨 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 불볕 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349. 14년 동안 산수에 주렸는데, 10여 일 사이에 실컷 산수를 즐겼다.

 

352~353.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 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 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운동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마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4. 이후 아주 선중생활을 계속하였다.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 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

>> 물 흐르듯, 바람결에 따라, 살아가는 백범의 모습이 상상된다.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365.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서대문감옥에서 소원하기를, 천우신조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이 소원을 초과하여 최고직을 경험한 나의 책임을 무엇으로 이행할까 하는 생각에서 모험사어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 2개월 만에 상편을 완성하였다. 경과 시실의 모년 모일을 기입한 것은 본국에 계신 모친께 편지를 올려 답장을 받아 기입하였으나, 지금 하편을 쓰는 때에도 어머님이 곧 생존하셨더라면 도움이 많았을 터이건만, 슬프도다!

어머님은 본래 다른 여성들이 미칠 수가 없을 만큼 용감하셔서 안악 경찰서에 출국원을 제출하였다. 이유는 나이 늙어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생전에 손자 둘을 제 아비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안악 경찰서의 허가를 얻으시고 짐을 꾸리던 즈음, 경성 경시청에서 요원을 안악으로 파견하여 어머님을 위협하고 설득하였다.


367. 9
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였다.

>> 나 또한 이러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큰 욕심일까? 내가 봐도 너무나 멋진 여성이다.

371. 너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이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뿐이었다. 그리고는 당신이 손수 만드신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다.


5.
중정 임시정부와 광복군
386.
봉빈은 비록 여성이나 총명
과감하여 전시공작의 효과와 능률이 중국 방면에까지 널리 알려져 칭찬을 받았으며, 봉빈 자신도 항상 자기가 경이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392.
그 자리에서 나는 우리가 주의를 논의할 때가 아니고, 민족적으로 조국을 광복한 후 각각의 주의로써 당적 결합을 할 셈하고, 지금은 단일적으로 각 단체를 합동
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제의하였다. 대부분 내 말에 찬동하여 통일 공작을 개시하였다.

7.
고국에 돌아와서

403.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고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존자들은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 동포들이 저 지경을 당하였다면 어떠할까? 화가 나느니 성이 나느니, 홧김에 술을 마신다 성난 김에 싸움을 일으킨다 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태만하지나 않을까.’

>> 매우 감정적인 나에게 왠지 일침을 가하는 말인 거 같아 뜨끔했다. 얼마 전 나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려고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실리적일 필요가 있다.

 

406. 나는 종종 토교에 가서 도로 수선, 과수 재배, 축석, 제방 등을 직접 실행하면서 근로생활층을 동정하기도 하였다.

>> 김구 선생의 낮은 곳에서 늘 직접 행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408. 상해 전 동포들의 대성황리에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13년 전에 본 어린 아이들은 벌써 장성하였고, 장정들은 이미 노쇠하여 옛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409.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이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 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집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차창으로 좌우를 바라보며 서울에 도착하니 의구한 산천도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410. 도착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경득의 유가족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자제는 덕산으로부터 찾아왔고, 이봉창 의사의 질녀가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경득 선생의 아들 윤태는 이북에 있는 관계로 오지 못하고 그 친딸과 친척 등은 강화.김포 등지로부터 찾아와서, 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으로 서로 대면하였다.

>> 김구 선생의 의리는 어디가 끝일까. 3열사를 이렇게 챙기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412.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다음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느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413.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 산책을 한다며, 운동을 한다며, 때로는 데이트를 한다며 뻔질나게 드나들던 효창 공원에 삼열사의 묘가 있는 것을 왜 몰랐을까. 김구 선생의 기념관도 왜 진작에 가보지 못했었는지 이제서야 후회가 된다. 오랜만에 효창공원도, 그리고 경교장도 꼭 한번 방문해보고 싶다.

 

416. “제가 일곱 살 때 선생님 글공부하시던 좌석에서 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외 동족 중 한 사람인 김판남씨가 나와서, 48년 전 나의 필적이 완연한 책 한 권을 내보이며 옛일이 어제 같다고 말하였다.

그 중에 또 잊지 못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닌 48년 전 동갑 되는 선씨 한 사람이 있어, 나와 격의 없이 지내다가 내가 그 동네를 떠날 때, 그 부인의 손으로 만든 필낭 하나를 작별 기념으로 내게 주었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 선씨에 대해 물으니, “선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부인과 가족은 보성읍 부근에 거주합니다. 그 노부인 역시 옛일을 잊지 않고 선생님이 지금 가시는 보성읍으로 마중나온다 합니다.”고 소식을 전하였다. 그날 그 동네를 떠나 보성읍에 도달하니, 과연 그 부인이 전 가족을 거느리고 마중나온 광경은 참으로 감격에 넘치었다.

>> 김구선생의 인간미가 마구 느껴져서 가슴을 울리었다. 그 예전의 인연도 잊지 않고 꼭 찾으며, 또 그들 또한 짧은 순간의 인연을 잊지 않고 있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김구 선생이 그러했듯, 나도 만나는 수 많은 사람들과 가슴에 남는 인연을 만들어가고 싶다. 

 
420~421.
그러나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옛날 나를 따라 오시던 어머님 얼굴만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옛 추억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다. 중경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어머님 최후의 말씀을 생각하니, 그것이 이날 이 자리에 모자가 같이 옛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예측하시고 하신 말씀 같아 슬픈 마음을 진정키 어려웠다.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423~424.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5.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426.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

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

이다.  

 

2) 정치 이념

426.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427.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과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는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은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428.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428~429.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9.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하여 귀일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430.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431.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432.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최고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433.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란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 내가 저자라면

어린 시절 나는 위인전을 가장 좋아하여, 김구 선생님의 위인전도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그와 얽힌 에피소드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으로 접한 그의 전 생애는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연구원 과정을 하면서 이렇게 책이 술술 넘어가는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뭉클해하며, 때로는 가슴 아파하며 그에게 완벽히 매혹되었다. 백범은 진솔하게,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그의 과거를 기술하고 있으며, 일관되게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나의 소원은 전문이 가슴을 절절히 파고들면서 책을 덮는 것을 아쉽게끔 만들었다. 절로 애국심이 생기고 또 나의 마음 가짐을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책의 구성은 시간순의 흐름으로 독자들이 쉽게 따라갈 수 있으며, 군데 군데 에피소드들이 많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아마 백범은 타고난 이야기꾼인 듯 하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감과 편집이 탁월했던 것 같다. 어려운 한자 보다 한글로, 국한문 혼용이 어려운 것은 쉬운 현대문으로 풀어 쓰여져서 읽기에 매우 편리했다. 더불어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꼼꼼한 각주가 실제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며, 백범이 잘못 기록한 내용들도 바로 잡아주고 있어 정확성을 더한다.
책의 서두부터 ‘교감 원칙’을 상세히 밝혀두고 있는 것도 특별하네, 그러한 원칙에 의거하여 제대로 책의 완성도를 더했다는 신뢰가 간다. 책의 서두에 위치한 사진 자료들은 백범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보여주며, 중간 중간에 삽입된 사진들은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책의 마지막에 ‘백범 연보’를 기록한 것도 탁월한 배치라고 하겠다. 책을 덮기 아쉬웠던 나는 다시 한 번 연보를 보며 자서전 전체를 갈무리할 수 있었다. 백범의 행적 외에도 당시 역사적인 주요 사건들을 같이 기록하여 전체적인 이해도를 높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별도의 보완점을 찾기 어렵다. 가슴 찡한 감동을 안고 이번 주말은 경교장과 효창공원으로 가서 백범을 만나 뵙고 싶은 밤이다.

IP *.124.78.13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