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녕이~
- 조회 수 2002
- 댓글 수 5
- 추천 수 0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서 인지,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게 딱 좋았다. 엄마가 힘내라며 사주신 새 운동화는 착화감도 그야말로 최고였기에 나의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곧 바쁘게 지나가면서 잊고 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년을 오고 갔건만 처음 알게 된 동네 다리의 이름,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던 벽화들, 열심히 걷고 또 자전거를 타는 동네 사람들을 보며 나는 신이나 마냥 쫑알 쫑알 거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숨이 가빠왔고, 자꾸만 시계를 쳐다 보게 되었다. 결국 “몇 분 지났어?”, “아직도 멀었나?” “아 저기 우리 집에 가는 버스가 지나가네.” 라는 말을 내뱉으며, 지금이라도 버스를 잡아 타야 할지 마음 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차들을 보자 나의 마음은 더욱 애타기 시작했다. ‘언제 가나, 괜히 걸어가자고 했나’ 하며 후회가 밀려왔지만 싫다는 사람을 같이 가자며 억지로 끌어 놓은 상황이기에 자존심상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가겠지, 조금 피곤해도 내일은 다행히 일요일이니 푹 쉬면 되지.’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옆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리 밑 산책로로 내려가는 걸 보았다. 저리로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에 그들을 따라 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 수줍게 조성되어 있는 오솔길이 펼쳐지면서 청계천 부럽지 않은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돌 징검다리를 건너며 의외로 빠른 유속에 아찔해지면서 백하를 건너던 연암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산책길 옆에 하염없이 서 있는 갈대밭을 보며 백범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걸었던 길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산책로를 마음껏 즐기게 되었다. 숨은 다시 가빠왔지만 마음은 한결 여유로웠다. 예상치 않고 만난 길에서 뜻밖의 선물을 얻은 것 같아 더욱 즐거웠고 하염없이 걸으라고 해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리 밑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골목길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대충 짐작으로 접어든 골목길에는 가보고 싶던 동네 맛집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었지 어디 있었는지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만나니 반가움이 더했다. 조금 더럽고 무서워 보이던 그 골목길도 맛집의 발견 하나로 왠지 밝아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다행히도 집으로 가는 길이 나타났다.
집에 도착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 땀으로 범벅 되어있었고 다리도 왠지 뻐근했다. 출발 시간 보다 1시간 30분이나 지나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즐거웠다. 백범처럼 그 시간에 집중하고 즐길 수 있었던 경험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당장의 풍경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하지? 혹은 괜히 왔어. 라며 뒤를 바라보던 나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백범 일지를 덮으며, 백범은 참으로 바람처럼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늘 현실에 충실했다. 기대와 다른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저 받아들였다. 한학 공부를 하다가 금새 관상 공부에 젖었는가 하면, 탈옥자의 신분으로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도 그 순간을 즐길 줄 알았다. 또한 순리대로 흘러가겠거니 하는 낙천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수 많은 암살 관련 루머가 들려옴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가 너무 부러웠고, 내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사실 현실의 버거운 짐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했었다. 도피의 끝엔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왠걸, 새로운 현실에는 더욱 버거운 과제들이 즐비했다. 화려한 배경을 자랑하고, 또 부족함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기가 팍 죽고 말았다. 또한 조금 천천히 가려고 했던 나와 달리, 이미 고3 시절로 돌아간 것 마냥 몇 날 밤을 새며 숙제를 하고 시험 준비를 하고 결국 좋은 성과를 내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몸살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 가려는 초심은 어느새 잊고 나는 또 빨리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야 말로 엉거 주춤한 상태로 떠밀리듯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족한 걸 인정하고 자책하지 않고 그저 내 속도, 내 걸음으로 한 발씩 포기하지 않고 걸어 왔을 뿐이예요.” 한 영화 제작자의 인터뷰 내용을 보다가 이 구절이 마음 속에 폭 안겨 들어왔다. 조금 늦을 수 있어도, 그저 나의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가리라.. 오늘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272 |
두 소녀와 두 권의 책 ![]() | 앨리스 | 2014.09.15 | 2139 |
4271 | #21 - 결심 [8] | 희동이 | 2014.09.15 | 1981 |
» | 나만의 속도로 걷기 [5] | 녕이~ | 2014.09.15 | 2002 |
4269 | 자동차 vs 자전거 여행_구달칼럼#21 [4] | 구름에달가듯이 | 2014.09.14 | 2156 |
4268 | 극가의 비주얼, 자비의 정신, 청어를 얹은 메밀국수 [9] | 종종 | 2014.09.14 | 3350 |
4267 |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 [2] | 어니언 | 2014.09.08 | 1956 |
4266 |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_찰나칼럼#20 [1] | 찰나 | 2014.09.08 | 3055 |
4265 | 어느 날의 기록 [1] | 에움길~ | 2014.09.08 | 1912 |
4264 | 4천만의 컴포트 푸드, 라면 | 종종 | 2014.09.08 | 2052 |
4263 | 영원한 탈출을 꿈꾸며 [4] | 왕참치 | 2014.09.08 | 1917 |
4262 | 새로시작하는 나의 난중일기 | 녕이~ | 2014.09.08 | 1865 |
4261 |
#20 가묘유허에서_정수일 ![]() | 정수일 | 2014.09.08 | 1889 |
4260 | #20 추석 - 넉넉함 | 희동이 | 2014.09.07 | 2045 |
4259 |
추석, 벼 ![]() | 앨리스 | 2014.09.06 | 2000 |
4258 | 막걸리_구달칼럼#20 [2] | 구름에달가듯이 | 2014.09.05 | 2141 |
4257 |
매일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삶 ![]() | 타오 한정화 | 2014.09.03 | 1964 |
4256 | 3-19. 콩깍지가 벗겨질 때 신화(神話)의 처방 [1] | 콩두 | 2014.09.02 | 2985 |
4255 | 무의식과 달콤한 대화_찰나칼럼#19 [2] | 찰나 | 2014.09.01 | 1965 |
4254 | 스페인여행의 첫째날....깃발이 펄럭인다 [1] | 에움길~ | 2014.09.01 | 2286 |
4253 |
마드리드 그리고 똘레도 ![]() | 녕이~ | 2014.09.01 | 2341 |