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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4일 23시 34분 등록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본영의 터전인 논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 앙리 파브르

 

 

극강의 비주얼에 담긴 자비의 정신, (청어를 얹은 메밀국수) 니신 소바

 

메밀은 맛있다. 야들야들 메밀묵을 채 썰어 찬 육수를 부어먹는 묵밥은 한여름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쫄깃구수한 메밀반죽을 도톰하게 부쳐 튼실하게 속을 채운 메밀 전병은 찰떡궁합 막걸리를 부르고, 각종 나물에 여리고 쌉쌀한 메밀 싹을 듬뿍 얹은 비빔밥은 늘어진 위장에 살랑, 봄바람을 날린다. 심지어 볶은 메밀을 따끈한 물에 그냥 우려낼 뿐인 메밀차는 또 얼마나 구수한가. 그러나 뭘 만들어도 맛있는 메밀의 포텐이 터지는 곳은 단연코, 메밀로 만든 면발에서다. 메밀은 궁극의 국수 평양냉면과 천의 얼굴 막국수,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의 국민 국수 소바를 낳았다.

 

요즘 100% 메밀로 만든 소바나 메밀 함량이 높은 평양냉면은 밀가루나 고구마 전분이 주재료인 국수들보다 고급 음식으로 대접을 받는다. 메밀 단가가 워낙 높아진 탓에, 제대로 메밀 함량 지켜가며 면발을 뽑아내는 식당에서 국수 값을 비싸다 타박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나름 귀하신 몸이 되었지만, 메밀은 쌀이나 밀 같은 주식의 반열에 오른 적이 결코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국수의 재료에 있어서 주류는 과거에도 지금도 밀이다. 아마도 메밀을 주재료로 한 국수가 온전한 하나의 장르로서 사랑 받는 지역은 한국과 일본이 유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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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인들의 메밀 사랑은 유난하다. 같은 메밀로 만든 국수지만 냉면이나 막국수는 계절과 지역에 따라 선호도가 확연히 달라진다면, 일본인들의 소바 사랑은 지역이나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우선 소바는 메밀로 만든 국수를 뜻할 뿐 아니라, 일본어로 메밀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심지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 31일에 먹는 음식도 소바다. 도시코시소바라 부른다. 메밀 소바를 따뜻한 다시 국물에 말아 먹으며 행운과 장수를 비는 풍습이다. 아무래도 일본식 소바라 하면 대나무발에 올린 메밀면을 차가운 쯔유에 담궈 먹는 자루소바를 떠올리게 되지만, 일본에서 소바를 먹는 방식은 다양하기 그지 없다. 일단 먹어본 것들만 떠올려본다면, 자루 소바는 기본, 새우튀김이나 굴튀김을 얹은 뎀뿌라 소바, 무를 갈아서 넣은 오로시() 소바, 일본식 청국장 낫토를 다져 얹은 낫토소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카레 소바가 있는데, 물론 새 발의 피 격이라 하겠다.

 

일본식 국수의 탄생과 종류를 기가 막히게 분류해놓은 책인 오카다 데쓰의 국수와 빵의 문화사를 보면, 각 지역별 명물이라 할만한 소바만 해도 50종이 넘는다. (제분, 제빵, 제면에 대한 전문기술과 식문화사를 다룬 책이라 재미로 읽기엔 힘들지만, 저자 본인이 오랫동안 일본 굴지의 제분회사에서 일했고, 음식문화사 연구자인만큼 책에 기술자의 꼼꼼함과 연구자의 학식이 잘 녹아있는 역저라 진정한 면식인이라면 알아둘만한 좋은 참고문헌이다.) 그가 깨알 같이 적어놓은 각양각색 소바의 특성과 재료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의 식자재가 다양한 지방색을 만나 어떻게 응용되고 분화해나가는 지를 볼 수 있고, 간단하게나마 재료의 조합을 기술해놓은 터라 미지의 소바 맛이 상상되어 은근 재미나다. 가령 가와라소바의 설명은 이렇다.

 

야마구치 현 가와타나 온천의 명물 소바. 뜨겁게 달군 기와 위에 식용유를 넣어 볶은 차 소바(차를 넣어 반죽해 만든 소바)와 소고기, 달걀, , 파를 얹고 국물을 부어 낸다.

 

뜨거운 기와에 볶은 녹차맛 소바라니. 강한 불맛과 담백한 차맛이 만난 소바는 대체 어떤 맛일까?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이토록 무궁무진한 소바의 세계지만, 내가 경험한 가장 강렬한 만남은 일본의 고도 교토에서 만난 니신소바. 별 준비 없이 떠난 출장을 겸한 인센티브 여행이었는데, 나로선 일본이 처음이었고 회사의 각기 다른 부서의 상사와 동료 직원, 거기에 상사의 부인이 낀 어색한 5인조 여행팀 중 음식이건 관광이건 뭘 미리 조사할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도착 둘째 날인가?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는 교토의 거리를 헤메다 점심 때가 지나 접어든 골목길 안에서 국수 류를 파는 것이 분명한 낡은 식당을 발견했다. 그리고 벽에 붙은 비닐 코팅한 한 장짜리 특선 메뉴에서 발견한 충격의 비주얼! 간장 색깔 선명한 국물에 담긴 소바, 그 위에 떡 하니 누워있는 고등어인지 꽁치인지 모를 조린 생선의 까무잡잡한 자태라니그것도 한 마리를 통째로 얹었으니 반찬을 국수 위에 얹은 모양새인가? 등 푸른 생선과 메밀 소바와 간장 국물의 조합은 대체 어떤 맛이려나? 그 생선 위에 듬뿍 얹은 파를 보고 있자니, ‘나 정말 비려, 엄청 비려…’ 라는 생선의 독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12일의 벌칙 메뉴를 들여다 보는 심정으로 사진을 노려보던 우리 일행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이 문제의 메뉴를 시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졌다. 사실은 안 져도 시켜볼 요량이었지만. 맛이 있건 없건 이런 어마어마한 국수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면식인의 자세일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일어 문맹인 우리들은 그 생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끝까지 몰랐는데, 다만 낯설지 않은 다시 국물이 따끈했고 상상했던 비린내도 나지 않아 생각보다 먹을만한 국수라는데 동의했던 것 같다. 심지어 일본 가서 이런 엽기음식도 먹어봤다는 자랑을 할 심산이었던 일행은 맛이 무난하다는 데 되려 실망한 눈치였다. 여튼 충격의 비주얼과 무난한 맛으로 기억되는 이 소바와 생선의 정체는 무려 2년 뒤에야 알게 되었다. 최근 일본을 다녀온 지인이 교토의 명물 소바가게에 직접 들러 국수와 농축 국물, 조린 생선을 한 팩에 담은 니신소바셋트를 보내준 것이다. 이거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 감사한 국수조공을 받아보고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찾아본 니신소바의 정체는 이랬다.

 

교토의 명물 소바.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말린 청어(니신)를 쌀뜨물에 담가 불린 다음, 물러질 때까지 뭉근히 조린다. 소바를 국물에 말아 청어조림을 얹고 파를 곁들인다(오카다 데쓰의 '빵과 국수의 문화사' 중에서,).

 

이거였구나! 그제서야 2년 전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먹었던 국수가 니신소바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미스터리한 생선의 정체도! 우리에게는 겨울철의 별미 과메기의 원조로 알려진 생선, 청어였다. 니신소바는 1861년 창업한 마츠바라는 식당의 주인이 음식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영양결핍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위해 단백질 등 필수영양소를 보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린 청어를 소바에 넣은 내놓기 시작한 데서 기원했단다. 그랬더니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구휼의 목적으로 개발된 니신소바는 오늘날 교토의 명물이 되어 원조집인 마츠바는 150년 역사를 이어가는 교토의 대표적인 소바집으로 성업 중이라 한다. 지인이 보내준 니신소바는 바로 그 마츠바에서 사온 진짜배기였기에, 나는 이 셋트를 김치냉장고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집에 아무도 없는 오후, 신성한 나 홀로 점심 공양의 시간에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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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에 익힌 면을 채에 받쳐 물을 빼고 농축국물에 적당히 물을 섞어 끓인 다음 면발에 붓는다. 조림 청어는 살짝 덥혀서 면 위에 올리고 마지막으로 파를 듬뿍 올려주면 끝. 간단히 완성된 니신소바는 성실하고 다부진 옆집 청년 같은 느낌이다. 다시마와 톳을 우려냈다는 설명대로 바닷것 특유의 감칠맛과 개운한 간장맛이 감도는 육수에, 연한 미색의 메밀면이 구수하게 어우러지는 소바가 잘 어울렸다. 그리고 니신소바의 하이라이트, 면발에 올린 청어조림은 한번 말렸다 다시 불려서 조린 생선답게 퍼석한 느낌이었는데, 살짝 부서뜨려 국물과 섞으면 좀 더 진한 감칠맛의 소바를 맛볼 수 있었다. 내 입맛에는 조금 짠 듯도 했지만 걱정했던 비린내는 나지 않았고, 얇게 썬 대파와 함께 먹는 청어 조림은 그 자체로도 밥 반찬 같은 느낌이 나서 한 끼의 식사로 부족함이 없게 튼실하다. 18세기에 들어와서야 공식적으로 육식 금지를 해제했던 일본[1]에서, 청어를 얹은 메밀 국수는 싼 가격에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신통 방통한 발상이었던 거다.  

 

밀가루로 만들어 희고 매끄러운 우동이나 소면에 비해 어둡고 다소 거친 질감을 지닌 소바는, 비교적 척박한 지형에서도 잘 자라는 구휼식물 메밀을 십분 활용한 서민의 음식이었다. 그래도 청어를 얹은 메밀 국수라니대체 어떻게 그런 조합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함경도의 명물인 함흥식 비빔냉면도 원래 가자미를 삭혀 얹은 생선국수가 아니던가. 처음 접했을 때는 대체 어떻게 이런 생뚱맞은 조합을 생각해냈을까 싶은 낯선 음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문화적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한 토막! 가장 일본적인 국수, 서민의 국수라는 소바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두 명의 한국 승려들이라는 사실, 알고들 계시려나? 7세기 경 일본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제분기술, 즉 맷돌의 사용법을 전한 사람은 그 유명한 고려의 승려 담징이고, 17세기 경 소바 반죽에 밀을 섞어 넣는 제면기술을 전래해 소바의 대중화에 기여한 사람은 조선의 승려 원진이다. 일본 덴치 천황 때 세워졌다는 절인 간제이온지(觀世音寺)에는 담징이 만들었다는 네 구멍 맷돌이 온전히 남아있단다. 또한 원진이 본디 끈기가 없어 면으로 만들기 어려운 메밀반죽에 밀가루를 섞어 탄력을 더하는 기술을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메밀로만 만든 소바는 끓이면 쉽게 끊어지거나 풀어져서 에도 시대까지도 찜통에 쪄냈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식 메밀 소바를 내는 집에 가면 면을 대나무 발이나 나무 찜통 위에 담아내는 것은 이런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빵과 국수의 문화사)

 

*         *         *

 

최근 동네에 100% 메밀만 써서 만든 면발을 주문과 동시에 반죽하고 뽑아내는 소바집이 생겼다. 마을 버스만 간신히 지나다니는 골목길에서 소수의 면식성인들이나 알아줄 정통 일본식 소바집이 장사가 될까 싶었는데,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인지 날이 갈수록 번창 중이시다. 덕분에 일본까지 가는 수고 없이도, 주말이면 느긋하게 슬리퍼를 끌고 아이들을 대동하여 본격적인 소바를 먹으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내가 먹을 복은 타고났구나, 흥흥흐뭇해하다가 문득 든 생각! 아니지, 이것은 오로지 고매한 불교의 설법에 더해 더없이 유용한 생활의 기술까지 이웃나라에 전하신 팔방미인 스님들의 은공 때문이 아니던가. 내 이 다음 절에 가게 되는 날이면 두 분을 생각하며 평소보다 두 배로 보시를 하리라 결심하였다. 하지만 스님, 오늘은 일단 감사히 먹겠습니다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7세기경부터 육식을 금지했는데, 승려 계급만이 아닌 전국민에 해당하는 엄격한 육식금지령이 공식적으로 해제된 것은 19세기 중반인 메이지 유신에 들어와서였다. 무려 1천 여 년간 육식이 금지된 것으로 실제 일본에서 본격적인 육식의 역사는 이제 겨우 100년 남짓하다. 다행히 섬나라인 만큼 풍부한 해산물은 육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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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09:04:46 *.50.21.20

오늘 점심은 국수가 먹고 싶어서 종종님 칼럼에 들어왔습니다. 

다섯줄밖에 안읽었는데 너무 먹고 싶네용. ㅠㅠㅠㅠ 아웅 

찰진 글 감사합니다!


에움에게 전해들었는데 부산에 맛있는게 많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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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10:12:18 *.92.211.151

그러니까 놀러와~ ^^

에움이 맛본 건 새발의 피!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여유있게 한번 놀아봅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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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09:54:18 *.218.174.163

청어와 메밀국수....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먼.

담에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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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10:13:15 *.92.211.151

특이하지? ^^

와, 스페인 여행 후 못 본 건데 진짜 한참 된 것 같아. 얼릉 봅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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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16:03:29 *.252.144.63

국수책은 잘 마무리 되었는지요?

종종님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 국수가 마구마구 땡긴다니깐!

좋으 책이 나올 듯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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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10:15:38 *.92.211.151

머리를 싸매고 도피, 회피를 거듭하다 이제 정신차리고  달리고 있습니닷~

9월 말이 마감이라 이제 마라톤 하반기에 접어든 상황이예요.

작가의 기를 빌려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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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7 18:02:40 *.94.41.89

종종의 국수가 어서 나오길 바래요!

식당 메뉴판에서 국수 사진을 보면 옆에 종종 얼굴이 같이 보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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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10:16:46 *.92.211.151

나의 국수, 아... 좋다.

책 제목으로 종종의 국수도 좋을 것 같아. 블로그 제목으로 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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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9 08:15:33 *.50.21.20

블로그 제목으로 딱이네요. 

친근해서 다가가기도 쉽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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